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천리 정양사(靜養舍)
노동환 가옥은 오수에서 삼계면 소재지를 지나 후천리 후천교 건너 왼쪽의 작은 다리를 통과하여 교회 앞을 지나 올라가면, 뒷내마을 안 북쪽 산기슭에 있다. 노동환 가옥의 본채는 1986년 9월 9일 지방문화재자료 제118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팔작지붕 아래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본채를 중심으로 오른쪽에 사랑채와 문간, 그리고 오른쪽 뒤에는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지어져 있다. 또한 사랑채 앞에는 어떠한 연유로 누가 썼는지는 몰라도 가로, 세로 각 85cm의 규격에 새긴 화석(花石)이라는 암각서가 있어 조선시대의 풍요로움을 더해주고 있다. 노동환 가옥은 조선 효종 때 지은 민가로 상량문에 ‘숭정기원후경인(崇禎紀元後庚寅)’이라고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1650년(효종 1)에 지어졌다. 사랑채는 마루를 높이 해 시원해 보이도록 하였으며, 사랑채 전면에는 가로 116cm 세로 40cm의 정양사(靜養舍)라 쓴 편액과 현판 1개가 걸려있다. 이 편액은 노동환의 조부께서 당대의 명필인 효봉(曉峯)의 글씨를 받아 세운 당호(堂號)이다. 또한 측면에는 가로 83cm 세로 35cm의 북계정사(北溪精舍)라 쓴 편액이 있는데 이는 풍남 노웅현의 글씨이며, 노웅현은 노사 기정진의 제자이다. 이 집은 뒷내마을이 처음 형성될 때 진씨가 현재 집 뒤의 대밭자리에 터를 잡고 살다 현재 자리로 옮겨 6, 7대를 살았으며, 뒤를 이어 양씨가 3, 4대를 살았는데, 이를 노동환의 8대조인 오류처사 노엽((盧燁)이 집터를 사 새롭게 축조하여 현재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집의 터는 제비가 알을 품고 있는 연소혈(燕巢穴) 형국으로 앞마당에는 제비가 먹을 수 있는 곤충들의 형상인 바위가 놓여 있고, 앞에 있는 산은 뱀의 형상으로 이 집을 넘겨다보기 때문에 거부나 인재가 나오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이에 뱀 머리를 눌러 꼼짝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 산머리에 “강정”이란 정자를 지었는데 없어졌으나 앞으로 다시 세울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414)
마을의 뒤에 흐르는 시내를 북계(北溪)라고 하는데 나의 5세조고부군(祖考府君)이 붙인 편호(扁號)이다. 대개 부군이 여기에서 처음 살기 시작하였다. 지세가 가파르고 비좁은데다 산봉우리가 아름드리 받치고 있는데 한 줄기 물길이 북쪽에서 흘러 내려오는데 그다지 얕지도 깊지도 않아 배꼽 깊이로 길게 흘러 진실로 볼 만하다. 북계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그후 중종조(仲從祖)의 조부가 시 3편을 지었는데 가히 징험할 만하다. 지금 그 내용을 살펴 벽에 써서 걸어 두었는데 연기에 심하게 그을러지고 좀벌레가 슬어 있었다. 선세(先世)에서 잘 이어가라고 지어주셨는데 혹여 민몰(泯沒)될까 두렵다. 근래 우리 종족 전주에 사는 응현(應鉉)이 손수 베껴 쓴 것을 얻어서 판각하여 걸어 두어 영원히 보존하려고 하였다. 실로 어려서 부모를 잃은 사람의 절박한 마음과 피땀이구나.
아! 선세부터 대대로 독실하게 행실하고 충효를 과책(課責)하며 학문을 쌓아 가므로써 가풍(家風)을 만들었으니 이곳에 종족을 모으고 이곳에서 빈객을 대접하고 이곳에서 관혼상제를 치르고 강명(講明)을 하지 않을 수 없으니 북계정사가 남중(南中)에서 가장 적적(寂寂)하지 않은 곳이라고 할 만하구나. 옛날에 이찬황(李贊皇)이415) 평원의 한 송이 꽃과 돌로 자손에게 유계(遺戒)하였다고 하는데 하물며 나에게 여러 대에 걸쳐 닦아온 기틀을 후손으로서 수호하는 책임이 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남기신 명계(冥戒)와 묵훈(默訓)에 있지 아니하겠는가? 그러므로 후손으로 수호하는 도리를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반드시 밤낮으로 격려하는 마음이어야 할 것이다. 그 가풍을 떨어뜨리지 않아야 가업을 이었다고 할 수 있으니 북계 물가에 세운 정사에 편액이 없다면 그 물이 세차게 흐르지 않겠는가?
병인년(丙寅) 5월 어느 날 5세손 원주(源珠) 삼가 씀.
里後川而曰北溪 不肖五世祖考 府君扁號也 盖府君始宅于玆 地勢爽塏 峯巒拱托 而一水自北而來 不淺不深 胦帶長流 信可觀也 意北溪之號 由是而 厥後有仲從祖祖父題咏三首 此足可徵也 今巧其荐揭書 烟煤已深 蟲蝕殆盡 竊惧夫先世肇錫之嘉 或致泯沒 得近故吾宗豊南應鉉 卽手筆摹刻揭板 將以圖不杇 實是孤露餘生 危衷苦血哉 噫 自余先世 世篤操履 課忠責孝 種學積文 以爲家風 而聚宗族于斯 延賓客于斯 以至冠昏喪祭 無不講明于斯 可謂北溪精舍 不甚寥寥于南中矣 昔李贊皇 以平泉一花一石 遺戒子孫 矧余累世之基之室 嗣守之責 可不有吾先父若祖 冥戒黙訓乎 然則嗣守之道將奈何 必夙夜惕厲心乎 其不墜家風 庶可謂背講 而北溪之水 無作精舍之額 不沏云爾
丙寅年 五月 日 五世孫 源珠 謹識
각주 414) 정량서 현판 및 북계정사기는 임실군 삼계면 후천리 465번지 도지정 문화재자료 제118호 노동환가옥의 사랑채에 걸려 있다. 노동환가옥은 1650년대 오류처사 노엽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415) 이찬황(李贊皇) : 찬황은 당(唐)나라 때 찬황백(贊皇伯)에 봉해진 명상(名相) 이덕유(李德裕)를 가리킨다. 일찍이 하남(河南) 낙양현(洛陽縣) 남쪽에 평천장(平泉庄)을 세웠는데, 둘레가 40리이고 기이한 초목과 돌이 많아 그 경치가 선경(仙境)과도 같았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