선거리 영덕재(永德齋)
이 재실은 운암면 선거리 선거마을 입구 길 왼편에 있다. 1979년 이 지역에 거주하는 경주 김씨(慶州 金氏)의 후손들이 이 지역 입향조 김덕립(金德立)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집으로 현판 1개가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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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저 무덤 (곁)에 집을 두는 것은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한 것이고, 종족들이 모여서 추모하기 위한 것이다. 운수(雲水; 임실)의 서쪽 섬진강이 시작하는 곳[原川]에서 오백여리 떨어진 상류 지점의 강변에서 5리 떨어진 곳에 있는 선거리(仙居里; 임실군 운암면 선거리 선거마을) 신원(辛原)에는 우리 10세조 호 묵암(黙庵) 휘 김덕립(金德立)의 무덤이 있다. 아울러서 좌우 가까운 산기슭 평지에는 후손들이 이어서 묻힌 곳이다.
무덤의 아래에 바람과 비를 막고, 첨망(瞻望)할 곳이 없는 까닭으로 후손들이 슬퍼한 것이 오래되었다. 무신년(1968) 겨울에 종족들이 모여서 다 같이 의논하기를 (재각을 마련하기 위해서) 세사(歲祀)의 물목금의 1/3으로 10년간 세사(歲事)를 지내고, 2/3은 10년 동안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변리(變利)를 두어, 재물을 거두어 모아 돈을 마련하기로 하였다.
무오년(1978) 음력 12월에 완의(完儀)를 통해 목재를 마련하고(資木), 다음해 기미년(1979) 음 2월 초순에 착공하여, 같은 해 8월에 건물[丙舍]을 완성하니, 무릇 7개월 만에 마쳤다. 동쪽과 서쪽에는 방을 두고, 가운데에는 대청을 두었다. 아주 검약하지만 또한 더욱 청초하고 맑다. 만약 묘제를 지낼 때에 비가 오거나 눈이 온다면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면 되는 것이다.
(묵암)공은 어려서부터[少服] 집안의 가법을 익혀 언제나 효도할 것을 생각(永言孝思)하고, 문학과 덕행을 한가지로 여기니, 그 음덕이 드리운 것 또한 오래 되었다. 공에 대한 사적은 집안에 보관된 유집에 기록되어 있다.
아. 우리 후손들이 선대의 덕을 추모하고 지성으로 이어받아 발전시켜 폐지하지 않고 끌어 온다면 이 재각은 유구히 이어질 것이니, 계속해서 지붕을 이어나갈[嗣葺]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으므로, 재각의 이름을 ‘영덕(永德)’이라 하였다.
(무덤을) 살피고 청소하는 날에 방황함이 있겠는가. 묘역[兆域]은 이곳에서 휴식하면서 학문에 마음을 둘 수 있는 것이[遊息], 이름을 돌아보고, 의(義)을 생각[顧名思義]한다면 아마도 더 첨가할 것이 없을 것이다.
또한 이 이름은, 부유함은 암등(岩嶝)도 흥하게 하며, 부는 덕을 일으키면서 생기는 것이므로, (영덕재)라 이름 지은 두 번째의 의미이다. 그 덕을 보고 그 생각을 영원히 하려는 것이다.
단기 4312년 서기 1979년 기미년 8월 18일. 종손 (김)학권이 삼가 짓다 9세손 정삼, 정갑이 삼가 쓰다.
盖墓之有舍 以享祖先 而宗族寓追慕者也 雲水之西 蟾津江原川五百餘里 上流地点 江邊距五里域 仙居里辛原 卽我十世祖 号黙庵 諱德立公之壽藏 幷以左右近址 山麓原於後孫 而連世葬也 阡下無風雨之庇 瞻望之所 故後昆之愴悒久 歲戊申冬族議僉同 歲祀物目金 三之一分 爲十有年奉歲事 三之二分 十有年變利 而鳩財集金 戊午陰十二月完儀資木 翌年己未陰二月初旬着工 同八月刱建丙舍 凡七閱朔 功告訖 東西爲奧 中介大廳 制甚約 亦復淸楚明朗 若墓之時有雨雪 則將事於斯矣 公自少服習家誡 永言孝思 文學 德行惟一 而其垂蔭也 亦永久 事載家藏遺集 嗟 我後孫 追慕先德 至誠紹述 勿替引之 則此齋之愈久 嗣葺不足慮矣 故揭齋以永德 省掃之日 彷徨乎 兆域因復遊息于玆齋 顧名思義 則庶可以無忝矣 且其名 卽富興岩嶝 富興德而生 故扁齋之第二義也 觀其德 而永其思乎
檀紀四三一二 西紀一九七九 己未八月 十八日 宗孫 學權 謹識 九世孫 正三 九世孫 正甲 謹書
각주 92) 전북 임실군 운암면 선거1길 7-1(운암면 선거리 선거마을 566-2)에 있다. 청웅면에서 신평면으로 가다가 선거마을 입구 길 왼편에 있다. 1979년 경주김씨 후손들이 입향조인 德立公을 모시기 위하여 창건하였다. 시제는 음력 3월 초에 이루어지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형태를 이루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