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종리 승유재(承裕齋)
이 재실은 운암면 운암리에서 운암대교를 건너 왼쪽으로 갈라지는 소로를 따라 들어가면 운종리의 큰복재와 작은복재라는 마을이 나온다. 작은복재의 뒤끝 아담한 산기슭을 배경으로 운암강을 굽어보며 있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전주 이씨(全州 李氏)의 입향조 천묵재(天默齋) 이상형(李尙馨)의 재실로 문중에서 건립하였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집이다.
이상형(1585~1645)의 본관은 전주로 자는 덕선(德善)이며, 시호는 충경공(忠景公), 호는 천묵재(天默齋)이다. 그는 선조 18년(1585) 지금의 오수면 둔기리에서 효령대군의 8세손으로 태어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1548~1631)의 문인 중 수제자로 광해군 때 사마시를 거쳐 인조 3년(162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가주서로 경연관이 되었다. 외직으로는 옥과현감을 지냈고 증직으로 자헌대부 이조판서 양관대제학 춘추관성균관사오위도총부도총관이 되었다. 유교의 경전과 사서에 능통하였으며 특히 역학에 밝았다. 1645년에 졸하였는데 조정에서는 그에게 이조판서가 추증되었으며, 시호를 충경(忠景)이라고 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천묵재유고(天默齋遺稿)가 전해지고 있다. 이상형묘비는 재각 500여m쯤 운암호를 바라보고 있는데 1649년에 신독재 김집이 짓고 당시 최고의 명필인 동춘당 송준길이 두전과 함께 썼다. 이상형의 업적과 묘비의 학술적 가치의 중요성으로 임실군에서는 2015년 7월 23일에 이상형묘비를 임실군 향토문화유산 기념물 1호로 지정했다.
97)
선조 증 부제학 천묵재98)의 제사를 모실 때 술회하며 느낀 것을 시로 적다.
先祖贈副提學 天黙齋致祭時 追述識感韻
孱孫攬涕掃秋原 못난 후손(孱孫) 눈물을 훔치며 가을 무덤가를 청소하네. 啣命祠官莅墓门 명을 받든 사관(祠官; 성균관 제주) 묘문에 다다르네.99) 一尺遺章留景烈 1척의 남겨진 문장(遺章) 경열(景烈)에 머무르네. 九重崇典感殊恩 궁궐에서 내려온 숭전(崇典)의 특별한 은혜에 감읍하네. 滄幸宇㤼冠裳倒 빠른 행차 집안에 이르니 관과 옷이 거꾸러지네. 日月吾東禮僞尊 해와 달이 뜨는 우리 동방 예에서 가장 존귀하네. 雲水滔滔鍾岳峙 구름과 물은 도도히 흘러가고 종악은 우뚝 솟았네. 瓊詞願借士林言 고운 말을 빌어 사림이 말하네
숭정 4 병자년(1816) 11월 15일 6대손 사석(師錫)이 재배하고 기록하다.
오호라. 사물의 이루어짐과 어그러짐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닌데, 어찌 다만 곧음으로써 맡길 수 있겠는가. 여러 기운의 성함과 쇠함은 생각하지 않고 선함으로써 그 계책을 삼는 것이 아니겠는가.
예전 선조와 인조의 시절에 충경공(忠景公) 천묵(天默) 이선생100)은 경학, 명예와 절조로 당대 선비들의 추대를 받았으며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남원[帶方]에 거주하면서 후손을 이어가니 문호(門戶)가 이루어졌다.
선생과 정부인 선산임씨의 무덤은 임실의 종산(鍾山) 아래에 있다. 예전에는 무덤 앞에 재각이 있었으며, 제사 전날(齋宿)밤에는 이곳에서 모임이 이루어지기도 하였으니, 모두 당시의 마땅함을 따른 것이다.
(재각이) 경인년(1950) 겨울에 전쟁으로 훼손되어, 매번 묘소에서 제사를 지내거나 무덤을 보살필 수 있는 곳이 없어져 폐허가 되었다. 가을에 벌초할 때에 토끼와 여우가 뛰어다닌 발자국이 있어, 마음에 새기고 눈물을 흘렸다.
이때에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모두 분발하기로 하고, 파에 따라서 돈을 내기로 하였다. 10세손 기정(起正)과 강영(康永), 영재(永宰) 등이 분주히 노력하여 재목을 구하면서 가장 많은 고생을 하면서 감독하였다. 그 후 몇 년을 봉사하여, 경자년(1960) 봄에 끝마쳤다. 옛 규모에 맞추어 5량(樑)이며 화려함은 이전보다 나았다. 그 문중의 선비인 기선(起善)과 기량(起亮)이 아울러서 나에게 그 기문(記文)을 부탁하였다.
아! 지금은 경인년으로부터 10년이 지난해인데, 천도(天道)가 작게 변하였으나, 그 후손들은 그것을 어제 아침과 같이 생각할 뿐이니, 그것을 일러 고통을 가라앉힌 것이라 하나 아니다. 뉘라서 알았으랴, 무릇 폐허가 되고 담장도 무너진 곳이 홀연히 다시 크고 화려한[輪焉 奐焉] 건물이 세워졌다. 한 건물에 길고 적은 것이 모여져 10세 동안 무덤을 보호한다. 온 집안이 정성을 다하고 모두 힘을 다하여서 다시 일체의 일을 이루어 냈다.
또 능히 선조의 호가(扈駕)와 척화(斥和)의 공을 계승하니 대대로 임금께서 관리를 보내어 묘에 제사지내게 하는 은전을 베푸시니, 나는 심법(心法)의 전함이 더욱 농밀하고, 제사를 받드는 것이 더욱 경건함고, 빈틈없이 자세하고 꼼꼼하게 미리 준비하는 것과[綢繆] 이루는 것이 그치지 않으니, 지금 행하는 것과 같을 뿐이다.
저 운암(雲岩)의 물은 밤낮으로 머무르지 않고 바다에 이르듯이, 이씨들도 다시 서울을 떠나 이곳에 온 것이 이미 오래되었다. 후에 다시 생각하는 것이 있으니, 이른바 승유재도 진실로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이끌어 그 물길이 쉼 없이 흘러 아주 멀리 가듯이 또한 이과 같기를 바랄 뿐이다.
신축년(1961) 11월 상완에 서흥 김씨 김규태101)가 기록하다.
嗚乎 物之成壞不常 奚直以委 諸氣運之盛衰 而不思 所以善爲之計哉 昔在宣仁之際 有忠景公天默李先生 以經學名節 爲當世所推 而後仍之居帶方者 嗣有門戶聲 以先生 與貞夫人 善山林氏之藏 在任實之鍾山下 舊有墓门之齋 齋宿燕集 皆於是取宜 庚寅冬 燬於酷燹 每祭墓省掃 無所於帰 則廢墟 秋草兎狐跳梁有足 惗心而涕目 於是衆議齊奮 逐派義捐 十世孫起正與康永 永宰奔走求材 最任賢勞而蕫 其後閱數歲 至庚子春告訖 依舊五樑 精麗過之 其门彦起善 起亮 幷遇余徵其記 噫 今距庚寅十年 天道小變矣 而自後裔 思之猶昨晨耳 謂之痛定則未也 而孰料 夫廢墟敗垣 忽復輪焉 奐焉 聚長少於一堂 護丘墳於十世哉 誠能以闔门齊奮之力 爲興復一切之擧 又能推祖宗扈駕斥和之功念列聖遣官 祭墓之典 則吾見心法之傳 益以密 香火之奉 益以虔 所綢繆成就不止 如今日之爲而已 彼雲岩之水 日夜不舍 而達于海 李氏之復 邨京其來已遠矣 後復有思 所以承裕者 苟能勿替 而引之 其波流之長遠 亦將如之矣乎
辛丑十一月上浣 瑞興金奎泰記
각주 97) 임실군 운암면 운종길 148-5(전북 임실군 운암면 운종리 191) 운암면 운종리 작은북재마을에 있다. 전주에서 순창으로 이어지는 27번 국도를 타고 순창으로 가다가 운암대교를 건너 운종 교차로에서 빠져 운암호수쪽으로 가다가 보면 우측에 있다. 98) 이상형(李尙馨, 1585~1645),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덕선(德先), 호는 천묵재(天黙齋). 효령대군의 7대손이며, 춘성군 이담손(李聃孫)의 현손이다. 아버지는 이욱(李昱)이며, 어머니는 임대영(任大英)의 딸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1612년(광해군 4) 사마시를 거쳐 1625년(인조 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성균관에 들어가 1628년 학록(學錄)에 오르고, 곧 가주서로 경연관이 되고 시강원설서와 사서를 역임한 뒤에 예조좌랑이 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는 오섬·김여옥·신응망 등과 함께 도내에 격문을 돌렸으며, 전라도로 온 세자를 호종하였다. 호소사의 막부로 들어가서 의병을 모았으나 강화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중단하였다. 1630년 사간원정언에 제수되었다가 전적으로 전직하고, 이어 병조좌랑과 정랑을 거쳐 사헌부지평으로 전직되었다. 문학(文學)으로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하고 또 직강을 역임한 뒤, 다시 정언으로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 다음해 옥과현감으로 나갔다가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척화를 주장, 화의를 건의하는 최명길(崔鳴吉) 등을 탄핵하였다. 1638년 교리·장령 등을 제수받았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경서에 정통하였고, 음양과 지리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역학에 뛰어났다. 『천묵재유고(天黙齋遺稿)』가 전한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남원의 요계서원(蓼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신독재 김집이 묘갈명을 짓고, 동춘 송준길이 비문을 썼으며, 도암 이재가 묘지를 지었다. 1756년(영조 32)에 홍문관부제학의 증직을 내리고, 제관을 보내어 제사 지내게 하였다. 99) 영조대부터 고종대까지 조정에서 예관을 보내어 시제를 지내었다. 100) 천묵재 이상형 101) 김규태(金圭泰, 1905∼1977) 현대의 시인이자 교육자. 호는 東隱 또는 白堂居士, 枕月莊主人. 본관은 청주, 진안군 진안면 군하리에서 출생. 한학을 배웠으며, 해방 후 진안면 부면장을 거쳐 鎭安中學院을 설립하고 國史敎習 및 교감을 역임하였으며, 槿明夜學院을 설립하여 문맹퇴치운동에 헌신했다. 13세부터 시 창작에 일념하여, 일제 치하의 신문과 잡지 등에 시를 발표하고, 향리에서 詩會를 열고 한시 백일장에서 수차 입상하였다. 守分 安貧樂道 淸廉을 생활신조로 오직 시와 서예에 심취하였다. 그의 동은시집 전 24권에는 한시 1990수가 등재되어 아들 祐鐘이 보존하고 있다. 1962년 재건국민운동 주최 국민도의확립 한시백일장에서 도지사상을 수상한 「風俗本於敎化」와 「元祖」등의 수상시도 시집에 수록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