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정리 영모재(永慕齋)
이 재실은 삼계면 학정리 용수골 골짜기 서편 기슭에 있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영월 엄씨(寧越 嚴氏)의 선조 십성재(十省齋) 엄준목(嚴峻睦)의 재실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집으로 현판이 1개 걸려 있다. 1978년 세웠으며 오른쪽 언덕에 ‘通政大夫刑曹參議仁樂堂嚴公峻睦景墓碑’가 서 있다.
1. 학정 영모재 참의 엄공 사실록(參議嚴公事實錄)
공의 이름은 준육(峻睦), 호는 인락당(仁樂堂), 본관은 영월(寧越)로 개국공신 엄유온(嚴有溫)의 8세손이다. 공의 성품은 효성스럽고 어려서부터 과실을 보면 품에 품어 부모님에게 올렸으며, 잠자리에 들면 부채를 부쳐 시원하게 하였다. 집은 비록 가난하지만 부모를 정성스럽게 공양하였는데[甘旨之供] 부귀한 집안들에 못지 않았다. 나이는 비록 어리지만 계절마다 아침저녁으로 살피는 정성은 어른들이 하는 것과 한가지였다. 부모상을 당해서는 피눈물로 상을 치루고 시묘살이를 하였으니 그 정성과 독실한 행동이 옛 사람과 한가지였다. 그런데도 나라에서 포상하고 정려를 내리는 은전을 받지 못하였으니 세상사람들이 다 이를 애석해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 서울로부터 남원의 사촌(沙村)으로 물러났다. 스스로 경계하여 말하길, ‘무릇 사람이 나라의 봉록을 받는다는 것은 그 뜻을 행함에 있는 것이니 진실로 혹시라도 봉록을 받아도 펼쳐 보일 수는 없으며 부모님이 계시지 않아 봉양할 것도 아닌데 어찌 몇 되 쌀에 마음을 쓰겠느냐?’ 하면서 궁벽한 시골로 자취를 감추었다. 당호를 걸어 인락(仁樂)이라 하였으니 대개 인자(仁者)는 산을 좋아한다는 뜻에서 취하였다.
날마다 마을의 수재(秀才)들과 함께 행간의 자구를 찾으면서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방에 틀어 박혀 왼쪽에는 그림을 오른쪽에서 서화를 가까이 하며, 초의(艸衣)를 걸치고 거친 밥을 먹으면서도 소연(簫然)하여 세속을 벗어난 풍모가 있었으니, 그 산수(山水)를 즐기는 마음을 여기에서 가이 알겠도다. 더욱이 집안을 다스리는데 부지런히 하였다. 매일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의관(衣冠)을 바르게 하고 단정히 앉아 중당에서 자손과 여러 며느리들이 차례대로 배알하여 각자 일을 하도록 했다. 또 일찍이 두 아들을 훈계하여 말하기를,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마치 담벼락을 바라보고 있는 것과 같으니라, 너희들은 모름지기 대학(大學)을 먼저 외워 덕(德)을 쌓는 기본으로 삼고 다음에 논어와 맹자를 읽어 도(道)를 향해가는 단계로 삼고 드디어 6경(六經)을 융화하여 관통한 연후에 면하게 될 것이니 힘쓰고 힘써야 할 것이다. 후세 자손들이 이를 받들어 안분(安分)하며 부지런히 학문을 닦아 이때부터 엄씨 가문의 문학이 영남과 호남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공은 선조(宣廟) 3년 경오년 3월 12일에 태어나서, 인조 21년(1643) 계미(癸未) 3월 25일에 죽으니 향년 74세였다. 묘는 부서면(府西面) 말목재[馬項峴] 자좌(子坐) 자리에 있으며 부인 숙부인(淑夫人) 밀양박씨(密陽朴氏) 행산군(杏山君)의 후손 박정수(朴鼎秀)의 딸이다. 묘는 공의 묘 서쪽 산기슭으로 동종동(銅鐘洞) 계좌(亥坐) 자리에 있고, 공의 큰아들 순표(舜杓)는 호조참판(贈戶曹參判)에 증직되었고, 둘째아들 순립(舜立)은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공의 놓은 재주와 남다른 행적으로서도 벼슬길을 마다하고 끝내 산림에서 늙어 생을 마쳤다. 남겨진 문적들이 흩어져서 아름다운 언행과 의로운 행적들은 모아 드러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공의 7세손 엄석창(嚴錫昶)과 그 족숙이 함께 힘써서 재물을 모아 을축년(乙丑) 3월 어느 날 공의 묘소 아래 조금 떨어진 곳에 재각을 짓기 시작하여 같은 해 10월 어느 날에 낙성을 하였다. 재각에 이름 붙이기를 영모(永慕)라 하였다. 나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내가 노쇠하였어도 사양치 못하고 대략을 서술한다.
고종 즉위 3년(1866) 병인년 4월 상완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행의정부영의정(行議政府領議政) 겸영경연춘추관사(兼領經筵春秋館事) 관상감사(觀象監事) 동래(東萊) 정원용(鄭元容) 삼가 지음.
公諱 峻睦 號仁樂堂 貫寧越 開國功臣 諱有溫 八世孫也 公賦性孝 自在髫齡 見果則懷 侍枕則扇 家雖貧甘旨之供 與富貴家等齡 雖弱省定之節 與老成人同 至遭憂血泣而居廬 其純誠篤行高人一等 而尙未蒙褒旌之典 世皆惜之 壬燹後 自京遯于南原沙村 而自警曰 夫人之干祿 所以行其志也 苟或得祿旣未能展布 親又不在養靡逮焉 寧可屑屑乎升斗之米耶 藏踪窮巷 扁其堂曰仁樂 盖取仁者 樂山之義也 日與村秀才 尋行數墨 津津自得 牢坐一室 左圖右書 艸衣木食簫然 有出塵之表 其山水之樂 於此可認也 尤勤於齊家 每未明而起 正衣冠端坐中堂 子孫諸婦 次第拜謁 然後各執其業焉 又嘗訓其二子 曰人而不學 其猶墻面 汝輩須先誦大學 以基入德之門 次讀論孟 以階向道之梯 遂至六經 融會貫通 然後庶免 則近之恥 勉哉勉哉 後世子孫 遵而安分勤學 自此嚴氏家文學 聞於嶺湖間 公生于宣廟朝 三年 庚午 三月十二日 卒于仁廟朝 二十一年癸未 三月二十五日 享年七十四 墓在府西島項峴 子坐原 配淑夫人 密陽朴氏 杏山君後 鼎秀之女 墓在公之墓 函麓銅鐘洞 亥坐原 公之長子 舜杓 贈戶曹參判 次子 舜立 通德郞 噫 公之高才異行 旣不能立於朝 終老於山林之間 則遺編散逸 嘉言懿乎 ▣殆就沈晦 公之七世孫 錫昶 與其族叔埻 出力鳩財 始以乙丑三月日 爲齋於公之墓下 稍間之地 訖功於同年十月之日 名其齋 曰永慕 問序於余 余不以衰耄辭 略爲之記
上之卽祚 三年 丙寅 四月 上浣 大匡輔國 崇祿大夫 行議政府領議政 兼領經筵春秋館事 觀象監事 東萊 鄭元容 謹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