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천리 첨모재(瞻慕齋)
이 재실은 삼계면 뇌천리 해곡 마을 안 서쪽에 있다.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연안 김씨(延安 金氏)의 선조 해곡(海谷) 김승박(金承朴)의 재실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집으로 현판이 1개 걸려있다. ‘崇禎紀元後四辛亥(숭정기원후사신해)’ 즉 조선 철종 2년(1851)에 세웠다.
남원[龍城]땅 서북쪽으로 40리에 있는 드높은 노산(魯山)이 남쪽 기슭으로 굽이굽이 돌아 이어지더니 높았다가 낮았다가 위태롭게 뻗어 내려 해곡촌(海谷村)을 이루고 여러 봉우리가 조공(朝拱)하듯 늘어서 있다. 좌우에 큰 시내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마을 입구를 휘감아 흐르며 마을 뒤로 기다랗게 뻗은 기슭이 있다. 아! 우리 선조가 대대로 묻힌 곳이로구나.
우리 김씨는 동방에 조선이 개국한 이래 높은 벼슬을 지낸 오래된 가문이며 도학(道學)의 연원(淵源)이 깊은 집안이다. 우리 가문의 비조는 고려 명종대 사문박사(四門博士)를 지낸 김섬한(金暹漢)이다. 나복산인(蘿葍山人) 김도(金濤)를 거쳐 조선의 문정공(文靖公) 김자지(金自知)277)에 이르러 그 몸소 실천한 내용과 아름다운 행적이 사승(史乘)에 실려 있으니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조선 중엽 이후 충효와 문장의 유풍을 답습하였다. 참판공(參判公) 김벽(金璧)은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공을 세워 포전(褒典)의 은혜를 입었으며 동추공(同樞公) 김승박(金承朴)은 하늘이 낸 효자로 미물(微物)마저 감동시켰다.[感物之化] 또한 노계처사(蘆磎處士) 김시중(金是重)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학업으로 이름을 알렸다.
동추공 이하 5세의 분묘가 모두 이 곳에 있는데도 수백년 동안 재실(齋室) 한 칸 마련하지 못하여 한을 품은 지 오래 되었다. 지난 신해년에 불초자(不肖子)가 앞장 서자 장로(長老)들께서 무덤 아래 가까운 곳에 재실을 짓고 ‘첨모재(瞻慕齋)’라고 이름지었으니 그 뜻이 어찌 심원(深遠)하지 않겠는가?
아! 사람이 자기 조상에게 어찌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봄비와 가을서리를 밟으며 몹시 애달프고 두려운 마음으로 군자는 종신토록 효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뭇사람들은 더러 정성(精誠)을 게을리하며 때로 쉬지 않는 사람이 드문 법이니 이 재실에 오르는 사람은 먼저 ‘첨모(瞻慕)’라는 두 글자를 살펴 보고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높고 낮은 구릉은 우리 선조의 무덤[攸藏]이며 울창한 송백(松柏)은 우리 선조의 유택(遺澤)이라는 것을. 심신을 정결하고 의관을 갖추어야 우리 선조가 강림하시고 정결하고 좋은 제수[籩豆]를 마련해야 우리 선조가 흠향(欽饗)하시리라는 것을.
여기에 오는 여러 자손은 노인이든 어린이든 현명하든 어리석든지 잘 살피어 차츰차츰 교화되어 모두 조상에 대한 효사(孝思)와 법도[有則]를 알아 되어 선조의 영령(英靈)에게 어찌 제가 후손이라고, 어리석은 저도 우리 선조의 후예로 이것을 보고 유연(油然)한 마음이 생긴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그 이름을 지으며 약간 기술하였다.
재실 지은 지 1주갑 춘3월 보름[望日] 동추공(同樞公) 11대손 김량기(金亮基) 삼가 지음
龍城西北四十里 魯山峻極南麓 逶迤屈曲 或高或低 或危或急 來作海谷村 諸峯朝拱羅列左右大川 自東而西回 抱洞口村後長麓 惟我先世屢繼入葬於乎 我金之於東方 自勝朝以來 軒冕 古家 道學淵源 明宗時 四門博士 公諱暹漢 爲鼻祖 歷蘿葍山人 諱濤 至我朝 文靖公 諱自知之 實行徽蹟 載在史乘 不須疊記 降自中葉 忠孝文章亦襲舊 參判決公 諱璧 有功於壬亂 至蒙褒典 同樞公 諱承朴 天出孝行 至有感物之化 又有蘆磎處士 諱是重 以尤菴門人 學業有著 同樞公以下 五世墳墓 皆在此所 數百年來 未遑一間齋室 茹恨久矣 粤在辛亥不肖之先行 長老建設一齋于墓下近地 名之以瞻慕 其義豈不深且遠也 嗟乎 人之於祖何嘗無瞻慕之心 春雨秋霜履之而有悽悵怵湯者 君子之終 身孝思也 至於衆人誠或未專有時而不息者 盖鮮矣 然則登是齋者 先省瞻慕二字 必有思乎邱陵高低思吾祖之攸藏也 松柏蒼爵思吾祖之遺澤也 齋明盛服思吾祖之來格也 籩豆靜嘉思吾祖之欽饗也 來此諸孫自老而至少幼自賢而至不肖 觀省漸化 皆知孝思有則在在 先靈豈不曰余有後乎哉 不肖亦以吾祖之一裔 見此而有油然之思於是乎 排其名而少述焉
齋建一周甲 春3月 望日 同樞公 十一代孫 亮基 謹識
각주 277) 1367(공민왕 16)∼1435(세종 17).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원명(元明), 호는 일계(逸溪). 밀직제학(密直提學) 도(濤)의 아들이다. 고려 우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1404년(태종 4) 집의가 되고, 1408년 형조참의가 되었다. 그 뒤 1418년 호조참판, 이듬해에 형조참판이 되고, 다시 예조참판을 거쳐 대사헌·원주목사가 되고, 1423년(세종 5)에는 평안도관찰사, 1428년에는 형조판서가 되었다. 이 때 마침 동지총제(同知摠制) 성개(成槩)의 노비에 대한 오결사건(誤決事件)이 일어나고 이를 계기로 형조의 기구확대를 둘러싸고 논란이 거듭되는 가운데 파직당하였다. 만년에는 개성부유후(開城府留後)가 되었다가 1434년 68세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학문이 뛰어나 음양(陰陽)·복서(卜筮)·천문·지리·의약·음률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였다. 배불론자(排佛論者)의 한 사람으로 자신의 상(喪)을 『주자가례』에서 따르도록 여러 아들에게 유언할 정도였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