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리 영모재(永慕齋)
이 재실은 운암면 선거리 하촌에 위치하고 있다. 영모재는 이곳에 살고 있는 전주이씨 재실로 시멘트 기와를 올린 팔작지붕 아래 정면 4칸(220cm) 측면 2칸으로 지었으며, 건물 전면의 마루와 둘레에는 툇마루가 놓여져 있어 어느 재실보다 특이한 점이 있다고 본다. 재실 내부에는 건립기 현판 등 5개의 현판이 걸려 있으며, 건립연대는 약 200년 전으로 추정된다. 이 재실은 임진왜란 당시 왜적을 피해 전주에서 이주해온 입향조 송학거사 이언방(松鶴居士李彦方)을 추모하기위해 건립하였다.
93)
重修塞責愧殘年 영모재를 중수하여 겨우 책임을 면하고 부끄러이 나이만 먹어 白首凭欄想漠然 흰 머리 난간에 기대어 막연히 생각하니 霜露濡新來衆裔 서리와 이슬에 새로이 젓는데, 뭇 후손들이 찾아드는구나 山川毓精仰先賢 산천이 정수를 길러 선현을 앙모하는구나 柏松已占滄茫域 잣나무와 소나무는 이미 무성해져 이곳을 풍요롭게 하고 花樹頻同喜悅?筵 집안사람들 자주 모이니 기뻐하는 자리 되었구나 百世在前追慕切 나이 백세 눈앞에 있으니 추모하는 마음 더욱 간절하고 吾宗此構永堪傳 우리집안 이곳에 건물 세워 영원히 감당하며 전해지기를
단기 4301년(1968) 3월 14세손 유사 이형로(李瀅魯)가 짓다.
예전에 범질(范質)이 오래된 벼루 하나를 얻어서, 이것이 대대로 전해져 온 물건임을 알고 좋아하여서 깊은 곳에 보관하였다. 왕공이 유고(遺藁) 천권을 역어 앞사람의 풍모가 있다고 이르고 받들어 떨어뜨리지 않았다.
지금 우리 이 재각이 어찌 옛 벼루를 보전하는 것이나 유고(遺藁)를 받드는 것에 비길 수 있겠는가. 옛날 황조(皇祖)가 성했을 때에, 선조의 무덤 아래에 창건한 이 재각은 가을의 상제와 겨울의 증제[秋嘗冬烝]를 지낼 때에 음복하는 장소이고, 봄에는 음악을 익히고 여름에는 시서를 외우며[春絃夏誦] 어려서부터 학문을 익히는[養蒙] 장소이다. 즉, 선조를 받드는 정성과 종친을 돈독하게 대하는 도리는 이곳에서 극진하여 지는 것이다. 후손을 사랑하는[貽後] 계책과 자손을 교육하는 방법이 이곳에서 성하는 것이 비교할 바 없다. 해가 가고, 달이 지남에 따라 이내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바람에 닳고 갈리며, 빗물에 씻기고 혹은 침식되어 허물어졌다.
내 불초하지만 지난번 서울에 갔을 때[遊洛] 하루 종일[晝宵] 걱정[耿耿]하면서 한 생각으로 쫒아내지 못한 것은, 항상 전대에서 시작한 일이 장차 땅과 섬돌이 같아지는 것을 염려한 것이며, 거듭 탄식한 것은 후학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규정[箴規]를 강하게 없애는 바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돌아와서 여러 친족들과 함께 재물을 모으고, 목재를 옮겨 놓아서 옛 방식대로 수리하고 고치니, 새로운 것이 더 훌륭해져서 이루어졌다. 외로운 소나무와 늙은 잣나무는 선대의 은덕이 아님이 없다.
산을 안고 물을 띠는 것은 모두 예전에 터를 존중한 것이고, 아침에 가고 저녁에 돌아옴은 정자를 생각하는 주인의 정성스런 마음과 부드러움이다. 만약 (주인이) 계시는 날에 찾아뵙고 때때로 익히면 (공자가) 행단에서 무리들을 가르치는 유풍을 의연히 생각할 수 있다.
말하기를 능히 전대의 굉장한 규모를 계승한다면 연이어서 가까워지는 것이다. 후생들이 영원히 사모하는 것은 이로써 기록하고 입에 계승하는 것이다.
운하여 이르기를
肇成此閣昔何年 이 건물을 이룩한 것이 그 언제던가 今日增修意悵然 오늘 증수하니 뜻이 슬프구나 檜栢靑山留舊壠 노송나무 잣나무 푸른 산에 옛 무덤이 있는데 詩書素業慕先賢 시와 서를 읽히는 일은 선현을 사모함이네 歌登花樹惇宗地 집안식구들과 노래부르니 종친들이 돈독해지네 美盡東南送客遥 아름다움을 다하고 동남으로 객을 보내니 멀어져 가네 前世淸風猶不墜 앞 세대의 맑은 바람은 오히려 떨어지지 않는데 期今後背永爲傳 지금과 후배를 기약함은 영원히 전해지게 하기 위함이다.
임금이 즉위하신 15년 무인(1878) 12월 하한. 행훈련원주부겸 판관 10세손 (이)승교가 짓다.
昔范質得古硯一座 知世傳之物 愛而深藏 王公輯遺藁千卷 謂前人之風 奉而不墜 今吾此齋 豈持古硯 與遺藁之比哉 粤在 皇祖之盛 創建此齋 於先壠之下 秋嘗冬烝 爲飮福之所 春絃夏誦爲養蒙之地 則奉先之誠 惇宗之誼 於斯極矣 貽後之謨 敎子之方 莫此盛矣 日征月邁 乃爲塵沒之累 風磨雨洗 或有滲漏之獘渺 余不肖 向在遊洛 晝宵耿耿 一念未遣者 常恐前世之緖業 將地同階 重歎後學之箴規 强滅無聞 歸與諸族 鳩財寫木 因其舊制 修而輯之 隨其新增 治而成之 孤松老栢 莫非先世之庥蔭 抱山帶水 皆是昔日之尊基 朝往暮歸 思亭主人之誠心藹然 若存日謁時習 杏亶學徒之餘風 依然可想 非敢曰 能繼前代之宏規 聯以知庶幾 後生之永慕 玆爲記而繼口 韻曰
肇成此閣昔何年 今日增修意悵然 檜栢靑山留舊壠 詩書素業慕先賢 歌登花樹惇宗地 美盡東南送客遥 前世淸風猶不墜 期今後背永爲傳
上之卽祚十五年戊寅季冬下澣 行訓練院主簿兼判官十世孫升敎 謹稿
무릇 모여서 화수(花樹)의 노래를 부르는 곳은 (선대의 일을) 계승하는[肄業] 장소가 있는 것이니, 재각은 고향[桑梓] 마을에 있으며, 영모(永慕)라고 이름 하였다. 백년을 이어 중수하였으니, 일거에 두 개의 아름다움이 있다. 대저 옛날에는 반드시 가숙(家塾)이 있으니, 그 사람[伊人]은 선대의 무덤에 의거하고자 한다. 나라의 도읍지로부터 시골의 마을에 이르기까지 학문에 힘쓰면서 휴식하면서 넓게 공부하는 바탕으로 삼는 곳이 있다. 궁실을 위해서 구목(邱木)을 베어내지 않으며, 집에서는 두려워서 조심하며 슬퍼함에서 깊이 사모하게 된다.
돌아보건데, 근본으로 타고난 떳떳한 성품[彝性]이 모두 모이면 누구인들 기뻐하지 않겠는가. 형제와 영재의 바람이다. 그러나 단란함은 얻기 어려우니 매번 친척과 분묘에서 떠나는 자가 많다.
오직 운수(雲水; 임실)의 선거(仙居) 마을은 즉 완산이씨의 집안으로, 지령(地靈)과 인걸(人傑)이 많아 예로부터 효근(孝謹)의 가문으로 일컬어진다. 조상이 남긴 공적[祖武]을 손자가 이어 받은 즉 지금도 문학하는 선비들이 많다.
장씨가 백인서(百忍書)를 써서 올린 것과 같이94) 돈목하다는 칭함을 받는다. 등자(鄧子)의 한 가지 예술이 나쁜 짓을 한 사람을 잘 다스리고 타일러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게 하는 교회(敎誨)에 각기 통하는 많은 방법이 있다.
저 선대의 무덤 아래를 바라보면, 훌륭한[嶷然] 옛 집이 존재한 것이 오래되었다. 여름에 시 읊고 봄에 거문고 타는(학문에 힘쓰는 것을 말함)것이 지금까지 8세를 이어오면서 오고 갔다. 바람에 갈리고 비에 씻겨 예전의 그런대로 갖추어져 있던 것이 없어졌다. 방자하게도 여러 종인들이 의논하여 이에 중건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집안 (재산의) 있고 없음에 따라 재산을 내는 큰 도리를 알아 그 자손이 선대의 뜻을 이어 받아[堂構] 옛 사람의 작은 집을 수리하였다.
상사(庠舍)에 용납되지 않는 한탄이 없도록, 지금은 큰 집이 넓고 넓게 하였다. 합문(闔門)에 공손한 모습으로 예의를 지키는 것은 손님을 대접하는 자리에서 질서 있게 하고자 함이다. 또 이곳에서 노래가 넘치며 이곳에서 모이는 것이다.
없는 사람 받들기를 있는 사람같이 하면 들리는 바가 있을 것이고, 보이는 바가 있을 것이니, 이른바 대장(大壯)의 괘가 길한 것이고, 영관(永觀)이 이곳에서 완성되는 것이니 종인(宗人)들과 함께하는 것이다. 효를 생각하는 바가 끝이 없으니, 공송하게 짧게 기록하며, 힘을 보태어 대들보를 들어 올린다.
들보를 동쪽으로 뻗치니, 풍소(風沼)는 왕왕(汪汪)하고, 한길로 통하니, 중관(衆觀)과 더불어 넓으니, 앎에도 방도가 있다. 선비는 몸을 깨끗이 씻고 덕(德)으로 목욕을 한다는 조신욕덕(澡身浴德)하니 장차 같아짐이 없겠는가. 들보를 서쪽으로 뻗치니, 선무산(선무봉)95)에 빛이 있어 들어가니 아득한데, 걸출한 사람을 많이 얻으니, 걸출한 인물[茂異]이 많구나. 가르치는 스승을 번거롭게 하지 않는 것이 어린 아이 때부터로구나. 들보를 남쪽으로 뻗치니, 도랑과 밭두둑을 굽어보니, 농사지은 것을 즐거워하고, 책상에 앉아 밝은 창문에 책을 읽고, 책을 읽고 난 뒤에, 농사에 관한 이야기 들을 만 하구나. 들보를 북쪽으로 뻗치니, 성묘하고 돌아올 때, 서리와 이슬에 슬퍼하다가, 조상대부터 바라보던 그것 후손들도 똑 같구나. 일상에 효도하고 공경하는 사람을 같이 얻었네. 들보를 위쪽으로 뻗치니, 끝이 없는 풍월(風月), 가슴에 품은 회포를 펼치니, 분향할 때마다 하늘에 고하고, 일을 점검할 때마다 어찌 감히 잊겠는가. 들보를 아래로 뻗치니, 둘러진 담장은 모두 같은 성씨의 집들이다. 시골 늙은이 기다리지 않고, 여름제사와 겨울제사[伏臘] 돌아온다. 평소와 같이 정다이 대화하니 모두다 어린 선비로구나.
바라건데, 상량한 이후에 한 뿌리에서 태어난 것을 영원히 생각하여, 동량의 길함이 오래되도록 지속되기를, 진덕(晉德)이 옛 것을 이은 것을 배워서 사사로움을 삼가고 효도하는 말을 익혀서, 가업을 이어받아 학문하고, 이 향기로운 곳에서 제사할 지어다.
임금께서 즉위하신지 14년 계해(1863)년 중추 상한에 통정대부 이조참의 영천 박도빈(朴道彬)96)이 짓다.
述夫 會爲花樹之歌 肄業有所 齋在桑梓之里 永慕以名 百年重修 一擧兩美 蓋古者必有家塾 伊人情欲依先塋 自國都以及巷閭 資博學於藏修游息 爲宮室不斬邱木 㝢深慕於怵惕愴悽 顧彛性之攸同 孰無樂 兄弟英才之願 然團圝之難得 每見離親戚墳墓者多 惟雲水仙居之村 卽完山李氏之宅 地靈人傑 自古稱孝謹之家 祖武孫繩 至今多文學之士 張氏之百忍書進 敦睦見稱 鄧子之一藝 各通敎誨多術 瞻彼先壟之下 嶷然 古齋之存久矣 夏誦而春絃 今爲八世之相守通來 風磨而雨洗 無浚舊日之苟完 肆將諸宗之謀 爰有重建之擧 識生財之大道 稱家有無 修完人之敞廬 其子堂構 無庠舍不容之歎 今見廈屋渠渠 有闔门儼若之儀 何待賓筵秩秩 院善且衍歌於斯 聚於斯 事亡如存 聞必有見必有 所大壯之吉 而永觀厥成 筮同人于宗 而孝思不匱 恭疎短引 助擧修樑
抱樑東 風沼汪汪 一道通 與衆觀澖 知有術 澡身浴德 將無同 抛樑西 仙舞山灮 入望迷 鍾得精英 多茂異 不煩師敎 自孩提 抛樑南 頫視溝塍 稼作甘 棐几晴窓 讀書後 農詎處處 往聽堪 抱樑北 上冢回時 霜露惻 自祖視之 均是孫 庸行孝悌 人同得 抱樑上 無邊風月 襟懷暢 焚香每相 告于天 點檢事爲 那敢忘 抱樑下 環堵無非 同姓舍 不待村翁 伏臘來 平居情話 皆儒稚
伏願 上樑之後 永念同根之生 長守隆棟之吉 修業晉德承舊 修言熟私毖孝 學於箕裘 祀於芬苾
上之卽祚十四年癸亥仲秋上澣 通政大夫吏曹參議靈川朴道彬述[낙관][낙관]
幸繩祖武到今年 조상의 일을 이어받아 다행히 이어서 금년에 이르러 棟宇添修復翼然 집을 더욱 수리하니 더욱 훌륭하구나 入室如闻先世訓 방에 들어가니 마치 선대의 가르침이 들리는 듯 하고 藏書爲待後孫賢 장서(藏書)는 후손이 더욱 현명해 지기를 기다리는 구나 風煙會處花全砌 바람과 연기 모이는 곳 꽃이 섬돌에 쌓이고 霜露濡時月滿筵 서리와 이슬이 젖어들 때에 달은 자리에 가득하구나. 敎子敦宗皆孝思 후손 교육하고 집안사람들 돈독할 때 모두 효를 생각하여 誓相不匱永謨傳 서로 서약하고 다하지 아니하여 영원히 전해질 것을 꾀하네,
지난 임술년(1862)에 중수한 이래 19년이 지나 건물이 무너지고 위태롭게 되어 서로 모아서 약간의 재산을 모아 수리한 이후 후손과 내가 더불어 뜻을 모은 즉 이 재각이 무너지지 않았다고 하더라.
粤自壬戌重修之後 以來十九年 棟宇將圮圾 鳩聚若干財 因以葺之後 後孫其與我同志 則庶斯齋之不朽也云爾
광서(光緖) 6년(1880) 경진년 조하(肇夏) 중수.
도유사(都有司) 11세손 종염(鍾艶)이 삼가 기록하다
重築山齋慕百年 산의 재각 중건하고 사모한지 백년에 滴楸霜露感楸然 가래나무에 서리와 이슬이 적시니 슬픔을 느끼네. 繞庭花樹歌宗族 뜰을 둘러싼 화수 종족들의 노래네 滿群圖書列衆賢 가득 찬 책들은 여러 현인들을 열 짓게 하네. 瓦潤䲮鴦雲宿霤 윤택한 기와집에 원앙이 모이고, 구름은 처마 속에서 머무르네. 欄成螓蝶月坐筵 난간은 매미와 나비처럼 이루어져 달빛이 자리에 앉아있네. 羣蒙入室資文學 떼 지은 어린아이들 방에 들어와 문학의 자산으로 삼고 庶見先謨永久傳 바라 건데 선조들 남긴 덕이 오래도록 전해지기를 바라네
임금께서 즉위하신지 14년 계해년(1863)년 중추 상한에 10세손 헌교가 삼가 짓다.
上之卽阼十四年癸亥中秋 上澣 十世孫 憲敎 謹稿
각주 93) 전북 임실군 운암면 선거리 326번지에 있다. 청웅면에서 신평면으로 가다가 선거마을 끝 왼편 산기슭에 위치해 있다. 94) 書進百忍字說 : 唐나라의 張公藝는 아홉 세대가 한 집에 살았는데 高宗이 그 방법을 묻자 忍자를 백 번 써 올렸다고 한다. 세상에서는 이를 두고 張公藝를 칭송하나, 이 글은 張公藝의 방법은 화난 연후에 참는 것이니 자기의 마음을 다스려 분노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느니만 못하다고 하였다 95) 임실군 운암면 선거리 시목동 서쪽에 있는 산. 96) 박도빈(朴道彬; 1828~?) 자는 경미(景美)‧경의(景儀). 본관은 고령(高靈). 증조부는 박경규(朴敬圭)이고, 조부는 박종순(朴鍾淳)이다. 부친 정헌대부(正憲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 박영원(朴永元)과 모친 성재숭(成載崇)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동생은 박호빈(朴濩彬)이다. 부인은 이공익(李公翼)의 딸이다. 1844년(헌종 10) 증광시에서 진사 3등 54위로 합격하였고, 1851년(철종 2) 정시 문과에서 을과 2위로 급제하였다. 1853년(철종 4)에는 한림소시(翰林召試)에 참여하여 이승유(李承游)‧조병협(趙秉協) 등과 함께 선발되었다. 1857년(철종 8)에 도청(都廳)의 소임을 수행하여 품계를 올려 받았다. 1863년(철종 14)에는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임명되었다. 1864년(고종 1)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재직 중, 대간(臺諫) 심의면(沈宜冕)에 대한 처분이 너무 과중하다는 지적을 하면서 임금에게 대간들의 직언을 받아들일 것을 건의하였다. 아들은 박태희(朴台熙)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