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리 영사재(永思齋)
청웅에서 강진 방향으로 가다가 중간에 호국원을 지나 백련리가 있고, 백련리마을을 거쳐 북쪽으로 300m 정도에 영사재(永思齋)가 있다. 영사재는 전주 이씨 재실로 통정공 10세조를 모신 재실로 상영(尙榮)의 10대조부이시다. 상량문을 보면 ‘숭정기원후 5무신 5월초’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908년에 세운 재실이며 문간 또한 단기 4316년이라고 적혀 있어 서기 1983년에 세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집으로 영사재기 현판 1개와 주련이 4개 걸려있다.
묘에 재실이 있는 것은 지당한 것인데 근세 이래로 가분(家墳)과 묘방(墓芳)이 더욱 성대해졌다. 자손(子孫)이 가난하여 겨우 먹고 살고 있지만 경영(經營)에 힘을 쓰지 않을 수 없어서 추모(追慕)하는 정성을 부친다.
운수의 강진(江津) 마을 계좌원(癸坐原) 기슭은 우리 10세조 통정공(通政公)이 안장된 곳으로 세장지(世葬地)가 되면서 우리 이씨가 비로소 남쪽에서 살게 되었다.
통정공의 아들 죽천공(竹泉公)이 학행(學行)이 있어 고을 사람들이 그를 향사하였다.
아! 후손들이 오랫동안 조잔(凋殘)해져 무덤 아래 재숙(齋宿)하는 곳 없이 매년 제사를 모시되 항상 맹동(孟冬)이었고 눈비가 내리면 옷이 젖고 형용이 보잘것없어 황급하게 설행하였으니 그 처량함을 어찌 다하겠는가.
옛날에 어떤 사람이 무덤 옆에 재실을 지어 이런 때를 만나 시제(時祭)의 의식에 따라 제사를 드리는 것에 대해 물었더니 퇴옹(退翁)께서 좋다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무덤 가에 재각이 있는 것이 자손들이 재숙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더욱 없을 수 있겠는가. 이에 앞서 족형 가의대부(嘉義大夫) 경우(璟宇)씨가 무덤 옆에 재실이 없는 것을 항상 개연히 여겨 종족들의 의견을 물어 거의 완성될 무렵 돌아가셨다. 종제(從弟) 한영(漢榮)이 가의공(嘉義公)의 아들 성의(聲儀)와 함께 남기신 계획을 조심스럽게 따라 무신년 봄 비로소 재실을 건축하였다. 규모는 비록 검약하지만 자못 정결하였다. 12년 후인 기미년 가을 온 종족이 재실에 기와를 올리지 못한 점에 대해 말하면서, 묘전(墓田)에서 해마다 나오는 이바지가 얼마 안되지만 밑천으로 삼아 도와서 여러 종족들이 뜻을 내어 기와 70을 구해 얻어 덮을 수 있었다.
또한 우리 집안이 남쪽으로 내려온 지 300여 년이 지나 비로소 무덤 아래 재실 한 채 지었으니 그 문장(門墻)이 누추하다고 할 수는 없었는데 기와까지 올렸으니 완미함을 겸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내가 가난한 종친으로 어려워하자 여러 종친에서 출금(出金)하고 부역(赴役)하여 완성하였으니 대저 선세(先世)에서 미처 하지 못하였던 일로 인하여 후손의 마음 속에 오랫동안 쌍여 있었다. 그래서 여러 종족들이 힘써 선조의 뜻을 이어 마침내 서로 알리게 되었다. 무릇 무덤 아래 재각이 있게 되었으니 추모(追慕)하는 곳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랴.
만약 그런 곳이 있어도 추모하는 정성이 없다면, 그것은 그런 곳이 없이도 더욱 정성을 드리는 것만 같지 못하니 밝은 세상에서 미처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예속(禮俗)이 날로 무너지는 시대를 당하여 후생소년 가운데 제기(祭器)를 구분하여 배열할 수 있고 항렬의 높고 낮음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그래서 한갓 재각 한 채 지어놓고 위선(爲先)의 일을 다 했다고 하면 이것은 옛사람들이 말한 폐학(廢學)이라고 할 만하니 부자(夫子)께서 묘(廟)를 지은 것을 옳다고 하겠는가. 오직 우리 가문의 젊은 사람들은 끊임없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 사업은 종제 문영(文榮)이 가장 애썼다.
경신년 봄 3월 갑자 통정공(通政公) 10세손 상영(尙榮)이 삼가 쓰다.
墓之有齋尙矣 而近世以來 尤盛人家墳墓呀有子孫十數而稍貯擔石者 無不極力經營以寓追慕之誠焉 雲水江津村 癸麓卽 我十世祖 通政公之壽藏也 而因爲世葬之阡 我李之南 始於通政公 公之子竹泉公 有學行而鄕人 俎豆之 嗚呼 雲仍之彫殘久矣 阡下無齋宿之所 每歲一祭時 常孟冬雨雪易降霑服 失容忽遽苟行 其所悽愴庸有旣乎 昔有問構屋墓側而遇如此之時 依時祭儀祭之者 退翁以爲吾矣 因此而知墓之有齋 非特爲子孫齋宿之所 而已矣 其尤可無也 哉先是族兄嘉義璟宇氏以墓無齋恒 切慨然合族 詢謀幾於有成而歿從弟漢榮 乃與嘉義公之子 聲儀恪循遺晝 戊申春始得建齋 制雖儉約頗完潔後 十有二年 己未秋擧宗咸以齋 未瓦爲言乃以墓田 歲供嬴餘爲資助以諸宗出義求得 瓦 七十將 以覆之也 而又以爲吾家之南也 三百有餘年 始得建一屋於墓下 而不可以陋其門墻矣 及其瓦也 開使完義可矣 余以貧宗難之而諸宗 卽又出金赴役以成之 盖先世未遑之事 因仍潜積於後昆 心中者久矣 故也 窃因諸族述先之勤意 有以相告者 夫墓之有齋 不過曰追慕之所而 已矣 若但有其所而 無追慕之誠 是不若無其所 而有其誠之爲愈也 此先行長者 所以未遑於凞世者也 今當禮俗日壤之時 後生少年其能辯俎豆之列 而識齒行之奠者 鮮矣 乃徒然以建一齋爲口先事畢了 則是古人所謂廢學而作夫子廟也 其可乎哉 惟吾宗少輩湥念之哉 此役也 從弟文榮爲㝡力焉
歲庚申春 三月 甲子 通政公 十世孫 尙榮 謹序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