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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임실의 재실
◈ 삼계리 녹천재(鹿泉齋)
록천재(鹿泉齋)는 삼계면 소재지에서 삼계중학교 방향으로 올라오다가 정문을 지나 1.5km쯤 농로를 따라 들어가면 삭녕 최씨 선산이 있고 그곳에 재실이 있다. 이 재실은 삭녕 최씨(朔寧崔氏) 중시조 태허정 최항(崔恒)의 증손인 준원(濬源)의 재실이다. 정면 6칸에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집으로 견고하게 지어져 안정감이 있고, 솟을대문 동쪽과 서쪽에 작은 문이 있어 3문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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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계리 녹천재(鹿泉齋)
 
록천재(鹿泉齋)는 삼계면 소재지에서 삼계중학교 방향으로 올라오다가 정문을 지나 1.5km쯤 농로를 따라 들어가면 삭녕 최씨 선산이 있고 그곳에 재실이 있다. 이 재실은 삭녕 최씨(朔寧崔氏) 중시조 태허정 최항(崔恒)의 증손인 준원(濬源)의 재실이다. 정면 6칸에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집으로 견고하게 지어져 안정감이 있고, 솟을대문 동쪽과 서쪽에 작은 문이 있어 3문으로 되어 있다. 솟을대문 옆에는 꽃담이 양쪽으로 길게 쌓아져 있어 미술적, 문화재적 가치가 높아 전문인들의 발길이 자자한 곳이다. 록천재(鹿泉齋) 편액을 쓴 이는 미상이며, 재실 안에는 현판이 1개 있는데 록천재 중수기는 남원의 명필 최병하(崔秉夏)의 글씨이다. 재실 서편에는 재실의 주인공인 준원의 묘가 있는데 전면에는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 겸 경연참찬관 성균생원 최공준원지묘(經筵參贊官成均生員 崔公濬源之墓) 증숙부인상주박씨지묘(贈淑夫人尙州朴氏之墓) 라고 적혀 있는데 비석의 비신과 이수는 같은 돌로서 붙어있는 것이 특징으로 희귀성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후면의 비문은 기록이 되지 않았다.
 
 
 
 

1. 삼계 녹천재 중건기(鹿泉齋 重建記)

 
대개 묘소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묘 아래에 재실이 있으니 이른바 ‘재숙(齊宿)’하는 곳이다. 재(齋)를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다섯 가지를 생각해야325) 재소(齋所)가 되는 것을 볼 수 있다.326) 선조는 그 자손과 한 몸이니 한 세대 또 한 세대를 거쳐서 먼 선조에 이르게 되니 멀어도 더불어 잊지 않아도 기한이 되면 잊어야 하므로327) 이 때문에 증자(曾子)께서 ‘추원(追遠)’으로 백성의 후덕(厚德)을 경계하였고, 주자(朱子)는 ‘이치가 밝지 않음이 없고 정성이 감동하지 않음이 없으니 체(褅)제사에 대해 석지(釋知)한다고 하셨던 것이다.328) 대개 이런 이치가 있어야 이런 정성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에는 재숙(齋宿)이 없을 수 없으며, 재숙에 재실(齋室)이 없을 수 없으며 재실은 잊지 못하는 단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밝구나. 이 무덤길 바로 우리 선조 승지공(承旨公)의 분묘가 있는 산이다. 나에게는[炳夏] 13세조가 되는 먼 선조이시다. 재실도 오래되어 그 사이 지붕을 많이 수리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본래 습기가 올라오는 터라서 무너질까 항상 걱정이었다. 옮겨서 새로 지으려고 했으나 어쩌다 높고 양지바른 곳을 얻지 못하여 어떻게든 옛터에 그대로 넓혀 쌓아서 견실한 곳을 만들어 오래오래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사람들의 공로이겠지만 노반(魯般)과 공수(工倕)의 먹줄도329) 뜻을 풀어보면 하늘과 땅 사이에서 조물주의 일을 대신한 것이리라.330)
 
재실은 무릇 도리 다섯에 기둥 일곱으로 지은 6칸 집으로 앞에는 정문(正門)이 있고 오른쪽에 협문(夾門)을 냈으며 기와를 올린 담장으로 둘렀다. 옛 것에 비하여 더욱 새로워졌다. 족질(族侄) 기우(基宇)와 서로 감역하면서 노력을 다 하였다.
 
오호라, 우리 집안은 통례공(通禮公)이 한양에서 남쪽 지방 대방(帶方, 남원)으로 처음 옮겨 내려 왔다. 공은 정당문학[政堂] 문정공(文靖公)의 손자으로 승지공(承旨公)의 아버지이다. 전후에 대대로 서로 계승하여 남쪽지방에서 칭송되었다. 그러나 곤곤하게 이어진 벼슬살이를 영화로 여기지 않고331) 오로지 문행(文行)을 귀하게 여겼으니 문행은 우리 집안의 가업[箕裘]이라 할 만하니332) 일사(逸仕)와 청선(淸選)를 어찌하여 시작으로 삼았겠는가?333) 근래에 쇠퇴하여 다만 망국334)과 세상의 변화를 애달프게 여긴다.
 
오직 이 언덕의 나무에서 어찌 진사도(甄師道)가 지은 사정기(思亭記)의 감흥을 느낄 수 없겠는가?335)산에 올라 묘에 재배하고 산에서 내려가 재실에 들어가니 진실로 가업을 계승한 뜻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문행(文行)을 실추하지 않는다면 우리 집안이 어찌 끝내 잘못되겠는가? 마침내 다시 머지않아 회복될 것이니 이것이 천리(天理)가 순환하여 인도(人道)가 뒤섞이는 것이다.336) 내가 아무리 칠십이 넘었어도 기대하는 소망이 없을 수 없으니 여러 종인들이 함께 더욱 힘써 재실을 새롭게 하는 것으로 우리의 일을 다 마쳤다고 하지 말고 후손들을 편안하게 할 계책을 생각하여337) 제사를 올리되 경성(敬誠)으로 하고 집안을 다스리되 친목(親睦)으로 한다면 이것이 후손들을 위한 불후의 길이 될 것이니 백세(百世)를 기다린다고 한들 어찌 아득하다고 하겠는가? 사람들은 이 언덕을 일러 자산(玆山)이라 하고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마시는 형국이라고 하였으니 산 아래 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녹천재(鹿泉齋)’라고 편액 했던 것이다.
 
신유년(辛酉) 10月 어느 날에
후손 전(前) 감역(監役) 최병하(崔炳夏)가 삼가 글을 짓다.
 
 
 

1.1. 鹿泉齋 重建記

 
盖自祭墓 墓下有室 所以齋宿也 齋之如何 以有五思 而如見其所爲齋者 祖先之於子孫一身也 及其一世又一世 以至于遠 則遠不與忘 期而忘至是故曾子 以追遠誡民德之厚 朱子以理 無不明 誠無不格 釋知禘之說 盖有是理 故有是誠也 然則 祭不可以不齋 齋不可以無室 室亦不爲無助於不忘之一端也 明矣 是阡也 卽我先承旨公墳山而於炳夏爲十三世亦遠矣 齋室亦久矣 間經修葺 不爲不多 本址汗濕 常患傾圮 謀所以移 新奈亦無 塽嵦得處 何仍於舊址 更加拓築 作爲堅實之地 以圖久遠是則人功也 般繩倕墨 亦解是意 其代造化之工於兩間也耶 室凡五架七楹 前正門右夾門 周垣以瓦 比舊益新 族侄基宇 相役致勤焉 嗚呼 吾家自漢京南徒帶方 始於通禮公 公政堂文靖公孫 承旨公考也 前後奕葉相承爲南服之稱 而不以袞 袞靑紫爲榮 惟文行是貴文行 可謂吾家箕裘逸仕 淸選權輿 於是奈之何 近久替零 徒悲風泉 滄棄之變也 惟玆邱壟梓楸 烏得無甄君思亭之感 上山拜墓 下山入室 苟不忘堂構之義 而不墜文行 則吾家亦何終替之有乎 終而復不遠復 固是天理循環 而 人道參焉 吾雖耄矣 不能無期待之願 願與僉族加勉 勿以齋室之新爲吾事已了 追念世來 燕翼遺謀 祭以敬誠 誼以親睦 則斯爲嗣修不杇之道 以俟百世 豈其爲遠也 俗邱稱玆山 爲渴鹿飮水狀而 山下有泉 故因以扁 鹿泉齋云爾 辛酉 十月 日 後孫 前監役 炳夏 謹識
 
 

 
각주
325) 원문의 五思는 사기거처(思其居處) 그 거처하시던 것을 생각하며, 사기소어(思其笑語) 그 웃고 말씀하시던 것을 생각하며, 사기지의(思其志意) 그 의지와 뜻을 생각하며, 사기소요(思其所樂) 그 좋아하시던 것을 생각하며, 사기소기(思其所嗜) 그 즐기시던 것을 생각한다.(『소학』
326) 『예기』 〈제의(祭儀)〉에 “재계한 지 3일에 마침내 그 위하여 재계한 조상을 보게 된다.〔齋三日 乃見其所爲齋者〕”라고 하였다.
327) 『예기』 〈상복소기〉에 “기년 만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예요, 기년 만에 상을 제하는 것은 도니, 제사를 지내는 것이 상을 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期而祭 禮也 期而除喪 道也 祭不爲除喪也〕” 하였다. 상을 제한다는 것은 남자는 수질(首絰)을 제하고, 여자는 요질(腰絰)을 제하며 연복(練服)으로 갈아입어 차츰 흉(凶)에서 길(吉)로 향함을 말한다. 친상(親喪)을 당하여 너무 슬퍼하다가 목숨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효경』 〈상친장(喪親章)〉에 “친상을 당한 뒤에 삼일이 지나면 음식을 들게 해서 어버이의 죽음 때문에 자기의 목숨까지 상하게 하지 않도록 백성들을 가르쳐야 한다. 지나친 슬픔 때문에 목숨을 잃게 하지 않는 이것이 바로 성인의 다스림이다.〔三日而食 敎民無以死傷生 毁不滅性 此聖人之政也〕”라는 말이 나온다. 또 『예기』 〈상복사제(喪服四制)〉에도 “사흘이 지나면 죽을 먹고, 석 달이 지나면 머리를 감고, 일 년이 지나면 연제(練祭) 이후의 상복으로 갈아입는다. 몸이 수척해질 정도로 지극히 애통해하더라도 자기의 생명만은 해치게 하지 말아서, 어버이의 죽음 때문에 자기의 생명까지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三日而食 三月而沐 期而練 毁不滅性 不以死傷生也〕”라는 말이 나온다.
328) 是故朱子以理無不明 誠無不格。釋知禘之說3-10 子曰 禘自旣灌而往者 吾不欲觀之矣 孔注 : 禘와 祫 제사의 禮는 昭穆의 순서를 정하기 위함이므로, 사당의 신주를 허문다. 여러 사당의 신주는 모두 태조의 사당에서 함께 먹게 한다. '灌'이란 울창주를 따르는 것인데, 태조에게 술을 따라 신을 내리게하는 것이다. 이미 강신을 한 후에 尊卑를 나열하고 소목의 순서를 정하는데, 노나라에서는 제사를 거꾸로 하여 僖公을 올리어 昭穆을 어지럽게 하므로 그것을 보지 않고자 한 것이다.[孔曰, "禘祫之禮, 爲序昭穆, 故毁廟之主, 及群廟之主, 皆合食於太祖. 灌者, 酌鬱鬯, 灌於太祖以降神也. 旣灌之後, 列尊卑, 序昭穆, 而魯逆祀. 躋僖公, 亂昭穆, 故不欲觀之矣."6)]
329) 원문의 般繩倕墨은 고대의 유명한 목수인 노반(魯般)과 공수(工倕)를 가리킨다.
330) 『서경』 〈고요모(皐陶謨)〉에 보인다.고요(臯陶)가 순(舜) 임금에게 고하기를 “여러 관직을 비워두지 마소서. 하늘의 일을 사람이 대신하는 것입니다.
331) 청자는 관복(官服)을 짓는 옷감의 색인데, 고급 관원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된다.
332) 키와 가죽옷이라는 뜻으로, 가업(家業)을 비유하는 말이다. 『예기』 〈학기(學記)〉의 “훌륭한 대장장이의 아들은 아비의 일을 본받아 응용해서 가죽옷 만드는 것을 익히게 마련이고, 활을 잘 만드는 궁장(弓匠)의 아들은 아비의 일을 본받아 응용해서 키 만드는 것을 익히게 마련이다.〔良冶之子 必學爲裘 良弓之子 必學爲箕〕”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333) 권여(權輿) : 사물의 시초를 뜻함. 저울을 만들 때는 저울대[權]를 먼저 만들고 수레를 만들 때는 수레의 판자[輿]부터 먼저 만드는 것에서 유래한 말이다.
334) 풍천(風泉) : 『시경(詩經)』의 편명인 〈비풍(匪風)〉과 〈하천(下泉)〉을 지칭하는 것으로, 현인이 국가의 쇠망을 걱정하는 내용임.[주D-002]풍천(風泉) : 『시경』 〈비풍(匪風)〉과 〈하천(下泉)〉을 이른다. 모두 제후의 대부가 주나라 왕실이 쇠미해진 것을 탄식해 읊은 시인데, 망한 왕조를 그리는 뜻으로 쓰인다. 여기서는 명나라의 멸망을 애상(哀傷)하는 뜻으로 쓰였다.
335) 진씨(甄氏)가 지은 사정(思亭) : 진사도(甄師道)가 지은 〈사정기(思亭記)〉에 “진군(甄君)이 부모와 형제의 장사를 치른 다음 그 곁에다 집을 지어 놓고 나에게 이름을 지어 달라고 하기에 사정이라고 지어 주었다. 그 이유는 부모를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古文眞寶後集 卷10』
336) 불원복(不遠復) : 멀리 가지 않고 되돌아온다는 뜻으로, 잘못을 깨닫고서 금세 바른길로 들어서는 것을 말한다. 『주역』 〈복괘(復卦) 초구(初九)〉에 “멀지 않아서 되돌아오니, 후회하는 일이 없을 것이요, 크게 좋을 것이다.〔不遠復 无祗悔 元吉〕”라는 말이 나온다.
337) 연익(燕翼)의 모훈 : 조상이 자손을 위해 세운 계책이나 교훈을 말한다. 『시경』〈대아(大雅) 문왕유성(文王有聲)〉에서 주(周)나라 문왕에 대해 “후손에게 계책을 남겨 두어 공경하는 아들을 편안케 하셨다.〔詒厥孫謀 以燕翼子〕” 하였다.
【향토】 임실의 재실
• 산수리 동산재(東山齋)
• 삼계리 녹천재(鹿泉齋)
• 삼계리 쌍괴당(雙槐堂)
(2024.01.02.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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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