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리 모의재(慕義齋)
이 재실은 임실군 강진면 백련리 백련산아래 신기마을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집으로 현판이 1개 걸려있다.
우리 임실에 뿌리를 둔 함양씨족은 교수관(敎授官)를 지낸 평(枰)에서 시작하여 그 손자 수심재(收心齋) 훈(薰)에 이르렀는데 기묘명현(己卯名賢) 저정공(楮亭公) 순달(順達)이 수심재의 손자이다. 임진왜란 때에 충신이 된 저정공이 묻히신 곳은 고을의 남쪽 백련리(白蓮里)의 쌍학봉(雙鶴峰) 아래로 부인과 부묘되었다. 해마다 제사를 지낸 지 200여 년이 되었는데 제사 지내는 사람들이 재숙(齋宿)할 곳이 없었고 제수를 마련한 공간도 없었다.
무릇 우리 고을이 이른바 오래된 집안이 사는 곳이기는 하지만 빈곤하고 보잘 것 없어졌으니 제사를 드리는 때가 되면 아! 차마 말을 할 수 있으리오. 옛사람들이 말하기를, ‘전인(前人)이 현달하였기 때문에 후배들이 열심히 배울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내가 그 말에 이어서 말하니, ‘선조가 현달하였기 때문에 후손들이 덕을 닦을 수 있는 것이다.’이리라. 지금 우리 종족이 생산과 이해(利害)에 종사하여 도의(道義)로 자처하지 못하고 저잣거리 사람으로 끝마치고 있어서 선조의 덕업을 천 길 구덩이에 파묻히게 하였다.
가문이 칠흑같이 어두운 한밤중 보다 적막(寂寞)하기를 어찌하여 백년이었으며 나의 몸은 나의 선조가 아니라면 어떻게 생겼겠는가? 근본이 상하면 오래도록 지탱할 수가 없는 것이며 친생(親生)에 부박(浮薄)하면 떨칠 수 없는 것이니 내가 매번 두렵게도 끌리지 않은 것은 이미 다시 맞이하였기 때문이다. 얼마나 다행인지 종족의 의견이 모두 같아서 몇 칸 재사를 짓기로 하여 1년 만에 공사를 마치었다.
문장(門長) 동엽(東燁)이 도유사(都有司)이었고 태식(泰植)이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힘을 기울였다. 재동(在東), 재영(在英), 재림(在淋), 재만(在萬) 및 종문(鍾文)과 병기(炳琦)가 전후로 일을 주관하여 비로소 우리 종중 안에서 할 말이 있게 되었다. 내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비록 오늘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지키는 사람이 없다면 무너져 썩어 버리게 될 것이니 우리 종족은 일이 다 끝났다고 하지 말고 더욱 선조를 받드는데 더욱 마음을 다해야 할 것이다. 선조가 닦은 덕업을 생각하여 조상께서 이루신 것을 생각하며 고심노력하여 이어받아서 수리해 간다면 낳아주신 분을 욕되게 하지 않고423) 이 재각도 장차 영원히 지켜가게 될 것이다. 서로 힘써야 할 것이다.
我咸陽氏之根於任實 實自敎授官諱枰 至其孫收心齋諱薰 而爲己卯名賢 楮亭諱順達 收心齋孫 而爲壬辰忠臣 楮亭公衣履之葬 在縣南白蓮里之雙鶴峰下 以配祔焉 歲祀之已關二百餘禩 而但祭員無齋宿之所 祭饌無可需之廚 夫以吾鄕 所謂故族 而貧苦迷孱 尤着於奉祭之日 鳴可忍言哉 古人有言曰 前人之所以顯 後輩之能勉學 余竊繼之曰 先祖之所以顯 後孫之能修德 今我宗族從事于生産利害 而不以道義自居 故鷟▣是市夫街人而終 使先祖之感德 埋於千仞坑塹 家門之寂寞 甚於三更柒夜 何以則百年 我身非我祖也 何自以生焉 傷其本根 而未有能支遠也 薄於親生 而未有能自振也 余每懼然不牽者 已富來欣矣 何幸宗議僉同 搆數間齋舍 周一年卽迄其功 門長東燁卽都有司 泰植之始終同力 在東在英在淋在萬及鍾文炳琦 前後幹事 始可以有辭於吾宗中也 湘燁竊念雖始於今日 守設之無人 則傾敗腐朽而止 吾宗族勿謂能事已畢 尤盡心於奉先思孝 念祖修德 仍思父祖作成之 苦心努力 繼之而修葺 則可謂不失於無忝所生而此齋將永久 守設矣 盖相勉之哉
檀紀四二九八年 己巳四月上澣 十代孫湘燁再拜謹記
각주 423) 원문의 무첨소생(無忝爾所生)은 《시경》 〈소완(小宛)〉에 “내 날로 매진하거든 너도 날로 매진하라. 일찍 일어나고 밤 늦게 자서 너를 낳아 주신 분을 욕되게 하지 말라.〔我日斯邁 而月斯征 夙興夜寐 無忝爾所生〕” 하였다. 늘 노력하여 부모를 욕되게 하지 말라는 뜻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