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평리 비봉재(飛鳳齋)
이 재실은 월평리 성저마을 안에 있다. 전주이씨 효령대군파 장손인 13세손 이창권 씨가 관리하고 있는 재실이다. 1950년에 건축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현판 1개, 주련 4개가 있는 팔작 기와집이다. 재실 앞으로 둔남천이 흐르고 4차선이 통과하는 교통 중심지이다.
팔공(八公)은 장수(長水)의 명산(名山)으로 높고 넓으며 그윽하고 고요한데, 이곳에 성적산성(聖跡山城)이 있다. 산의 한 줄기가 서쪽으로 뻗어 30리를 구불구불 이어지다가 다시 솟아 성(城)을 이루었는데, 이 산성(山城) 안에 묘(墓)가 있으니 바로 송암(松菴) 이공(李公) 성노(聖老)가 묻힌 곳이다.
먼 산이나 가까운 산이나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아 앞에 죽 서서 읍(揖)하는 모양으로 있고, 도로와 철도가 곧바로 남원(南原)으로 통하여 오가는 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물은 성수산(聖壽山) 상이암(上耳菴)에서 나와 빙 둘러 흐르는 것이 마치 활을 당긴 모양과 같으며, 물빛과 산의 경치는 위아래로 푸르고, 아름다운 새와 기이한 짐승을 아침저녁으로 모두 볼 수 있으니, 표현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경관이 오직 공의 묘궐(墓闕)에 펼쳐진 지가 200여년이 되었다.
9대 종손(宗孫) 강진(康珍)이 동강(東江) 김비(金秘)에게 비명(碑銘)을 부탁하였고, 묘정(廟廷)을 굳건히 하였으며, 60년이 지난 무오(戊午)년에는 강진(康珍)의 아들 영재(永宰)가 가문의 재산을 덜고 돈을 모아서, 성(城) 아래에 병사(丙舍) 세 칸을 짓고는 아울러 담까지 두르고 나니, 재실이 있는 곳이 마치 고개를 쳐들고 나는 봉황과 같았으니, 공(公)의 묘(墓)는 이른바 나는 봉황이 알을 품은 형국이었다.
그 후 19년이 지나도록 아직 사실을 기록한 것이 없어, 외람되게도 나에게 부탁을 하였으니 내가 끝내 거절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야기 하나를 꺼내고자 한다. 대개 봉황은 다섯 가지 색채를 갖추고, 덕(德)의 빛남을 바라보며, 죽실(竹實)이 아니면 먹지 않고 살아있는 풀은 밟지 않으며, 나라가 잘 다스려지면 나타나고 혼란하면 숨나니, 이것이 인(仁)한 새로 일컬어지며 360종의 날짐승 가운데 우두머리가 되는 까닭이다.
공(公)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후손인 천묵재(天黙齋) 충경공(忠景公)의 손자로 가법(家法)의 영향을 받았다. 부모님을 봉양함에 얼음 속에서 잉어가 뛰어나오는 기이한 상서가 있었고, 부모의 상을 당하여 시묘살이 할 적에는 3년 상을 다 마쳤으며, 평생 동안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책을 읽어 근엄하게 온 고을의 모범이 되었다. 이는 그의 마음을 확립하고 행실을 굳건히 함이 마치 사람들 가운데 봉황과 같은 점이 있는 것이니, 공(公)이 좋은 터를 만난 이유가 사람과 사물이 서로 비슷한 것을 얻었다고 말할 만 하리라.
바라건대, 지금은 서양의 사조(思潮)가 동방에 넘쳐 사교(邪敎)가 풍조(風潮)를 이루니, 그 조상을 제사하지 않는 일이 넘쳐나 모두들 그러한데 재숙(齋宿)하는 곳을 어디다 쓰겠는가. 그러니 오직 공(公)의 후손들만은 잘못된 풍속을 구원하며 근본에 은혜 갚기를 극진히 권하라. 이와 같이 한다면 후손들이 선조의 덕(德)을 본받아 닦아 공(公)의 은택이 여전히 끊기지 않는 점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할 것이다. 공(公)의 후손들이 이런 일을 따르고 더욱 힘쓴다면, 집집마다 봉황이 되고 대대로 봉황이 되어서 자기 할아버지의 손자 됨에 부끄러움이 없은 뒤에야 여러 공(公)들을 잘 섬겼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함부로 말한 것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문미(門楣)에 걸어두기에 어떻게 여기겠는가.
병자(丙子)년 5월 어느 날 황주(黃州) 변시연(邊時淵)이 기록하노라.
八公長水名山 磅礡焉、幽閴焉 有聖跡山城 一支西馳 蜿蜒三十里 復聳為城 山城內有墓 即松菴李公聖老之藏 遠山近山 不高不低 案前列揖 ; 公路鐵道 即通南原 去者來者 蹄輪接尾 水出聖壽山上耳菴 環抱若彎弓 水色山光 上下交翠; 珍禽異獸 朝暮供觀; 勝狀難形 惟墓闕顯刻者 迄二百有年
九代胄孫康珍 以東江金秘丞銘 堅之墓庭 歷周甲戊午 康珍子永宰 傾門財又鳩金 城底築丙舍三間 并及於墻垣 若雇舍顏揭飛鳳 以公墓稱飛鳳抱卵形也。 飲落十九年 尚無記實 謬託不侫 辭不得已 則有一說焉 蓋鳳之為物 具五文覽德輝 非竹實不食 不履生草 治見而亂隱 此所以稱仁鳥而為三百六十羽蟲之長也。公以孝寧大君後天默齋忠景公之孫 濡染家法 養親有冰魚之異 丁憂廬墓終制 畢生讀程朱書 儼然為一鄉模楷 蓋其立心操行 有似乎人中之鳳 以公遇吉地 可謂人與物相得耶
願今西潮東漲 邪教成風 不祭其祖者 滔滔皆是 焉用齋宿之所 惟公後孫 援乎流俗 致勸報本 有如是 可謂聿修先德而公之澤 尚有不斬者存也 公之後者 從此加勉 家家鳳 世世鳳 無愧為乃祖之孫然後 可謂能事諸公 以為如何妄言及此 用揭楣頭?
丙子 五月日 黃州 邊時淵 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