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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임실의 재실
◈ 덕계리 동산사(東山祠)
동산사는 삼계면 덕계리 중촌마을 입구에 위치해 있다. 동산초당은 선성(先聖)의 도를 보위하여 붉은 해가 아침 창에 떠올라 천지의 변화를 정관(靜觀)하고 밝은 달이 중천에서 천지의 덕심(悳心)을 완연히 보고 있으니 물욕[物累]으로 어두워진 마음을 녹여 우리의 중화(中和)의 덕을 길러야 할 것이다. 라는 뜻을 가지고 세워진 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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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계리 동산사(東山祠)
 
동산사는 삼계면 덕계리 중촌마을 입구에 위치해 있다. 동산초당은 선성(先聖)의 도를 보위하여 붉은 해가 아침 창에 떠올라 천지의 변화를 정관(靜觀)하고 밝은 달이 중천에서 천지의 덕심(悳心)을 완연히 보고 있으니 물욕[物累]으로 어두워진 마음을 녹여 우리의 중화(中和)의 덕을 길러야 할 것이다. 라는 뜻을 가지고 세워진 사당이다.
 
 
 
 

1. 덕계 동산사 동산초당기(東山草堂記)

 
천지문명(天地文明)의 기운이 동쪽에 모여 꽃피우고 해와 달이 뜨고 큰 바다가 있기에 산정수사(山亭水榭)도 아침 햇빛을 곧장 받는 동쪽에 문명을 이룬 곳이 많은 것이리라. 사람이 그 사이에 이런 마음을 일깨워 밝은 해가 뜨듯이 양명(陽明)이 날로 더하고 음탁(陰濁)이 날로 사라져 자연 그대로 정상(情狀)이 맑디 맑게 청허(淸虛)한 곳에서 저절로 드러날 것이니 이것이 어찌 어진 군자가 아니라면 알뜰히 거처할 수 있겠는가?
 
내가 잘 아는 이종봉(李鍾鳳; 雅號 拙軒)은 선대인(先大人)의 뜻을 이어받아, 호남의 남쪽 노산의 동쪽에 집을 짓고 학업을 익히는 곳으로 삼아 ‘동산초당(東山草堂)’이라고 이름을 짓고[牓] 나에게 그 일에 대해 써달라고 부탁하였기에 내가 글을 짓었다.
 
공자(孔子)께서 동산(東山)에 올라 노나라를 작다고 하셨으니 무릇 노나라는 천승(千乘)의 국가로 작다고 할 수 없는 국가인데 공자께서 작다고 하신 것은 처소의 높이를 말한 것이 아니라 도의 근본이 크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대저 주공(周公)의 후손으로 부모의 나라에 대해 안타깝게 여기며 탄식한 게 아니겠는가? 지금 우리들의 초당이 노나라에 들어맞으리라. 그런데 또한 동산에 대해서 안자(顔子)가 문득 공자에게 감모(感慕)하였으니 시대를 아파하며 그러하였는가.
 
아! 서럽고 애달프지만 우리 동방에 은나라의 기자(箕子)가 온 이래 수 천년 의관(衣冠)과 문물(文物)이 한 번에 변하여 도에 이르러 천하에 소중화(小中華)라고 성대하게 칭하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별안간 인간 세상에 간악한 가르침과 괴이한 재주, 간사한 소인배들이 들끓어 온 세상의 형세가 어둡고 아스라하여 당당하던 우리나라도 점점 깊은 겨울밤에 빠져 버렸으니278) 동방에서 피어오른 천지문명의 기운(氣運)마저 때로는 끝나는 것인가?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해와 달은 언제나 떠오르고 저 넓은 바다가 바뀌지 않고 있으니 저들이 때로 가리어져 어두워지나 그것은 밖에서 형혹(熒惑)이 어지러운 것일 뿐이다. 어지러운 사회에서 군자마저 위에서 다 사라져 버려도279) 밝은 세상이 아래에서 다시 돌아올 것이므로280) 우리들의 기운이 안정해지면 천지의 기운도 안정되라는 것은 필연적 이치이다.
 
이러한 때에 이곳 동산초당은 선성(先聖)의 도를 보위하여 붉은 해가 아침 창에 떠올라 천지의 변화를 정관(靜觀)하고 밝은 달이 중천에서 천지의 덕심(悳心)을 완연히 보고 있으니 물욕[物累]으로 어두워진 마음을 녹여 우리의 중화(中和)의 덕을 길러야 할 것이다. 세간에 염량(炎凉)에 대해 모두 동자(童子)의 궤이한 질문에 부치만,281) 『대역(大易)』에서 음기를 억누르고 양기 붙드는 의리를 연구하고 『춘추(春秋)』에서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가르침을 강구하여 비록 깊은 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부식하여 마지 않으면 새벽 빛이 만회(挽回)하여 짙은 그림자가 모조리 거두워져서 온 세상이 밝아질 것이며, 이곳 동산초당은 온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탬이 되니 어찌 소소하다고 하겠는가? 만약 그대가 나의 말을 우활하다고 여긴다면 동방이 도리어 서방(西方)만 못하다고 할 만하다. 힘쓰라! 우리들은 노산(魯山)의 동쪽에서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며 즐거워하리니.
 
때는 신축년 섣달에 옥남산인(沃南山人) 송병순(宋秉珣)
 
 
 

1.1. 東山草堂記

 
天地文明之氣 會萃於東 而日月出焉 忝海居焉 故山亭水榭之直受 朝陽而居於東者 往往多文明之區 人於其間提掇 此心皦如出日 則陽明日 勝陰濁日 消本然情狀 自露於湛然淸虛之地 此豈非仁人君子所愛而居之者乎 李大雅鍾鳳甫述其先大人之志 肯堂于湖之南魯之東 以爲肄業之所牓之曰 東山草堂 屬余記實 余作而應曰 夫子登東山而小魯夫魯千乘之國 國不爲小而夫子小之云者 非直以所處高道本大而然也 盖亦以周公之後 父母之國 歎惜之歟 今吾子之堂適符於魯而又以東山顔之抑 或有感慕乎 夫子而傷時之亦 然耶 嗚呼噫嘻 吾東自殷師以來幾千載衣冠文物一`變至道 以小中華蔚然見禰於天下今忽滛敎怪技狐媚蜮射於人世四海之勢 皆入於晻靄迷茫而堂堂 我國亦沈沈然有長夜之漸 抑天地文明之氣 華於東者 亦有時而 盡歟雖然日月依舊而 出焉 泰海不改其居焉 則彼有時而晦冥乃其自外之熒 惑虹曀者 耳剝之上九旣盡於上則復之一陽旋生于 下吾之氣 定則天地之氣 亦定焉 此必然之理也 于斯時也 一區東山閑先聖之道 紅日朝牖靜觀天地之變化 明月中宵宛見天地之眞心 以銷物累之蔽而 養吾中和之德 世間炎凉都付於童子之詭問而 究抑陰扶陽之義於大易講奠華攘夷之旨於春秋 雖長夜黑窣窣之中 扶植不已挽回曙光以至陰 翳盡捲九有昭明 則一區東山其有補於天下人世也 豈曰 小小哉 若子以余言爲迂則 是所謂東者 反不如西也 勗哉 吾將從魯之東 以觀朝日之方 昇樂爲之記
 
音重光赤 舊若二之日 沃南山人 宋秉珣 記
 
 
 

2. 덕계 동산사 동산초당(東山草堂) 기와를 올리는 서(序)

 
바야흐로 졸헌공(拙軒公)이 여기에서 강수(講修)하였으니 초당은 빛나고 윤이 나고, 인문은 아름답고 무성하구나. 못가에 핀 연꽃과 울타리의 국화는 격자 책상에 놓인 경서(經書)와 함께 빛나고, 휘장을 펼친 설도(雪棹)282)로 이웃에 사는 친구의 아름다운 연못에서 맞이하였다. 공께서 돌아가신 지 몇 십년 만에 세상이 크게 변하여 선비들이 옛날과 다르게 되었다. 뜰에 봄풀이 가득하여 옛날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상록(相祿) 등이 퇴락하여 사라지는 것을 걱정하여 수리하고 기와로 바꾸었다. 화려하게 꾸미려는 것은 아니고 그 옛 모습을 마음에 담고 오래 보존하기 위해서이다.
 
아아! 기와로 바꾸는 것은 초당의 본래 뜻에 맞지 않아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다. 우려하는 마음에서 어쩔 수 없이 수리하였으니 뜻을 이어갈 후손은 이런 의미를 헤아려야 할 것이다. 초당의 오래 변하지 않는 것은 기와에 있지 않고 유구한 도에 있기 때문이다.
 
병술년 9월 종손 상록(相祿)이 삼가 씀.
 
 

2.1. 東山草堂 盖瓦 小序

 
方拙軒公之講修于斯也 草堂輝潤 人文美茂 潭蓮籬菊 俱暎於格 案之經卷 布幰雪棹 相迎于朋隣之麗澤 公歿後幾十年 世級一變 士所趍異古 滿庭春草 無復舊時顔面則 相祿等懼夫頹蕪而泯沒焉 乃繕理而瓦易之非敢侈也 卽感其舊而謀於久也 嗚呼瓦之易也 非草堂之本意而悶悶焉 出於憂慮之所 非得已也 後之善繼者 能審是意以究乎 草堂之悠久 不在乎瓦 而別有所悠久之道也 丙戌 九月 從孫 相祿 根識
 
 

 
각주
278) 비방과 중상을 당할 때 쓰는 말이다. 역사(蜮射) 혹은 사역(射蜮)이라고도 한다. 물속의 역(蜮)이라는 괴물이 사람의 그림자를 보고 모래를 입으로 뿜으면 그 사람이 병에 걸려 심하면 죽기까지 한다는 고대의 전설에서 유래한 것이다. 역은 단호(短狐)라고도 한다. 『搜神記 卷12』
279) 『주역(周易)』 박괘(剝卦)의 정전(程傳)에, “박괘는 모든 양이 다 떨어져 없어지고 유독 상구 일효만 남아 있어 마치 큰 과일 하나만 먹히지 않아서 장차 다시 생겨날 도리가 있는 것과 같으니, 상구 일효 또한 변하면 순음으로 되어 버리긴 하지만, 양이 완전히 다 없어질 리는 없으므로, 위에서 변하면 아래서 생겨 잠시도 멈출 틈이 없는 것이다.[剝之爲卦 諸陽消剝已盡 獨有上九一爻尙存 如碩大之果不見食 將有復生之理 上九亦變則純陰矣 然陽無可盡之理 變於上則生於下 無間可容息也]”
280) 원믄의 地山謙은 땅 속에 산이 있는 것이 兼이니, 君子가 이것을 본받아서 많은 것을 덜어내고, 적은 것을 보태주니, 물건을 저울질하여 공평하게 베푼다. 높은 산이 대지의 아래에 있는 형국. 군자는 이 괘상을 거울삼아 많은 것은 덜고 모자란 것은 보태서 사물의 균형을 맞추고 공평하게 한다. 겸손하면 형통한다. 하늘의 도리는 높은데서 아래로 내려와 땅위의 만물을 생동케 하고, 땅의 도리는 스스로 낮은 도리를 지킴으로서 하늘을 돕는 것이다. 자신의 도리를 지키고 중용의 도를 행한다면 이롭지 않을 것이 없는 괘상이다. 地山謙은 겸손함으로서 발전하는 형국이다.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임으로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괘상이다.
281) 孔子가 동쪽 지방을 지나다가 두 아이에게 희롱을 당했던 사실에 대해 공자를 변호한 글이다. 두 아이가 다투고 있는 것을 보고 공자가 그 이유를 묻자, 한 아이가 해가 솟아날 때가 해가 중천에 떠있을 때보다 크기가 커 보이니, 가까이 있는 것이 더욱 커 보인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해가 솟아날 때가 거리가 더 가깝다고 주장하였다. 다른 아이는 해가 솟아날 때보다 해가 중천에 떠있을 때가 더욱 뜨거우니, 가까이 있는 것이 더 뜨겁다는 사실로 보아, 중천에 떠 있을 때가 더욱 가깝다고 주장하였다. 공자가 이에 답하지 못하자, 두 아이가 누가 공자더러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라 하였느냐고 비웃었다. 이현운은 이 사실에 대해서 상수학적 논의의 전개를 통해 공자를 변호하였다. 그의 생각으로, 천지의 변화는 陰陽이 때에 따라 승강을 반복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었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 더욱 덥고 해가 솟아오르거나 질 때 더욱 찬 것은 모두 陰陽의 승강 때문이지, 그 거리에 멀고 가까움의 차이가 있어 그러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그는 하늘과 땅의 거리를 제시하기도 하였는데, 하늘의 동쪽으로부터 땅까지의 거리는 사만팔천리, 하늘의 중앙에서부터 땅까지의 거리 또한 사만팔천리이므로 동쪽이고 중앙이고 상관없이 하늘과 땅 사이의 거리는 일정하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두 아이의 질문은 애초에 어느 한 쪽을 고르는 것이 잘못된 대답이 되는 것이므로, 대답하지 않은 공자가 옳다고 변호하였다
282) 설도(雪棹) : 진(晉)나라 때 왕휘지(王徽之)가 타고 갔던 배이다. 왕휘지가 산음(山陰)에 살았는데, 한밤중에 눈이 내리다가 개자 친구인 대규(戴逵)가 갑자기 생각났다. 이에 즉시 밤을 새워 배를 타고 가 대규가 사는 집 문 앞까지 갔는데, 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되돌아왔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나는 흥이 나서 갔다가 흥이 다해 돌아온 것이다.” 하였다. 『世說新語 任誕』
【향토】 임실의 재실
• 뇌천리 첨모재(瞻慕齋)
• 덕계리 동산사(東山祠)
• 덕계리 노양재(魯陽齋)
(2024.01.02.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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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