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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고고학으로 본 임실
◈ Ⅳ. 동진강 하구 가야포와 임실 월평리 산성
호남평야를 넉넉하게 적셔주는 강이 동진강東津江이다. 동진강은 내장산 까치봉 까치샘1에서 발원해 서북쪽으로 흘러 전북 김제시 성덕면 남포리와 부안군 동진면 안성리 사이에서 서해로 들어간다. 18세기에 제작된 ‘팔도지도八道地圖’2를 보면 부안 동북쪽에 동진東津이 표기되어 있는데, 그 지명에서 강의 이름이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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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동진강 하구 가야포와 임실 월평리 산성
 
 

1. 1. 동진강과 동진강 하구 가야포

 
호남평야를 넉넉하게 적셔주는 강이 동진강東津江이다. 동진강은 내장산 까치봉 까치샘1에서 발원해 서북쪽으로 흘러 전북 김제시 성덕면 남포리와 부안군 동진면 안성리 사이에서 서해로 들어간다. 18세기에 제작된 ‘팔도지도八道地圖’2를 보면 부안 동북쪽에 동진東津이 표기되어 있는데, 그 지명에서 강의 이름이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는 과정에 생긴 동진면이라는 지명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동여도’ 속 동진강 하구 가야포
 
1913년 발간된 전라북도 지도
 
 
동진강은 호남평야의 젖줄인 도원천·원평천·고부천·정읍천의 큰 지류를 거느린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동진강 발원지로 알려진 호남정맥 묵방산에서 발원하는 도원천은 줄곧 서북쪽으로 흐른다. 원평천은 모악산 남쪽 국사봉에서 발원해 매봉산에서 시작하는 두월천을 더해 전북 김제시 죽산면에서 동진강을 만나 서해로 빠져나간다. 전북 정읍시 소성면 애당리 골짜기에서 발원한 고부천은 서북쪽으로 흐르다가 정읍시 고부면 강정리에서 줄곧 북쪽으로 흘러온 동림천과 합류하여 부안군 백산면을 지나 동진면에서 동진강으로 들어간다.
 
전북 정읍시 신태인읍과 이평면 경계인 만석보터 부근에서 정읍천이 동진강 본류에 합류해 수량이 풍부해지고 그 폭도 넓어져 강으로써 모든 위용을 갖춘다. 만석보萬石洑3는 1892년 고부군수 조병갑이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해 쌓은 보로 동학농민운동의 시발점이 된 곳이다. 동진강은 또한 섬진강 물을 끌어들여 드넓은 호남평야를 적셔주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8년 동진농업개량조합에서는 섬진강 상류에 운암제를 축조하고 그 물의 유역을 변경시켜 동진강유역의 농업용수로 이용하였다.
 
 
동진강 하구 가야포와 계화도
 
 
1965년에는 동진강 하류지역의 수리 불안전 답과 계화도 간척지에 관개용수의 공급, 호남지방의 전력난을 해소할 목적으로 섬진강댐이 완공되었다. 임실군 강진면 옥정리와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 사이에 건설된 섬진강댐은 다목적댐으로 달리 옥정호, 운암저수지, 갈담저수지라고도 불린다. 그리고 원평천과 두월천이 만나는 지점에서 서쪽으로 2km 가량 떨어진 곳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그 규모가 큰 벽골제碧骨堤4가 있다.
 
 
새만금 속 군산도 위성사진
 
 
 
조선 철종 8년(1857)에 제작된 『동여도東輿圖』5에 가야포加耶浦가 표기되어 있다. 동진강 본류와 지류를 따라 그물조직처럼 잘 갖춰진 내륙수로와 내륙교통로의 종착지에 가야포가 있다. 1864년 김정호金正浩6가 지은 지리책인 『대동지지大東地志』7 부안현 산수조에도 가야포가 등장한다.8 동진강 하구인 전북 부안군 부안읍과 계화도 중간지점으로 행정구역상 부안군 계화면 궁안리·창북리 일대에 속한다. 서해 연안항로의 기항지이자 제사유적인 부안 죽막동에서 그 위쪽으로 20km 가량 떨어진 곳이다.
 
호남평야의 풍부한 물산이 한데 모이는 곳이 동진강 하구이다. 19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동진강 하구에는 가야포를 중심으로 장신포·사포·덕달포·부포·줄포·식포 등 포구가 많았다. 동진강 하구의 크고 작은 포구들 중앙부에 가야포가 있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때 광활방조제와 1963년 계화지구농업종합개발사업을 실시하는 과정에 농경지로 바뀌어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다행히 1970년대 부안군 계화면과 동진면 일대에 대한 정밀 지표조사에서 밀집파상문이 시문된 가야토기편이 수습되어 적지 않은 관심을 끌었다.
 
 
만경강과 동진강 하구 항공사진
 
가야포와 내륙교통로 복원도
 
 
 

2. 2. 가라왕 하지 남제에 사신 파견

 
좌 백두대간 육십령
 
우 육십령 안내석
 
 
주지하다시피 가야는 기원을 전후한 시기부터 6세기 중반까지 영남 서부지역에서 호남 동부지역에 걸쳐 존재하던 세력집단 또는 소국들의 총칭이다. 전북 동부지역인 운봉고원과 진안고원 속 장수군에도 소국으로까지 발전했던 가야계 소국들이 그 실체를 드러냈다. 이를 증명해 주는 봉토의 직경이 20m 내외되는 300여 기의 가야계 중대형 고총이 운봉고원과 진안고원에 속한 장수군에 밀집 분포되어 있다. 아래의 사료를 통해 대가야를 비롯한 가야계 소국의 발전상과 함께 중국과의 국제교류도 살필 수 있다.
 
가라국은 삼한의 한 종족이다. 건원 원년(479) 국왕 하지荷知가 사신을 보내와 방물을 바쳤는데 이에 조서를 내렸다. “널리 헤아려 비로서 조정에 올라오니 멀리 있는 오랑태夷가 두루 덕에 감화됨이랴. 가라왕 하지는 먼 동쪽 바다 밖에서 폐백을 받들고 관문을 두드렸으니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의 관작을 제수함이 합당하다.”(『남제서』 동남이열전 가라)
 
위의 기록에 의하면, 479년 가라왕 하지는 중국 남조 남제南齊9에 사신을 파견하여 남제와 통교를 맺은 왕이다. 가라왕 하지에 대해서는 고령설, 김해설, 함안설 등 다양한 견해가 있는데, 당시 대가야의 발전상을 근거로 대체로 대가야 왕으로 보고 있다. 그리하여 후기 가야의 맹주인 대가야 왕을 가라왕으로 보는 견해가 널리 통용되고 있다. 479년 가라왕 하지의 책봉은, 대가야가 가야지역을 지배하는 대표적인 정치체임을 과시하는 동시에 나아가 한반도의 유력한 정치세력의 하나로 국제적인 공인을 받게 됐음을 의미한다.
 
 
상 백두대간 치재
 
하 치재 정상부 모습
 
 
무엇보다 중국 왕조로부터 책봉을 받은 일이 없는 신라에 앞서 대중외교를 전개하여 한반도 정세에서 유력한 정치세력으로서의 위상을 공인받았다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는다. 당시 대가야가 남제와 교섭을 벌이게 된 배경에는 4세기 후반 이래 가야세력과 친연관계에 있었던 백제의 일정한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당시 백제는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 신구귀족들이 왕권과 정국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권력투쟁으로 왕권의 쇠약과 함께 정치적인 혼란기를 보내고 있었다.
 
 
상 성수면 월평리 산성
 
하 월평리 산성 북쪽 경상도 가는 길
 
 
종래에는 가라왕 하지가 중국 남조 두 번째 왕조인 남제로부터 ‘보국장군본국왕’으로 책봉을 받을 때 섬진강 루트를 사행로로 이용한 견해가 널리 통용됐다. 다름 아닌, 대가야가 5세기 중엽부터 황강이나 남강을 거쳐 남원과 곡성, 구례를 지나 섬진강 하구인 하동까지 이르는 내륙교통로를 5세기 후엽에 장악하여 대가야권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섬진강 루트는 거리상으로 너무 먼 거리를 우회해야 하고 교통로를 복원하는데 최소한의 기본조건인 경제성과 신속성, 효율성을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
 
 
산성 남쪽 성벽
 
 
 
종래에 대가야권에서 설정된 반월상의 섬진강 루트를 이용하게 되면 다른 내륙교통로보다 상당히 먼 거리를 우회해야 한다. 당시 백제의 일정한 도움 혹은 암묵적인 용인을 받아 서해의 연안항로를 따라 대가야의 중국 사행이 이루어졌다면, 고고지리의 내용10과 사행단의 최종 목적지를 근거로 동진강 하구의 가야포도 그 유력한 후보지로 꼽힌다. 우리나라에서 해양문화가 가장 융성했던 새만금 동쪽에 있었던 동진강 하구의 가야포가 그 역사적인 현장이었을 개연성이 높다. 부안 죽막동 출토유물의 분석을 통해서도 가야포의 존재를 추론해 볼 수 있다.
 
 
산성 지표조사 광경
 
섬진강댐 내 운암면 운정리
 
 
 

3. 3. 내륙교통로와 월평리 산성

 
우리나라와 중국을 이어주던 해상교통로 중 연안항로는 한반도의 서북쪽 연안과 중국의 동북쪽 연안을 따라 항해하기 때문에 일찍부터 사용됐다. 고조선 멸망 이후 낙랑·대방군이 해상교역을 주도하다가 4세기 후반에는 백제가, 5세기에는 고구려가 해상교역의 주도세력을 이루었으며, 백제는 무령왕 대에 이르러 다시 고구려를 압도했다. 대가야는 섬진강 하구의 하동을 출발 남해안과 서해안을 경유하는 연안항로를 따라 항해하다가 서해안 기항지인 부안 죽막동에 들러 해신에게 제사를 올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남정맥 가는정이
 
 
그런데 부안 죽막동에서 대가야토기가 거의 출토되지 않았다. 전북 동부지역에서 가야계 소국으로까지 발전했던 운봉가야와 장수가야와 관련된 가야토기도 섞여있지 않았다. 반면에 남해안에 기반을 둔 금관가야와 아라가야, 소가야토기는 상당량 출토됐다. 만약 가라왕 하지가 하동에서 출발해 연안항로를 따라 운항했다면 부안 죽막동에서 대가야토기가 출토되어야 한다. 부안 죽막동에서 대가야토기가 섞여 있지 않는 것은 그 위쪽에 또 다른 가야의 거점포구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곳이 가야포로 추정된다.
 
 
상 부안군 계화면 창북리 용화동마을
 
하 용화동마을 말무덤
 
 
백두대간의 어느 고개를 넘는가에 따라 두 갈래의 루트가 있다. 하나는 백두대간 육십령六十嶺11을 넘어 진안고원을 횡단하는 방법이다. 대가야의 도읍인 고령에서 출발해 가조와 거창을 거쳐 안의에 다다르면, 이곳에서 남강의 지류인 남계천을 따라 오르다가 백두대간 육십령을 넘는 루트이다. 영호남 교류의 상징인 육십령을 넘으면 200여 기의 가야계 중대형 고총이 밀집 분포된 전북 장수군에 도달한다. 그리고 금남호남정맥의 자고개尺峙를 넘게 되면 섬진강 상류지역으로까지 곧장 나아갈 수 있다.
 
 
정읍시 영원면 지사리 고분군
 
 
다른 하나는 백두대간 치재를 넘어 섬진강유역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고령에서 합천과 거창을 거쳐 함양에 이르면, 전북과 경남 도계인 팔량치와 매치를 넘어 운봉고원까지 도달한다. 운봉고원은 사통팔달했던 교통의 중심지이자 20여 개소의 제철유적으로 상징되는 철의 왕국이다.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철산지를 기반으로 운봉가야가 문헌 속 기문국己汶國으로 발전했으며, 남원 월산리·두락리 등 운봉고원에 100여 기의 가야계 중대형 고총이 남아있다. 백두대간 치재를 넘으면 말고개재와 한치재를 거쳐 임실 월평리 산성에 도달한다.
 
위에서 복원된 두 갈래의 내륙교통로는 임실 월평리 산성에서 만난다.12 이 산성은 섬진강을 중심으로 그 주변지역에 거미줄처럼 잘 갖춰진 여러 갈래의 내륙교통로가 하나로 합쳐지는 곳이다. 예컨대 진안 와정토성臥停土城13을 경유하여 진안고원을 종단하는 간선교통로와 만경강유역에서 호남정맥의 슬치를 넘어 온 웅진기 간선교통로가 만난다. 동시에 백두대간의 치재를 넘어 운봉고원을 거쳐 경남 서부지역으로 향하는 백두대간 치재로와 호남정맥의 석거리재를 넘어 고흥반도까지 이어진 내륙교통로, 동진강 하구의 가야포까지 이어진 내륙교통로가 갈라지는 분기점이다.
 
 
계화지구농업개발사업 기념물
 
기념탑
 
 
위와 같이 섬진강유역에서 내륙교통망의 허브역할을 담당했던 임실 월평리 산성 북쪽에 임실 금성리·도인리가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가야계 소국인 기문己汶이 있었던 곳으로 비정됐지만, 그것을 입증해 주는 가야계 중대형 고총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더욱이 마한의 지배자 무덤으로 밝혀진 말무덤의 존재도 파악되지 않고 있다. 2013년 임실 금성리에서 제철유적이 발견되어14 커다란 주목을 받았으며, 백제 때 임실군 행정치소가 그 서쪽에 있다. 백제 돌평현 행정치소인 청웅분지를 거쳐 전북 임실군 강진면에서 그 방향을 북쪽으로 틀어 율치를 넘으면 섬진강댐에 당도한다.
 
섬진강댐은 1928년 구댐과 1965년 신댐이 완공됐지만, 당시에 학술조사를 실시하지 않아 지금도 수많은 매장문화재가 물속에 잠겨있다. 선사시대부터 역사시대까지의 다양한 문화유적이 밀집된 임실 운정리가 가장 대표적이다. 임실 운정리 서쪽에 호남정맥에서 가장 큰 관문인 가는정이가 있다. 호남정맥 묵방산과 성옥산 사이 고갯마루로 섬진강에서 동진강유역으로 나아갈 때 꼭 거쳐야 하는 큰 고갯길이다. 섬진강댐에서 호남정맥 가는정이를 넘고 팽나무정과 장승백이를 통과하면 호남평야 동쪽 관문인 전북 정읍시 태인면에 다다른다.
 
호남정맥 가는정이에서 가야포까지는 자연협곡과 호남평야를 통과한다. 호남평야를 경유하는 과정에 마한의 분구묘로 구성된 정읍 운학리·지사리, 부안 용화동을 거쳐 새만금 동쪽 가야포까지 손쉽게 도달할 수 있다. 이 루트15는 대가야를 비롯한 영남 내륙지역과 전북 동부지역에 기반을 둔 가야계 소국들이 백두대간과 호남정맥을 넘어 동진강 하구의 가야포까지 도달하는데 가장 용이하다. 동시에 동진강 하구의 가야포와 대가야의 도읍인 경북 고령이 서로 위도상으로 거의 비슷해 거리상으로도 최단거리를 이룬다.
 
 
동진강 하구 모습
 
 
그렇다면 대가야 등 영남 내륙지역과 전북 동부지역 가야계 소국들이 남제를 비롯한 중국과 국제교류를 할 때 가야포를 거점포구로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이유는 백두대간의 육십령과 치재를 넘어 가야포까지 도달하는데 거리상으로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통로의 필수 조건인 경제성과 신속성, 안정성도 두루 갖추고 있다. 동시에 남해안과 서해안의 연안항로를 경유하지 않고 바로 중국의 목적지를 향해 출발할 수 있다는 지정학적인 이점도 빼놓을 수 없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가야포까지 이르는 육로의 거리도 섬진강 하구인 경남 하동보다 더 짧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전북 부안군 계화면 궁안리·용화동 일대에서 밀집파상문이 시문된 가야토기편이 수습됐는데, 이곳은 가야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부안 용화동은 이중토단으로 내곽과 외곽을 갖춘 위곽유적圍郭遺蹟으로 마한의 지배자 무덤으로 밝혀진 6기 내외의 말무덤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은 한 기의 말무덤만 보존되어 안타까움을 지울 수 없다. 동진강 하구 일대에는 말무덤과 위곽유적을 근거로 마한 소국의 존재와 함께 가야포가 있었을 개연성이 높다. 당시 가야포는 중국에 있었던 신라방新羅坊16과 그 역할이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4. 4. 새만금 속 가야포에 큰 관심을

 
호남평야의 심장부인 김제·만경평야를 달리 ‘금만평야’라고 부르는데, ‘새만금’은 ‘금만’이라는 말을 ‘만금’으로 바꾼 것이다. 그리고 새롭다는 뜻의 ‘새’를 덧붙여 만든 신조어이다. 오래 전부터 기름진 땅으로 유명한 만경·김제평야와 같은 옥토를 새로이 일구어 내겠다는 의지가 그 속에 담겨있다. 1991년부터 시작된 새만금사업은, 전북 군산시 비응도에서 야미도와 신시도를 거쳐 부안군 변산면 대항리까지 33.9km로 방조제를 쌓아 갯벌과 바다를 땅으로 전환하는 국책사업이다. 우리나라에서 해양문화가 가장 융성했던 곳으로 그 동쪽에 가야포가 있다.
 
새만금 내 동진강 하구의 가야포는 가야계 소국이 이용하던 거점포구로 추정된다. 대가야를 비롯한 영남 내륙지역과 전북 동부지역에 기반을 둔 가야계 소국들이 남제 등 중국과 교역할 때 주로 이용하던 국제교역항으로 추정된다. 동시에 철의 왕국으로 융성했던 운봉고원의 기문국己汶國이 철을 생산할 때 불순물 제거를 위해 제련로에 넣었던 굴이나 조개껍질을 가야포에서 조달하지 않았을까?
 
새만금 속 동진강 하구는 해양문화가 가장 융성했던 곳이다. 백제부흥군과 나당연합군이 격전을 벌인 백강, 신라와 당나라 수군의 최후 격전지도 가야포 부근이다. 그리고 해상왕 장보고 선단의 거점인 청해진을 없애고 당시 최고의 바다 전문가들을 새만금으로 이주시켰다. 927년 오월吳越의 반상서班尙書가 후백제 도읍 전주를 방문할 때 이용했던 오월과 후백제의 사행로使行路도 새만금을 경유해 전주까지 이어졌다.
 
새만금 속 군산도群山島17는 금강과 만경강, 동진강 물줄기가 한데 모이는 곳에 위치하여 줄곧 해상교통의 중심지를 이뤘다. 특히 후백제가 오월, 고려가 남송과 국제교류가 왕성할 때는 거점항구이자 국제외교의 관문으로 큰 번영을 누렸다. 그리하여 900년 전 군산도 망주봉 주변에는 숭산행궁崧山行宮을 비롯하여 사신을 맞이하던 군산정群山亭, 바다신에게 제사를 드리던 오룡묘五龍廟와 사찰인 자복사資福寺, 관아인 객관 등 많은 건물이 있었다. 무엇보다 숭산행궁은 그 자체만으로도 국가의 통치시스템이 작동된 곳으로 당시 해상교통의 중심지였음을 반증해 줬다.
 
 
부안군 변산면 죽막동 제사유적 출토 토기들
 
 
새만금은 한마디로 인문학의 보물창고다. 앞으로 새만금 속 군산도 동쪽 가야포 추정지에 대한 발굴조사와 함께 해상교통로의 경로와 그 변천과정을 밝히기 위한 학계의 관심과 행정당국의 지원을 당부드린다. 다행히 고고학에서 ‘역사의 실체’로까지 평가받고 있는 동진강 하구의 매장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향후 발굴조사를 통한 가야포의 역사적인 의미가 심층적으로 재조명됐으면 한다. 동시에 새만금 해양문화의 역동성과 새만금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담아낼 새만금박물관의 건립도 반드시 모색됐으면 한다.
【향토】 고고학으로 본 임실
• Ⅲ. 삼국시대 백제와 가야문화의 공존
• Ⅳ. 동진강 하구 가야포와 임실 월평리 산성
• Ⅴ. 통일신라와 후백제 고고미술의 보고
(2024.01.04.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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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