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리 추모재(追慕齋)
청웅에서 강진면 경계를 지나 첫 마을인 신기마을에서 백련산 쪽으로 1.5km쯤 가면 함양박씨 재실인 추모재(追慕齋)가 있다. 상량문에 단기4283년 庚寅 2월 13일 건립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시멘트기와 팔작지붕이며, 추모재기 등 4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추모재(追慕齋)’란 편액은 각을 하지 않고 써져 있는 상태로 박봉희의 낙관이 있다.
추모(追慕)라는 것은 먼 선대의 자취를 쫓아 순임금이 요임금을 그리워 하듯이 후손이 조상을 사모하는 것이다.427) 우리 박씨의 원류는 심히 아득하여 다 기록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 고을에 들어온 것은 십수대이니 만약 실적(實蹟)에 대한 기록이 없다면 뒤에 고증하기 어렵게 되기에 간략하게 말해 두고자 한다.
우리 선조 좌령산원(左領散員) 부군 박득지(朴得止)의 부인 전주 최씨가 세 아들을 데리고 내려와 처음 임실에 거처하였으며 강진면 백련산 동쪽 기슭 임좌원에 묻혔다. 큰 아들 박예(朴隸)는 감찰(監察)을 지냈으며 부인은 순창 조씨인데 정랑(正郞) 조권(趙權)의 딸이다. 무덤은 순창 마흘리(馬屹里)에 합장하였다. 딸 하나를 두었는데 대사간을 지낸 광산 김씨 극유(克忸)에게 시집갔다. 외손이 봉사(奉祀)하였다.
둘째 아들 박정(朴楨)은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부인은 흥덕 장씨이다. 무덤은 덕치면 가곡(柯谷)에 합장하였다.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장자는 수림(秀林)으로 진사(進士)이었고 이분이 박승후(朴承後) 진사(進士)를 낳았다.
둘째는 박창림(朴昌林) 상장군(上將軍)을 지냈다.
셋째는 박기림(朴起林)으로 호군(護軍)과 부사직(副司直)을 지냈다. 부인은 문화 유씨(柳氏) 문함(文咸)의 딸이다. 무덤은 강진면 갈담(葛潭) 잉어(鯉魚) 명당에 합장하였다. 이분은 아들 넷을 낳았는데, 장자는 진사 맹호(孟豪)로 진사 박주(朴주)와 진사 박교(朴嶠), 진사 박기(朴岐)를 낳았다. 딸은 경주 이씨 임(荏)에게 시집갔다. 둘째 박중호(朴仲豪)는 문과에 급제하였고, 셋째는 진사 박계호(朴季豪)이며, 네째는 진사 박승호(朴承豪)로 이분에게는 박윤(朴潤), 박준(朴俊), 청주 한씨 대호군(大護軍) 축(軸)에게 시집간 딸이 있다.
넷째 진사 박종림(朴從林)의 무덤은 재궁동(齋宮洞)에 있으며 이분이 진사 박천호(朴千豪)를 낳았다. 무덤은 같은 곳에 있다.
다섯째 진사 박의림(朴義林)으로 막내가 박평등(朴枰登)으로 사마시와 문과에 입격하여 선교랑(宣敎郞)과 행남원교수(行南原敎授)를 지냈다. 무덤은 청웅면 구상동 손좌(巽坐)에 있다.[원래 옥전 죽방리에 있었다.] 부인은 광산 김씨로 사직(司直)을 지낸 김옥(金阿)의 딸이다. 무덤은 공이 안장된 백호등(白虎嶝) 간좌(艮坐) 언덕이다. 2남 1녀를 두었다.
장자 박현(朴玄)은 어려서 사마시에 등과하여 봉직랑(奉直郞), 군자감(軍資監) 봉사(奉事)를 지냈고 부인은 고령 신씨로 서령(署令)을 지낸 맹주(孟舟)의 딸이다. 무덤은 백련동 선영 아래 임좌원에 함께 안장하였다. 이분이 박훈(朴薰)을 낳았다. 박훈의 호는 목심재(收心齋)로 갑자년에 사마시에 입격하고 기묘년에 ‘근실유행(謹實儒行)’으로 현량(賢良)으로 추천되었다. 정암 조광조의 문인이시다. 또한 ‘탁이효행(卓異孝行)’이 조정에 알려져 호역(戶役)이 면제되고 정려가 내려졌다. 사론(士論)이 계속 일어나 학정서원(鶴亭書院)에 배향되었으며 『기묘명현록』에 그 이름이 실렸다. 부인은 부안 김씨로 판관(判官)을 지낸 김팽석(金彭石)의 딸이며 무덤은 부안에 있다. 광산 이씨로 수찬(修撰)을 지낸 이호선(李好善)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는데 무덤은 선영 아래에 합장하였다.
둘째 박현몽(朴玄蒙)은 선교랑과 풍천교수(豊川敎授)를 지냈다. 부인은 남원 윤씨로 직장(直長)을 지낸 윤계승(尹繼承)의 딸이다. 무덤은 구상동에 합장하였다.[간좌원] 이분이 박번(朴蕃)을 낳았다. 박번의 호는 인덕정(仁德亭)으로 무오년에 사마시에 입격하여 행공주교수(行公州敎授)를 지냈다. 기묘년에 효행과 학술로 현량과에 천거되었다. 호역이 면제되었고 정려가 내려졌으며 학정서원에 배향되었고 『기묘명현록』에도 수록되었다. 부인은 기계 유씨로 내금위(內禁衛)를 지낸 유문손(兪文孫)의 딸이며 무덤은 선영 아래 합장하였다. 딸은 함양 오씨 관찰사 오응(吳凝)에게 시집갔다.
수심재공(收心齋公)은 2남 1녀를 두었다. 장자 박원영(朴元英)은 군자감(군자감) 직장(直長)을 지냈다. 부인은 동복(同福) 오씨로 참봉을 지낸 오자권(吳自權)의 딸이다. 무덤은 선조비(先祖妣) 최씨의 무덤 오른쪽 쌍분[雙兆]으로 안장하였다. 둘째는 진사 박원개(朴元凱)이며 딸은 전주 이씨 이원(李轅)에게 시집갔다.
인덕정공은 2남 2녀를 두었다. 장자는 박수해(朴壽海)이며 부인 남원 양씨이며 무덤은 구상동에 합장하였다. 둘째는 박수건(朴壽乾)이고 무덤은 같은 곳에 있다. 딸들은 각각 양천 허씨 귀문(貴文)과 연안 김씨 광국(匡國)에게 시집갔다.
직장공(直長公)은 3남 4녀를 두었다. 장자는 박효달(朴孝達)이며 무덤은 백련동 왼쪽 기슭에 있다. 둘째 박충달(朴忠達)은 군자감 봉사를 지냈으며 부인은 청주 한씨로 호조참의를 지낸 한전(韓傳)의 딸이며 무덤은 같은 곳에 합장하였다. 막내 박순달(朴順達)의 호는 저정(楮亭)이다. 타고난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고 강개하며 절의가 있었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군자감 참봉으로서 의병을 일으켜 극념당(克念堂) 김천일(金千鎰)과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과 더불어 함께 전란 중에 순절하였다. 강진면 강잠(康岑) 자좌(子坐)에 안장하였다. 병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절의삼강록』에 게재되었다. 부인은 경주 이씨로 주부(主簿)를 지낸 이종문(李宗文)의 딸이다. 무덤은 합장하였다. 딸들은 각각 경주 김씨 김취련(金就鍊), 도강 김씨 원모당(遠慕堂) 김후진(金後進), 임성회(林成檜), 임성백(林成栢)에게 시집갔다.
봉사공(奉事公)은 세 아들을 두었다. 장자 박사온(朴思溫)은 봉사(奉事)에 임명되었다. 무덤은 같은 곳에 있다. 둘째는 박사량(朴思良)인데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무덤은 청웅면 향교동 자좌에 있다. 막내는 박사공(朴思恭)이며 무덤은 청룡리(靑龍里) 서쪽 기슭에 있다.
저정공(楮亭公)은 세 아들을 두었다. 장자는 박사묵(朴思默)이다. 둘째 박사숙(朴思淑)은 부군이 순절하는 모습을 보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형제가 다시 의려(義旅)를 모았다가 전란에서 순절하여 충효를 둘다 온전하게 하였다. 이사익(李思益)의 호는 동고(東皐)이다. 전란이 끝난 시기에 가법(家法)을 근수(謹守)하였다. 매년 선공(先公)의 기일(忌日)에는 피를 토하며 흐느끼며 식음을 물리쳤다. 방백(方伯)이그 충문(忠門)의 효를 안타깝게 여겨 여러 차례 천목(薦目)에 올랐다. 마침내 은덕(隱德)하여 출사하지 않았다. 무덤은 강잠(康岑)의 선영 아래 있다. 그 나머지 분역(墳域)은 분파(分派)에서 수호(守護)하고 있다.
아! 한 집안에서 삼강(三綱)이 세상에 나왔다. 삼충구효오열(三忠九孝五烈)에 이르기까지 많아 여기에 전부 세세히 기록할 수가 없다. 품은 추감(追感)이 어찌 감히 말로 하겠는가. 오직 우리 가문이 충효(忠孝)를 이어가고 가업을 이어가며 닦아 화목하게 지내는 가풍을 삼가 힘써 없어지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무오년 9월 상순 후손 종헌(琮憲)이 삼가 지음 유사 혁근(爀根) 정두(廷斗) ▣▣ 글씨를 씀.
追慕者追遠代之蹟而後孫 羹墻之慕寓焉 我朴之源流甚遠 不能盖錄 然入玆鄕十數代 若無實蹟之記則 難以證後 故略言之 惟我先祖 左領散員 府君諱得止 配全州崔氏 率三子始居任實 墓江津面白蓮山 東麓 壬坐 長曰諱隸 監察 配淳昌趙氏 正郞 趙權女 墓淳昌馬屹里合兆 只有一女 適光山金氏 大司諫諱忸 外孫奉祀 次曰諱楨縣監 配興德 張氏 墓德峙面柯谷合兆 有五子 長諱秀林進士 寔生諱承後進士 次諱昌林上將軍 諱起林護軍 副司直 配文化柳氏文咸女 墓江津面葛潭鯉魚明堂合兆 寔生四子 長諱孟豪進士 寔生諱주進士 諱嶠進士 諱岐進士 女慶州李氏諱荏 次諱仲豪文科 次諱季豪進士 次諱承豪進士 寔生諱潤 諱俊 女淸州韓氏 大護軍諱軸 四諱從林進士 墓齋宮洞 寔生諱千豪進士 墓上同 五諱義林進士 季曰諱枰登 司馬兼文科宣敎郞行南原敎授 墓靑雄面九相洞 巽坐【元玉田 竹坊里】配光山金氏 司直 諱阿女 墓公兆白虎嶝艮坐 有二子一女 長諱玄 童登司馬 奉直郞 軍資監 奉事 配高靈申氏署令孟舟女 墓白蓮洞先塋下任坐合兆 寔生諱薰 號收心齋 甲子登司馬 己卯以謹實儒行 薦賢良科 卽靜菴趙先生門人也 且以卓異孝行 事聞于朝 給復命旌 士論繼起 俎享鶴亭書院 昭載己卯賢錄 配扶安金氏 判官 諱彭石女 墓在扶安 配鑛山李氏修撰諱好善女 墓先塋下合兆 次諱玄 蒙 宣敎朗 豊川敎授 配南原尹氏 直長繼承女 墓九相洞合兆 寔生蕃 號仁德亭 戊午中司馬 行公州敎授 己卯以孝行學術 薦賢良科 以爲旌復俱享鶴亭書院 亦載己卯名賢錄 配杞溪兪氏 內禁衛諱文孫女 墓先塋下合兆 女咸陽吳氏 觀察使諱凝 收心齋公有二男一女 長諱元英 軍資監直長 配同福吳氏 參奉諱自權女 墓先祖妣崔氏墓右雙兆 次諱元凱進士 女全州李氏諱轅 仁德亭有二子二女 長諱壽海 配南原楊氏 墓九相洞合兆 次諱壽乾 墓上同 女陽川許氏諱貴文女 延安金氏諱匡國 直長公有三男四女 長諱孝達 墓白蓮洞左麓 次諱忠達 軍資監奉事 配淸州韓氏 戶曹參議諱傳女 墓上同合兆 季諱順達 號楮亭 天性俊邁慷慨有節 當壬辰之燹 以軍資監參奉 應募擧義 與克念堂金公千鎰 霽峰高公敬命 同殉于戰亂 ?葬于江津面康岑子坐 贈兵曹參判 載節義三綱錄 配慶州以氏主簿諱宗文女 墓合兆 女慶州金氏諱就鍊 道康金氏遠慕堂諱後進 女林成檜 女林成栢 奉事公有三子 長諱思溫奉事 墓上同 次諱思良通政大夫 墓靑雄面鄕校洞子坐 季諱思恭 墓靑龍里西麓 楮亭公有三子 長諱思默 次諱思淑 見先父君死節 不勝憤恨 兄弟更募義旅 亦殉于戰亂 忠孝雙全 季諱思益 號東皐 搶攘之餘 護守家法 每當先公忌日 泣血却食 方伯憐其忠門之孝 屢登薦日竟隱德不仕 墓康岑先塋下 其餘墳域分派 守護
嗚呼 一門 三綱聞世出焉 至於三忠九孝五烈之多 而擧未細錄于此 追感之懷曷勝敢言 惟願吾族克紹忠孝緖業式修敦睦家風恪勤勿替云
歲戊午 九月 上旬 後孫 琮憲 謹識 有司 爀根 廷斗 ▣▣ 書
증자(曾子)가 이르기를, “부모의 장례를 신중하게 치르고 조상을 추모하면, 백성들이 모두 두터운 덕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자손이 많아서 비록 천 만인에 이른다고 하더라도 그 근본은 하나이다. 천만인이 한 가지에 정성을 돌린다면 추모하는 마음이 아무리 천만년이라도 하루와 같다. 화목하는 마음은 비록 천만인이라도 한 사람 같으니 그 덕이 중후(重厚)하지 않겠는가!
학고(鶴皐)의 서쪽, 연산(蓮山)의 동쪽은 우리 선조(先祖)와 그 부인 전주 최씨의 유택지(幽宅地)이며 대대로 계속 안장된 곳이다. 묘 아래 오래된 재각(齋閣)이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기울고 무너져 비마저 새서 위로는 비가 몰아치고 바람이 들이치는 염려를 면할 수 없었다. 여러 종족이 의견을 내서 보수하였다. 오래된 기둥을 새로운 재목으로 바꾸고, 처마가 새서 새 띠로 덮었다. 전보다 다섯 배나 깨끗하고 청결해져 더욱 유사(有司)가 사람을 얻었음을 알 수 있겠다. 이름을 걸기를, ‘추모(追慕)’라고 하였다. 대개 증자에게서 취한 뜻이다. 다만 봄이슬 가을서리가 내리는 철에 우리 자손들이 무덤을 살피고 쓸며 모든 소목(昭穆)이 많고 성대하구나.428) 추모하는 정성이 유연(油然)하여 당헌(堂軒)에 가지런히 늘어서서 형이라고 하고 동생이라고 하니 즐겁고 기쁘구나.
돈목(敦睦)하는 가풍이 왕성하게 일어나서 ‘백성들이 모두 두터운 덕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이라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물의 흥망성쇠가 사물의 이치이니 역에는 건곤(乾坤)이 있고 건곤도 늙지만 천지마저 오히려 장구하지 못한데 하물며 사람이 만든 재실(齋室)이겠는가! 부디 힘써야 할 것이다. 후손들이 잘 이어받아 쫓아야 할 것이다. 드러나지 않은 선조의 뜻을 아름답게 추모하며 조상의 숨은 덕을 밝혀야 할 것이다. 서까래 하나 하나 변질되면 지붕을 완전하게 할 것이며 소나무 한그루 가래나무 한그루 정성껏 마련하여 보호하고 길러야 할 것이다. 항상 변하지 마음이 있어야 하니 학고와 연산과 더불어 천년토록 무궁할 것이다.
무오년 9월 상한(上澣)에 후손 홍근(泓根)이 삼가 쓰다. 문장(門長) 준근(準根) 유사(有司) 일근(泆根), 정모(廷謨) 간사(幹事) 정두(廷斗), 종헌(琮憲)
曾子曰愼終追遠 民德歸厚 子孫之多 雖至千萬人其本則一也 以千萬人歸誠于一則追慕之心 雖千萬年一日也 惇睦之情 雖千萬人一身也 其德不重 且厚歟鶴皐之西 蓮山之東 卽我先祖妣 全州崔氏幽宅之地 而屢世繼葬之所也 墓下舊有齋閣 歲月滋久欹漏傾頹未免上雨旁風之虞矣 諸宗出義修補棟之舊易以新材檐之漏 盖以新茅 瀟洒淸淨 倍蓗於前益知有司之得 人焉 因揭號曰追慕 盖取曾子之意也 第當霜露之節 惟我子孫 瞻掃封瑩 咸昭咸穆洋洋焉 濟濟焉 遠慕之誠油然而生序列堂軒曰 兄曰弟怡怡也 嬉嬉也 惇睦之風 藹然而發 民德歸厚 寔在於此矣 然而物之盛替物之理也 易有乾坤而乾坤亦老天地猶不能長久 况人所作爲之齋屋乎 勗哉後昆克紹而趾美追先志之徵闡祖德之幽一榱一椽隨渝而完葺之一松 一楸設誠而 護養之常有勿替之心 則與皐之鶴山之蓮將無窮於後千秋云爾
戊午 九月 上澣 後孫 泓根 謹記 門長 準根 有司 泆根 廷謨 幹事 廷斗 琮憲
운수면(雲水面) 옥천의 북쪽에 산이 하나 있는데 울창하게 우뚝 서 있는 백련산(白蓮山)이다. 이 산은 우리 박씨의 선조 좌령공(左領公)과 그 부인 최씨가 재난을 피하여 내려와 사셨던 곳이다. 세대가 쌓여 내려오면서 재사를 중건하였는데 그 사실(事實)에 대해서는 전에 적어 잘 갖추어 두었기에 다시 쓸 필요는 없겠다.
산의 동쪽 기슭에 홀로 우뚝한 빼어난 것이 선조와 그 부인 최씨께서 친히 정한 유택지(幽宅地)이다. 이후 증손, 현손 후손들이 잇달아 안장된 곳이기도 하다. 수호하는 사람들이 오백여 년 시간 속에 여러 무덤과 재각이 기울어져 무너지는 것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후손들이 통탄하였다.
기축년 가을에 중건하자고 발의하여 모든 종족이 힘을 다해 의연금을 내어 경인년(於庚寅) 연초에 공사를 시작하여 6월에 마치었으니 어찌 부지런히 일한 유사(有司) 홍린(泓麟)의 정성과 종규(宗規)를 엄정하게 세운 대공(大功)이 아니겠는가!
가장 한스러운 것은 홍린이 일찍 세상을 떠나 버렸고 기와마저 충분하지 못해 3년이 되지 않아 물이 새서 스며드는 근심이 생긴 것이다. 유사 홍룡(泓龍)이 즉시 회의를 열어 소나무를 팔아 마련한 6만원을 기본으로 민의원(民議院) 세경(世徑) 특별히 10만원을 내고, 각지에 거주하는 여러 후손들이 형편에 따라 성의를 내어 재실 공사를 마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모두 추모하는 지극한 정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뒤를 이어갈 자손들도 뜻을 계승하는 정성으로써 힘써 잘 관리한다면 이 재각은 영원할 것이리라.
단기 4288년 을미 10월 상한 후손 영선(泳善)이 삼가 짓다. 문장(門長) 성현(聖賢) 도유사(都有司) 홍룡(泓龍) 고문(顧問) 홍구(泓龜), 상엽(湘燁), 세남(世南) 유사 용철(容喆), 재남(在南), 창헌(昌憲), 순연(順然) 泓▣, 동일(東泆), 동용(東龍), ▣▣, 華▣
雲水面 玉川之北 有一山鬱然特立者 白蓮山也 玆山惟吾朴氏先祖左領公 夫人崔氏避禍棲息之所也 世代之籍縷來歷 齋舍之重建事實前記之述備也 不必疊床 而山之東麓兀然深秀者 先祖妣 夫人崔氏自占幽宅之地 而伊後孫曾玄蓮葬之處也 守護者五百餘年 星霜累度齋閣 未免傾頹 實是雲仍之痛歎 己丑秋 以重建發議 僉族盡力捐金 始役於庚寅歲初 六月而工訖 此豈非有司泓麟之誠 勤嚴立宗規之大功哉 最恨者泓麟 已爲蚤世 瓦不充分 未三年而有滲漏之患 有司泓龍 卽開會議基 以賣松金六万圓 而民議員世徑 特出十万圓 各居諸孫隨分出義 齋役乃得完了 此皆出於追慕之至誠也 後之子孫亦以繼志之誠 勉黽嗣葺 則庶斯齋之不杇矣
檀紀 四二八八年 乙未 十月 上澣 後孫 泳善 謹識 門長 聖賢 都有司 泓龍 顧問 泓龜 湘燁 世南 有司 容喆, 在南, 昌憲, 順然, 泓▣, 東洙, 東龍, ▣▣, 華▣
아! 우리 16세조 좌령산원공(左領散員公)이 여말(麗末)에 태어나셨는데 충의(忠義)는 일월보다 밝았고 지조는 빙설(氷雪)보다 늠름하였는데 현달하지 못하고 생을 마치셨다. 그 부인 최씨가 아들들을 데리고 임실군 강진면 백련산 아래에 거처하였다가 청웅면 구고리(九皐里)로 옮기셨다.
지금 그 유지(遺址)가 눈앞에 완연하게 있으니 자손된 자로 누군들 공경함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부인의 무덤은 백련사 동쪽 기슭에 임방(壬方)을 등진 언덕에 있다. 모두 오백여 년을 지켜오다 보니 재사(齋舍)는 성상(星霜)을 겪으면서 거의 기울어 무너졌다. 후손들이 각처에 흩어져서 중건하고자 하였으나 그 뜻을 미처 이루지 못하였다. 작년 가을 묘제(墓祭)를 지낼 때 문장(門長) 및 용식씨(庸植氏)와 몇 사람이 그 일에 대해 앞장서서 말하였는데 온 종족이 즐거이 따르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이것이 어찌 오래전부터 추모하였던 똑같은 마음이 아니겠는가? 서로 다투듯이 앞장서서 힘을 다해 연금을 내고 송추(松楸)를 내놓았다. 연초에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몇 개월 되지 않아 공사를 마쳤다. 아무리 물건이 있으면 성사되지 않을 수 없겠지만 정성 없이는 성사되지 않는 법이다. 족형(族兄) 홍린(泓麟)씨가 아니었다면 이 재각을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홍린이 유사의 책임을 담당하여 바야흐로 이렇게 바쁜 농사철에 개인적인 일을 돌아보지 않고 엄직하고 규모있게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았다. 이것은 진실로 깊이 추모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후인들은 진실로 그 뜻을 계승하여 힘쓰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이 재각의 이름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불초(不肖)도 후손으로서 비록 그 발자취를 쫓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 성심(誠心)에 감동하여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어서 삼가 위와 같이 쓴다.
경인년 4월 하순에 후손 홍래(泓來) 삼가 적음 문 장(門 長) 박성희(朴聖熙) 도유사(都有司) 박홍린(朴泓麟) 발기인(發起人) 박병헌(朴炳憲), 박홍구(朴泓龜), 박용식(朴庸植), 박홍두(朴泓斗) 박동교(朴東敎), 朴▣▣, 朴▣▣, 박세남(朴世南), 박재희(朴在熙) 朴泓龍, 박용철(朴容喆), 박병문(朴炳文)
嗚呼 惟我十六世祖 左領散員公 出於麗末 而忠義昭乎月 節操凜於氷雪 而身不容顯跡而終 夫人崔氏率二子焉 任實郡江津面白蓮山下 後徙靑雄面九皐里 今其遺址 宛在目前 爲之子孫者 孰不起敬也哉 夫人墓在白蓮山東麓 負壬之原 守護五百有餘年 而齋舍累經星霜 幾至傾頹 雲仍散在各處 見欲重建有志未遑矣 昨秋墓祭時 門長及庸植氏數人 倡言其事 而僉族無不樂從 此豈非追慕之夙所一般者哉 乃相爭先盡力捐金 又放松楸補其不足 始役於歲首 不數閒而訖工 雖曰有物則無不可成 無誠亦不能就 若非族兄泓麟氏 此齋幾乎不成 泓麟擔當有司之責 方此農殷 不顧私事 嚴直規模 終始如一 此乃寔出於追慕之源也 後人苟能繼其志而 黽勉不己 則此齋之名永爲不杇也 不肖亦苗裔 而雖不能追踵感其誠心 不能無一言 而謹記如右
歲庚寅 四月 下澣 後孫 泓來 謹撰 門長 朴聖熙 都有司 朴泓麟 發起人 朴炳憲, 朴泓龜, 朴庸植, 朴泓斗, 朴東敎, 朴▣▣, 朴▣▣, 朴世南, 朴在熙, 朴泓龍, 朴容喆, 朴炳文
각주 427) 원문의 갱장(羹墻)은 어진이를 사모하는 말이다. 《후한서(後漢書)》 이고전(李固傳)에, “순(舜)이 요(堯)를 사모하여, 앉아 있을 적에는 요 임금을 담에 뵙는 듯하고, 밥 먹을 적에는 요 임금을 국에서 뵙는 듯했다.” 하였다. 428) 昭穆) :: 주(周)나라 문왕(文王)과 아들 무왕(武王)이 소목(昭穆) 관계를 이루며 태묘(太廟)에 봉안된 차례를 말함. 소목은 종묘 등 사당에서 적용하는 신주의 배열 순서로 왼편은 소(昭), 오른편은 목(穆)이라고 하는데, 이를테면 아비가 소(昭)이면 아들은 목(穆), 손자는 소, 증손은 목으로서 서로 엇갈리게 배열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