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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고고학으로 본 임실
◈ Ⅴ. 통일신라와 후백제 고고미술의 보고
섬진강유역에 속한 남원은 교통의 중심지와 전략상 요충지로서 이점을 잘 활용하여 줄곧 거점지역을 이루었다. 통일신라 신문왕 5년(685) 처음으로 남원에 소경을 설치하고 여러 주와 군의 민가를 이주시켰으며, 신문왕 11년(691)에는 남원성을 쌓았다. 중국 장안성과 흡사하게 바둑판처럼 정전법이 시행된 남원성이 축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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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통일신라와 후백제 고고미술의 보고
 
 
섬진강유역에 속한 남원은 교통의 중심지와 전략상 요충지로서 이점을 잘 활용하여 줄곧 거점지역을 이루었다. 통일신라 신문왕 5년(685) 처음으로 남원에 소경을 설치하고 여러 주와 군의 민가를 이주시켰으며, 신문왕 11년(691)에는 남원성을 쌓았다. 중국 장안성과 흡사하게 바둑판처럼 정전법이 시행된 남원성이 축성된 것이다.1 남원성에 대한 몇 차례의 시굴조사에서 인화문이 시문된 통일신라 토기가 출토되어, 그 가능성이 입증되었다. 다시 말해 남원성 북문지 부근 시굴조사에서 통일신라 토기보다 그 시기가 앞서는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다.
 
 
신평면 용암리 진구사지
 
 
통일신라 신문왕 5년(685) 남원소경을 두었는데, 고려 태조 23년(940) 남원부로 격하될 때까지 255년 동안 남원은 소도읍으로 행정의 중심지를 이루었다. 남원에 소경이 설치된 뒤 당시 행정치소의 위치가 척문리 산성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것으로 추측된다. 남원성 북쪽에 인접된 교룡산성은 그 초축 시기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삼국시대 평지성과 산성의 기본적인 도성체제에 따라 남원성과 교룡산성이 서로 비슷한 시기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앞으로 교룡산성의 초축 시기와 개축을 파악하기 위한 발굴조사가 추진되었으면 한다.
 
신라가 정복한 지역의 주민들을 집단으로 이주시켜 그들에 대한 통제와 회유책의 일환으로 소경이 설치되었는데, 남원소경에는 주로 고구려 계통의 유민들을 이주시켰다. 당시에는 소경이 행정적 또는 군사적인 성격보다 문화적으로 더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남원은 고구려 문화의 전통을 간직한 곳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것으로 짐작된다. 남원경에 이주된 고구려 유민들의 흔적을 찾는 학술조사도 기획되었으면 한다.
 
 
상 남쪽에서 바라 본 진구사지
 
하 북쪽에서 바라 본 진구사지
 
 
남원경이 설치될 정도로 막중한 역할을 담당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의 분묘유적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당시 삼국시대 굴식 돌방무덤을 약간 변형시킨 고분과 불교의 영향으로 시신을 화장하고 나서 남은 것을 뼈단지에 넣어서 묻어 주는 화장묘가 널리 유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원시 대강면 사석리에서 인화문이 새겨진 통일신라토기를 생산하던 대규모 토기요지가 발견되었을 뿐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토기요지가 잘 보존되어 있었는데, 그 이후 계단식 농경지의 개간과 농수로의 개설로 유적이 심하게 훼손되어 안타깝다.
 
 
 

1. 1. 신평 진구사지 출토유물과 그 의미

 
종래의 지표조사를 통해 학계에 보고된 임실군 내 사지는 34개소에 달한다. 임실군 임실읍에 8개소로 가장 많고 오수면에 5개소, 삼계면에 4개소, 덕치면·신덕면에 3개소 등 임실군 전 지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안타깝게 이 사지들과 관련된 문헌이 거의 없고, 아직까지 사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사지의 창건 시기와 그 성격이 상세하게 파악되지 않았다. 임실군 신평면 용암리 진구사지의 경우만 유일하게 5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사지의 창건 시기와 함께 그 변천과정이 심층적으로 파악되었다. 이에 여기서는 임실 진구사지를 중심으로 임실군의 불교문화2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좌 진구사지 석등
 
중 남원 실상사 석등
 
우 담양 개선사지 석등
 
 
전북 임실군 신평면 용암리 북창마을에 임실 진구사지가 있다. 임실군 신평면과 신덕면, 운암면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봉
 
우리에서 약간 곡선으로 흘러내린 산줄기의 끝자락이다. 이 사지의 남쪽에서 섬진강이 거의 국자모양으로 흐르고 있는데, 신평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흐르던 물줄기가 거의 U자형으로 휘감아 도는 그 안쪽에 사지가 있다.
 
본래 임실 용암리 사지로 불리다가 1992년 발굴조사 때 진구사珎丘寺 명문와가 출토되어, 그 이후부터 진구사지로 불린다. 진구사는 『삼국유사』에 고구려 승려이자 열반종주涅槃宗主로 알려진 보덕普德의 제자 적멸寂滅과 의융義融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 시기는 대체로 600년대 후반 통일신라로 추정되고 있다.
 
임실 진구사지 석등을 보호하고 사지의 성격을 밝히기 위해 1992년 시작된 발굴조사는 중기사 인법당으로 확대되면서 2001년까지 10년 동안 계속되었다. 모두 5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진구사지는 크게 4차에 걸쳐 가람伽藍3 배치가 변화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창건 시기의 가람은 북창마을 민가가 들어선 곳에 있었으며, 2차 가람은 석축을 쌓아 가람의 중심이 석등 북쪽으로 옮겨진 시기로 고려시대 중기로 추정된다. 고려 말에 조성된 3차 가람은 중심 가람을 중심으로 그 영역이 동쪽으로 얼마간 확장되었다. 4차 가람은 대형 깬돌로 사역을 구획하고 현재의 위치로 석등이 옮겨진 시기로 조선 중기 이전으로 파악되었다.
 
 
상 진구사지 무너진 석탑
 
하 진구사지 비로자나불
 
 
임실 진구사지 석등과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 철불鐵佛, 석탑石塔, 좌대座臺 등을 근거로 통일신라 말에 크게 중창된 것으로 추정된다. 2010년 임실 진구사지 석등4은 용암리 석등에서 그 명칭이 바뀌었는데,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석등이다. 호남지방 석등의 특색을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으로 화사석의 여덟 면에 모두 창을 낸 남원 실상사 석등, 담양 개선사지 석등과 상통한다.
 
남원 실상사를 중창한 수철이 고복형 간주석과 화사석의 특징을 근거로 임실 진구사지 석등이 담양 개선사지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통일신라 말 임실군과 그 주변지역을 무대로 활동하였던 호족세력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후백제 때 국가차원에서 중창되었을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런데 완주 봉리사지 본존불과 좌우 협시보살상, 완주 대아리 석불좌상의 머리가 없는데, 지금까지는 그 이유를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과 일제강점기 때 훼손된 것으로 보았다. 최근 후백제 석탑으로 비정된 군산 발산리 오층석탑과 친연성이 강한 장수 삼봉리 개안사지 석탑도 탑재석이 대부분 유실된 상태로 그 존재를 드러냈다.
 
 
진구사지 철불
 
좌 진구사지 출토 명문와
 
우 진구사가 새겨진 기와 조각
 
 
임실 진구사지 석탑과 남원 만복사지5 석탑도 상당수 탑재석이 유실된 상태로 일부 옥개석만 남아있는데, 석탑의 양식은 후백제 석탑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전주에서 출발하는 내륙교통로가 통과하는 주요 길목으로 대부분 평지가람이다. 후백제와 관련이 깊었던 평지가람에서 석탑의 탑재석이 유실되거나 심하게 훼손된 주된 원인으로는 후백제의 멸망과 관련이 깊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시 말해 후백제 때 창건되었거나 왕실의 지원을 받아 중창된 평지가람 내 석탑이 후백제 멸망으로 큰 피해를 입은 것이 아닌가 싶다.
 
 
연꽃무늬 수막새, 넝쿨무늬 암막새
 
 
임실 진구사지에서 출토된 유물의 분석을 통해서도 그 가능성을 추론해 볼 수 있다. 모두 5차례의 발굴조사에서 유물은 통일신라부터 조선시대까지 토기류와 자기류, 기와류, 청동기류, 철기류 등의 유물이 나왔는데, 여기서 가장 관심을 끈 것이 초기청자이다.
 
초기청자는 선해무리굽과 중국식해무리굽, 한국식 해무리굽이 섞였는데, 유약은 그 색조가 녹갈색 혹은 황갈색 계통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중국 북방 요장의 영향을 받아 출현한 것으로 알려진 초기백자는 전혀 출토되지 않았다. 초기청자의 조합상과 그 속성은 임실 진구사지에서 북동쪽으로 15km 떨어진 진안 도통리 출토품과 거의 똑 같다.
 
진안 도통리 초기청자 요지는 백제 마돌현馬突縣6에 속하였던 곳으로 고려 이전까지 줄곧 임실군의 속현이었다. 후백제의 영역에서 유일하게 벽돌가마에서 초기청자를 생산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신경준에 의해 편찬된 『산경표山經表』7에 실린 15개의 산줄기 중 그 길이가 가장 짧은 금남호남정맥은 금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으면서 두 강의 발원지도 함께 거느리고 있다. 금남호남정맥 산줄기 남쪽 섬진강유역에 속한 전북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외궁리에 3개소의 초기청자 요지가 있다. 이 초기청자 요지들은 구획성과 함께 그 규모가 방대하다는 점에서 두드러진 특징을 보인다.8
 
 
상 수막새
 
중 암막새
 
하 용 얼굴무늬 암막새
 
글씨가 새겨진 전
 
 
 

2. 2. 진안 도통리 초기청자 요지와 후백제

 
 
우리나라에서 초기청자의 출현시기와 관련해서는 9세기 전반부터 10세기 후반까지 그 견해가 매우 다양하다. 중국 오대십국 중 하나인 오월국吳越國9에서 이주한 공인집단 및 오월이 송에 멸망하면서 각지로 흩어진 일부 도자 장인들이 고려에 유입되어 그 기능을 전수함으로써 한반도의 초기청자가 등장하였다는 것이다. 중국 청자의 본향이 월주요로 오월은 월주요越州窯의 후원을 토대로 번영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가 하면 고려정부가 주도적으로 중국 청자 장인들을 데려와 수도권 일대에서 양호한 입지를 선택하여 요장을 설립하고 초기청자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상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중평마을
 
하 중평마을 초기청자 요지
 
초기 청자요지 발굴 광경
 
 
중국 절강성 월주요는 해무리굽과 길이 40m 이상 되는 대형의 벽돌가마塼築窯로 상징된다. 그리고 초벌구이를 하지 않고 건조된 그릇에 유약을 입혀 한 번만 굽는 단벌구이가 그 특징이다. 경기도 용인 서리와 시흥 방산동, 황해도 봉천 원산리 등 가장 이른 시기의 대형 전축요는 길이 40m, 내벽의 너비 200cm 내외로 측면에 출입구와 선해무리굽완이 상징적인 유물이다. 우리나라 초기청자 요지에서 밝혀진 유구와 유물의 속성은 대체로 중국 절강성 월주요와 긴밀한 친연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진안 도통리는 한 차례의 발굴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아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요도구 갑발 노출 상태
 
 
우리나라 대형 전축요의 분포양상과 그 특징을 근거로 전축요의 축조기술과 청자의 제작기술이 중서부에서 남서부로 확산된 견해가 널리 통용되고 있다. 이를 근거로 여주 중암리와 서산 오사리, 대구 진인동, 칠곡 창평리, 진안 도통리 등은 요지의 길이가 절반으로 축소되었고, 선해무리굽과 한국식해무리굽완을 생산하다가 소멸되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중선남후설中先南後說로 우리나라의 중서부가 남서부보다 전축요가 흙가마土築窯보다 앞선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그런데 진안 도통리 초기청자 요지는 대형 전축요에서 문양이 없는 초기청자만을 생산하였다는 점에서 이곳만의 강한 지역성이 입증되었다.
 
금강과 만경강, 동진강의 내륙수로와 해상교통로가 그물망처럼 잘 구축된 곳이 새만금10이다. 선사시대부터 천혜의 교통망을 살려 해양문물교류의 허브역할을 담당하였고, 마한에 이르러서는 패총의 보고이자 해양문화의 거점지역으로 발전하였다. 조선술과 항해술이 발달함에 따라 동진강 하구의 가야포 등 새만금 거점포구를 통한 국제해상교류도 활발하였다. 백제의 웅진·사비기 때는 백제의 대내외 관문이자 해상 실크로드의 출발지로 막중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어찌 보면 군산과 군산도는 선사시대부터 줄곧 천혜의 교통망이 거미줄처럼 잘 구축된 문물교류의 허브였다.
 
 
선해무리굽 초기청자 조각들
 
 
해상왕 장보고 선단에 의해 사단항로가 개척된 이후에는 새만금 해역을 장악하였던 후백제가 오월과의 국제외교를 가장 왕성하게 펼쳤다. 견훤은 892년 나라를 세우고 처음으로 오월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900년 후백제를 선포한 뒤 오월에 사신을 다시 보내 오월왕으로부터 백제왕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상 중국식해무리굽 초기청자 조각들
 
중 전주 동고산성 출토 중국식해무리굽 초기청자 조각들
 
하 진안 도통리 출토 초기청자들
 
명문이 새겨진 원통형 갑발
 
 
900년 전주로 도읍을 옮긴 견훤은 새만금 거점포구를 출발해 군산도를 경유하는 사단항로를 이용하여 오월에 사신을 보냈다. 그리고 918년 후백제가 사신과 더불어 말을 오월에 보내자, 927년 오월국 사신인 반상서班尙書가 서신을 갖고 후백제를 방문하였다. 중국 청자의 본향인 오월과 가장 왕성하게 국제외교를 펼친 나라가 후백제다.
 
그러나 고려는 918년 나라를 세우고 그 이듬해 오월에 사신단을 한 번만 파견하였을 뿐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견훤이 그토록 큰 비중을 두었던 오월과 국제외교의 결실로 청자 제작기술이 최초로 후백제에 전래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후백제의 견훤이 45년 동안 오월과 돈독한 국제외교의 결실로 오월의 선진문물인 월주요의 청자 제작기술이 후백제에 전파된 것이 아닌가 싶다.
 
 
갑발, 벽돌 모음
 
 
후백제 때 축성된 전주 동고산성과 진안 도통리 초기청자 요지의 출토품 사이에 서로 조형적인 유사성과 친연성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는 전주 동고산성 출토품을 중국제 청자로 분류하였는데, 최근 발굴조사를 통해 그 생산지가 진안 도통리로 밝혀졌다.
 
반면에 중국 오대십국五代十國11의 혼란기 때 중국인 장인집단이 고려에 유입된 것으로 본 주장도 있다. 그런데 월주요의 장인집단은 오월로부터 국가차원의 후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로의 망명보다 오히려 국제외교를 통한 후백제로의 파견 내지 유입된 것 같다.
 
우리나라의 초기청자 요지 중 진안 도통리 경우만 유일하게 초기청자만을 생산하였다는 역사적인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아마도 진안 도통리의 운영주체와 운영시기를 추론하는데 결정적인 단서가 될 것이다. 이에 반해 시흥 방산동과 용인 서리의 경우에는 초기청자와 초기백자를 함께 제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후백제 도읍인 전주와 인접된 진안고원은 도요지의 보고이자 도자문화의 중심지이다. 진안고원에서 도자문화의 첫 장을 열었던 진안 도통리·외궁리 초기청자는 오월의 첨단기술 전파로 후백제 때 처음 제작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선사시대부터 해양문물교류의 허브역할을 담당하였던 새만금 거점포구로 오월의 청자 제작기술이 후백제로 유입된 것 같다.12
 
오월의 반상서가 후백제의 도읍인 전주를 방문할 때 오갔던 오월吳越과 후백제의 사행로를 초기청자의 전파경로로 추정된다. 당시의 경로를 복원해 보면, 항주에서 월주를 거쳐 명주에 다다르고 주산군도에서 사단항로로 군산도를 경유하여 만경강 내륙수로로 전주까지 손쉽게 도달한다.
 
후백제 도읍인 전주 동쪽 진안고원은 초기청자부터 옹기까지 도자문화가 융성하였던 곳이다. 진안고원에 속한 전북 진안군에 120여 개소와 임실군에 40여 개소의 도요지 중 전주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초기청자 요지가 있다. 전주에서 출발해 전북 완주군 상관면 용정마을을 지나 호남정맥 마치를 넘으면 진안 도통리까지 아주 용이하게 도달할 수 있다. 진안 좌포리는 호남정맥 마치를 넘어 진안고원 방면으로 가기 위한 사람들이 섬진강을 건넜던 나루가 있었던 곳이다.
 
진안 도통리·외궁리 초기청자 요지와 전주를 이어주던 길은 용정龍井과 마치馬峙의 지명 속에 담긴 것처럼 그 의미가 컸던 것 같다. 백두대간과 금남호남정맥, 금남정맥을 따라 후백제가 구축해 놓은 외곽 방어선 안쪽에 진안고원 초기청자 요지가 있다.
 
후백제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남원 실상사와 익산 미륵사지에서 진안 도통리 출토품과 흡사한 초기청자가 나왔다. 남원 실상사는 견훤이 무진주에 도읍한 이후 실상산문에 큰 관심을 두어 실상사 조계암 구지에 세워진 편운화상의 부도에 후백제의 연호인 정개正開가 사용된다.
 
전주로 천도한 이후에는 견훤의 미륵신앙이 김제 금산사에서 익산 미륵사지로 바뀔 정도로 익산 미륵사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922년에는 익산 미륵사탑을 복구하고 백제 무왕의 미륵신앙을 부활시킴으로써 전제군주로서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강조하였다. 종래에는 모두 중국제 청자로 분류13하였기 때문에 향후 초기청자의 역사성을 재조명하기 위한 연구방법도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936년 갑작스런 후백제의 멸망으로 진안 도통리 초기청자 요지가 갑자기 침체기에 빠진다. 아마도 초기청자에서 다기茶器와 제기祭器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당시 핵심 소비층인 후백제 왕실과 도읍인 전주로의 공급이 중단된 것이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진안 도통리에 설치된 강주소의 설치목적과 그 역할도 주목해야 한다. 당시 최고의 선진문물인 청자 제작기술을 가진 첨단기술 집단을 국가 차원에서 통제하기 위해 강주소剛朱所가 설치되었는데, 갑작스런 후백제의 멸망으로 그 운영주체가 고려로 바뀐 것 같다. 우리나라 가장 내륙지역인 진안고원에서 초기청자만을 생산하다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마침내 가마터의 문을 닫았다.
 
 
중국 절강성 상림호 유적을 찾은 호남고고학회 회원들
 
상림호 유적 가마 노출 상태
【향토】 고고학으로 본 임실
• Ⅳ. 동진강 하구 가야포와 임실 월평리 산성
• Ⅴ. 통일신라와 후백제 고고미술의 보고
• Ⅵ. 산성 및 봉수의 분포양상과 그 의미
(2024.01.04.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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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