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봉리 영모재(永慕齋)
30번 국도 좌측 성수면 삼봉리 금동마을 이정표를 따라 300m쯤 들어가면 풍산 심씨 재실인 영모재(永慕齋)가 위치하고 있다. 풍산 심씨 재실인 영모재는 후손들이 세운 것으로 대문 입구의 바위에 “풍산심씨 제동” 이라는 암각서도 있다. 이 재실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집으로 현판이 2개, 주련이 6개 걸려있다.
무덤 근처에 있는 재각의 이름을 ‘영모(永慕)’라고 한 것은 ‘추감영사(追感永思)’의 뜻이다. 『시경』에 이르기를,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느냐, 그 덕을 닦을지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당구(堂搆)에108) 힘을 다하고 제사를 모시는 데 정성을 다해야 하는데, 그것은 오히려 작은 절의에 해당되고 오직 그 뜻을 이어받아 사업을 계승하여 집안의 명성을 실추하지 않는 것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급무일 것이다.
삼가 살펴보니, 공의 이름은 심찬서(沈纘西)이고 자는 사윤(士胤)이다. 둘째 손자의 이름은 수이(壽㶊)인데 천작(天爵109))과 승자(陞資)로 가선대부(嘉善大夫)와 호군(護軍)에 추증되었고 3대를 추은(推恩)하게 되어 공도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에 추증되었다.
우리 심씨의 본관은 풍산(豊山)으로 비조는 의정공(議政公) 심승경(沈承慶)이시다. 이후로 1세를 지나 조선의 태종을 보좌하여 공신(功臣)이 되신 심귀령(沈龜齡)이 풍산군(豊山君)에 봉해졌고 정헌대부(正憲大夫) 판의흥부사(判義興府事)를 지냈다. 호는 병담(屛潭)이고 시호는 정양공(靖襄公)이다.
중엽 이래 벼슬살이가 더욱 빛나 이름난 정승[名卿]이 이어졌으며 크나큰 공훈이 세상에 알려져 국가의 정간(楨幹)된 사람이 많았는데, 아! 기묘년부터 화를 입었다.
심언통(沈彦通)는 호(號)가 성와(聾窩)인데 학행(學行)으로 금천도찰방(金泉道察訪)에 제수되었다가 이조 참의[吏議]에 증직되었다. 공은 관직을 버리고 남원군(南原郡) 말천(抹川)에 은거하며 생애를 마쳤다. 공의 고조이시다. 대대로 음관(蔭官)을 이어갔는데 선고(先考)의 이름은 도(棹)이며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시 정(司僕寺 正)을 지냈다. 임실군 원상동면(元上東面) 관전리(館田里)에 우거하셨다. 처음에는 무덤110)은 세동(細洞) 해천(亥阡)에 있었다. 동생 심거원(沈巨源)은 자가 사청(士淸)인데 같은 곳에 안장되어 있다. 아! 두 집안의 후손들이 언덕에 올라 성묘할 때마다 쇠락해져가는 비애와111) 서조를 사모하는 마음112)이 더욱더 깊어졌다.
그래서 같은 마음으로 수계(修稧)113)하여 약간의 재물을 모으고 제전(祭田)을 계획하였으며 그밖에 전장(田庄)을 널리 설치하여 해마다 조세(租稅)를 받아 종중 재산을 마련하였고 한 해 한 번 강신(講信)하게 되었다.
지난 경인년 봄에 의견을 물어 뜻을 하나로 모아 재실 한 채를 건축하여 ‘영모(永慕)’라는 편액을 달았다. 1년이 되지 않아 공사를 마쳐 철마다 제향(祭享)할 수 있는 곳이 마련되었고 청년들이 학업할 수 있는 곳이 되었으니 처마 아래 창가가 환하게 밝아오고 담장이 맑고 깨끗해졌다.
난간에 올라 멀리 바라보면 앞에는 한 줄기 길에 있는데 산맥을 끊고 돌을 뚫어 큰 길을 새로 이었으니 전남선(全南線)과 서로 이어져 있다. 성수산(聖壽山)의 울창한 삼나무와 소나무가 베어져 장포(匠圃)에 들어가 재목이 되어 숯을 만들어졌다. 수레를 몰아 움직여 끊임없이 수출하고 산해진미[山珍海錯]와 동철어염(銅鐵魚塩)이 수입되어 쌓여 있고 길가 상점이 서로 마주보며 즐비하다. 유평(柳坪)114)에 면(陸棉)을 재배하여 길쌈하고 농사 짓으며 근검하니 의식(衣食)이 풍족해져서 도회지(都會地)라고 하겠다.
이에 오봉(五峯)의 밝은 달이 비추고 삼산(三山)의 솔바람이 맑게 불어오니 궤안(几案) 가운데 주옹(主翁)115)이 친구를 맞이하여 거문고를 어루만지니 길게 휘파람불며 술을 품고 시를 읊으며 형해(形骸)의 밖에서 한가로이 노닐 것이니 이런 즐거움은 손님[屬客]에게는 얼마나 지극하겠는가?
아뢰기를, ‘옛날의 분암(墳庵)116)은 진(晉)의 병사(丙舍)이고 당(唐)의 향정(享亭)이니 왕씨(王氏)의 춘우정(春雨亭)와 전씨(錢氏)의 명발당(明發堂)117)이 그런 것이다. 또한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소주(蘇州)의 범씨(范氏)의 의장(義庄)118)과 하남(河南)의 장씨(張氏)의 세거(世居)를 으뜸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 홀로 옛 것만 아름답다고 하겠는가? 재각의 이름을 돌아보고 뜻을 생각한다면 그 이름을 더럽혀서는 안될 것이다. 다. 다만 바라는 것은 우리 종족이 영원히 머무르며 사모하는 것이다. 이어 사율(四律) 한 수를 끝에 덧붙인다.
晩築小齋誼合宗 느즈막히 작은 재실을 지어 종족의 정의를 모으니 天藏基業筮龜從 하늘이 감춰 둔 기업(基業)으로 덕망있는 원로가 뒤를 쫓네119) 幽院敷榮唐棣萼 그윽한 담가에 꽃이 펼쳐지니 당체(唐棣)120) 꽃이고 外堂羅列太華峰 집 밖에는 태화봉(太華峰)이 늘어서 있네.
四時薦享馨芬苾 사시사철 제향을 올리니 그 향기 향기롭고 一隴省同老栢松 한 구릉에서 같이 늙어가는 송백(松柏)을 살피노니 丁寧陟降靈如在 정녕 오르내리시는 선령이 있는 듯 하니 寓慕兒孫永世逢 사모하는 자손 아이들을 영원토록 만날 수 있겠네.
무진년(戊辰年 ) 동지달 하순에 승지공(承旨公) 8대손 6품 승훈랑(承訓郞) 장릉참봉(莊陵參奉) 심진표(沈鎭杓)가 삼가 짓다.
墓之有齋 齋以永慕 名誌追感永思之義也 詩曰 無念爾祖 聿修厥德 然則堂搆之致力 芬苾之殫誠 猶屬小節 惟繼志述事 不墜家聲 是乃爲先之急務也 謹按 公諱纘西 字祀胤 次孫諱壽㶊 蒙天爵陞資 嘉善護軍 推恩三代 公加贈通政承 政院左承旨 兼經筵參贊官 夫吾沈姓 貫豊山 自鼻祖議政 公諱承慶 以后歷一世 入我朝佐太宗功臣 有諱龜齡 封豊山君 資正憲判 義興府事 號屛潭 卒諡靖襄 中葉炳奕簪冕 相承名卿 巍勳著聞 一世爲國楨幹者多矣 粤自己卯禍有諱彦通 號聾窩 以學行 除金泉道察訪 贈吏議公 棄官筮遯于南原郡抹川終老 於公高祖也 世承蔭官而考諱棹 通訓司僕寺正 寓居于任實郡元上東面館田里始焉 崇封若堂者 在於細洞亥阡也 與弟公諱巨源 字士淸 同塋壽藏也 噫 兩家雲仍 陟岡省掃 風泉之悲 霜露之感 悠久愈湥也 且同心修稧 若干募財 祭田計劃 外布置田庄 遂年稅租 合爲宗中財産 歲一講信矣 去庚寅春 徇謀僉同 建築一齋 額懸永慕 不朞年告迄以備 四時俎豆之設 靑年隸業之所 軒窓鴻朗 垣墻瀟灑矣 若夫登欄遠眺也 前有一條面路 斬山鑒石 新繕大道 與全南線相通也 聖壽山杉松鬱櫟 斫入匠圃 選村造炭 驅輪働車 絡繹輸出 山珍海錯 銅鐵魚塩 輸入頹積 街市啇店 櫛枇相望 柳坪陸棉 錦稻耕織 勤儉衣食豊足 此亦一都會也 於是乎 五峯明月 與三山松風 雙淸來照 凡案中有主翁 款納賓朋 撫琴長嘯 藏酒拈韻 徜徉徉乎 形骸之外 此樂何極屬客 而告之曰 古之墳庵 晉之丙舍 唐之享亭 若王氏春雨 鐵氏明發堂 是爾矣 且世之稱姑 蘇笵義庄 河南張世居 屈指爲首 然奚獨專美於古歟 言顧齋名而 思義則庶可無忝矣 惟願吾宗永言寓慕哉 賡載四律一首尾附
晩築小齋誼合宗 天藏基業筮龜從 幽院敷榮唐棣萼 外堂羅列太華峰
四時薦享馨芬苾 一隴省同老栢松 丁寧陟降靈如在 寓慕兒孫永世逢
歲在 戊辰 至月 下澣 承旨公 八代孫 六品 承訓郞 莊陵參奉 沈鎭杓 謹識
각주 108) 당구(堂構) : 긍당긍구(肯堂肯構)의 준말로, 가업(家業)을 이어받아 발전시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서경》 〈대고(大誥)〉의 “아버지가 집을 지으려 하여 이미 설계까지 끝냈다 하더라도, 그 자손이 집터도 닦으려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집이 완성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若考作室 旣底法 厥子乃不肯堂 矧肯構〕”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109) 천작(天爵) : 하늘에서 내려 준 작위, 즉 덕이 충만하여 저절로 존귀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인작(人爵)에 대한 용어이다. 《孟子 告子上》 110) 원문의 崇封若堂은 공자가 “내가 집채같이 큰 봉분〔封之若堂者〕을 보았다.” 하였다. 《禮記 檀弓上》 이는 사방이 사각형으로 반듯하고 높은 무덤을 형용한 말인데, 후세에는 일반적으로 무덤을 뜻하는 말로 통용되었다. 111) 원문의 풍천(風泉)은 《시경(詩經)》의 편명인 〈비풍(匪風)〉과 〈하천(下泉)〉을 지칭하는 것으로, 현인이 국가의 쇠망을 걱정하는 내용임. 112) 원문의 상로지감(霜露之感)은 돌아가신 부모나 선조를 서글피 사모함을 가리키는 말로 《예기》 제의(祭義)에 가을 제사 때에 “서리나 이슬이 내리면 군자가 이것을 밟고 반드시 서글퍼지는 마음이 있으니, 이는 추워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113) 수계(修禊) : 물가에서 노닐면서 불길한 재앙(災殃)을 미리 막던 풍속으로, 보통 삼월 삼일에 행하였다. 진(晉)나라 왕희지(王羲之)의 난정 수계(蘭亭修禊)에 대한 고사가 유명하다. 114) 본래 운봉의 남면(南面)지역으로 유평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 때 수철리, 용은리와 덕산리, 유평리 각 일부가 병합되어 공안리에 편입되었다. 1680년경 함양박씨(咸陽朴氏)가 처음 이 마을에 정착하여 10여호의 작은 마을로 이어져 오다가 조선조 말에 30여 호로 늘어났다. 처음 마을 이름은 낙안리(落雁里)로 불리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한번 객지로 나가면 고향을 잊고 영영 돌아오지 않자 마을이 위축되고 빈한해지자 마을 선비들은 주민의 뜻를 모아 마을이름을 바꾸기로 하였다. 오랜 심의결과 유평마을이 공안 들녘에 위치하여 주변에 버들가지가 많고 또한 수양버들 숲이 있어 버들은 번식력이 강한나무로 마을에 강한 재생력과 번창을 기원하는 상징적 의미로 「벗들」이라 부르기로 하고 한문으로 ‘유평(柳坪)’으로 표기 하였다고 한다. 115) 주옹(主翁)은 주인옹(主人翁)의 준말로, 몸의 주인인 마음을 의인화한 것이다. 당(唐)나라 때 서암(瑞巖)이란 승려가 매일 스스로 자문자답(自問自答)하기를, “주인옹아! 깨어 있느냐?” “깨어 있노라.” 하였다 한다. 《心經 卷1》마음이 외물(外物)에 이끌리지 않도록 시시각각(時時刻刻) 일깨우는 지경(持敬) 공부의 한 방법이다. 116) 분암(墳庵)은 ‘墳’은 무덤, ‘庵’은 암자를 말하니 ‘무덤가에 있는 암자’를 말한다. 다시 풀어보자면 ‘선영의 묘역 주위에 건립되어 묘소를 지키고 선조의 명복을 빌며 정기적으로 제를 올려주는 불교적인 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재궁(齋宮), 재암(齎庵), 능암(陵庵), 재사(齋舍) 등으로도 불렸는데 왕실에서는 조선 중기 이후까지도 왕릉과 관련한 원당(願堂)과 원찰(願刹)을 세우고 불교적 제의가 성행하였으며, 이를 따라서 사대부나 관료들의 집안과 문중에서도 분암(墳庵)을 세우거나 불교식 상장례를 행하는 일이 일반적이었다. 분암은 죽은 이를 화장하고 난 유골을 모셔두고 명복을 빌며 승려로 하여금 제를 지내게 했던 시설이었으나 한때는 유생들의 시회 또는 강학장소, 또는 문집이나 족보를 편찬하던 곳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117) 《시경》 〈소완(小宛)〉은 난세에 형제가 서로 조심하며 화를 면하자고 다짐한 시인데, 그중에 “나의 마음 근심하고 슬퍼하면서, 옛날의 선인을 생각하노라. 먼동이 트도록 잠을 못 자고, 부모님 두 분을 생각하노라.〔我心憂傷 念昔先人 明發不寐 有懷二人〕”라는 말과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들어서, 너를 낳아 주신 분을 욕되게 하지 말라.〔夙興夜寐 無忝爾所生〕”라는 말과 “두려워하고 마음 졸이며, 살얼음 밟듯 할지어다.〔戰戰兢兢 如履薄氷〕”라는 등의 말이 나온다. 118) 범중엄이 재상을 하다가 벼슬을 그만 둔 후에 소주에 큰 땅을 마련하고 범씨의장을 세웠다. 의장이란 범씨 문중에서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하는 장원이다. 119) 원문의 서귀(筮龜)는 점(占)을 치는 시초(蓍草)와 거북을 말하는데, 이것으로 점을 쳐서 길흉 화복(吉凶禍福)을 미리 판단하는 것이라, 사람마다 이를 소중히 여기는 데서, 전하여 덕망(德望)이 높은 원로(元老)에 비유한다. 120) 당체(唐棣)는 ‘棠棣’와 같은 뜻으로, 《시경》〈소아(小雅)〉의 편명인데 이 역시 주공이 지은 것으로, 주공이 관숙, 채숙을 처형하고 나서 더욱 형제간의 변고를 몹시 가슴 아프게 여겨 지은 것이라고 한다. 〈상체〉 시에 “상체의 꽃이여, 악연히 빛나지 않는가. 무릇 지금 사람들은, 형제만 한 이가 없느니라. 사상의 두려운 일에, 형제간이 매우 걱정하며, 언덕과 습지에 시신이 쌓였을 때, 형제간이 찾느니라. 할미새가 언덕에 있으니, 형제가 급난을 당하였도다. 매양 좋은 벗이 있으나, 길이 탄식할 뿐이니라.〔常棣之華 鄂不韡韡 凡今之人 莫如兄弟 死喪之威 兄弟孔懷 原隰裒矣 兄弟求矣 鶺鴒在原 兄弟急難 每有良朋 況也永歎〕”고 하였는데, 위 시에서 말한 꽃과 꽃받침은 한 가지에서 나와 서로 보호하는 작용이 있으므로, 이를 형제간의 우애에 비유한 것이고, 할미새는 날 때는 울고 걸을 때는 꽁지를 자주 흔들어서 불안한 뜻이 있으므로, 이를 급난(急難)한 일을 당한 데에 비유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