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리 봉사재(奉思齋)
청웅면 소재지에서 강진 방향으로 가다가 우측에 첫 신기마을이 있고, 신기마을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봉사재(奉思齋)는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 종중 재실로 ‘기자가 동쪽 땅에 봉해진지 3,045년째 계해 3월 12일’이라고 써져 있는 것으로 보아 1923년에 지은 것으로 보며, 팔작지붕아래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지붕은 시멘트 기와지붕이다. 재실 안에는 봉사재기 등 현판이 2개가 있고, 주련이 5개가 있다. 대문에는 태극 모양의 그림이 있고, 대문 잠금장치는 거북 모양으로 특이한 점을 표현하고 있다. 거북 모양의 뜻은 재실의 화마를 방지하기 위한 뜻으로 표현된다. 담장은 조선식 담장으로 되어 있다.
우리 9세조와 그 부인 해주 오씨의 무덤 아래 지은 재실이다. 무덤은 백련산 아래 서창 마을 뒤 임방(壬方)을 등진 언덕에 있었다. 백년이 지나도록 재숙(齋宿)할 곳이 없었다. 종숙부(從叔父) 상영(尙榮)이 문장(門長)이 되었는데 당시 옛 묘전(墓田)마저 남아 있지 않게 되자 장차 건축하려고 하였는데 불행히 세상을 떠나셨다. 계부(季父) 문영(文榮)이 드디어 족질(族姪)과 더불어 적대(炙臺)을 세우고 수습하여 몇 년 동안 모은 곡식이 60여 석에 이르렀고 종중(宗中)에서 뜻을 모아 각 호에서 돈 5000을 내어 비로소 공사비용을 마련할 수 있었다.
아! 재실 한 곳 짓는 것이 이와 같이 어려우니 하늘이 정성껏 지키려는 도리에 대하여 반드시 먼저 삼가 봉분을 만들고 사초를 입히고 그 송추(松楸)를 아름답게 가꾸고 수석(樹石)으로 살피고 풍향(豊享)으로 받드는 것이다. 그런 연후에야 재실에서 자손이 재숙할 수 있기 때문에 정성을 지키는 것이며 재실이 있어야 위선(爲先)을 능히 다 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종족이 가난하여 선세(先世)를 위한 일을 하지 못해도 정성을 드리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 정성을 드리는 곳을 반드시 먼저 해야 되는 것은 될 한 가지인데 갖추지 못한 바 있었으니 바로 재실이었으니 앞에 홀로 서 있기도 어려웠다. 먼저 힘써야 할 것을 알지 못하고 외관(外觀)만 일삼으며 제사를 빠뜨리게 되고 무덤가 나무를 말라죽게 하며 집 한 칸 수리하는데 게으르고 자손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이것이 어찌 선조를 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 종족으로 이 재실에 오르는 사람은 더욱 먼저 힘써야 할 바를 아는데 뜻을 두고 정성껏 힘써서 바꾸지도 말고 어지럽히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후일에 선조를 위하려고 한다면 집안의 은감(殷鑑)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때문에 기문을 지으며 생각하노니 여러 부형제(父兄弟)과 더불어 힘써야 할 것이다.
봉사재를 건축한 지 6년이 지난 무진(戊辰) 3월 29일 무오에 긍의(亘儀) 삼가 씀.
齋寔我九世祖妣海州吳氏墓下 所築也 墓在白蓮山下 西倉村後負壬之原 而歷數百年 無齋宿之所 從叔父 尙榮爲門長 時歲舊墓田零餘 將爲營建而 不幸喪逝季父文榮遂與族姪起梡收拾幾年穀至六十餘石 又謀宗中戶出錢五千始得辦功 嗚呼 一齋之難有如是也 天夫守誠之道 必先謹其封莎 美其松楸 樹石以議之 豊享以事之 夫然後乃齋以爲子孫 齋宿之所 故守誠而至於有齋 則爲先之能事 可謂畢矣 今以若貧宗得爲先世未能之事 非不誠思勸矣 而其守誠之所 必先者一有所不備則是齋也 難以孤立於前矣 若乃不知先務而末事 外觀至以落祭呂赫丘木而倦修一屋子之不眼者 則足豈爲先之是稱云乎哉 惟吾宗之登新齋者 尤常知先務之爲志而誠勤無替 無或爲後日爲先家之殷鑑可矣 故敢爲之記而 思與諸父兄弟共勉云爾
奉思齋 建築後六年 戊辰 三月 二十九日 戊午 亘儀謹記
운수(雲水) 고을은 호남의 명승(名勝)이다. 백련산(白蓮山)이 굽이굽이 동쪽으로 내달려 쌍학봉(雙鶴峰)이 돌연히 기운을 모아들여 산수(山水)가 수려하여 감여가(堪輿家)가 길강(吉岡)라고 점지하는 곳이다. 그 아래 조그마한 재각이 있는데 굉걸(宏傑)하지는 않지만 매우 완미(完美)한 재각으로 기와를 얹은 지붕 모서리가 날개를 펴고 나는 듯 소나무와 가래나무 사이에서 휘영찬 모습이다.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반드시 누가 주인이냐고 물을 것이니 바로 완산(完山) 이문영(李文榮)씨의 8세조와 부인 해주오씨(海州吳氏)가 안장된 재사(齋舍)이다.
집안이 본래 청빈한데 어떻게 재실을 짓는 비용을 마련하여 이런 재실을 지었을까? 하늘이 내린 정성이 아니라면 유연(油然)히 힘을 다해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저 사람이 선조를 받드는 절개는 성심(誠心)을 위주로 해야지 재력(財力)은 그 다음인 것이다. 진실로 성심이 있으면 재력이 이르지 못함을 어찌 근심하겠는가! 만약 재력은 남아도 성심이 부족하면 비록 굉걸한 재각에 풍성한 제향을 올린다고 해도 어찌 도리를 다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때문에 왕상(王祥)의 잉어와 맹종(孟宗)의 죽순424)처럼 때가 아닌데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니 지성(至誠)의 소치로 하늘이 필연적으로 응답하신 것이다. 또한 시호(豺猢) 같은 미물(微物)도 능히 보본(報本)의 도리를 알기에 그런 물건으로써 제사를 드리는 것이니 하늘이 주신 양지(良知)를 사람으로서 그만도 못해서야 되겠는가?
아! 우리 종족 문영씨는 대군(大君) 선조 장방(長房)의 후손이다. 호남 고을로 내려온 지 10여세가 지나도록 그 덕을 닦으며 시예(詩禮)의 가르침과 효제(孝悌)의 행실을 실로 가법(家法)으로 전수하였다. 법도 밖으로 벗어나지 않고 완연히 시골의 처사(處士)로 살아서 같은 마을의 종족이 대부분 수신(修身)하며 깨끗한 행실로 주경야독(晝耕夜讀)을 업으로 삼았다. 집은 비록 가난하였지만 선영(先塋)에 대한 일에 있어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묻고 논의하였으며 집에 행랑이 있듯이 무덤에 교사(郊祀)를 지냈다. 매번 비 맞고 서리 맞는 서러움에 처량한 마음으로 슬퍼하며 예로써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재각을 완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씨의 묘사(墓舍)를 세우지 못한 지 오래 되어 걱정스럽고 마음이 어둡고 소심하게 움츠려 들어 충분히 의견을 내지 못하여 미안하였다. 여러 종족이 약간의 재력을 모아서 계해년 봄에 건축을 시작하여 재각에 ‘봉사(奉思)’라는 편액을 걸게 되었다. 대개 선조를 받들고 효를 생각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당시에 효향(孝享)할 뿐만 아니라 후대에 자손으로 하여금 이름을 돌아보고 그 의미를 생각하여 그 뜻과 사업을 이어가서 가업을 발전시키는 도리를425) 다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재각도 영원할 것이니 『시경』에 이르기를, “길이 효심으로 사모하니 효심으로 사모하는 것이 곧 법칙이 되니라.”하였으니 이것을 가리킴이 아니겠는가?426)
병인년 7월 상순에 족손(族孫) 전국자박사(前國子博士) 삼가 씀. 문장(門長) 문영(文榮), 도유사(都有司) 정의(廷儀), 장재(掌財) 기완(起梡)
雲水之鄕 湖南名勝也 白蓮山逶迤東走 而雙鶴峰突然聚氣 山明水麗 爲堪輿家卽占吉岡 而 下有數椽斯齋 制不宏傑 而甚完美 瓦鱗屋角 翼然如飛 輝咉於松梓之間 行路之過此者 必指號而問豈主 則乃完山李文榮氏八世祖 妣海州吳氏壽藏之原齋舍也 家本淸貧 何以辦結構之費 而有此俎豆之所耶 莫非根天之誠 油然而殆竭力所致也 蓋人於奉先之節 誠心爲主財力次之 苟有誠心 何憂乎財力之不逮也 若力有餘 而誠不足 則雖傑舍豊享 何足以稱道哉 故王鯉孟筍非時而發見者 以豈至誠所致 天必然應者也 旦夫豺猢微物也 能知報本之義 以其物而祭獸魚 此亦天賦之良知也 可以人而不如乎 噫吾族文榮氏 大君先祖長房支裔也 流落湖鄕者 十餘世之修闕德 詩禮之訓 孝悌之行 實爲傳授家法 而不逾守繩墨之外 宛然爲一鄕處士 同里諸族擧皆 修身潔行 以耕讀爲業 家雖不貨 若有事先壟 則必詢謨而出議 家有廊而郊有墓 每於雨露霜露之哀 必凄慘怵惕而祭之 以禮享需祭 閣無不完備 唯吳氏之墓舍 未遑者久矣 庸足憂懼洞洞 小心縮縮 未安於足輪議 諸族鳩得若干財 迺於癸亥春 經始建築 遂扁其齋曰奉思 蓋奉先思孝之義也 此不但孝享於當時 使後世子孫顧名思義 繼志述事 克盡堂構之道 則此亦長遠之齋也 詩云永言孝思 孝思維則 其斯之謂歟
丙寅七月上澣 族孫前國子博士 謹識 門長 文榮 都有司 廷儀 掌財 起梡
각주 424) 원문의 王鯉孟筍은 진(晉)나라 때 효자인 왕상(王祥)의 고사(故事)와 오(吳)나라의 효자(孝子) 맹종(孟宗)의 고사를 가리킨다. 왕상은 계모가 병이 들어 한겨울에 잉어〔鯉魚〕가 먹고 싶다고 하자, 강에 나가 옷을 벗고 얼음 위에 엎드리니 얼음이 스스로 녹으며 물속에서 잉어가 뛰어나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맹종은 늙고 병든 어머니가 겨울에 죽순을 먹고 싶어 하자 안타까운 마음에 대숲에 들어가서 슬피 울었는데, 갑자기 땅 위로 죽순 두어 줄기가 나왔으므로 가지고 돌아가서 어머니에게 드려 병을 낫게 하였다고 한다. 425) 원문의 堂構는 긍당긍구(肯堂肯構)의 준말로, 가업(家業)을 이어받아 발전시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서경》 〈대고(大誥)〉의 “아버지가 집을 지으려 하여 이미 설계까지 끝냈다 하더라도, 그 자손이 집터도 닦으려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집이 완성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若考作室 旣底法 厥子乃不肯堂 矧肯構〕”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426) 《시경(詩經)》 〈하무(下武)〉에 “길이 효심으로 사모하니 효심으로 사모하는 것이 곧 법칙이 되니라.〔永言孝思, 孝思維則.〕”라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