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천리 귀노재(歸魯齋)
오수면 주천리 마을 안뜸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귀노재(歸魯齋)는 곡성 현감을 지낸 곽득형(郭得亨)의 재실로 팔작 기와집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이 지역에 거주하는 현풍 곽씨 문중에서 1922년에 지었다. 귀노재 편액은 효산 이광열이 썼으며, 건물 안에는 3개의 현판과 6개의 주련이 있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삼계사(三溪祠)가 있다.
운수에 포산(苞山)씨가 있으니 지신사(知申事) 노재공(魯齋公)에서 비롯되었다. 그 선대는 경기(京畿)의 적성(積城)에 살았는데 공에게 이르러 노산(魯山)이 왕위를 손위(遜位)하는 날을 당해 벼슬을 버리고 남으로 노산 아래에 내려가 노재를 짓고 스스로 호를 삼았다.
그가 돌아가시자 여러 아들이 상구(喪具)를 모시고 경기로 돌아와 장례 지냈다. 막내 아들 곽득형(郭得亨)이 연산군의 재위 시절에 곡성현감을 지냈는데, 조정이 혼란해지자 바로 관복[印綬]을 벗고 노산 아래로 돌아와 다시는 나가지 아니하였다. 죽어서도 역시 노산에 안장되었다. 이 때문에 그 무덤 아래에 귀노재(歸魯齋)를 짓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그 후로 자손이 노산(魯山)에 조상을 받들며 살게 되었다. 문학과 행의(行義), 충훈(忠勳)과 풍절(風節)이 대대로 그 아름다움을 계승하여 빛나는 운수(雲水)의 덕망(德望)이 되었으니 얼마나 위대한가?
지금 그의 먼 후손 찬영(瓚永), 진규(震奎)가 나에게 재각의 처마에 걸어 둘 글을 부탁하였다. 무릇 서리와 이슬이 내리면 슬픈 마음으로 첨소(瞻掃)하면서 사모하는 정성을 펴고 향화(香火)를 정결하게 받들며 관천(灌薦)하여 혼백에 보답해야 하니 진실로 백세토록 효자(孝慈)하며 이곳에서 밝디 밝게 종사(從事)하여 변하지 말며 없어지지 않아야 할 것이다. 강명(講明)은 정녕히 기다리지 않아야 할 것이다.
가만히 부모님께 독실히 하고 먼 조상을 추모하는 것은 그 뜻을 계승하고 그 사업을 이어가는 것보다 급하지 아니하니, 살아계실 때에 삼생(三牲)으로 치양(致養)하며 두꺼운 이불로 잠자리를 모시는 것이 반드시 효라고 할 수 없고, 돌아가신 후에 천거(千車)로 장례를 지내고 만호(萬戶)로 무덤을 지키게 하는 것을 반드시 효라고 할 수 없다.
우리 포산씨가 동방(東方)에서 대대로 충효로 이름을 남긴 것은 지신공이 노산에서 우거하며 임금을 사모하였기237) 때문이다. 곡성공도 노산을 부모가 계신 곳으로 생각하고 다른 곳이 아닌 이곳으로 돌아왔던 것이니 충효일 따름이다.
이어서 송당(松堂), 오암(鰲巖)이 힘을 다해 근왕(勤王)하였으며 삼정자(三亭子)가 가정(家庭)에서 드러냈던 행실을 청계(淸溪)가 사모한 것이 어찌 귀로(歸魯)를 계술하지 아니한 것이겠는가? 다시 지금부터 그 기맥(氣脈)을 남기어 전형(典刑)을 맡게 된 자는 사람마다 오직 충효 두 글자로써 계술하는 것을 급무로 삼아 밤낮으로 매진하여 조상을 욕되게 하지 않아야 할 따름이다.
무릇 이와 같이 한다면 지신공과 곡산공에게 지극히 효를 다하는 것이다. 공의 혼령도 믿고 명명한 가운데 오르내리시면 기뻐하며 이르기를, ‘나에게 후손이 있어서 노산이 무궁토록 이지러지지 않겠구나. 포산씨의 명성이 중하게 될 것이다.’하리라. 아, 어찌 이에 더욱 힘쓰지 아니하겠는가. 내가 노산을 보위한다고 하기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이렇게 말하여 알린다.
계묘년(1903) 2월 하순 종후인 종석 삼가 글을 지음.
雲水之有苞山氏 自知申事 魯齋公 始也 其先家于圻之積城者 世至公而値魯陵遜位之日 棄官南遯于魯山之下而築魯齋 以自號其沒也 諸子奉喪還葬于圻 季子諱得亨 當喬桐主時出知谷城縣 色朝廷昏亂卽 解印綬歸老于魯山下 不復出沒則亦以魯山爲大歸之藏 此歸魯齋之作於其隴下也 自是厥後子孫 仍奠居于魯 丈學行義 忠勳風節 世趾其美 赫然爲雲水之望 何其偉哉 今其遠裔瓚永震奎徵余爲一言於齋之楣 夫霜露怵愴瞻掃以伸慕香火䖍潔灌薦以報魄 固百世孝慈之所 洞洞從事于是而勿替而不匱者 無待乎 講明而丁寧也 窃謂篤親追遠莫急於繼其志而述其事生 而三牲致養重秵供寢未必孝也 沒而千車送葬萬戶守塚未必孝也 我苞山氏之東也 世以忠孝詒謨是知申公之 以魯寓榛苓之思 而谷城公則遂以魯爲父母之邦睠焉 必歸而不于他者亦忠孝 而已矣 嗣是而松堂鰲巖之僇力王愾聽溪慕三亭子之著行家庭 何莫非繼述於歸魯者也 復自今而往凡爲其氣脉之遺而典刑之託者 人人亦惟以忠孝二字 爲繼述之急 而夙夜征邁以克底于無忝而已 夫如是其爲孝於二公也 至矣 公之靈亦將陟降 悅豫於冥冥而曰 余有後焉 魯山其不騫于無窮而苞山氏之聲與之輕重矣 放乎盖於是焉 加勗哉 余以衛於魯也 敢不辭而爲言此以諗之
삼가 노릉(魯陵)의 역사를 살펴보면, 옛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하고 절의를 지킨 신하들로, 사육신(死六臣)과 생육신(生六臣)을 상론(尙論)할 수 있으며, 같은 시대에 관직을 버리고 남쪽으로 은둔한 옥천신씨(玉川申氏)의 귀래정(歸來亭)과 운수곽씨(雲水郭氏)의 노재(魯齋)가 있다. 여러 현사(賢士)들이 얘기하는 노재(魯齋)가 바로 우리 선조 승지공(承旨公)이 노산(魯山) 아래에 돌아가 은둔하였던 것으로 스스로 그렇게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대개 공의 뜻을 노산(魯山)에서 볼 수 있고 노재(魯齋)에서 볼 수 있으니 노릉(魯陵)에 깊이 우거하며 우러러 보겠다는 뜻으로 ‘귀(歸)’자를 서술하는 데에 급급하지 않으셨으리라.
공의 막내아들 곡성공(谷城公)은 국정이 어지러웠던 광해군 시절[昏朝]에 과거를 멀리하리라 생각하고 태항산(太行山)의 저녁구름[暮雲]238)과 흐르는 물 같은 일념(一念)으로 북쪽으로 노산(魯山)을 바라 보았으니 무릇 노나라의 성인(聖人)이 봉해졌던 곳이다. 금보(禽父)239)가 친친(親親)의 가르침과 공자[宣尼]의240) 더디다는 한탄241)이 저절로 효에서 충으로 옮겨가서 일어난 감흥이니, 문득 말하기를, “친노(親老)께서 집에 계시니 대저 돌아가서 봉양해야 한다.”하고는 관복을 벗고242) 돌아가서 삼가 선조의 여막을 지키며 종신토록 뜻을 지키었다.243) 이때부터 자손들이 세거하게 되었으며 노산 아래 우뚝 솟은 무덤을 바라보며 그 유명(遺命)을 따르고 있다.
공은 살아서도 노산을 떠나지 않으셨고 죽어서도 노산을 떠나지 않으셨다고 할 수 있기에 묘재의 이름을 ‘귀노(歸魯)’라고 지었다. 혹자들은 이르기를, “‘노(魯)’는 선재(先齋)의 편액인데 외람되이‘귀(歸)’자를 붙여서 묘재(墓齋)로 습용(襲用)하는 것은 쓸데없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 뜻을 손상하지 않는 것이니 ‘아버지가 집을 지으려고 하였으니 그 아들이 집을 얽어야 한다’라고 하였으며244) ‘그 중도(中道)를 진실로 잡아야 한다.’245)라고 하였으니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전수한 것에 순임금이 두 마디를 보탠 것은 정녕(丁寧)의 뜻이었다.
재각은 옛날에는 띠집이어서 한 해 한 번 지붕을 이어야 했다. 비좁은데다가 물이 새기도 해서 마음에 차지 않았다. 모든 종친들이 의견을 내어 옛 틀을 증축하여 기와로 바꿔 오래 갈 수 있도록 하였다. 무덤 아래 좀 떨어진 곳을 정해 초석을 놓고 공사를 한 지 여러 해가 지났다. 돌이켜 보니 일은 크고 힘은 보잘 것 없어 서까래 하나 기와 한 장 자손의 정성에서 나오지 않는 게 없었다. 재물을 모으고 공사를 동독하는 데 우영(佑永), 병민(秉珉), 병희(秉禧)가 더욱더 있는 힘을 다하였다.
재각이 완성되고 삼가 장차 축사하며 여러 종인들에게 널리 알리기를, 구묘(邱墓)의 흥쇠와 묘사(廟社)의 주경(主敬)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땅을 뒤덮으니 누군들 이런 마음이 없겠는가? 종족들은 여기에 모여 봄가을로 향사하고 봄이슬 가을서리에 슬퍼할 것이며 향기가 올라가 신령(神靈)의 기(氣)가 사람을 엄습하면 같은 마음으로 감응할 것이다. 동우(棟宇)를 수호하는데 있어서 죽루(竹樓)는 본디 썩기 쉬우니 계속해서 지붕을 이어준다면 혹여 썩지 않을 것이리라. 하물며 이런 후손들이 있음에랴. 비바람이 몰아쳐도 달리 의심할 여지가 없겠다.
다만 우리 종족이 여기서 강명(講明)해야 하는 것은 ‘귀로(歸魯)’ 두 글자이니 우리 선조가 두 세대에 걸쳐 충효(忠孝)로 관철한 요령(要領)이니 우리 종족의 흥폐가 반드시 장차 이 두 글자에 걸려 있는 것이다. 이름을 돌아보고 그 뜻을 생각하여 어떻게든 계승할 따름이다. 일찍이 중엽 이래 문학(文學)과 절의(節義)가 울연하게 서로 바라보니 사림들이 현자를 존숭하고 원우(院宇)에서 향사를 받들고 조정에서 장렬(獎烈)하여 정려를 내렸으니 가히 훌륭하다고 하겠구나. 그 뜻을 이어갈 사람이 지금은 학덕이 높은 원로인데 대부분 조령(凋零)하여 문화가 이와 같이 점점 부박해지고 쇄미해져 부진(不振)해질까 두렵다.
머리를 세우고 남쪽으로 천자산(天子山)의 산색을 바라보니 주렴(珠簾) 가득히 더욱더 푸르구나. 바라건대 장차 『노춘추(魯春秋)』의 일부를 가져 두어 낭독(朗讀)하도록 힘써 격려할 것이다. 여러 어린 아이들이 등당(登堂)하여 향사(享祀)의 예의와 읍양(揖讓)과 진퇴(進退)에 대해 배우게 하여 지나가는 사람이 경전을 암송하는 소리를 듣게 되리라. ‘귀노재’라는 말은 후손들에 의해 항상 바꾸지 않게 될 것이니 어 계술하였다는 실상이 아니겠는가? 바라건대 여러 종족들은 이렇게 힘써야 할 것이다. 빛나는 선대의 훈업(勳業)과 청덕(淸德)에 우리 집안의 연세 많고 덕 있는 어른 곽종석(郭鍾錫)씨가 여러 사람의 공적인 안목으로 진필(眞筆)과 묘갈명(碣銘)을 살펴 사실을 서술하여 재기(齋記)를 지었으니 아부라고 할 수 없으리라. 여기에 거듭 쓰지 않는다.
갑자년 2월246)[大壯月] 상순에 후손 상표(尙杓)가 삼가 짓다.
謹按魯陵歷史 爲舊主盡忠守節之臣 尙論死六生六而同時 棄官南遯 有若玉川申歸來亭 雲水郭魯齋 諸賢魯齋卽 我先祖承旨公 歸隱於魯山之下 因以自號者也 盖公之志見魯於山見魯於齋 深寓魯陵瞻望之意 不汲汲於敍述歸字也 公之季子 谷城公 見昏朝政亂 有遐擧之想 北望魯山 太行暮雲 一念如水 夫魯聖人之所封也 禽父親親之敎 宣尼遲遲之歎 自然感發移忠於孝 輒曰親老在堂 盖往歸養 解紱逕歸 恪守先廬 矢志終年 自是子孫仍世居焉 瞻彼魯下有屹堂封式遵遺命 公可謂生不離魯 死不離魯 墓齋之命名 以歸魯者 此也 或曰 魯是先齋之扁而却添歸字 襲用墓齋 不其疊床哉 是無傷也 若考作室厥子肯構 允執厥中者 堯之授舜也 舜復益之以二言者 丁寧之意也 齋舊茅焉 歲一葺之 陜隘滲漏 猶慊於心 闔宗動議思欲增其舊制 瓦以壽之 就墓下數武許 稍妥定基 礎經紀有年 顧事巨力綿 一椽一瓦 無非出於子孫誠力中 而至於鳩財董役 佑永秉珉秉禧 尤爲致力焉 齋成謹將祝辭諗于諸宗曰 邱墓興衰 廟社主敬 頂天覆地 孰無此心 宗族會此 春秋享祀 霜露怵惕 焄蒿悽愴 亦應同情 至於棟宇之守護 竹樓固易杇者 嗣而葺之 庶或不杇 况此雲仍在之 上雨旁風 保無他慮 但吾宗之所 當講明於此者 歸魯二字 卽吾先祖兩世 忠孝貫撤要領也 吾宗興替 必將卜於此二字 顧名思義承襲如何耳 往嘗中葉 文學節義 蔚然相望 至有士林崇賢 院宇腏享 朝家獎烈 棹楔成命 此可謂善乎 繼述者也 今也耆舊宿德 擧皆凋零 文化日漸浣薄 若是以往 竊恐鎖尾不振矣 矯首南望天子山色 滿簾增翠 願將魯春秋一部臨軒朗讀 策勵羣小兒輩登堂 習俎豆之禮 揖讓進退 庶幾過者 聞絃誦之聲 歸語魯齋 後承尙爾不替也云爾 則豈非繼述之實歟 願諸宗以是勗哉 至若光世勳業淸德 吾宗長德鍾錫氏 公眼眞筆碣銘也 齋記也敘實 而必不至阿好 此不重述
閼逢困頓敦 大壯月 下澣 後孫 尙杓 謹識
3. 주천 귀노재3 /귀로재 추감(歸魯齋追感)
魯齋歸隱魯山247)東 노산의 동쪽 노재로 돌아와 은거하시어 晻世浮榮看似空 어둔 세상의 헛된 영화 부질없는 것으로 보시었네 一忠一孝家謨立 오로지 충과 효로서 가문을 세우고 亦死亦生臣義同 죽고 사는 것으로서 신의를 같이 했네 乙旨嶺雲邊迷裏 을지령의 구름가에 헤매이듯 얽혀 있고 子規按月人愁中 자규새는 달에 깃들고, 사람은 근심에 잠기네 應有英靈來極享 응당 영령들이 이 정자에 돌아와 깃들 望期禪盃仰高風 때가 되면 잔을 들어 올리며, 고풍을 우러르네
임술년 5월 14세손 찬규(瓚奎)가 삼가 쓰다.
각주 237) 원문의 진령(榛苓)은 개암나무와 감초(甘草)로 《시경》〈패풍(邶風) 간혜(簡兮)〉에 “산에는 개암나무가 있고 습지에는 감초가 있네. 누구를 그리워하는가. 서방의 미인이로다. 저 미인이여! 서방의 미인이로다.〔山有榛 隰有苓 云誰之思 西方美人 彼美人兮 西方之人兮〕” 하였는데, 주자(朱子)는 “서방의 미인은 서주(西周)의 훌륭한 왕을 가리켜 말한 것이니, 현자(賢者)가 나쁜 세상의 하국(下國)에서 태어나 주나라가 성할 때의 훌륭한 왕을 그리워하여 지은 것이다.” 하였다. 여기서는 임금을 생각하는 마음을 비유하였다. 238) 운산(雲山)의 그리움 : 부모를 그리워하는 자식의 마음을 뜻하는 말이다. 당(唐)나라 적인걸(狄仁傑)이 병주(幷州)의 법조참군(法曹參軍)으로 부임할 적에 태행산(太行山)에 올라 멀리 남쪽으로 흰 구름 하나가 떠가는 것을 보고는, 저 구름 아래에 부모님이 계실 것이라면서 한참 동안 바라보며 사념에 젖다가 구름이 보이지 않게 된 뒤에야 떠나갔다는 고사가 전한다. 《新唐書 卷115 狄仁傑傳》 239) 禽父(금보) : 주공의 아들로 자는 伯禽(백금). 아버지의 명으로, 봉토인 곡부로 가서, 諸侯(제후-영주)가 돠었으며, 봉토의 이름을 魯(노)라 지었음.】 240) 《맹자》〈진심 상(盡心上)〉에 “공자가 동산에 올라가서는 노나라를 작게 여겼고, 태산에 올라가서는 천하를 작게 여겼다.〔孔子登東山而小魯 登太山而小天下〕”라는 말이 나온다. 선니(宣尼)는 공자의 별칭으로, 한 평제(漢平帝) 원시(元始) 원년에 공자를 추시(追諡)하여 포성선니공(褒成宣尼公)이라고 하였다. 241) 도성을 떠나는 아쉬운 마음에 발걸음이 자꾸만 늦어져 집에서 담근 좋은 술을 마실 겨를도 없이 저잣거리의 술을 사 먹고 취한다는 말이다.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공자가 자신의 고국인 노(魯)나라를 떠나면서 “더디고 더디구나, 나의 발걸음이여.[遲遲 吾行也]”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242) ‘해불(解紱)’은 수령이 차는 도장의 끈을 풀었다는 뜻으로, 관직에서 벗어났다는 말이다. 243) 호시는 옛날에 남아(男兒)가 태어나면 장차 사방(四方)을 경영하는 데에 뜻을 두게 한다는 의미에서 뽕나무활〔桑弧〕과 쑥대화살〔蓬矢〕 여섯 개로 천지 사방을 향해 한 개씩 쏘았다는 데서 온 말로, 곧 남아의 장대한 포부를 의미한다. 《禮記 射義》 244) 선조의 유업(遺業)을 이어 다시 건물을 세운 것을 말한다. 《서경(書經)》 대고(大誥)의 “아버지가 집을 지으려고 모든 방법을 강구해 놓았는데 아들이 집터를 닦으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나아가 집을 얽어 만들 수가 있겠는가.[若考作室 旣底法 厥子乃不肯堂 矧肯構]”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245)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 나오는 바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은미하니, 오직 정밀하고 일관되게 하여 그 중도(中道)를 진실로 잡아야 한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는 16자(字)를 압축해서 말한 것이다. 주희(朱熹) 등 송유(宋儒)가 이것을 요(堯)ㆍ순(舜)ㆍ우(禹) 세 성인이 서로 도통(道統)을 주고받은 십륙자심전(十六字心傳)이라고 강조한 뒤로부터, 개인의 도덕 수양과 치국(治國)의 원리로 숭상되어 왔다 246) 원문의 大壯月은 2월의 異稱이다. 247) 노산 : 임실군 오수면 망전리 소재, 해발 539.7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