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두리 영사재(永思齋)
이 재실은 오수면 용두리에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집으로 현판이 1개, 주련이 5개 걸려있다.
서쪽을 바라보면 삼계(三溪)의 푸른 물결이 앞뒤로 합쳐져서 흐르다가 석문(石門)에서 어울러져 떨어지고 있다. 남쪽을 바라보면 노적(露積) 둥근 봉우리가 몸을 감추었다가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나더니 두허(斗墟)에서 사라진다. 북쪽은 가리키면 날아갈 듯 응치(鷹峙)가 날개를 펼치고 오수역[獒驛]을 멀리서 받들고 있으니 이곳에서 용두산수(龍頭山水)가 비롯되었으니 밝고 아름답구나. 거룩하구나.
동쪽에서 내려온 일맥(一脉)이 천황봉(天皇峰)에서 분가(分家)하여 옥경(玉京) 금문(金門)을 여러 차례 열었다가 닫았다가 죽 늘어서더니 율촌(栗村) 뒤에서 봉우리가 되었으니 바로 용두 주산이며 침묘원(枕卯原)에 있는 봉분(封墳)은 우리 증조 할아버지 농은공(農隱公)이 안장된 곳으로 여기에 선영을 잡은 지 100년이 되었다. 촌로(村老)와 나그네가 높이 바라다 보며 이 풍채(風彩)를 어제 본 듯 하니 어찌 그리 많은가?
농은공은 효령대군(孝寧大君)은 12세손이며 충경공(忠景公) 천묵재(天默齋)의 6세손으로 세상에 태어나셨다.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와 우애를 먼저 하고 나머지 시간에 농사짓고 독서하며 집안을 다스려 부를 이루었다. 장의(仗儀)를 잘 베풀고 부모를 봉양하고 남은 힘으로 가까이는 친척에서 멀리는 친구들까지 끼니를 잇도록 도와주고 혼인하도록 보태주어 내외에 많은 집안이 화목해져서 사람들이 칭송한 지 오래되었다.
아! 좌식(坐食)이 누적되었지만 과연 명명한 도움이 있어 증손(曾孫)이나 현손(玄孫)으로 남은 사람은 몇 되지 않아도 궐각(闕閣) 한 채가 있어 시사(時思)로써 살펴 게을리 하지 않겠구나. 하물며 의관(議官) 이한의(李漢儀)가 봉향(奉香)에 책임이 있어 매번 생각하니 의관(議官) 종숙(從叔) 이찬우(李燦宇)씨가 여러 조카를 돌아보며 한탄하여 말하기를, “내 나이 지금 팔순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와우산(臥牛山)에 재각이 있은 모습을 볼 수 없겠구나.”라고 하였다. 와우산은 우사중산(右思中山)에 있는 혈명(穴名)이다. 말씀이 미처 끝나지 않았는데 이한의가 공경하게 일어서서 말씀드리기를, “종질(從姪)의 생각도 이미 정해졌는데 미처 아뢰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무덤으로 가는 길[隧道]230)의 북면 병좌원에 터를231) 정하여, 봄에 시작하여 중추(秋仲)에 공사를 마쳤으니 ‘조상의 덕을 닦았다’라고 할 만하다.232) 재각은 4칸으로 가운데 대청(大廳)이 있고 동서에 방을 두도록 짓고 쌓았다. 서각(書閣)에 물건을 보관하고233) 담을 두르고 문을 내었다.
무덤의 예의(禮儀)를 점덤 갖추게 되었으니 선령(先靈)이 강림하여 임하실 만하다. 그동안 여러 종친들이 보습과 쟁기와 소쿠리와 단지를 지니고 스스로 와서 힘을 다하였으니 그 사람의 이름을 낱낱이 거론할 수 있겠는가?
낙성하는 날에 이르기를, “어른이나 아이 할 것없이 손님들이 모두 이곳에 모였다. 모든 사촌형제들이 옷을 갖춰 입고 효에 대해 말하여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영사(永思)’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하면서 억지로 내가 기문을 쓰게 되었다. 내가 자리를 피해 옷깃을 여미며 말하기를, “재주없는 내가 부끄러워 땀이 날 정도로 상량문을 짓고 편기(扁記)에 있어서 그 뜻을 생각하며 이름을 내려주면서 부득히 붓을 잡고 대답하기를, ‘인간의 온갖 일은 생각한 즉 이루어지고 생각하지 않은 즉 공허한 것이니, 눈을 보는 바를 생각하고 쫓게 되는 것이다. 병란(兵亂)과 형륙(刑戮)의 시대는 생각만 해도 두렵고 두려운데 띠집과 묘사(廟祠)를 보니 생각이 편안하고 공경스럽다.
지금 언덕에 올라 떨어진 가래나뭇잎을 끌어 모으고[攀] 무덤가에 썩은 풀을 치우니 그 생각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여러 종형제들은 재각에 오르면서 여기에서 이름을 돌아보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빈 터를 채우고 목이 메여서 대답할 수가 없었다. 매우 가슴이 아파서 붓을 대어 이곳에 머무를 것이다. 아! 이어갈 후손은 눈물로 쓴 글을 보아야 할 것이다.
무인년[戊寅] 가을 8월 상휴(上休) 증손 연의(淵儀) 손을 깨끗이 하고 삼가 지음 임오년[壬午] 겨울 10월 하완(下浣) 현손 기항(起恒) 삼가 씀 재각(齋閣) 건축 유사 증손 관의(寬儀) 삼가 준공하여 아룀
西望而三溪淸波先後合流 而幷落于石門 南瞻而露積圓峰藏身何自忽焉 呈畵於斗墟北 指而飛似鷹峙翼然遙拱乎 獒驛龍頭山水於斯焉 明麗矣 韙哉 東來一脉 遠自天皇分家 累開閉玉京金門 而鍾立一土星于栗村後而峰焉 乃龍頭主山 而枕卯而封三尺者 卽我曾王考農隱公衣履之藏也 卜兆于玆洽百年野老路人之高 景這風彩如昨日 睹者何其多也 公孝寧大君 十二世 忠景公 天默齋之六世孫也 篤生於世襲孝悌之餘 讀耕幷修 治家能富 伏儀善施 養親餘力 近自親戚 遠及故舊 待而擧火 資而婚娶者 內外多家宜乎 人之久頌也 嗟乎 坐食積累 果然冥佑 曰曾曰玄者 指難勝屈 而尙闕閣一棟 揆以時思 不已謾乎 况議官漢儀 責在奉香 每思則泚顙日議官 從叔燦宇氏 顧諸侄而 歎曰吾年今八旬矣 乘化在邇 其不見臥牛山之有齋矣 臥牛卽右思中山之穴名也 聽未了漢儀敬起而對曰 唯從侄之思 已有定筭而 未及告者也 於是胥宇乎 隧道之北面 丙之原 經始春殷 告功秋仲可曰 聿修也 齋凡四間 中而廳之 東西而房之 架而堆書閣以藏器 環粉墻而門焉 墓儀稍備而陟降之靈 庶得依臨矣 這間諸從之 釋耒耟携簞壺而 自來殫力者 枚可名乎 落之日 長幼賓客咸集 於是諸從採衣言孝未 敢而辭之不曰 永思强不肖記之 不肖避席袵歛曰 不佞六偉汗呈 而其於扁記 思之義以錫嘉 獲乃秉管 答之曰 人間百務思則立 不思則空 且目之所視 而思從之視 干戈刀鉅則思 鬪焉惧焉 視茅家廟祠則思 安焉敬焉 今來升邱而 攀落楸臨墓而 掃殘草其思 果何如哉 諸從之時登齋者 能顧名而思義乎 於是滿座泫然聲哃 而不成答 感愴之極筆落止此 噫 後之繼思者 宜視我和淚之墨
戊寅 秋八月上休 曾孫 淵儀 盥手 謹記 壬午 冬 十月 下浣 玄孫 起恒 謹書 齋閣建築 有司 曾孫 寬儀 謹竣工 頓首
각주 230) 원문의 수도(隧道)는 춘추 시대 정(鄭) 나라 장공(莊公)이 그의 어미 무강(武姜)을 성영(城潁)에 유폐시켰다가 영고숙(潁考叔)의 권유로 대수(大隧)에 들어가 상봉했던 고사와 관련이 있다. 231) 《시경》 대아(大雅) 면(綿)에, “고공단보가 아침 일찍 말을 달리어, 서쪽 물가를 따라 기산 아래 이르렀으니, 이에 강녀와 함께 와서 집터를 보았느니라.[古公亶父 來朝走馬 率西水滸 至于岐山 爰及姜女 聿來胥宇]” 한 데서 온 말인데, 이 시는 곧 태왕이 처음 빈(豳) 땅에 살다가 적인(狄人)이 자주 침범하자 그들을 피해 빈 땅을 버리고 다시 기산(岐山) 아래로 옮기기 위해 집터를 보던 일을 노래한 것이다. 232) 율수(聿修) : 조상의 덕을 닦는다는 말이다. 《시경》 〈문왕(文王)〉의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느냐, 그 덕을 닦을지어다. 길이 천명에 짝하는 것이,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는 길이니라.〔無念爾祖 聿修厥德 永言配命 自求多福〕”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233) 《주역(周易)》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군자가 앞으로 자기가 크게 쓸 물건을 몸에 간직했다가 때를 기다려서 움직인다면, 어찌 이롭지 않은 일이 있겠는가.〔君子藏器於身 待時而動 何不利之有〕”라는 말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