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정 성수재(聖壽齋)
이 재실은 삼계면 학정리 용수골 골짜기 동편 기슭에 있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밀양 박씨 문중의 재실이다. 1927년에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집으로 현판이 1개 주련이 4개 걸려 있다.
402)
성수산(聖壽山)에 4대의 무덤을 연달아 안장하였으니 밀양씨족 일파 가운데 저명한 분들이시다. 은거하면서 출사하지 않았던 박정민(朴鼎敏),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내고 순절하여 선무공신[宣武勳]에 녹훈된 박우생(朴禹生)과 유일[逸]로 천거되어 참의(參議)에 임명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은 파문(坡門) 사람으로 죽계(竹溪) 박후립(朴厚立), 음직으로 참판(參判)에 올랐던 박이룡(朴爾龍)이다.
양양(洋洋)한 영령(英靈)이 위에 계신 듯한데 후손들은 매양 띠집에 빗물이 흘러 슬퍼하였다. 성묘할 때마다 재계(齋戒)하지 않을 수 없는데 재계하지 않고 치재하였다. 재계할 곳이 없어 한이 되어 오랫동안 정성과 힘을 들여 정묘(丁卯)년 가을에 이르러 재각이 마침내 낙성하였다.
대체로 ‘영모(永慕)’나 ‘추원(追遠)’이라고 편액을 많이 하는데 지금 혼동하지 않고자 ‘성수(聖壽)’라고 편액하였으니 모두 제사를 받들고 선조를 추숭(追崇)한다는 성인의 제도에서 그 뜻을 취하였다. 띠집이 아니라 기와를 올려 동우를 견고히 하여 영원할 보존할 수 있게 하였다. 산은 본래 청정하고 성스러운 곳이니 그 수정(壽正)을 말하는 것이 오늘날 박씨의 제각으로 부합된다.
무덤에 재각을 짓지 못하여 오랫동안 적막하게 지낸 지 몇백년이 되었다. 동족[華宗] 박병하(朴秉夏)가 여름에 나에게 부탁하며 소기(小記)를 보여주기에 이 재각의 완미(完美)와 그 이루어짐을 크게 칭찬하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노력한 사람은 박시돈(朴時敦), 박맹진(朴孟鎭), 박응진(朴膺鎭), 박원식(朴源植), 박원실(朴源實)이니 곧 후손이라는 명색으로 모두 문행을 갖추고 선조의 위업을 이었던 것이다. 장성와 임실이 200리나 떨어져 있어서 내가 비록 이 재각에 오르지는 못하지만 공경히 그 얘기를 듣고 효를 생각하는 정성에 감복하여 더럽혀지는 것을 돌아보지 않고 성인(聖人) 기자(箕子)께서 하신 한마디 ‘장수하시기를 치하하니 영세토록 없어지지 않으리라.’라는 말을 빌어 쓴다
신사년 중양(重陽) 일 수성(隨城) 최승휴(崔升休) 삼가 지음.
山而聖壽 墓而四世 聯以永葬 此密城氏中 一派之著顯者 隱德不仕諱鼎敏 軍資監正殉節錄宣武勳諱禹生 逸參議不起坡門人竹溪諱厚立 蔭參判諱爾龍也 洋洋乎英靈如在上 悽愴之裔 每當灌茅 若上墳時 不得不齋 不齋而致齊 無其所爲恨 久積誠力 至丁卯秋齋 克成之世 盖多以永慕追遠 爲扁而今不欲渾之 因以聖壽顔焉 盖取諸以承祭祀 追崇先祖 古聖之制也 不茅而瓦 固其棟宇 永壽之計也 山本靜而聖 言其壽正 爲今日朴氏齋之符也 山若不得齋 則徒作長寂寞 幾百年矣 日介其華秉夏 夏予晩要 示予小記 且盛稱此齋之完美 而其成之也 終始最賢勞者 時敦 孟鎭 膺鎭 源植 源實 卽裔孫名 而俱有文行 克繩先武 長與任距 二百里之遠 予雖不登斯齋 祗聞說而感其孝思之誠 不顧塵穢 窃以箕聖一 曰壽爲賀永世不杇之福
歲辛巳重陽日 隨城 崔升休 謹記
각주 402) 성수재는 밀양박씨의 재실이다. 성수산에 있기 때문에 성수재라 하였다. 이 곳에는 밀양박씨 4세의 묘가 있다. 덕을 감추고 출사하지 않은 박정민과 군자감정이며 임진왜란에 적을 쳐서 순절한 선무공신 박우생, 유일로 참의를 제수받았으나 나가지 않은 죽계 박후립, 음직으로 참판에 오른 박이룡의 4세의 묘이다. 1927년에 자손들이 재실이 없음을 한으로 여겨 오던 터에 서로 함의하여 재각을 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