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계리 효사재(孝思齋)
삼계면 소재지에서 삼계중학교를 지나 직진하면 전면에 청주한씨 묘가 있고, 묘전에 효사재(孝思齋)가 있다. 효사재는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한세신(韓世信)을 위한 재실이며 팔작지붕에 겹처마를 두르고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현판이 1개 걸려있다.
이 재실은 우리 13세조 조봉공(朝奉公)의 묘소 아래에 있는 재실이다. 경영한 지 오래 되었는데 지난 을묘년 봄에 종중(宗中)의 논의로 함께 재물을 모아서 창건하였다. 무릇 넉 달 만에 낙성을 아뢰니 동량(棟樑)이 크고 장엄하니 훼손되지 않고 오랫동안 이어지게 될 것이다.
지금부터 묘사(墓祀)를 지낼 때에 이곳에서 제수를 준비하여 조상께서 살아 계실 때처럼 정성을 다해야 한다. 화수회(花樹會)의 질서(秩序)가 생겨 화목해질 것이니 예경(禮經)에 종족이 모여서 함께 먹는다는 도리를 따르는 것이리라.344) 우리의 재각에 오르면 선조를 모시고 효를 생각하는 마음이 잔잔하게 생기게 될 것이다. 그래서 ‘효사재(孝思齋)라고 편액하였으니 가하지 아니하겠는가?
송잠계(宋潛溪)345)이 평양임씨(平陽林氏) 묘각기(墓閣記)에 이르기를, ‘임씨(林氏)가 그 선조를 모실 재실을 묘 아래에 지었으니, 매양 제수를 마련하던 곳인데 좌우로 행랑을 두어서 자손들이 독서하는 방으로 삼았다. 10여 세대에 이르러도 바꾸지 않았더니 명나라 초기에 명환(名宦)으로 찬란하게 빛나 중원의 번창한 집안이 되었다.’고 하였다.
내가 일찌기 이 글을 읽고 나도 모르는 사이 스스로 무릎을 꿇었다. 대저 명문우족(名門右族)의 종법(宗法)이 엄밀하고 후손들이 번창하는 것은 달리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조를 존모하고 종족을 공경하는 규범에 있으니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권면하고 형은 그 동생에게 권면하여 더욱더 돈독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조상을 존모하기 때문에 당당하므로 재각을 고쳐야 할 때마다 지붕을 새로 이어주는 것이 아주 쉬운 일이다.
무릇 우리 같은 뿌리들은 항상 재실의 이름으로써 척량(脊樑)을 새겨 두고 경계하며 살핀다면 아마도 조상을 욕되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병진년(丙辰) 봄 3월 기망(旣望) 후손 철교(喆敎) 삼가 짓다.
斯齋卽吾十三世祖 朝奉公 墓下丙舍也 經營彌久而 去乙卯春 宗議僉同 鳩財創建 凡四閱朔 告落棟宇 樑梁鴻朗莊嚴 可以不毁於久遠 繼自今墓祀時 滫隨于此 致其如在之誠 爲花樹會秩序拜拜 然雍睦倣禮經合族而 食之之道也 登吾齋者 奉先思孝之心 油然而生矣 故扁之曰 孝思齋無乃可乎 宋潜溪 平陽林氏 墓閣記曰 林氏築室于其先祖䉞之墓下 爲烝常之所 而左右廊廂 爲子孫讀書之室 至十餘世 不替明初名宦 煥爀居然爲神州大家 余嘗讀此 不覺雙昧自跪 盖名門右族之宗法嚴密 而後昆蔚興者 非他術也 尊祖敬族之規 父勉其子 兄勉其弟 愈久而愈篤故也 惟其尊祖 故瞠瞠則屋子之隨救隨葺 特易易耳 凡我同根 常以齋號銘着脊樑而 警省焉 則庶可以無悉也夫
夫歲在丙辰春 三月 旣望 後孫 喆敎 謹識
각주 344) 원문은 명대(明代) 호광(胡廣) 등이 찬정(撰定)한 『예기(禮記)』 권16에 “上治祖禰 尊尊也 下治子孫 親親也 旁治昆弟 合族以食 序以昭穆 別之以禮義 人道竭矣”라고 한 구절을 원용한 말이다.『예경(禮經)』을 살펴보건대 구족(九族)이 있으니 “위로 조부와 부친의 사당을 잘 관리하는 것은 존자(尊者)를 높이 받들기 위해서이고, 아래로 자손을 잘 다스리는 것은 친해야 할 사람을 친하기 위해서이며, 곁으로 형제간에 잘 지내는 것은 예의로 구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345) 송잠계(宋潛溪) 잠계는 명나라 송렴(宋濂)의 호이다. 그가 주돈이(周敦頤)를 위시한 송나라 때 아홉 선현에 대해 각 가문의 사당에 전해오는 초상화와 기타 문헌의 기록을 참고하여 〈송구현유상기(宋九賢遺像記)〉라는 제목으로 정리하였는데, 본 내용은 작자가 그 유상기를 발췌하여 기록한 것이다. 『文憲集 卷3 宋九賢遺像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