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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임실의 재실
◈ 덕계리 추원재(追遠齋)
이 재실은 임실군 삼계면 덕계리 화촌마을 서쪽에 위치해있다. 이 지역 경주 정씨(慶州 鄭氏) 정희교(鄭希僑)의 재실이다. 정희교의 자는 정대(貞大)로 기묘사화 때 낙향하여 평생을 자연과 함께 조용히 지내니 세상 사람들이 ‘기묘완인(己卯完人)’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재실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 기와집으로 현판 1개, 주련이 4개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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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계리 추원재(追遠齋)
 
이 재실은 임실군 삼계면 덕계리 화촌마을 서쪽에 위치해있다. 이 지역 경주 정씨(慶州 鄭氏) 정희교(鄭希僑)의 재실이다. 정희교의 자는 정대(貞大)로 기묘사화 때 낙향하여 평생을 자연과 함께 조용히 지내니 세상 사람들이 ‘기묘완인(己卯完人)’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재실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 기와집으로 현판 1개, 주련이 4개 걸려있다.
 
 
 
 

1. 덕계 화촌 추원재기(追遠齋記)

 
충순위(忠順衛) 정공의 묘소는 남원부 북쪽 오지방(梧枝坊) 화촌리(花村里) 신좌원에 있다. 부인 해주오씨를 부좌하였다. 옛날에는 묘의 재실이 없어서 지난 신사년 후손들이 협의하여 재실을 짓고 추원(追遠)이라고 편액하였다. 이제 서평(西坪) 김기상(金基尙)의 묘갈명을 나에게 보여 주며 기문(記文)을 부탁하였는데 내가 이렇게 쓴 것은 늙었다고 사양할 수 없어서 삼가 살펴보고 적어 보았다.
 
공의 이름은 정희교(鄭希僑)이고 자는 정대(貞大)로 본관은 경주이다. 성종 갑인년(1494)에 태어나 선조 정해년(1587)에 죽었으니 향년 94세였다. 대저 공께서는 타고난 성품이 영민하고 지혜롭고 여러 학문에 박학하였으며 세상을 구할 재주가 있으며 관직은 충순위에 이르렀으니 장차 크게 쓰일 분이셨다. 그런데 중종 기묘년(1519)에 권간(權姦)들의 사화를 일으켜 여러 선비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귀양을 갔다. 공은 기미를 살펴 낙향하여286) 과감하게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와서 노은(魯隱)이라 이름짓고 세속과 떨어져서 책을 덮어두고 자연과 함께 조용히 지내며 고기를 낚으며 스스로 즐겨워하시니 세상 사람들이 ‘기묘완인(己卯完人)’이라고 불렀다.
 
오호라! 간사한 사람들이 행세할 때 군자를 질시하고 미워하며 반드시 배척하여 죽이려고 하니 어찌 군자가 되어 침을 흘리며 흉인들과 함께 공을 세우고자 기꺼이 어깨를 나란히 하며 임금을 섬기겠는가? 이 분께서 세상에 전한 충효와 정하신 평소 뜻은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은 것이니 성대하지 아니한가?
 
아! 우리 조선은 여러 번의 사화(士禍)가 있었는데 우리 하천(霞川) 선조도 기묘명현(己卯名賢) 중에 하나이셨으므로 지금 공의 일에 있어서 더욱이 감개함을 이기지 못하여 대략 기술한다. 바라는 것은 정씨(鄭氏) 여러 군자들이 당우(堂宇)를 깨끗이 하고 때때로 재숙(齋宿)하며 좋은 음식으로 제향을 올려 효사(孝思)의 정성으로 추원(追遠)하면 백성의 덕성이 돈후하게 되어287) 세상의 도리가 후에라도 좋아질 것이다. 이에 ‘충순의 후손[雲仍]288)’이라 할 만하여 문호(門戶)가 더욱 창대해 질 것이니 또한 옳지 않겠는가? 일을 맡아 처리한 현명하여 수고하였으니 영화가 같으리라.289)
 
병신년[丙申] 중추(仲秋) 가배절(嘉俳節)에
장택(長澤) 고한주(高漢柱) 삼가 씀.
 
 
 

1.1. 追遠齋記

290)
 
忠順衛鄭公之藏在南原府北梧枝坊 花村里 辛坐原 夫人海州吳氏 祔焉 舊無墓齋而往辛巳 後孫協議建齋扁以追遠 今以西坪金基尙碣銘示余謁記之 余惟此信筆也 不能以耄昏辭因謹按爲之 敍曰 公諱希僑 字貞大 慶州世家 生于成宗甲寅 卒于宣廟丁亥 享年 九十四 盖公天資英邁 學問博洽 有經濟才官 忠順衛 希將大用 而當中宗乙卯 權姦釀禍 諸賢誅竄 公介石見幾勇退還鄕 號魯隱 掩郤卷書優游山水漁釣 自娛世稱 己卯完人 嗚呼 憸人用事 嫉惡君子 必欲擠之死 豈有君子而垂涎功名與凶人輩甘心 比肩以事君乎 此公之世傳 忠孝素志 有定而 不負所學此也 不亦盛矣哉 噫我國朝累度士禍 吾霞川先祖亦己卯名賢之一也 今於公之事 尤不勝慨然略記之 以此願鄭氏諸君子肅淸堂宇 以時齋宿 禋享苾芬 孝思追遠 使民德歸厚 世道後昇則 是可曰 忠順雲仍而 門戶益昌實 不亦韙歟幹事賢勞榮均 時 丙申仲秋 嘉俳節
 
長澤 高漢柱 謹記
 
 

 
각주
286) 원문의 개석(介石)은 자신의 신념과 어긋날 때에는 지조를 돌처럼 굳게 지키면서 단호하게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는 것을 말한다. 『주역(周易)』 〈계사전 하(繫辭傳下)〉의 “군자는 기미를 보고 떠나면서 하루가 다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예괘(豫卦) 육이(六二)〉에 ‘돌처럼 견고해서 하루가 다하기를 기다리지 않으니, 정하고 길하다.’라고 하였다. 절조가 돌과 같으니 어찌 하루가 다하기를 기다리겠는가. 이를 통해서 군자가 결단하는 것을 알 수 있다.〔君子見幾而作 不俟終日 易曰 介于石 不終日 貞吉 介如石焉 寧用終日 斷可知矣〕”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287)신종추원(愼終追遠) : 부모의 상을 당했을 때와 선조의 제사를 지낼 때 애통함과 경건함을 극진히 하며 예법에 맞게 행하는 것을 말한다. 종(終)은 부모의 죽음을 뜻하고, 원(遠)은 선조를 뜻하는데, 『논어』 학이(學而)에 “어버이 상을 당했을 때 신중하게 행하고 먼 조상님들을 정성껏 제사 지내면 백성들의 덕성이 한결 돈후하게 될 것이다.〔愼終追遠 民德歸厚矣〕”라는 말이 나온다. 논어 학이(學而) 9장, “愼終追遠 民德歸厚” ‘삶의 마지막(초상)을 신중하게 처리하고 멀리까지 추모하면 백성의 덕이 후하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다.
288) 운잉(雲仍)은 팔대손인 운손(雲孫)과 칠대손인 잉손(仍孫)을 아울러 이르는 말
289) 현초(賢招) : 홀로 수고가 많았다고 임금이 불러서 위로해 주는 것을 말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북산(北山)에, 다른 관원들도 많은데 불공평하게 자기만 잘나서 혼자 고생한다[獨賢勞]고 한탄하는 대목이 나온다.
290) 삼계면 오지리 박우터 마을 안 북쪽에 위치. 이 지역의 경주정씨 선조 충순위 노은(魯隱) 정희교(鄭希僑)의 재실.
【향토】 임실의 재실
• 덕계리 노양재(魯陽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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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2.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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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