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곡리 서륜재(叙倫齋)
이 재실은 덕치면 사곡리 자경동에 있으며 경주 이씨(慶州 李氏)종중의 재실이다. 무인년 봄에 묵은(黙隱) 이규상(李奎祥)이 비로소 완성하고 현판을 썼다.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지붕은 함석으로 이어져 있다. 내실에는 6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서윤재는 경주이씨 국당공(菊堂公) 이천(李蒨)의 11세손 반우공(飯牛公), 서계공(西溪公), 청송공(靑松君)의 삼형제를 모신 재실이다. 아버지는 숭문원(承文院)과 내자시(崇文內資寺) 주부(主簿) 묵재공(默齋公)이시며 어머니는 전주황씨로 외조는 진사(進士) 황응정(黃應井)이다. 본 재실은 1853년에 창건하였으나 1918년에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었고, 4년 후인 1922년에 중건하였으나 1935년에 큰 불이 나서 다시 소실되었다. 조국이 광복된 후 1947년에 자손들이 정성과 노력을 모아서 자경촌(自耕村) 앞에 재중건하였으나 자손들의 간곡한 청으로 1985년에 선산 아래로 이건하여 1986년 3월에 낙성하였으니 후손들은 수호하고 보존할 일이다.
반우공(飯牛公)
공의 이름은 이경(李經)이고 자는 권중(權仲), 호는 반우공(飯牛公) 처사이다. 부인은 경주정씨(慶州鄭氏)로 참봉공(參奉公) 정희현(鄭希賢)으로 딸이다. 후사를 두지 못하여 조카 정연(鼎然)을 입계하셨다. 공은 1558년 묵재공(默齋公)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11세 때에 부친상을 당하여 상례(喪禮)에서 모든 예절을 엄격히 하였다. 영특한 재질로 수학하고 강론하여 문장을 떨치셨다. 1589년 기축년 옥사로 인하여 평안북도 위원(渭原)으로 유배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귀향할 수 있는 은전을 입었다. 정유재란 후 청웅면 구고리에 반우당(飯牛堂)을 건립하여 영재들을 기르며 강론을 펼치셨다. 1645년에 향년 88세로 돌아가시니 사곡리 당고개[堂峙] 갑좌원(甲坐原)에 합장으로 모셨다.
서계공(西溪公)
공의 이름은 이위(李緯)이고 자는 찬중(粲仲)이고 호는 서계공으로, 예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부인은 청주한씨로 한충헌(韓忠獻) 어모장군(禦侮將軍)의 따님이며, 3남1녀를 두셨다. 장남은 이두연(李斗然)이고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차남은 이정연(李鼎然)【백부에게 출계함】으로 장령에 증직되었고, 삼남은 이옥연(李玉然)으로 별좌(別坐)를 지냈다. 장녀는 동래인 정원봉(鄭元鳳)에게 시집보냈다. 공은 1562년 묵재공의 차남으로 출생하여 영특한 자질로 수학하고 강론하여서 문장을 떨치셨다. 기축옥사로 인하여 함경북도 회령(會寧)으로 유배되었다가 임진왜란때 귀향하게 되는 은전을 입었다. 병자호란을 당해서는 아들 이두연에게 의병을 일으켜 조국의 위난에 분연히 일어나라고 엄명하였다. 1638년에 향년 77세로 돌아가시니 사곡리(沙谷里) 소태곡(小台谷) 갑좌원(甲坐原)에 모셨다.
청송공(靑松公)
공의 이름은 이강(李綱), 자는 장중(張仲), 호는 청송공으로 내자시(內資寺) 봉사(奉事)를 지냈다. 부인은 강진안씨(康津安氏)로 안문우(安文宇)의 따님이시다. 장남은 이시연(李時然)이고 참봉을 지냈고, 차남은 이성연(李省然)으로, 형제를 두었다. 공은 1568년 묵재공의 3남으로 태어나 영특한 자질로 수학하고 강론하여 문예를 두루 통달하였고, 효제와 충신의 독실함으로 고을사람들의 칭송을 받으셨다. 기축옥사로 인하여 형님 반우공(飯牛公)과 둘째형 서계공(西溪公)께서 유배되시자 몸소 유배소에 가서 형님들의 시중을 들었는데 한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셨다. 1634년 향년 65세로 돌아가시니 사곡리(沙谷里) 산막곡(山幕谷) 오좌원(午坐原)에 모셨다.
서기 1986년 병인 3월 일 서계공 12세손 이상탄(李相坦) 삼가 지음.
도유사 이상모(李相謨) 유사 이부형(李富炯) 이상윤(李相允) 이상연(李相演) 이상수(李相洙) 이종기(李鍾基) 이종수(李鍾洙)
城南二月問春遲 성남쪽에서 이월에 봄이 더디오냐고 물으니 花樹湥湥舊蔭垂 꽃나무에 돌돌히 옛 그늘 드리우네 虎嘯空山山下靜 호랑이 빈 산에서 읊어도 산 아래는 고요하고 龍吟大海海中奇 용이 큰 바다에서 읊어도 바닷속은 기이하네.
石性看人人可石 바위의 성정으로 사람을 보면 사람도 바위가 될 수 있고 詩心聽鳥鳥能詩 시 짓는 마음으로 새소리 들으면 새도 시를 짓을 수 있으리 先賢遺蹟皆如此 선현이 남기 흔적이 모두 이와 같으니 幸望吾宗合無期 우리 종족이 모두 기약(期約) 없기를 바랄 뿐이다.
정미년 3월 어느날 후손 극상(克相) 삼가 지음
아! 저 호남의 운수현(雲水縣) 서쪽에 있는 성수산(聖壽山) 아래 은덕군자(隱德君子)의 월성(月城)의 후손으로 세 선생이 있었으니 맏이는 반우(飯牛)이며 둘째는 서계(西溪)이고 막내는 청송(靑松)이다. 맏이로구나, 둘째로구나, 막내로구나. 책상을 잇닿아 학문을 강마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려졌는데, 사람들이 ‘연벽(連璧)’429)이라고 칭송하였다.
선조[穆陵] 기축(己丑)의 재앙에 반우공(飯牛公)은 관서(關西)의 위원(渭原)에 유배되었다. 서계공(西溪公)은 동강(東岡) 김공(金公)과 더불어 함께 관북(關北)의 회령(會寧)에 유배되었다. 함께 온갖 고생을 하였으나 사면(赦免)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두문(杜門)하여 강도(講道)하며 후학(後學)을 장진(獎進)하며 청절(淸節)로써 삶을 마쳤으니 편안한 마음으로 분수를 지키며 천명을 깨달은 유현(遺賢)이 아니겠는가?
가만히 그 ‘백중계(伯仲季)’ 반우와 서계와 청송공의 무덤이 사곡(社谷) 구내 한 눈에 서로 보이는 땅에 있으니, 아! 태어나서 같이 먹고 잤는데 죽어서 이웃한 곳에 묻혔으니 어둡지 않는 정령들이 살았거나 죽었거나 차이가 없으니 흔연히 세상에 있을 때와 같구나.
그러나 돌아보니 세 분을 모신 무덤 아래 제사음식을 나눌 곳이 있어야 하는데 미처 겨를이 없었고 힘이 미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세 선생이 살아계셨을 때 우애(友愛)가 돈독하여 ‘이장(二藏)’라고 할 수 있으며 여러 자손이 누대로 경건하게 받드는 도리로 일체(一體)가 되었으니 구분하여 재실을 따로 세울 필요가 없었으므로 옛날에 오산공(五山公) 정규(廷奎)가 창건할 때 결정하였는데 결론을 맺지 못하였다. 그러나 고종 무인년 봄에 묵은공(默隱公)의 규상(圭祥)씨가 자경동(自耕洞)에 영건(營建)하고 ‘서륜(敍倫)’ 두 글자로 편액한 것이 이런 것이 아니지 않는가? 아! 이 재각을 변환하는 것이 어찌 번거롭겠는가? 창건 이후 여러 차례 잿더미가 되었으니 이것도 운수 때문에 그런 것인가?
정해년 봄에 봉우(逢雨), 근상(根相)과 상희(相僖)가 다시 중건하자는 뜻으로 여러 종친들과 의논하고 재물을 모아 공사를 시작하였다. 때마침 한국전쟁[庚寅之亂]이 일어나 힘이 미칠 겨를이 없었고 구애받는 일이 많았다. 경인년부터 지금부터 거의 20년에 이르렀는데,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430) 그 공역을 폐지할 수 없었다. 때문에 상유(相維)가 발기하여 공사를 계속하니 뭇 논의가 하나되어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한 나머지 전후에 미비했던 점을 차차 완성할 수 있었으니 누군들 뜻이 있어도 일을 마침내 이루지 못하겠는가?
어느날 상희군이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였는데 병폐(病廢)한 내가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 전말(顚末)에 대해 간략하게 글로 사실을 기록할 뿐이다. 오직 바라는 것은 이 재각에 오르는 모든 종족들이 그 이름을 돌아보고 그 뜻을 헤아려 극히 효제(孝悌)하여 그 조상을 욕되게 하지 않고 도리에 합당해야 할 것이다. 진실로 혹시라도 그렇게 된다면 아마도 선조의 덕에 잃게 할까 두렵다. 모두 서로 힘써야 할 것이다.
융희 기원후 정미 3월 동종(同宗) 후손 규하(圭厦) 삼가 씀.
猗彼湖南之雲水縣 西聖壽山下 有隱德君子之月城后 三先生者存焉 伯曰飯牛 仲曰西溪 季曰靑松 伯兮仲兮季兮 聯床講劘之學 弁著處世 時稱連璧云 穆陵己丑之禍 飯牛公 配于關西之渭原 西溪公與東岡金公 同謫關北之會寧 俱苦▣▣ 及其蒙宥而還山也 杜門講道 獎進後學 淸節以終 此非安分知命之遺賢也歟 窃念其伯仲季飯牛西溪靑松之墓 在於沙谷區內 一眸相望之地 噫 生而居同爨之室 歿而葬互隣之域 其不昧之靈 想亦無間於存 歿而欣然 若在世之日矣 然所三位墓下 固當有分飯之家舍 而未遑者 不但事力之不逮 三先生當年友愛之篤 可謂二藏而諸子孫累世虔奉之道 便是一軆 不必返分而各設也 往昔五山公廷奎氏 卽創始之▣ 有定而未果 高宗戊寅之春 默隱公圭祥氏 營建于自耕洞 扁以敍倫 二字者亦非此也歟 嗚呼 斯齋之變換 何其煩也 創建以後 累入於灰燼 是亦運之所以然耶 丁亥年春間 逢雨根相相僖 以再重建之意 詢謀諸宗 鳩財起工 而時値庚寅之亂 力不暇及事 多拘碍亦勢也 今距 庚寅殆近卄裁功虧一簣之力 不可廢止也 所以相維發起續工衆議 家合竭力殫誠之餘 前後未備次第就完 孰爲有志 事不竟成也 日相僖君 徵記於余 病廢人事 何敢當也 略敍顚末 久可云乎 記實而已 惟望僉宗登斯家也 顧名思義克敦孝悌 無忝厥緖 允合道理 而苟或及是 則恐有損於先德矣 盖相勉勗哉
隆熙 紀元後 丁未 三月 日 同宗 後孫 圭厦 謹書
敘倫齋設昔何天 서윤재를 그 옛날 어느 하늘가에 세웠나? 特爲牛西飛位阡 특히 반우(飯牛)공과 서계(西溪)공을 배향한 지 오래인데 往者廢無餘夢幻 옛날에 폐지되어 덧없이 남김 없었는데 今焉輪奐告功竣 지금에는 크고 아름다운 건물을 짓고 낙성을 고하네.431)
弟兄同竄一千里 형제들이 천리 같은 곳에 귀향 갔는데 世代已經三百年 세대 이미 3백년이 지났구나. 顧我諸宗相勉義 우리 여러 가문을 돌아보니 서로 의로 힘쓰리니 登斯孰不慕其先 이 곳에 오르는 자 누군들 그 선조를 사모하지 않으리.
정미년 3월 일 서계공 12대손 상유(相維) 삼가 지음
5. 사곡 서윤재 중건 유사기(敘倫齋 重建 有司記)
재각의 이름을 ‘서윤(敘倫)’이라고 한 것은 조상을 추원(追遠)하고 족친(族親)들이 윤리를 펴라는 뜻에서 그렇게 지은 것이다.
우리 선조 주부(主簿) 묵재공(黙齋公)께서 서울을 떠나 남쪽으로 옮기시고 운수현 구고리(九皐里)에 기틀을 여셨다. 공은 세 아들을 두셨는데, 큰아들 반우공(飯牛公)의 이름은 경(經)으로 처사(處士)로 일컫어졌으며, 둘째 서계공(西溪公)의 이름은 위(緯)이며 예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막내 청송공(靑松公)의 이름은 강(綱)이며 관직은 봉사(奉事)를 지냈다.
서계공의 큰아들은 이름이 두연(斗然)이고 호는 정리당(靜履堂)이며 도헌(都憲)을 역임하였다. 서계공은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앞장서서 의병을 일으켜 남한산성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화친이 성사되었다는 소식에 눈물을 머금고 오래오래 은둔하며 살 뜻을 품고 사곡(沙谷) 성수산(聖壽山)으로 돌아와 은거하였다가 그대로 머물렀다. 삼형제 반우공, 서계공, 청성공의 무덤이 사곡의 당고개, 소태산(小台山) 막곡(幕谷)에 있으니 지금 300여 년이 지나 분향(分享)할 재사(齋舍)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중엽 이래로 세덕(世德)이 알려지지 않고 가업(家業)마저 부진(不振)하여 재각을 영건하는 일에 결실을 맺지 못하였으니 여러 해를 지나오면서 세 집안의 후예들이 어찌 개탄하며 한스럽지 않았겠는가?
지난 고묘(高廟) 무인년에 백증고(伯曾考) 묵은공(黙隱公)이 창건(創建)한 이후에 두 차례 잿더미가 되었으니 크고 아름다운 건물을 낙성하기까지 얼마나 많이 어려웠겠는가? 근래에는 재력이 미치지 못하여 세월이 경과하였는데 정해년 봄 무렵 문중의 논의가 일치되어 종숙(從叔) 봉우(逢雨)와 족형(族兄) 근상(根相)과 내가 여러 종친들과 더불어 의논하여 공사를 시작한 이후에 공사를 마치지 못하였는데 한국전쟁[庚寅之亂]을 당해 몇 년 중단되었다. 사백(舍伯) 상유(相維)가 발기(發起)하여 공사를 이어갔다. 모든 사람이 놀랍게도 힘을 다해 드디어 성취하였으나 그 규모가 미흡을 면하지 못하였다. 오늘 이후에 이 재각의 낙성을 보게 되었으니 세대를 이어가며 보존해야 할 것이다. 이 재각이 불후하리니 오로지 여러 종친의 공력이다.
모름지기 온 집안이 선조를 추모하는 마음은 영원토록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위로는 선조가 남기신 은택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족친들이 윤리를 펴면서 돈독하게 지내야 할 것이니 이 재각을 창건한 뜻은 모두 그 가운데 있다. 낙성되었기에 감히 그 경위에 대해 간략하게 적어둔다. 이에 유사(有司)를 기록하고 그 이름을 표기하여 오래도록 전하니 뒤에 올 후손을 기다리노라.
정미 3월 일 후손 상희(相僖)가 삼가 기록한다.
유사록(有司錄) 도유사(都有司) 봉우(逢雨) 부유사(副有司) 근상(根相) 규발(圭勃) 병우(秉雨) 총무(總務) 상희(相僖) 감재(監財) 종덕(鍾德), 상연(相演), 상수(相洙) 감동(監董) 상순(相順), 도상(導相), 상호(相浩), 상만(相萬), 주형(珠炯) 감역(監役) 규병(圭秉), 종기(鍾基), 상돈(相敦), 상용(相龍). 상실(相實), 철상(哲相), 상전(相全), 형만(炯萬), 판우(判雨), 기우(基雨) 협찬(協贊) 규익(圭益), 규주(圭周), 종석(鍾碩), 종수(鍾洙), 상우(祥雨), 형우(炯雨), 장우(壯雨), 선우(善雨), 극상(克相), 헌상(憲相), 상유(相維), 현상(玄相), 상귀(相貴), 상두(相斗), 상선(相善), 복형(福炯)
齋之以名敘倫 因祖上遠慕族親敘倫而然也 惟我先祖主簿黙齋公 離洛南遷 肇基于雲水縣九皐里 公有三子 長號曰飯牛諱經處士 次曰西溪諱緯贈禮參 季曰靑松諱綱官奉事 西溪公之長胤 諱斗然 號靜履堂 官都憲 公丙子亂 首倡擧義進 至南漢山城 遽涵和成之淚 長懷肥遯之志 歸隱於沙谷聖壽山而仍居焉 窃惟三昆季飯于西溪靑松公之墓 在於沙谷之堂峙小台山幕谷 而今距 年餘三百 固當有分享之齋舍 然中葉以來 世德無閣 家業不振 墓閣營構之未果 至于累世三家之後裔者 豈非慨恨不禁之憂也 顧往高廟戊寅伯曾考黙隱公 刱建以後 灾燼於兩次之變輪奐存瑩 何其多難也 伊來財力之不逮 荏苒經過而 丁亥春間 論家合從 叔逢雨族兄根相 不肖與諸族詢同始役後 告功未果 時値庚寅之亂 幾年中斷而 舍伯相維發起續工諸矣 渾然奮力 遂然竣功 恐不勉規矩之未洽矣 今日而後 見斯齋之落成 繼世而保存 斯齋之不杇 專是諸族之功也 力也 豈須僉家追遠感慕 永代勿替 上以報於先祖之遺逢 下以敦於族親之敍倫 則本家之創義感在其中者矣 旣落敢以略敍經緯 玆錄有司 表其名而壽其傳 以竣來後之就資焉
丁未 三月 日 後孫 相僖 謹記
有司錄 都有司 逢雨 副有司 根相 圭勃 秉雨 總務 相僖 監財 鍾德 相演 相洙 監董 相順 導相 相浩 相萬 珠炯 監役 圭秉 鍾基 相敦 相龍 相實 哲相 相全 炯萬 判雨 基雨 協贊 圭益 圭周 鍾碩 鍾洙 祥雨 炯雨 壯雨 善雨 克相 憲相 相維 玄相 相貴 相斗 相善 福炯
각주 429) 연벽(連璧) : 두 개의 아름다운 구슬이 서로 이어졌다는 말로, 흔히 형제가 똑같이 뛰어난 것을 표현하는 말로 쓰인다. 여기서는 성임(成任)ㆍ성간(成侃)ㆍ성현(成俔) 형제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430) 《서경》 여오(旅獒)에 “자그마한 행동이라도 신중히 하지 않으면 큰 덕에 끝내 누를 끼칠 것이니, 이는 마치 아홉 길 산을 만들 적에 한 삼태기의 흙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 공이 허물어지는 것과 같다.〔不矜細行 終累大德 爲山九仞 功虧一簣〕”라는 말이 나오는데, 431) 원문의 輪奐은 규모가 크고 아름답다는 뜻으로, 건물이 낙성된 것을 축하할 때 쓰는 상투적인 표현이다. 진(晉)나라 헌문자(憲文子)가 저택을 신축하여 준공하자 대부들이 가서 축하하였는데, 이때 장로(張老)가 말하기를 “규모가 크고 화려하여 아름답도다. 제사 때에도 여기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상사 때에도 여기에서 곡읍을 하고, 연회 때에도 여기에서 국빈과 종족을 모아 즐기리로다.〔美哉輪焉 美哉奐焉 歌於斯 哭於斯 聚國族於斯〕”라고 하니, 헌문자가 장로의 말을 되풀이하며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면서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자, 군자들이 축사와 답사를 모두 잘했다고 칭찬한 고사가 전한다. 《禮記 檀弓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