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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임실의 재실
◈ 오수 오암리 용두정(龍頭亭)
임실군 오수면 오암리 오촌마을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옆 산자락에 칠우대(七友臺)가 위치해 있고 칠우대 산자락 중간에 있다. 또한 봉천리 냉천마을 뒤편에는 오노유상대(五老遊上臺)가 있어 이곳은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유명한곳이다.
오수 오암리 용두정(龍頭亭)
 
임실군 오수면 오암리 오촌마을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옆 산자락에 칠우대(七友臺)가 위치해 있고 칠우대 산자락 중간에 있다. 또한 봉천리 냉천마을 뒤편에는 오노유상대(五老遊上臺)가 있어 이곳은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유명한곳이다.
 
 
 
 

1. 오암 용두정기(龍頭亭記)

 
임실[雲水]의 남쪽 용두리449)에 산이 있다. 험준하고 단단한 것이 참으로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감추어 둔 곳으로 그 멋진 기세가 끝나는 곳은 황홀하여 마치 신룡(神龍)이 머리를 쳐든 것 같다. 왼쪽[左頰]으로는 곧 네 개의 털 뭉치처럼 많은 바위들이 내달리고, 수 십보를 가면 연못이 있다. 오른쪽[右頰]으로는 한줄기 맑은 물이 흐른다. 석문(石門)에서 쏟아져 나와 부딪쳐 소리가 나는 것이 마치 우레와 석문이 서로 호응하는 것 같다.
 
우리 선조 오암공(鰲巖公) 휘 한오상(韓五相)은 사용(司勇)벼슬을 지냈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재기가 준상(俊爽)하였다. 기자(箕子) 할아버지의 범주의 도를 산림처사들이 강론하는 정수로 여겼다. 이에 사촌 맏형[從伯] 백운헌공(白雲軒公)과 함께 곧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선생에게 가르침을 청하였고, 쌍백당(雙柏堂) 이원배(李元培) 등 제현과 도의(道義)로 교제를 맺었다. 기사환국(己巳換局, 1689년)이 일어났을 때, 동지들을 규합하여 송원(訟寃)을 하려 했으나 도리어 간신들에 상소를 올리지 못하였다. 마침내 원기산에서 자취를 감추고, 매번 백이숙제의 수양산 고사리를 외면서 쌀이 있어도 먹지 못하는 것처럼 하였다. 봄옷이 완성되어야 바람도 쐬고 목욕도 하였다. 일찍부터 ▣를 멀리하는데 우거하다가, 69세의 수로 졸하여 여기에 묻혔다. 매년 한차례 제사를 올리니 이 정자를 지은 까닭이다.
 
아. 병란을 겪으면서 시문을 보존하지 못하고 정자만이 홀로 서 있으니, 이 한이 하늘까지 닿는다. 그러나 그 뜻은 당시 간악한 흉수들의 뇌를 찢고 땅에 떨어뜨리는 것이 있다.
 
옛날 진(秦)나라는 강한 무력으로 육국을 통합하여 영원히 황제노릇을 하고 싶었으나, 유방과 항우가 한 번 호령함에 땅위의 낙엽처럼 쓸려가 버린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익을 먼저하고 의리를 뒤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의리가 있는 곳에 도가 펴지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므로 공자는 백이숙제의 의리를 일컬어,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어도,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추앙한다”고 하였으니, 그 은덕을 이어받은 것이 지금의 이 정자이다. 미약한 자손들이 고생 끝에 세운 옹색한 하나의 작은 정자이지만, 우리 선조의 당시의 의리는 왕공도 부러워하지 않으며, 필부에게도 부끄러움이 없다고 할만하다. 원컨대 후손들은 이에 욕됨이 없도록, 경물로만 여기지 말고 눈과 귀에 갖추기를 바란다. 선조께서 오늘날 되살린 부러워하지 말고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뜻을 사모한다면, 곧 거의 가까울 것이다. 이에 시 한수를 짓는다.
 
 
先公遺蹟僾然留  선조께서 남긴 유적에 어렴풋이 남은 곳에
▣構新亭此水頭  여기 물머리에 새로 정자를 지었네
危石綠崖鰲背古  우뚝선 바위, 푸른 절벽, 자라 등위에
平沙連渚鷺胸▣  평평한 물가는 이어져 해오라기 가슴에 ▣▣▣▣
隱林高義千秋烈  숲에 은거한 높은 뜻은 천년이 지나도 꼿꼿하고
謝職當年暇日休  당대에 벼슬을 사양하고 한가로운 날들을 보냈네
來裔欲承眙▣後  후손들이 계승하는지 ▣▣▣▣
盡心須向範疇求  모름지기 범주를 구하는데 진심을 다하시게
 
기자탄강 3130년450)(1955) 을미년 맹춘에
구세손 종연(鐘淵)이 삼가 쓰다
수역監役) 상연(尚淵)
▣연(▣淵)
 
 
雲水陽 有龍頭之山 峻險且固 可謂天設地秘 其奇偉之勢之所窮 恍若神龍舉頭而 左頰則四鬢群 巖走 至十數步間 成沼 右頰則一帶清流 自石門瀉出 觸激成聲 有如雷門相應 我先祖鰲巖公 諱五相 官司勇 天資秀異 才氣俊爽 以箕祖範疇之道 為山林講討之精 乃與從伯白雲軒公 就正于同春宋先生而與李雙柏451) 諸賢為道義之交 己巳禍作 將欲唱同志叫閤訟寃 反為群壬所沮 未果登徹 遂屛跡元氣山中 每誦夷齊首陽之薇 如有手+米▣而不得焉者 及春服之成 風兮浴兮 庸寓曾瑟遐趣 而壽六十有九而沒 仍葬于此 歲薦一祭 此亭之所以作也 噫 兵燹所經 詩文不保 而亭獨立 此恨徹天 然其義 則可使當日 奸謏裂腦 而墮瞻也 昔秦以強 悍并六國 欲帝萬世 劉項一呼 落葉掃地 何也 以其先利 而後義也 然則義之所在 道無不伸 故夫子稱夷齊之義 曰餓死首陽 民到于今 受其賜 今此亭也 不過弱子孱孫 辛苦營築之 區區一小亭 然吾祖當日之義 則可謂王公之不羨 而匹夫之無愧者矣 願言來裔之無忝者 勿以景物朮備於耳目 而慕祖先 當日不羨 無愧之義 則庶乎可矣 賡以一詩曰
 
先公遺蹟僾然留 挽搆新亭此水頭
危石綠崖鰲背古 平沙連渚鷺胸▣452)
隱林高義千秋烈 謝職當年腶日休
來裔欲承眙▣後 盡心須向範疇求
箕聖誕降三千一百▣十 祦 乙未孟春 日 九世孫 鐘淵 謹記
 
監役 尚淵 在淵
 
 

 
각주
449) 임실군 오수면 용두리.
450) 기자탄강은 서기전 1175로 추정하고, 마지막자가 十으로 보이며, 을미년이기에 1955년으로 추정함.
451) 쌍백당(雙柏堂) 이원배(李元培, 1785~1850) : 자는 순거(舜擧), 호는 쌍백당(雙柏堂), 본관은 광산(光山), 경학과 성리학을 연구하여 문리를 터득하고 학행으로 이름이 났다.
452) 현판이 훼손되어 글자를 알 수 없음. 아래도 동일
【향토】 임실의 재실
• 관촌 덕천리 영벽정(暎碧亭)
• 오수 오암리 용두정(龍頭亭)
• 오수 주천리 화락정(和樂亭)
(2024.01.02.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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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