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은리 사오재(思五齋)
사오재(思五齋)는 이 지역 해주오씨 입향조 오흥윤(吳興胤)의 재실로 삼계면 삼은리 오괴정 건너편 들판에 위치하고 있다. 편액은 해평 윤용구가 썼으며, 글씨를 액자에 넣고 유리를 끼워 보존하고 있다. 사오재의 상량문에는 ‘遯庵南下 426甲戌春 2월 8일 壬辰五時入柱同月甲辰申時 上樑’이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1934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현판이 1개 걸려있고 솟을대문을 지어 보존하고 있다.
옛날 증자(曾子)는 양조(羊棗)를346) 먹지 않았고, 서중거(徐仲車)는 돌을 밟지 않았다. 대개 효자가 부모를 사모하는 마음이 사물을 마주하면 갑자기 생겨나서 차마 하지 못하는 바가 있게 되니 이런 마음을 미루어 구한다면 효성이 지극하였던 위대한 순임금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오십에 사모하는 효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347)
오호라, 내[不肖]가 4세손인 몸으로, 하늘이 돕지 않으셔서 아홉 살에 아버지를 잃고 오직 어머님이 길러 주시어 성장하였다. 선부군(先府君)의 용모와 수염과 모발[髭髮]이 모두 은은하니[依依然] 평생 동안 행실과 뜻을 간직한 바 그 만에 하나라도 헤아려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로지 부군(府君)을 모시지 못하였던 것으로 어머님을 종양(終養)348)할 것을 생각하며 백년을 하루 같이 여겼다. 지금에 이르러 부모님이 모두 계시지 않고 몸은 늙고 머리는 희어졌으니 하늘이 다하고 땅이 꺼지는 아픔마저 부칠 곳이 없구나.
가만히 생각하니 목숨이 다하면 선산(先山)에 두리라는 마음으로349) 부군의 묘 근처에 재각을 짓고 조석으로 드나들며 바라보며 ‘사오(思五)’라고 편액을 하였다. 대개 제의(祭義)에서 취하였으니 그 거처하셨던 곳을 생각하며[思其居處], 그 좋아하셨던 것을 생각하고[思其所嗜], 그 즐거워하셨던 것을 생각하며[思其所樂], 그 뜻과 웃으셨던 말씀 등에 미친다는 ‘오사(五思)’에 해당하는 글자이다.
오호라. 그 또한 슬픈 일이다. 사람들의 생각은 그 좋아하고 즐거워하시는 성품을 생각하여 여차여차한 것으로 비슷하겠지만, 나의 생각은 그 좋아하고 즐거워하시는 성품이 어떤 것일지 생각하니 처량해진다. 생각하는 것은 같지만 그 생각하게 되는 것은 같지 않으니 망극한 생각이 다섯에 그칠 뿐이겠는가? 비록 천 가지 만 가지 생각으로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증자께서 고기와 대추를 먹지 않고 서중거가 돌을 밟지 않았던 같이 어찌 할 수 있겠는가, 어찌 할 수 있겠는가?
다섯 기둥을 세운 재각은 계유년 겨울에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여름에 낙성하였다.간신히 힘써 경영한 지 30년 동안 일찍이 하루도 효를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아! 후손으로 이 재각에 들어오는 사람은 이름을 돌아보고 그 뜻을 생각한다면 그 부모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영원하기를 바랄 뿐이다.
갑술년 7월 7일 불초자(不肖子) 치권(致權)이 피눈물로 삼가 글을 짓다.
昔曾子不食羊棗 徐仲車不踐石 盖孝子思親之心 遇物輒生有所不忍 推此以求之 則不獨大舜 以後五十慕可知也 嗚呼 不肖以四世 一身不弔于天 九歲失怙 惟慈天 被養 以至成立 其於先府君 容貌髭髮 盖嘗依依 然則生平事行與志意之所存 可能測識其萬一哉 惟以不得事府君者思終養於慈天 百年如一日 而至于今 二親俱不存 身且老白首 窮天極地之痛無處可寓也 窃有意畢命松楸 就府君壽藏近地 因齋爲以爲朝夕瞻望 揭之 以思五 盖取祭義思其居處 思其所嗜 思其所樂 及志意笑語等 五思宇也
嗚呼 其亦可悲也 已人之思 追思其嗜樂之性 如此如此而彷彿之也 不肖之思 尋思其嗜樂之性 如何如何而悽愴之也 思則一而其所以思不同也 然則罔極之思止於五而已哉 雖謂之千思萬思 無不可也 至若曾子不食羊棗 仲車之不踐 石何敢焉何敢焉 齋凡五楹 始役于癸酉冬 至明年夏落成 亦辛勤經營三十年 未嘗一日不思存者也 噫後之人 入斯齋者 顧名思義 則其有不思其親者乎 庶圖所以不朽矣
歲甲戌 七月七日 不肖子 致權 泣血 謹識
각주 346) 고염나무 열매라고 한다. 347) 오십에 사모함 : 지극한 효성. 순(舜)은 50세에도 효가 지극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348) 종양(終養) :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돌아와서 연로한 어버이를 돌아가실 때까지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349) 주나라 관제에 가족장(家族葬) 제도가 있었다. 옛 시에 “목숨이 다하면 선산에 의지하고 싶다.〔畢命依松秋〕”라는 소원이 있었고, 정자(程子)는 좌우로 무덤을 배치한 도판을 그렸으니, 만일 부모의 체백(體魄)을 하나하나 각기 길한 곳을 택하여 장사 지낸 뒤에야 좋다고 여겼다면, 성현도 반드시 먼저 그렇게 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