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천리 경사재(敬思齋)
이 경사재(敬思齋)는 신평면 소재지인 원천리마을 중앙에 있으며 파주 염씨 종중의 재실이다. 정면 3칸이며, 측면이 2칸으로 현판이 1개, 주련이 4개 걸려있다. 원천리는 파주 염씨 5세손이며, 관(官)이 사옹원주부(司甕院主簿)인 응동(應東)께서 1456년에 입향 하여 중시조로부터 25세까지 이르러 세거하면서 염씨 종중에서 1942년 본 마을 500번지에 재실을 건립하였다. 편액과 재실 안에 있는 경사재기(敬思才記)는 당대 서예가인 이자철(李慈喆)이 썼다.
염(廉)공 동옥(東玉)이 6월에 황방산 중에 나를 다시 찾아와 옷깃을 여미면서 말하기를, ‘우리 염씨의 본관은 파주이다. 우리 선조 주부공(主簿公) 염응동(廉應東)은 비로소 임실에 살기 시작하였다. 그 아들 진사공 염수정(廉壽丁)은 단종이 양위(讓位)했을 때 통곡하며 산에 들어가 종신토록 출사하지 않았는데, 그의 자손들이 임실에 거주하게 된 것도 감히 그 뜻을 어기지 않으며 기꺼이 은거하며 현달하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살아서 임실에서 농사짓고 죽어서 임실에 묻히기를 이렇게 4백 여년이 되었다. 고관대작(高官大爵)으로 떨치지 못하였고 게다가 빈한한 국면에 처하여 주부공 이하 여러 세대에 걸쳐 향사[香火]를 이어왔으나 후손들이 치제(致齊)할 곳이 없었다. 일찍이 우리 종중 염상수(廉祥洙)가 비로소 경영하기 시작하여 거의 완공될 즈음에 돌아가셨다. 지금 뒤를 이어 정성을 다하고 있는 사람은 동원(東源), 동훈(東燻), 동명(東明)이다. 저 또한 외람되게 함께 처음부터 끝까지 같이 하고 있다. ‘재실이 이미 완공되어 경사(敬思)하는 마음으로 기문을 써서 그 뜻을 펼치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사람이 생각하지 않으면 잊게 되고 생각한다고 해도 공경으로 하지 않으면 망령된 것이다. 비록 그렇다고 해도 자손들이 자기 조상을 친히 여기는 것이 마치 어버이를 친히 여기는 마음으로 조상에게 한다면 아무리 백대 조상이라 해도 부자처럼 잇닿은 것이리라.’ 하였다. 무릇 부모에게 있어서 자식은 어찌 생각하지 않아도 생각나는 것이고, 또한 어찌 감히 공경할 수 없어도 공경하는 것이니 생각하는 일로 선조께서 편안하게 되었으니 내가 어찌 번거롭게 덧붙이겠는가?
갑신년(甲申) 가을 7월 어느날 완산(完山) 이존철(李存哲)이 기록하다.
廉公東玉 暑月再訪 余于黃方山中 斂袵而語 曰吾廉本坡州人也 而我先祖主簿公諱應東 始居任實 其子進士公諱壽丁 莊陵遜位之時 痛哭入山 終身不出世 其子孫之居于任者 亦不敢越厥志 樂隱而厭顯 生則耕于任 死則葬于任 四百年餘于此矣 簪組之不振固也 而又局于貧寒 自主簿公以下 屢世之香火有續 而雲仍之致齊無所 曾年吾族祥洙 始爲經營 垂成而歿 今繼以盡誠者 東源東燻東明 而 東玉亦忝 與始終齋 旣成榜之以敬思 願記以衍其義也 余曰人不思則忘 思而不以敬則妄 雖然子姓之視祖先 若以視父之心 推以上之 雖百代直子父而已 夫子之於父 安得無思思 又安敢不敬敬 以思之事先之妥已得矣 余更安庸贅說爲
甲申 秋七月 日 完山 李存哲 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