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암리 극경재(克敬齋)
이 재실은 오수면 오암리 한암마을 위에 위치하고 있다. 극경재(克敬齋)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교하 노씨 도선산의 재실로 1942년에 지었다. 극경재 편액은 노시재가 썼으며, 4개의 현판과 5개의 주련이 남아있다. 담장은 돌과 흙으로 섞어 쌓은 후 토기와를 올린 상태이며, 앞 정문과 옆에는 작은 문으로 되어 있으며, 건물의 지붕은 강판으로 개량하였다.
뽕나무와 가래나무도 오히려 지극히 공경하거늘, 하물며 선조들의 혼백이 의탁한 곳임에랴.
해마다 시제를 지내고, 봄가을로 묘소를 찾아뵙고 청소할 때마다, 슬퍼하는 감정이 있지 않으면 자기를 용납하지 않았다. 치소의 남쪽마을은 한암리(寒岩里)이고, 봉우리는 두리봉(斗里峰)이니, 곧 우리 남쪽으로 낙향하신 선조 휘 성구(聖龜) 첨지중추부 용양위부호군부군께서 은거하여 여생을 보내다가 묻힌 곳이다. 자손들이 이에 대대로 거주하면서 제사를 모셨지만, 힘이 미치지 못했다. 이 해에 제사 지낼 곳을 천거하고 친족들이 모여 재실이 없는 것이 무궁한 한이 된지 오래되었다며 신세를 한탄했다. 이에 임오년에 종의(宗議)가 구름처럼 일어, 한 재각을 세우고, “극경(克敬)”이라는 현판을 붙여 얼굴로 삼았으니, ‘선조의 아름다움을 좇아서, 삼가 공손히 제사를 드린다’는 뜻이다.
아! 선조에 대해 자손들이 삼가 공손히 제사를 드리고, 그 사모하는 정성을 기록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른바 ‘경(敬)’이라 하는 것은 비단 철에 맞게 제사를 올리는 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모(慕)’라는 것도 또한 봄비에 슬퍼하고, 가을서리를 두려워하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 한 몸 받은 곳을 안다면, 곧 반드시 온전히 돌려줄 것을 생각하여 감히 훼손하거나 상하지 않게 해야 하며, 서 있다가도 엎어지고 뒤집어지는 이유를 안다면, 곧 반드시 더립히지 말것을 생각하여 감히 사치하거나 거만하지 않아야 한다. 온전히 돌려줄 것을 생각하는데도 그 몸을 공경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극경(克敬)과 극모(克慕)는 효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다. 그러니 곧 우리 교하노씨의 재각에 이름을 붙이면서, 극경(克敬)을 버린다면, 무엇으로 이름을 붙이겠는가. 그러나 내가 보건대, 세상 사람들이 그 실재에 힘쓰고, 그 이름에 힘을 쓰면서 묘에 재실을 둔 것이 온 나라에 가득하되, 제사를 드리는 때와 봄비 가을 서리 사이에 극경(克敬)과 극모(克慕)의 정성을 다하는 사람은 아마도 드문 것 같다. 하물며, 온전히 돌려줄 것과 더러힘이 없을 것을 생각하는 사람을 바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바라건대 우리 모든 종친들은 효도와 공경을 주된 근본으로 삼아서 나뉘거나 흩어지는데 이르지 말고, 또 집안의 명성을 잘 계승하기를 바라노라. 이에 삼가 처마에 새기어서 붙이니, 우리 후손들로 하여금 경계할 것을 알게 하고자 함이라.
계미년 중추 하한에 8대손 성우(性愚)가 삼가 쓰다.
惟桑與梓201) 尚可敬止 況祖先體魄攸託 歲時芬苾春秋省掃 其不有怵惕興感 而不容自己者乎 治之南里曰寒岩 峯曰斗里 即惟我落南祖諱聖龜 僉知中樞府 龍驤衛副護軍 府君之 菟裘202)而堂斧203)也 子孫仍以世居而事力不逮 惟此歲 薦芬苾之所 聚族 歌哭204)之 堂訖無有焉為無窮之恨久矣 乃自壬午宗議雲興 建一齋榜用克敬為顏 盖所以遹先追懿 敬慎祀事之義也
噫子孫之於先祖 惟祭之以敬 書其思慕之誠而已 然所謂敬者不但在於奠獻進退之際而已 所謂慕者又不但在於春雨秋霜悽愴怵惕之間而已也 知身體髮膚之有受 則必思全歸而不敢毀傷矣 知成立覆墜之有由 則必思無忝而不敢奢傲矣 夫思全歸而不敬其身者 未之有也
克敬克慕孝之道盡矣 然則惟我交盧之齋 捨克敬 奚以名 雖然吾觀世之人務其實而務其名 墓之置齋遍一國矣 而能於奠獻進退之際 春雨秋霜之間 盡其克敬克慕之誠者 或鮮矣 況可望其有全歸與無忝之思者哉 願我僉宗以孝敬為主本 毋或至於判渙 又能善繼其家聲 則是其庶幾焉者也 書此謹識于楣 使為我後承者 知夫戒焉
歲在癸未仲秋下澣 八代孫 性愚 謹識
운수현 남면 한암리 북쪽에 극경재가 있으니, 교하노씨205)의 묘사이다. 노씨로 공숙공(恭肅公)으로부터 시작해서, 9세손 첨추 휘 성구(聖龜)가 처음으로 남쪽으로 이거했다.
문행을 대대로 계승하며, 무덤이 줄을 지어, 이제 9세손 재석(載碩)과 종손 철호(哲鎬) 및 모든 친척들이 처음으로 임오년 봄부터 묘사를 지어서 재숙도하고, 친척들에게 강학할 수 있는 곳으로 삼았다.
그중에 먼 곳에서부터 나를 찾아와 기문을 요청하며 말하길, “경(敬)이란 글자 하나는 곧 성인학문의 시(始)와 종(終)이 되고, 위·아래를 꿰뚫는 것이다”고 하였다.
세시에 맞게 제사를 드리고, 이에 모든 친척들의 부형과 자제들을 앞에 불러 모으고, “지금 나의 이 몸은 부모의 부모로부터 온 것이고, 또, 조선(祖先)으로부터 위로 백세를 올라가면 곧 옹자(翁子)같다. 반드시 신을 섬기기를 지극히 공경하여 마치 곁에 있는 듯 정성을 다해야 한다. 지극한 공경으로 몸가짐을 하고, 성인을 본받을 것을 격려하며, 조상과 선조들에게 먹칠을 하지 말아야한다.
많은 자제들이 모두 말하길 “저희들이 비록 불민하나 감히 이에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이같이 한 즉 노씨 가문의 선영들께서도 또한 응당 양양하시며, 애애하시어 마치 그 말을 듣는 듯 하시며, 그 일을 돕는 듯 할 것입니다.
각자 힘쓰기를 바라며, 이에 고재(告載), 석재(碩載), 선재(善載)가 판을 깎고, 또 새기어서 기록하였다.
단기 4276 계미년(1943) 중추 상간 금재 완산 최병심 쓰다.
雲水縣之 南面 寒巖里北 克敬齋者 交河盧氏墓舍也 盧氏自恭肅公 九世孫 官僉樞 諱聖龜 始遷南鄉 文行承世 邱隴成行 今其九世孫 載碩與宗孫哲鎬及諸族 始自壬午春營成墓舍 以為齋宿之所 且會諸昆講學 其中遠來請記余曰夫敬之一字 乃聖學之成始成終 徹上徹下者也
歲時祀事 既畢族父兄召群子弟前 曰今我此身從父母來父母 又從祖先而來等 而上之百世 直如翁子206)耳 必須事神克敬而致如在之誠 持身克敬而勵希聖之學207) 以母忝乎祖先 群子弟 皆曰某㝳雖不敏 敢不悉力于此 如是則盧氏之先靈 亦應洋洋焉僾僾焉 如聽其言而相其事矣
請各勉旃 既以 告載 碩載 善載 析且錄以為記
檀紀四千二百七十六年 癸未 仲秋上澣 欽齋 完山 崔秉心 記
임실[雲水]의 남쪽, 남원[廣漢]의 북쪽 오암208)은 그 뒤를 남극성이 비추고 있어서, 전에는 호남의 특별한 지역이라 칭하였으니, 사대부가 거주할 만한 땅이라고 하였다.
아! 우리 선조 첨중추공은 잠영세족으로서 어릴 적에 벼슬길에 나섰다. 비록 미관말직에 있었어도 고결한 품격과 맑은 절조가 매우 뛰어나서 언행이 세상에 부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갑자기 관직을 버리고, 이곳 남쪽으로 내려와서, 산림간에 자취를 감추시고, 밭 갈고 독서하는 것에 맛을 들였으며, 자손들을 잘 이끌고, 향우간에 후히 대접하며 한 세상을 소요하니, 사람들이 한 고을의 스승이라고 칭하였다.
세월이 멈추지 않아 천수를 누리고 졸하시니, 자손들이 이곳에 안장하였다. 이로부터 이곳에 대대로 살게 되어, 마침내 우리 집안이 남쪽으로 이주한 중조가 되었다. 후일의 성쇠를 이에 볼 수 있다. 이로부터 후손들이 점점 번성하였으나, 지금에 이르러 세력이 빈약하여 묘 아래에 재실 한동도 짓지 못하니, 선조를 우러러 송구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금년에서야 비로소 묘 아래에 몇 칸 집을 짓고 “극경재(克敬齋)”라고 명칭하였다. “극경(克敬)”이란 뜻은 ‘조상을 공경하고, 친족간에 화목하게 지내라’는 뜻이다. 제사를 지내는 것은 사시사철 끊이지 않고, 공부하는 소리가[絃誦] 이웃고을 멀리까지 들렸다.
세상에 이름을 알리는 것이 비단 문학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근근이 문호를 보존해온 이래 수 세대동안, 삼가 후생들은 위로는 선조들의 유훈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는 후손들의 화합의 기운을 잃지 않도록 서로 경계하며, 향사를 지낼 때에는 정성을 다하고, 지키고 보존하는 데에 진심을 다하여서, 친족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어리석은 제가 미약하나마 성심을 다해서 삼가 소회를 썼습니다.
또 시를 지어 말하길
祖道南遷卜一邨 할아버지께서 남쪽의 한 고을로 이거하시어 鰲岩頭戴別乾坤 오암의 머리에서 하늘과 땅이 나뉘네 香火遠聞亨四節 제사지내는 것 멀리까지 알려져 사철 끊이지 않고 誦聲久作學三尊 외우는 소리 오래도록 일어나니 삼존을 배우고 群峰烈立為兄弟 무리지은 봉우리 열지어 서서 형제를 이루고 花樹層生養子孫 후손들은 계속 이어져 자손을 양육하고 十世積蔭存此閣 10세에 쌓인 음덕 이 집에 존재하고 克隨所感敬其魂 힘써 그 느낀 바를 따라 그 혼을 공경하네
계미(癸未) 중추(仲秋) 하한(下澣)에 10대손 영호(泳鎬)가 삼가 짓다.
雲水之南廣漢之北 鰲岩 在其後南極照 其前称為湖南別區 可謂士大夫可居之地也 惟我 先祖僉中樞公 以簪纓世族 少時登仕 雖在微䆠 然清標雅操超拔 凡類言行不合於世 故遽然去官南遷于玆 寓跡於山林之間 着味於耕讀之中 善戒子孫 厚接鄉友 逍遙一世 称為一鄉之師範矣
歲月不留 以天年終 子孫安葬于玆 因以世居 遂為吾家落南之祖也 而後日之盛衰 於斯鑑也 從此後裔 漸臻繁 至然而勢貧力弱 未竪一棟於墓下 俯仰先祀 不勝悚然 而至于今年 始構數椽于墓下 號曰克敬齋也 克敬之志 在乎尊祖敦睦之道也 而香火之節 不絕於四時 絃誦之聲 遠聞於鄰鄉 然策名於世者 不有但以文學 僅保門戶而來數世也 恭惟後生以此相戒 上不負先世之遺訓 下不失後日之和氣 勤誠於享祀之節 盡心於守成之道 無使獲戾於閥閱可也 愚敢竭微誠謹陳所懷云耳
又有詩曰
祖道南遷卜一邨 鰲岩頭戴別乾坤 香火遠聞亨四節 誦聲久作學三尊
群峰烈立為兄弟 花樹層生養子孫 十世積蔭存此閣 克隨所感敬其魂
歲在癸未仲秋下澣 十代孫泳鎬 謹識
‘구름 낀 하늘 이미 밝으니 처사의 별도 삼림의 깊숙하고 으슥한 곳[林壑]에서 또한 기뻐하네. 고향으로 돌아오는[歸人] 수레는 소박한 정성이네, 처음부터 끝까지 본받기를 바란다는 것은 일편단심이니, 어느 겨를에 벼슬하리오.
우리 교하 노씨는 한성부원군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겸판병조사 시호 공숙공(恭肅公) 휘 노한(盧閈 ; 1376~1443)이 중조(中祖)가 되신다. 6대를 전하여 통정대부 행함양군수공 휘 노윤중(盧允中 ; 1718 ~ ?)으로 이어진다. 증손 첨중추 절충장군 행용양위 부호군공 휘 노성구(盧聖龜)와, 아들 첨중추 절충장군 행용양위 부호군공 휘 노세적(盧世迪)이 살아서 만났다.
숙종의 전성기 때에는 마땅히 벼슬길에 나아가 세상에 쓰일 것이라는 즐거움이 있었으나, 꿈에 소나무와 구름사이로 들어가니, 산골[邱壑]에 들어가는 생각이 간절하여 중추(中樞) 2공은 道鏟을 품고서 임실[雲水] 남승치 아래 두리봉이라는 곳으로 자취를 감추니, 기사사화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공이 졸하여 이곳에 장사지내니, 이 자손 때부터 운수에 머물러 살게 되니, 또한 중추공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임오년 중춘(仲春)에 선영 아래에 극경재를 건립하였다. 가을 상제 때와 겨울 증제 때는 비바람을 가려주며, 봄에 음악을 익히고 여름에 시를 외울 때에는 글공부를 하는 곳이니, 곧 조상을 공경하고 친족간에 화목하는 아름다운 곳이다. 비록 거의 되었다 하더라도, 그러나 효라는 것이 좋은 음식으로 봉양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요, 수많은 사람들이 수총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뜻을 잇고 사업을 계승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니, 무릇 우리 모든 종친들은 모름지기 공경하고 효도하는 것으로 뜻을 잇는 급선무로 삼는다면, 자취가 대대로 그 아름다움이 빛날 것이니, 교하 노씨의 바람이 이보다 중한 것이 있겠는가. 이에 스스로 반성하며 또한 권면하는 바이다.
단기 4276년 계미년(1943) 2월 일 8대손 철우(澈愚) 삼가 적다.
雲霄既明 處士之星209) 林壑亦喜 歸人之駕 則素誠乎 願效於始終者片心 奚暇於仕宦也 惟我交河之盧 以漢城府院君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 右議政兼判兵曹事謚恭肅公 諱閈 為中祖而傳至六葉 通政大夫行咸陽郡守公 諱允中 曾孫 僉中樞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公 諱聖龜 子僉中樞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公 諱世迪 生逢 肅廟盛際 宜若彈冠210)振縷樂 為需世之用 而夢入松雲 思切邱壑 中樞二公 懷道鏟 跡於雲水南升峙下斗里峯者 盖以己巳士禍211)之始也 公卒而葬於斯 自是子孫奠居雲水者 亦以中樞公始也 壬午仲花+日 建克敬齋於塋下 秋嘗冬烝212)為風雨之庇 春絃夏誦為隸業之所 則敬先睦族之美 雖曰庶幾 然孝不以三牲213)致養 萬戶守塚為貴 以繼志述事為貴 則凡我僉族氏 惟以敬孝為繼述之急 而世跡其美赫然 為交河之望弗亦重乎 以是自省而亦勸云爾
檀紀四千二百七十六年 癸末(1943) 二月 日 八代孫 澈愚 謹識
각주 201) 상여재(桑與梓--) : <시경> 소아편, 뽕나무와 가래나무도 반드시 공경하는데, 우러러 볼 것이 아비 아님이 없으며 의지할 곳이 어미 아님이 아닌가? 터럭으로도 이어지지 않으며 마음속에도 걸리지 않는가? 하늘이 나를 나심이여, 내가 난 때가 어디에 있는고?(維桑與梓도 必恭敬止온 靡瞻匪父며 靡依匪母가 不屬于毛며 不離于裏아 天之生我여 我辰安在오) 202) 토구(菟裘) : 벼슬을 내놓고 은거하는 곳이나 노후에 여생을 보내는 곳. 중국 노나라 은공(隱公)이 토구 땅에서 은거한 데서 나온 말이다. 토구지지 (菟裘之地) 203) 당부(堂斧) :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나오는 말로 무덤을 뜻하는데, 사원의 탑이 원래 사리(舍利)를 보관하는 곳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204) 가곡(歌哭) : 노래와 통곡, 모진 운명을 한탄한다는 뜻의 표현이다.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자여(子輿)가 불우한 친구인 자상(子桑)을 위문하러 갔을 때, 자상이 노래를 부르는 듯 곡을 하는 듯[若歌若哭] 거문고를 타면서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였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205) 공숙공(恭肅公) : 교하노씨는 10세 책의 아들 대에서 4파로 갈리어 크게 번성하기 시작한다. 큰아들 제가 시중을 지내고 서원군에 봉해져서 서원군파로, 둘째 진이 공민왕조에 창성군파로, 셋째 균(鈞)이 경원군에 봉해져서 경원군파로, 넷째 영(渶)이 신양군에 봉해져서 신양군파로 갈린다. 그중 창성군파에서 인물이 많이 나와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공숙공(恭肅公) 한은 진의 손자이고 연산군 때 영의정을 엮임하여 무오사화 때 많은 사림을 구출한 문광공(文匡公) 사신(思愼)은 한의 손자이다. 206) 옹자(翁子) : 금의환향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한나라의 사마상여(司馬相如)나 주매신(朱買臣)을 꼽는다. 장경과 옹자(翁子)는 각각 사마상여와 주매신의 자인데, 이들의 고사는 다음과 같다. 사마상여가 중랑장(中郞將)이 되어 고향인 파촉(巴蜀) 땅에 사신으로 갔을 적에 촉군 태수(蜀郡太守) 이하가 모두 교영(郊迎)하였으며, 현령(縣令)은 ‘몸소 쇠뇌를 등에 지고 앞장서서 달림으로써〔負弩矢先驅〕’ 존경하는 뜻을 보였던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 한나라 주매신이 만년에 영달하여 회계 태수(會稽太守)로 부임할 때 누더기 차림에 인수(印綬)를 허리에 차고 군저(郡邸)에 가자 아전이 인수를 발견하고는 경악하여 상관에게 보고하였으며, 마침내 그를 영접하기 위해 백성들을 동원하여 길을 치우게 하였는데, 그중에는 주매신을 경멸하며 버렸던 옛날의 아내와 그 남편도 끼어 있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64上 朱買臣傳》 207) 희성지학(希聖之學) : 성인을 본받으려는 학문이었고 : 현인(賢人)의 학문을 말한다. 북송(北宋)의 주염계(周濂溪)가 말하기를, “성인은 하늘을 본받기를 바라고, 현인은 성인을 본받기를 바라고, 선비는 현인을 본받기를 바란다.[聖希天 賢希聖 士希賢]” 하였다. 《通書》 208) 임실군 오수면 봉천리(오암)리. 209) 처사지성(處士之星): 小微(소미)성. 호분성 위에 있는 사대부의 별, 첫째별은 處士, 둘째별은 議士, 셋째 별은 博士, 넷째 별은 大夫. 210) 탄관(彈冠) : 관의 먼지를 턴다는 뜻으로, 의기투합하는 친구의 손을 잡고 벼슬길에 나설 준비를 한다는 말이다. 서한 왕길(王吉)이 관직에 임명되자 친구 공우(貢禹)도 덩달아 갓의 먼지를 털고 벼슬길에 나설 준비를 했다는 ‘왕양재위 공공탄관(王陽在位 貢公彈冠)’이란 말이 《한서》 권72〈왕길전(王吉傳)〉에 나온다. 왕양은 왕자양(王子陽)의 준말로, 왕양의 자가 자양이다. 211) 기사사화(己巳士禍): 조선 시대, 1689(숙종 15)년에 왕이 후궁인 숙원 장씨(淑媛張氏)의 소생을 세자로 삼으려 하는 것에 반대한 서인(西人)들이 내침을 당하고 남인(南人)이 정권을 잡게 된 일. (=기사환국(己巳換局) 212) 추상동증(秋嘗冬烝) : 예기 14편 명당편에 나오는 용어. “이런 까닭으로 여름에는 약제를 지내고 가을에는 상제를 지내고 겨울에는 증제를 지내고, 봄에는 사제를 지내며 가을에는 마침내 크게 사제를 행한다(是故夏礿秋嘗冬烝 春社秋省而遂大蜡)” 213) 삼생(三牲)의 봉양 : ‘삼생지양(三牲之養)’은 소, 양, 돼지의 세 짐승으로 만든 음식을 말한다. 관리가 되어 부모를 좋은 음식으로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효경(孝經)》 〈기효행(紀孝行)〉에 “비록 날마다 삼생으로 봉양한다고 해도 오히려 효가 되지 않는다.〔雖日用三牲之養, 猶不爲孝也.〕”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