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암리 경모재(敬慕齋)
이 재실은 운암면 학암리 학암 마을에 있다. 1966년 이 지역에 거주하는 장수 황씨(長水 黃氏) 문중에서 그들의 선조 황태세(黃泰世)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각 기와집으로 현판이 1개, 주련이 4개 걸려있다.
102)
대저 묘에 재각이 있는 것은 이른바 향화(香火)의 절차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며 추모하는 사람이 머물기 위한 것이다. 그 아름다움이 시작하는 의리는 혹은 어짊에 처하는 좋은 곳이거나, 혹은 선대의 행적이 특별히 드러난 곳이다.
임실군 운암면 학암리에 경모재가 있으니, 이곳은 우리 익성공(翼成公) 방촌(尨村)선생103)의 13세손인 휘 태세(泰世), 자 희숙(熙叔), 호 운석(雲石)의 재각[墳菴]이다. 공은 유년기[齠齡]부터 자질이 총명하고 지성으로 부모를 섬기어 본인이 존재하는 것을 잊을 정도였다.
나이 7~8세에 집안이 가난하여 인근의 사숙(私塾)에서 학문을 배웠으나 전적으로 학문에 전념하지 못하고 돌아와 농업에 종사하였다. 그것은 부모님을 모시는 도리를 잊을까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학문은 대성하지 못하였으나, 경지에 도달하여[造諧] 바름을 얻었으며, 실제로 이행함에 딱 맞게[得中] 하였다. 이에 사림(士林)들이 조정에 천거하여 가선대부 공조참판(嘉善大夫工曹參判)에 증직하였다.
불초(不肖)하게도 봄과 가을 (제사에) 직면하여서 무덤 아래에 비바람을 가리며 우러러 사모할[瞻慕]수 있는 장소가 없어 슬퍼한 것이 오래되었다. 을사년(1965) 9월에 족숙 완주(完周)와 동생 의광(義光)이 여러 집안사람들과 함께 재각을 건립하는 의논을 일으켜 재물을 거두어 모으고[鳩財] 기술자들을 모아 재각[丙舍]을 창건하였다.
병오년(1966) 10월에 공사를 마치니 동서로는 재실을 이루고, 중간은 대청을 만들었다. 규모는 매우 작으나, 비바람이 불어도 걱정하지 않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 가능하였다.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능히 선대의 유훈을 계승할 수 있으니, 이른바 서기(庶幾; 어떤 방향으로 변화하려는 조짐)를 알아 후손들이 공경하고 사모함을 받을만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이와 같이 기록한다.
단기 4300년(1967) 정미년 정월 23일 7세손 義眞이 삼가 기록하다.
盖墓之有閣 所以備香火凡節 而寓追慕者也 其肇嘉之義 或因處仁之勝 或取先蹟之特箸焉 任實郡 雲岩面 鶴岩里 有敬慕齋 卽我翼成公尨村先生十三世孫 諱泰世 字熙叔 號雲石之墳菴也 公自齠齡 資質穎悟 至誠愛親 不知有己 年七八家貧 求學於隣近私塾 未至全攻 歸於農業 恐所以缺養親之道而然也 學不及大成 造諧得正 踐履得中 士林薦于朝 贈嘉善大夫工曹參判 不肖當春秋 阡下無風雨之庇 瞻慕之所 故悵悒久矣 乙巳年九月族叔 完周 舍弟義光 與諸族 共倡建宇之議 鳩財集工 刱建丙舍 丙午年十月 工造訖 東西爲齋室 中間大廳 規模甚約 然不可畏風雨之時 而享祀能焉矣 非敢曰 能繼先代之遺訓 所以知庶幾 後孫之敬慕 而玆爲記
檀紀四千三百年丁未正月二十三日 七世孫義眞謹識 刱立者名單 顧問 學周 義眞 義龍 有司 完周 副有司 桂周 寅周 總務 義光 掌財 義斗 義文 監董 明周 義善 評議員 龍周 先周 銅周 義順 義昌 義圭 義金 義鉉 義洪 義男 義烈 評議員 義坤 義榮 義俊 義燁 義宗 義庠 義正 成淵 義九 龍淵
각주 102) 경모재는 전북 임실군 운암면 학암2길 17-7(운암면 학암리 874)에 있다. 1966년 장수 황씨의 조선과 효자 處五를 모시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제향일은 음력 10월 13일이고,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103) 황희를 말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