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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임실의 재실
◈ 후천리 취수당(醉睡堂)
이 재실은 임실군 삼계면 후천리 계림군사우 밑에 있는 위치해 있다. 경주 김씨 재실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집이다. 현판이 1개, 주련이 2개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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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천리 취수당(醉睡堂)
 
이 재실은 임실군 삼계면 후천리 계림군사우 밑에 있는 위치해 있다. 경주 김씨 재실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집이다. 현판이 1개, 주련이 2개 걸려있다.
 
 
 
 

1. 후천 제숙공 사당 창건 중수사실

 
만물은 하늘을 근본으로 하고, 사람은 조상을 근본으로 삼는다. 때문에 옛날 성왕들은 교외에서 하늘에 제사하고 조상을 배향하였으니 크게 보답하기 위해서이다.416) 또한 시조묘(始祖廟)를 지어서 영원히 불천지례(不遷之禮)를 사대부(大夫士)에게 이르게 하였다. 대개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각각 근본에게 보답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우리 선조 제숙공(齊肅公)은 개국훈신으로서 중흥의 운수에 의탁하여417) 세우신 공에 대해서는 역사책에 실려 있다.418) 비로소 높은 관직을 받고 부조묘(不祧廟)에 봉해졌다. 자손들이 경향(京鄕)의 여러 곳으로 흩어졌으나 오래도록 더욱 번성하여 고관벼슬이 계속 이어졌고419) 나라와 더불어 같이 누린 아름다움이여! 아! 성대하구나!
 
공의 9세손 동추공(同樞公) 김원중(金元重)은 장자로서 아들이 없어서 차적(次嫡)을 입적하여 공의 제사를 잇게 하였다. 그후 남원 아산(阿山)의 시골집으로 옮겼다. 대개 증참판공(贈參判公) 김성진(金聲振)을 따라서 은거하였던 곳이다.
 
여러 차례 전쟁을 겪으면서 문헌들이 탕잔(蕩殘)하여 공이 태어나고 돌아가신 날 조차 고증할 수 없어서 봄가을로 두차례 정일(丁日)에 제사를 올렸다. 처음에는 사당의 면모를 갖추지 못하여 청사(廳事)가 낮고 좁음을 면하지 못하였다.
 
공의 9세손 참판공(參判公) 김시진(金始振)이 전라도 감사로 내려와서 비로소 사당[社屋]을 창건하였다. 봉사손이 가난하기 이를 데 없어 제사 모시는 예절이 점차 옛날 같지 않아졌다.
 
공의 12세손 김영호(金潁豪)가 개탄하며 심히 탄식하여 종인들을 데리고 재물을 모으고 여기저기서 추렴하여 제수로 쓸 자금으로 이바지하며 ‘대종계(大宗稧)’라고 이름짓고 서문을 지어서 이에 대해 알렸다. 재종질 첨추공(僉樞公) 할(硈)과 삼종질[三從] 감(礛)이 서로 더불어 협력하여 일이 거의 성취되고 있었다. 그런데 갑신년에 이르러 종가(宗家)가 더욱 탕패(蕩敗)하게 되어 선업을 보존할 수조차 없게 되었고 옛터마저 장차 다른 사람들에게 속하게 되었다. 첨추공이 여러 종족들과 모의하여 속환(贖還)하였다.
 
세월이 흘러 오래되자 묘우(廟宇)가 기울고 허물어졌다. 이때 선친[先考] 효정공(孝貞公)이 안동부사로 부임하셨고, 숙부 판서공(判書公)이 개성유수[分司松京]로 계셨고, 계부(季父) 부사공(府使公)과 족숙(族叔) 목사공(牧使公)은 영천 및 밀양의 수령으로 나가 있을 때 녹봉을 쪼개서 경영하여 중수하도록 하였다. 공의 13세손 김언욱(金彦郁)과 14세손 김낙규(金樂珪), 김낙붕(金樂朋), 김낙대(金樂大)로 하여금 일을 맡게 하여 8개월 만에 마쳤다. 영모(永慕)라 편액하고 따로 재사와 창고방을 지었다.
 
또한 제위전[祭田] 약간을 마련해 그 출납을 엄하게 하여 사당을 보수하고 제수를 마련하는 비용을 모두 각각 저축하게 하였으니 한가지 방도였다. 대종계의 성헌(成憲)이 오래 되었어도 바꾸지 않았다. 매번 제향일이면 유사(有司)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모여서 제수를 준비하며 제향의 의례를 실천하니 미혹됨이 없었다.
 
또한 종약(宗約)을 세워 그 모자라거나 남거나 범공(范公)의 의장(義庄)의 규범과 여씨향약(呂氏鄕約)의 뜻을 본받아 서로 구휼하고 서로 권면하였다. 우리 종족의 성대함을 위해서가 아니라 향린(鄕隣)의 사대부가 드물게 있는 것은 진실로 우리 선조의 적경(積慶)과 위지(委祉)가 미친 바이기 때문이다. 진실로 여러 종인이 본원(本原)을 생각하고 뜻을 모으지 않았더라면 어찌 능히 이루었겠는가! 모두 각자 근본에 감사드리며 보답한 것이라 하겠다.
 
오호라! 이 재각에 올라 제례를 행하는 사람은 엄연하게 재각을 우러러 바라볼 것이니 세대(世代)가 아무리 멀다 하더라도 반드시 후손에 비취는 대덕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방계의 후손도 늘어서 있으니 친속(親屬)이 아무리 소원하여도 한 몸에서 갈려진 것임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조상을 추모하는 효성과 종족 간에 돈목하는 마음으로 장차 그 애연함을 느끼고 유연함을 일으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종묘의 일에 술잔을 나누고 420) 음복하는 예의로421) 사람을 가르쳐 효성스럽고 화목하게 하는 데 있지 않은 것이 이것이니 우리가 삼가 서로 힘쓰면서 여러 종족에게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올해 여름에 우리 종인(宗人) 김봉호(金鳳豪), 김낙려(金樂麗)가 써가지고 와서 ‘사당을 증수하여 고치고 제위전을 마련한 것이 어찌 종중의 어르신들께서 조상을 받드는 지극한 뜻에서 비롯되지 않은 것이 없겠습니까?’ 견문은 날이 갈수록 멀어지고 유적(遺蹟)은 침몰되어가니 표장(表章)이 있지 않으면 어떻게 후손에게 보이겠습니까?’라고 하면서 나에게 실기를 써달라고 하면서 장차 판각하여 걸려고 하였다.
 
아! 옛날 을유년 내가 성균관에 올라 가면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화산(花山) 임소에 영근(榮覲)하였다. 선조들의 사당을 중수한다는 논의에 대해 들었는데 하는 일없이 있다가 한 해가 흘러 이렇게 기적(紀蹟)의 글을 쓰게 되었으니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지금 옛일을 생각하니 더욱 그립고 구슬프다. 그 사실에 대해 서술하니 후손들이 이 글을 보게 된다면 더욱 힘써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임금이 재위하신 지 24년 갑신년 4월 어느날
13세손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원임의정부(原任議政府) 좌의정겸영경연사감(左議政兼領經筵事監) 춘추관사(春秋館事) 세자전(世子傳)
김사목(金思穆)422) 삼가 글을 짓다.
14세손 김약필(金樂弼) 삼가 씀.
 
 
 

1.1. 齊肅公 祠堂 創建 重修事實

 
萬物本乎天 人本乎祖 古聖王旣郊天配祖 以大報之 又制爲始祖廟 百世不遷之禮 達于大夫士 盖所以使天下之人 咸各報其本也 惟我先祖齊肅公 以開國勳臣 攀附興運功 垂竹帛始受疎封 爲不祧之廟 子孫散處 京鄕久益繁衍 圭組相承與 國匹休 嗚呼盛哉
 
公之九世孫 同樞公諱元重 因長房之中絶 以次嫡入承公祀 其後移居 于南原阿山鄕第 盖從贈參判公諱聲振 捿隱之地也 旣而屢經兵燹 文獻蕩殘 公之生卒月日無所考徵 遂用春秋二丁以薦 初嘗而廟貌 猶未備儀 廳事不免湫隘 及公九世孫 參判公 諱始振 來按 湖南節 始克刱建祠屋 而祀孫貧窶 祀享之節 漸不如古 公之十二代孫 潁豪 慨然深歎 倡率宗人 鳩財歛散 以助供芬苾之資 名之曰大宗稧 作序文以識之 其再從姪 僉樞公硈 與其三從礛相 與恊力承行 事幾就緖逮 至甲申 宗家轉益蕩敗 無以保其先業 舊基將屬他人 僉樞公 聚謀於諸宗 以圖贖還 而歲月滋久 廟宇傾頹時 則先考孝貞公 莅任安東 堂叔父參判公 分司松京 季父府使公 曁族父牧使公 出宰榮川及密陽 各割俸金 經紀重修 而使公之十三世孫彦郁 十四代孫樂珪樂朋樂大 掌其事 八閱月而功告訖 扁以永慕 別建齋舍及庫房 旣又營置祭田若干頃 謹其出納 修廟薦享之需 皆各有儲 是乃一遂大宗稧成憲 久而勿替者也 毋當祭祀之日 有司供具少長咸集 籩豆有踐 享儀靡忒 又立宗約 取其嬴餘略 倣范公義庄之規 呂氏鄕約之義 以相周恤 以相規勉 不惟爲吾宗之盛事 亦鄕隣士夫家之所 罕有者斯固我先祖積慶 委祉之攸 及而菊匪衆宗人之思 惟本原合謀幷力 又惡能有濟 是卽所謂咸各報其本者也 嗚呼 登斯堂而行斯禮者 仰瞻楹桶之有儼 則 世代雖遠 而必念壽後之大德 傍視雲仍之在列 則親屬雖疎 而必念一體之 以分追遠思孝之誠 敦宗友睦之心 將見其僾然而感 油然而生 宗廟之事 旅酬燕毛之禮 無非所以敎人孝睦者 此也 此吾所惓惓相勉 而竊有望於諸宗者也 今年夏 宗人鳳豪樂麗甫 書來以爲祠廟之增修 祭田之營 置何莫非宗中 先丈老奉先之至意 而見聞日遠遺蹟 寢泯不有表章 何以詔後 請余記述 將以獨板 噫 在昔乙酉 余登上庠 榮 覲于先考花山任所 承聆先廟 重修之議 居然歲甲一周 述此紀蹟之文事 若有不偶然者 感念今昔倍㘦愴慕 遂敍其事實 俾後之覽 此者知有所加勉云爾
 
上之 二十四年 甲申四月 日
十三世孫 大匡輔國 崇祿大夫 原任議政府 左議政 兼領經筵事監 春秋館事 世子傳 思穆 謹記
十四世孫 樂弼 謹書
 
 

 
각주
416) 『예기(禮記)』<郊特性>에 ‘만물은 하늘에 근본하고 인간은 조상에 근본한다. 이것이 조상을 상제(上帝)와 짝하고 교외에서 제사지내는 이유가 되는 것으로서, 근본 되는 것에 크게 보답하고 처음 시작한 것에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라는 구절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萬物本乎天, 人本乎祖, 此所以配上帝也, 郊之祭也, 大報本反始也.)
417) 원문의 반부(攀附) : 반룡부봉(攀龍附鳳)의 준말로, 제왕 혹은 명사(名士)에게 몸을 의탁해서 이름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한(漢)나라 양웅(揚雄)이 지은 『법언(法言)』 〈연건(淵騫)〉의 “용의 비늘을 끌어 잡고 봉의 날개에 붙는다.〔攀龍鱗 附鳳翼〕”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418) ‘서적1(書籍)’이나 ‘사기22(史記)’를 이르는 말
419) 규조(圭組 옥으로 만든 홀(笏)과 인수(印綬))
420) 여수(旅酬)는 주인과 빈(賓)이 술잔을 주고받은 뒤에 의식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술잔을 돌려 가며 마시는 것이다.
421) 연모(燕毛)는 제사가 끝나고 철상(撤床)을 한 다음 잔치할 때는 작(爵)과 사(事)는 따지지 않고 다만 머리털 색깔로 앉는 순서를 정한다는 것이다.
422) 김사목(1740-1829):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백심(伯深), 호는 운소(雲巢).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의 손자이며, 형조판서 김효대(金孝大)의 아들이다. 70년 동안 영조·정조·순조 세 임금을 모셨는데, 90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한 지 60년을 맞이하여 회방(回榜:登科回甲)으로 궤장(机杖)을 하사받았다. 시호를 경헌(敬獻)이라 하였다. 1824년 순조 갑신년에 김사목 당시 좌의정이 남원 아산방의 종인들과 찬의하여 사우를 중수하니 김태식이 중수의 뜻으로 남원 네종중에서 백미 200가마니를 갹출하여 제위토 17두락을 마련하고 묘대를 중수한다.
【향토】 임실의 재실
• 후천리 정양사(靜養舍)
• 후천리 취수당(醉睡堂)
• 덕천리 영덕재(永德齋)
(2024.01.02.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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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