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리 감모재(感慕齋)
이 재실은 성수면 태평리 양암 마을, 임실~진안간 도로에서 상양 마을 쪽으로 약 100m지점에 있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연안 김씨(延安 金氏)의 선조 김흔(金昕, 1579~1645)의 재실로 1770년 창건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969년 개축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 기와집이다. 재실 안에는 현판이 2개, 주련이 4개 걸려있다.
운수(雲水)의 고을을 다스리는 곳의 동쪽으로 30리 정도 떨어진 지역에 “성수(聖壽)”라는 산이 있고 성수(聖壽)산 동남쪽에 한 기슭을 특별히 “양암(陽巖)”이라 한다. 이 곳 위에 계좌(癸坐) 정향(丁向)으로 4 척(尺)정도 되는 자리가 바로 우리 9대(代) 조고(祖考)이신 연안(延安) 김공(金公) 통정대부(通政大夫) 부군(府君) 휘(諱) 흔(昕)의 체모가 묻힌 만년유택(萬年幽宅)이다. 그리고 이곳 아래에 몇 칸의 재각이 높고 우뚝하게 세워져 있으며, 감모(感慕)라 편액한 곳이 우리 9대(代) 조고(祖考)이신 통정대부(通政大夫) 부군(府君)의 묘막(墓幕)이다. 9대(代) 조비(祖妣) 숙부인(淑夫人) 여산 송씨(礪山宋氏)는 일찍 돌아가시어 별도로 도인동(道引洞) 선영(先塋)에 장사지냈고, 숙부인(淑夫人) 현풍 곽 씨(玄風郭氏)와 부군(府君)은 합장하였다. 대대로 전해져 오는 미덕(美德)의 일부는 이공(李公) 병은(秉殷)이 지은 비문(碑文)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아! 자손들이 번성하지 못하고 가세(家勢) 또한 침체되어, 미처 재사(齋舍)를 짓지 못하다가 근래 들어 종인(宗人)들의 의견을 묻고 도모하여 모두 의견을 같이 함으로써, 약간의 재물(財物)을 모으고 여러 집들이 함께 일하여 세 칸을 세웠으니, 그것이 곧 중당(衆堂)과 동실(東室)과 서실(西室)이다. 제사지낼 적에는 이곳에서 재숙(齋宿)하고, 성묘(省墓)할 적에는 이곳에 모여 많은 자손들이 참여할 수 있으며, 통정공(通政公) 부군(府君)에게 함께 나아가는 제사 당일에는, 통정공(通政公) 부군(府君)의 슬하(膝下)에서 그의 가르침과 훈계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부군(府君)께서 저승에서 묵묵히 도우시는 덕(德)에 오늘에야 후손(後孫)들이 쌓아두었던 응어리들이 하나라도 풀 수 있을 것이로다!
기유(己酉)년 2월에 계획하여 같은 해 가을 9월에 완성함에 처음부터 끝까지 열심히 수고한 사람인 종협(鍾協)과 상영(相泳)과 은영(殷泳)은 내가 감독함에 혹시라도 미리 움직이는 일이 없지 않았으니, 그러므로 번잡한 말이지만 대략적인 전말(顚末)을 기록한다.
대개 재실을 ‘감모(感慕)’로 이름 한 것은 옛 군자(君子)가 서리와 이슬을 밟고 비와 이슬을 밟음에 계절이 변화하는 때를 느끼고 조상(祖上)을 추모(追慕)한다는 뜻에서 취한 것이다. 오직 우리 후손들이 고인(古人)들이 조상(祖上)을 추모하는 정성을 몸으로 알고 선조(先祖)을 높이고, 시조(始祖)를 받든다면 그 효과를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증자(曾子)께서 말씀하시길 “사람의 임종(臨終)을 엄숙하게 맞이하고 멀리 조상(祖上)을 추모한다면 백성의 덕(德)이 두터운 데로 돌아갈 것이다.”라 하셨으니 아마도 이를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일 것이로다. 그러니 이를 경계할지어다.
무오(戊午)년 단오(端午)절에 통정공(通政公) 9 세손(世孫) 찬기(贊基)가 삼가 기록한다.
雲水之鄉治之東 一舍之地 有山曰聖壽 聖壽之東南 特一麓曰陽巖 上而癸坐丁向四尺之土 即我九世祖考延安金公 通政大夫府君 諱昕 衣履之藏 永萬年幽宅也下而數間之齋 兀然亭然而額以感慕者 是我九世祖考通政大夫府君之墓幕也 九世祖妣淑夫人礪山宋氏 早世而別葬於道引洞先塋 淑夫人玄風郭氏與府君同窆 其佗世德 詳於李公秉殷所撰碣文
嗚呼 子姓不蕃衍 家勢亦沈滯 尚無齋舍之建 近以詢謀僉同鳩財若干 而諸戶共役 構三間而眾堂也·東室也·西室也則俎豆也齋宿於斯 展省也會合於斯 有如干百子孫 同進於通政公府君之當日 滕下而承聲欬者也然則府君冥冥默佑之德 有待於今日而後裔積累之憾 或可以敘萬一也哉 經始於己酉年二月 落成於同年秋九月 終始賢勞者鍾協 相泳 殷泳也 不肖於董督 或不無所預 故將蕪辭而敘顛末之略
蓋號齋以感慕者 取古之君子 履霜露屨雨露 而感時追慕之意焉 惟我後裔 體古人追慕之誠 而尊祖奉先則其為效果 何如云哉? 曾子曰 慎終追遠 民德歸厚矣 其比之謂歟 戒之哉!
歲戊午重五節 通政公九世孫贊基謹記
선영(先塋) 아래에 비석을 세우고, 재각을 짓는 것은 아름다운 외관을 위함이 아니라, 자손들이 선조께 정성껏 제를 올리고 추모하는 마음을 지님으로써, 사람의 도리를 다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아! 우리 11대 선조이신 통정공(通政公) 휘(諱) 석(昕), 자(字) 여중(汝中)께서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형님 첨추공(僉樞公)을 아버지처럼 섬김에, 상동(上東)의 30리쯤 되는 곳으로 옮겨와 살면서 닷새에 한 번씩 형님을 찾아뵈었으니, 그 품행과 도의가 세상에 훤히 드러났다.
공은 처음에 여산(礪山) 송(宋) 씨를 부인으로 맞아들였지만, 일찍 세상을 떠나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하였고, 뒤에 다시 현풍(玄風) 곽(郭)씨를 부인으로 맞아 5남 3녀의 자녀를 두었다. 그 뒤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상동(上東) 남쪽 암계(巖癸) 언덕에 안장하였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삼 백 여 년 간 가문이 떨쳐 일어나지 못하여, 장자와 차자의 후손 삼사십 호(戶) 가운데, 다만 몇몇 집안의 후손들에게만 전해져 그 떨침이 나약했으니, 통탄스럽기 그지없다.
을미(乙未)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전의(全義) 이병은(李炳殷) 공께서 작은 비석에 명문을 새겨 그곳에 세웠고, 15년 뒤인 기유(己酉)년에는 재각의 건립을 계획하였으나, 웅장하고 화려하게 지어서 향당(鄉黨)사람들에게 통정(通政)공께 후손이 있음을 알리고자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일족이 선조의 묘소를 찾아뵙고 청소함에 풍우(風雨)의 화가 없이 재각에서 머무를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할 뿐이었다.
이러한 일은 모든 일족이 결코 힘쓰지 않아서는 안 될 일이니, 처음부터 마무리까지 더욱이 노력이 두드러졌던 이는 찬기(贊基), 종협(鐘協), 은영(銀泳)이다. 재각이 완성됨에, “감모(感慕)”로써 글자를 적어, 추모의 감정을 흥기시키나니 영원토록 길이 삼가야 하는 도의로다. 오직 우리 종족(宗族)은 선조를 높이는 도리를 잃지 않고 영원히 지키고 해이해지지 않기를 바라나니, 우리 종족은 세상에 다시 떨치고 일어나 부끄러움이 없을지어다.
신해(辛亥)년 11대손 상영(相泳)이 삼가 기록하노라. 문장(門長) 병기(丙基) 유사(有司) 종수(鐘壽) 종철(鐘喆)
夫先塋之下 立碑建閣 不是觀美 為其子孫者 有追遠157)感慕之心 而以盡人道者也 吁 惟我十一世祖 通政公諱昕字汝中 早失怙 事伯氏僉樞公如父 移居上東一舍之地 五日一拜 行誼著世 初娶礪山宋氏 早卒無育 再娶玄風郭氏 生五男三女 而卒葬于上東陽巖癸原. 今距三百餘年 門戶未振 長次家之孫三四十戶 僅傳而三四五家之孫有而弱焉 可勝痛哉 歲乙未 始短碣全義李炳殷翁撰銘而立. 越十有五年 己酉謀起齋閣 不是壯麗 使鄉黨足以知我通政先祖之有後 吾之僉宗 瞻掃封塋 無風雨之患而齋宿 則於斯足矣 是役也 諸宗靡不庸力 始終尤功者 贊基 鐘協 銀泳也. 齋既成 以感慕為記 興感追慕 永世不妄之義也. 惟願宗族不失尊祖之道 永守勿替 則吾宗亦有復興於世 而庶幾不愧也夫
辛亥 暮春日 十一代孫 相泳 謹記 門長 丙基 有司 鐘壽 鐘喆
각주 157) 추원(追遠) :《논어(論語)·학이(學而)》에 “어버이의 상을 당했을 때에 삼가 상례를 행하고 선조께 정성껏 제를 올리면 백성들의 덕성이 두터워질 것이다(愼終追遠 民德歸厚矣)”에 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