Ⅵ. 산성 및 봉수의 분포양상과 그 의미
삼국시대 때 임실군의 위상을 이해하는 데 산성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만경강에서 섬진강유역으로 진입하는 길목인 슬치 주변에 산성이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호남정맥 산줄기가 그다지 험준하지 않아 일찍부터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곳이 슬치이다. 전주를 중심으로 한 만경강유역에서 임실과 남원 등 섬진강유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대부분 넘어야 하였던 큰 관문으로 전주와 남원을 잇는 17번 국도와 전라선이 이곳을 통과한다. 이 고개의 서쪽 산봉우리에 임실 슬치리 산성과 그 동북쪽에 완주 만마관산성, 섬진강과 인접된 곳에 임실 대리·방현리·성미산성 등 5개소의 산성이 있다.
임실군 산성 및 봉수 분포도
관촌면 덕천리 성미산성과 섬진강
섬진강 남쪽에 우뚝 솟은 성미산(430m)에 성미산성이 있는데, 이 산의 지형이 비교적 완만한 서쪽 기슭을 아우르는 산정식이다. 산성의 평면형태가 사람의 왼쪽 발바닥과 거의 흡사한 모양으로 그 둘레가 517m이다. 백제 무왕 때 쌓은 각산성으로 학계에 보고되었는데, 2007년 발굴조사에서 성벽과 집수시설, 구들유구가 조사되었다. 성벽은 내·외벽을 모두 판석형 깬돌을 가지고 쌓은 협축식으로 산성의 가장 낮은 남서쪽에서 그 평면형태가 원형을 띠는 2기의 석축 집수시설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백제의 지방통치제도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오부명五部名 인장와印章瓦가 출토되어, 이 산성의 역사적인 의미를 더해 주었다.
상 성미산성 항공사진
하 성미산성 복원된 성벽
성미산성 현황도
호남정맥 슬치 못지않게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곳이 가는정이다. 섬진강댐 내 임실 운정리 서쪽에 호남정맥에서 가장 큰 관문인 가는정이가 있다. 호남정맥 묵방산과 성옥산 사이 고갯마루로 섬진강에서 동진강유역으로 나아갈 때 꼭 거쳐야 하는 큰 고갯길이다. 호남정맥 가는정이를 넘어 팽나무정과 장성백이를 통과하면 호남평야 동쪽 관문인 전북 정읍시 태인면에 다다른다. 일찍부터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의 다양한 문화유적이 가는정이 부근에 밀집 분포되어 있다. 앞장에서 이미 설명한 동진강 하구의 가야포加耶浦까지 이어진 내륙교통로가 통과하는 가는정이의 북쪽 산봉우리에 임실 마암리 산성이 있다.
상 외벽 축조 상태
하 복원된 성벽
상 성벽 발굴 광경
하 발굴 구역 모습
임실군의 산성 중 가장 관심을 끄는 곳이 임실군 성수면 월평리 산성이다. 이 산성은 삼한시대 옛 성터로 학계에 보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전주와 남원을 잇는 17번 국도변에 임실 월평리 산성이 있는데, 임실군 성수면 월평리에 속한다. 성수산에서 발원해 줄곧 서쪽으로 흐르다가 갑자기 그 방향을 남쪽으로 꺾는 오수천 동쪽에 산성이 있다. 이 일대에서 오수천은 남천으로 불리는데, 남천을 따라 남북방향으로 쭉 뻗은 산줄기에 산성이 있다. 남천 동쪽에 두 개의 산봉우리를 거느린 산이 있는데, 북쪽 산봉우리에 산성이 있으며, 남쪽 산봉우리 남쪽에 성밑마을이 있다.
성미산성 집수정 발굴 후 모습
상 1호 집수정
하 2호 집수정
임실 월평리 산성은 세 갈래의 산자락 사이에 형성된 두개의 계곡을 아우르는 포곡식이다.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남쪽 두 개의 골짜기 구간을 제외하면 성벽은 대부분 산자락의 정상부를 통과한다. 성돌은 깬돌을 장방형으로 거칠게 다듬어 만들었는데, 성돌과 성돌 사이는 소형 깬돌편과 기와편으로 메꾸었다. 성벽은 남쪽 구간이 대부분 석성을 이루고 있으며, 다른 구간은 산봉우리의 가파른 지형을 그대로 살린 토성혼축성이다. 산봉우리 정상부에 그 주변지역이 잘 조망되는 세 곳에 망루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 내부는 대부분 계단식 지형을 이루고 있는데, 그곳에 다양한 성격의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지표조사 때 토기편과 자기편, 기와편 등이 수습되었는데, 기와편이 유물의 절대량을 차지한다. 토기편은 격자문과 승석문이 시문된 적갈색 연질토기편과 회청색 경질토기편, 기벽이 얇은 고려토기편 등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자기편은 문양이 없는 순청자편을 중심으로 상감청자편, 분청사기편, 조선후기의 백자편까지 포함되어 있다. 유물의 종류와 그 속성을 근거로 산성의 존속 기간은 백제부터 조선까지 1000년 이상으로 추측된다. 이처럼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그 시기적인 폭이 넓은 유물이 산성에서 함께 수습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경우로 그만큼 임실 월평리 산성이 줄곧 막중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 아닌가 싶다.
섬진강을 중심으로 금강과 만경강, 동진강, 남강유역의 내륙교통로가 임실 월평리 산성에서 합쳐진다. 예컨대 금강유역에 속한 진안 와정토성을 경유하여 진안고원을 종단하는 간선교통로와 만경강유역에서 호남정맥의 슬치를 넘어 온 웅진기 간선교통로가 만난다. 동시에 백두대간의 치재를 넘어 운봉고원을 거쳐 경남 서부지역으로 향하는 백두대간 치재로와 호남정맥의 석거리재를 넘어 고흥반도까지 이어진 내륙교통로, 동진강 하구의 가야포까지 이어진 내륙교통로가 갈라지는 분기점이다. 따라서 임실 월평리 산성은 섬진강유역에 그물조직처럼 잘 갖춰져 내륙교통망의 허브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 같다.
섬진강 중류지역을 동서로 횡단하는 오수천을 따라 산성이 조밀하게 배치되어 있다. 임실군 오수면에서 순창군 동계면까지의 구간으로 그 길이가 대략 10km 정도 된다. 오수천은 성수산에서 발원하여 줄곧 남서쪽으로 흐르면서 남천과 율천을 합치고 삼계석문三溪石門을 지나 순창군 적성면 평남리에서 섬진강 본류에 합류한다. 오수천을 중심으로 그 양쪽에 크고 작은 분지들이 연속되어, 이를 합쳐서 오수분지라고 부르는데 오수천과 율천이 합류하는 부근에 비교적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삼계석문 북쪽 산봉우리에 임실 삼은리 성지를 중심으로 서쪽에 임실 삼계리 산성 A·B, 남서쪽에 임실 홍곡리 산성과 임실 세심리 산성이 있다.
금강 상류지역인 진안고원을 종단하여 고흥반도까지 이어지는 남북방향 교통로를 비롯하여 영산강유역을 곧장 연결해 주는 동서방향 교통로가 모두 이곳을 통과한다. 특히 임실 덕계리 산성은 고흥반도까지 이어진 교통로와 오수분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두 갈래의 교통로가 만나는 곳에 자리한다. 오수분지를 관통하는 오수천을 따라 선상으로 연결된 내륙교통로를 관할하기 위해 임실 우번리 산성과 순창 신흥리 산성 등 10여 개소의 산성을 집중적으로 배치한 것이 아닌가 싶다.
흔히 봉수란 그 주변지역이 잘 조망되는 산봉우리에서 밤에는 횃불을 피우거나 낮에는 연기를 올려 위급한 소식을 전달하는 통신제도이다. 1894년 우리나라에 근대의 통신시설인 전화기가 도입되기 이전까지 변방의 급한 소식을 가장 신속하게 중앙에 전달하는 통신방법이다. 그리고 일반 국민들의 개인적인 의사표시나 서신을 전달하지 않고, 오직 국가의 정치·군사적인 전보기능만을 담당하였다. 고려 말의 봉수선로가 대체로 계승되어, 조선 초기에 정비된 5봉수로의 직봉과 간봉이 통과하지 않는 임실군에서 10여 개소의 봉수가 발견되어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상 성수면 월평리 산성 남쪽 성벽
중 남쪽 성벽 세부 모습
하 성벽 축조 상태
임실군 관촌면 덕천리 산24번지 성미산成米山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금남호남정맥 팔공상 북서쪽 데미샘에서 발원해 서쪽으로 흐르는 오원천烏院川 동쪽에 있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 “둘레 545m의 석축으로 한 개의 우물이 있다”라고 소개되어 있다.
성미산성 오부의 이름이 찍힌 기와들
뚜껑, 세발토기 조각 모음
쇠로 만든 무기류
이 산성은 테뫼식 석축 산성으로 그 둘레가 522m 정도이다. 산성의 평면형태는 장타원형으로 정상부가 좁고 아래쪽이 넓으며, 지형상으로는 북동쪽이 높고 남서쪽이 낮다. 2007년 발굴조사에서 다수의 구들유구와 집수시설, 성벽 등이 확인되었다. 구들유구는 수혈식 주거지 내 화덕 및 구들로 추정되는데, 유구가 심하게 훼손되어 일부만 남아있다. 구들 주변에서 자라병, 개배, 호형토기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금동여래입상
집수시설은 자연암반층까지 굴광한 뒤 뻘흙을 사용하여 수평을 맞춘 다음 벽석을 쌓고 그 뒤쪽은 점토로 채웠다. 성벽은 백제 때 처음으로 축성되고 나서 그 이후 여러 차례 개축이 이루어졌음이 확인되었다. 산성의 남쪽 대지에서 다수의 백제 인장와가 출토되었으며, 원형의 석축 집수시설 2기가 확인되었는데, 이 집수시설들은 동시에 축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성벽 뒷 채움 사이에서 금동여래입상이 출토되었다.
유물은 백제 오부명五部銘 인장와를 비롯하여 다량의 기와류와 철기류가 나왔다. 오부명 인장와는 주로 상上·중中·하下·전前 등이며, 이외에도 오五·수水 등이 더 있다. 이제까지 인장와는 백제 고도에서 주로 출토되고 있으며, 다른 지역으로는 청주 부모산성, 금산 백령산성, 정읍 고사부리성이 있다. 백제의 오부체제 및 지방통치제도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산성의 축조방식과 출토유물을 근거로 백제 사비기에 축성되었지만 바로 성의 기능이 상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 무왕 6년조와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8년조를 근거로 성미산성을 ‘각산성角山城’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장암리 성미산성 남쪽 성문 터
장암리 성미산성 내 망루
장암리 성미산성 성벽 축조 상태
임실군 신평면 대리 390-17번지 일대 자리한 포곡식 석성이다. 섬진강 상류인 오원천烏院川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거의 직각이 되게 남쪽으로 꺾이는 서쪽 산봉우리에 자리한다. 이 산성은 대부분 성벽이 붕괴되고 일부만 남아있으며, 성벽의 북동쪽은 성벽을 쌓지 않고 절벽처럼 생긴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는 “약 750m의 토축으로 무너졌으나 개략적인 형태를 지니고 부근에는 기와편이 흩어져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산성의 내부에서 회청색 경질토기편과 기와편이 산재되어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상 성수 월평산성 내 민묘 구역
하 신평면 대리산성과 섬진강
임실군 관촌면 방현리 공수봉 북쪽 산봉우리를 휘감은 테뫼식 산성이다. 이 산성에서 서남쪽으로 1.7km 지점에 성미산성이 있으며, 남쪽으로 580m 떨어진 곳이 임실 방현리 고분군이 있다. 성벽은 대부분 붕괴되거나 유실되어 그 축조방법을 알 수 없으며, 산성의 평면 형태는 타원형이다. 산성의 서쪽 성벽을 따라 임도가 개설되어 있으며, 북문지로 추정되는 곳에 산성 내부로 들어가는 농로가 개설되어 있다. 성벽은 그 폭이 20~30m 내외로 비교적 일정하며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였다. 산성의 내부에 기단석으로 추정되는 석재가 일부 남아있으며, 성벽 주변에서 크기가 다른 팔메돌이 확인되었다.
임실군 청웅면 석두리 607번지 일원으로 구고리와 옥전리 경계를 이루는 산봉우리 정상부에 위치한다. 임실읍에서 남서쪽으로 이어진 도로를 따라 9km 가량 가면 청웅면 소재지 구고리에 닿게 되는데, 구고리 평지마을 청웅초등학교 동편 성재산에 자리한다. 이 산성은 테뫼식 석성으로 정상부가 대부분 밭으로 개간되었으며, 성벽은 그 흔적이 확실하지 않지만 붕괴된 성돌로 추정되는 석재가 일부 확인된다.
청웅면 석두리 산성 위치도
석두리 산성 전경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 “주周 240간間석축石築, 정井1”이라고 소개되어 있으며, 『문화유적총람文化遺跡總覽』에는 “성치산 정상에 주위가 490m 정도 되는 성지가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산성에서는 북쪽의 임실방면과 남쪽의 강진방면이 한 눈에 보일뿐만 아니라 청웅분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좋은 곳이다.
본래 백제의 돌평현堗坪縣으로 신라 경덕왕 16년(757) 구고현九皋縣으로 고쳤으며, 순화군淳化郡에 속해 있었다. 고려 전기 남원부南原府에 예속되었다가 공양왕 3년(1391) 군으로 승격하였으나 조선 태조 3년(1394) 다시 현으로 격하되어 임실군에 편입되었다. 임실 석두리 산성은 백제 돌평현과 통일신라 구고현의 치소성으로 추정된다.
임실군 덕치면 사무소에서 27번 국도를 따라 순창방면으로 8㎞ 쯤 가면 도로 우측에 암치마을이 있다. 이 마을 북쪽에 성미산(587.9m)이 있는데, 이 산 정상부에 임실 장암리 성미산성이 자리한다. 이 산성은 평평한 정상부를 두른 테뫼식 산성으로 지표상에 돌로 쌓은 성벽의 흔적이 남아있어 석성으로 추정된다. 산성의 형태는 장타원형으로 산성의 내부에 암자가 자리하고 있다.
상 산성 내부 정상부 모습
하 덕치면 장암리 성미산성 전경
이 산성의 동벽은 별다른 시설 없이 절벽인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절벽은 2단으로 계단형이며, 전체적인 길이는 200m 가량이다. 서벽은 돌을 이용하여 성벽을 축조하였는데, 성벽이 대부분 무너져 그 축조방법을 상세하게 알 수 없다. 남벽은 성벽이 비교적 양호하게 남아있는데, 성벽은 편축으로 축조되었으며, 성벽의 높이가 6m 내외이며, 정상부 폭이 2m 가량 된다. 성돌은 대부분 길이 35cm, 폭 20cm 내외의 장방형으로 다듬었는데, 그 표면이 거칠다. 성벽의 정상부에는 돌을 이용해 만들어진 여장女墻이 남아있으며, 남벽은 길이 50m 내외이다. 북벽은 서벽과 마찬가지로 성벽이 대부분 무너져 내렸으며 길이 40m 내외이다.
산성의 내부에는 성문과 우물, 건물지, 병사훈련지, 망루가 남아있다. 성문은 남쪽과 북쪽에서 확인되었는데, 남문은 폭 3m, 높이 1.5~2.5m 가량으로 등산로로 이용되고 있다. 북문은 폭 4m 가량으로 주변의 성벽이 무너져 뚜렷한 형태는 남아있지 않지만 하단부에서 문지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북문도 남문과 마찬가지로 등산로로 이용되고 있다.
우물은 산성 내부 암자에서 동쪽으로 약 50m 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한다. 현재 시멘트로 정비되어 옛 모습이 아니지만 주민과의 면담조사를 통해 예전에는 가로와 세로 5~6m 정도의 규모였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 우물은 산성이 운영되었을 당시 식수를 공급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암자에서 동북쪽으로 100m 떨어진 곳에 가로와 세로 1m 규모의 초석들이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다. 이 초석들과 관련된 건물지는 3개소로 모두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암자에서 동북쪽으로 100m 가량 떨어진 건물지는 초석의 간격이 1.5~2m 내외로 그 평면 형태가 남북으로 긴 장방형이다. 그리고 정면 10칸, 측면 3칸으로 길이 19.5m, 너비 4.5m이다. 다른 2개소의 건물지는 수풀이 무성하게 우거져 그 구조가 어떤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였다.
모두 2개소의 망루로 추정되는 유구가 확인되었다. 첫 번째 망루는 남문에서 성벽을 따라 동쪽으로 약 60m 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한다. 현재는 별다른 시설이 남아있지 않지만 망루가 설치될 정도의 공간이며 사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특히 임실과 순창을 잇는 27번 국도, 지리산 반야봉과 노고단, 덕유산, 팔공산, 무등산을 모두 조망할 수 있다. 두 번째 망루는 북문에서 동쪽으로 성벽을 따라 200m 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첫 번째 망루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시설이 확인되지 않았다.
유물은 기와편과 토기편이 수습되었다. 기와편은 바닥에 쌓여 있을 정도로 그 양이 많은데, 산성의 중앙부 남문이 위치한 구역에 집중적으로 쌓여있다. 기와편은 명갈색과 명회색으로 외면이 사격자문과 집선문이 시문되어 있다. 그리고 승석문과 격자문이 타날된 회청색 경질토기편과 통일신라시대 완편碗片, 고려시대 도기편, 백자편 등이 수습되었다. 유물의 조합상을 근거로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시대까지 비교적 폭 넓게 운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 북쪽 성벽
산성 남쪽 성벽
산성 내 건물 터와 주춧돌
임실군 오수면 방축마을을 서북쪽 산봉우리 정상부에 자리한다. 이 산성은 산봉우리 정상부와 남쪽 골짜기를 아우르는 포곡식 산성이다. 산성의 내부는 경사면을 따라 비교적 넓은 대지를 이루고 있는데,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다. 산성의 평면 형태는 동남쪽과 서북쪽이 긴 타원형으로 성벽의 둘레가 420m 내외이다. 성벽은 산봉우리로 이어져 등산로로 이용되고 있으며, 성돌은 외면을 다듬은 부정형 할석으로 그 길이가 30cm이다. 산성의 내부 동남쪽에서 석축이 확인되었는데, 석축은 그 평면 형태가 방형으로 주로 부정형의 판석을 이용해 쌓았다.
『조선보물고적자료』에 “산성 내부에 한 개의 우물이 있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데 현지조사 시에는 수풀이 우거져 우물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다”라고 소개되어 있다. 유물은 집선문이 타날된 명회색 연질토기 동체편과 회색 경질토기편, 분청사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유물의 조합상을 근거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비교적 폭 넓게 산성이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 오수면 둔덕리 산성과 삼계석문
하 호남정맥 경각산 봉수와 불재
임실군 삼계면 홍곡리 홍곡마을 서쪽 산봉우리에 자리한다. 이 산성은 야산의 서쪽 사면에 입지를 두고 있는데, 성벽의 동북쪽이 야산의 정상부를 따라 이어지고 있으며, 성벽의 서남쪽은 경사면을 따라 내려오다가 야산의 하단부와 맞닿는다. 산성은 그 평면형태가 남북으로 긴 마름모꼴이며, 일단 흙을 이용해 쌓은 토성으로 보이지만 부분적으로 석재가 확인되기 때문에 토석혼축성으로 추정된다. 산성의 내부에서 격자문이 타날된 회청색 경질동체편과 단사선이 희미하게 시문된 회청색 경질토기 저부편이 수습되었다. 삼국시대 토기편이 수습되어 삼국시대 때 운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임실군 구간에서 호남정맥은 남쪽의 섬진강과 북서쪽의 만경강유역으로 갈라놓는 분수령을 이룬다. 호남정맥의 경각산(689.3m)은 산의 형국이 고래 등에 우뚝 솟은 혹을 닮아 붙여진 이름으로 만경강유역이 한눈에 잘 조망된다. 임실군 신덕면 조월리 조월마을 주민들은 “옛날 위급할 때 연기와 불빛으로 서로 신호를 주고받던 봉수가 있다”고 제보해 주었다. 섬진강과 만경강유역을 곧장 연결해 주는 내륙교통로가 통과하는 호남정맥의 불재가 잘 조망된다. 임실군에 분포된 10여 개소의 봉수 중 가장 북서쪽에 자리한다.
임실군 신덕면 신흥리 신흥마을에서 남쪽으로 500m 가량 떨어진 노적봉(405.3m)에 자리한다. 이 산의 정상부에 봉수가 자리하고 있는 것은 신덕면 삼길리 외량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면담조사에서 밝혀졌다. 이 마을 주민들은 “노적봉 정상부에는 위급할 때 연기나 불빛으로 신호를 주고받던 봉수가 있다”고 제보해 주었다. 만경강과 섬진강을 곧장 연결해 주던 호남정맥의 불재로 연결되는 내륙교통로가 한눈에 조망되는 곳이다.
상 운암면 신흥리 노적봉 봉수
임실군 신평면 학암리 학산마을 북쪽에 세 개의 산봉우리가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높은 중앙부 산봉우리(395.1m)에 봉수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 봉수가 자리하고 있는 것은 학산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면담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이 마을 주민들은 “언제 누가 사용했는지 알 수 없지만 구전으로 마을 뒷산에 연기와 불빛으로 신호를 주고받던 봉수가 있다.”고 제보해 주었다. 이 봉수에서 남동쪽으로 6km 정도 떨어진 곳에 임실 백이산 봉수가 있다.
하 운암면 학암리 봉수
임실읍 신안리와 청웅면 향교리, 운암면 학암리 경계인 백이산(530.7m) 정상부에 자리한다. 이곳에 봉수가 있는 것은 신안리 금동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면담조사에서 밝혀졌다. 이 마을 주민들은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위급할 때 낮에는 연기와 밤에는 불빛으로 서로 신호를 주고받던 봉수가 있었다”고 제보해 주었다. 임실과 순창을 이어주는 30번 국도가 통과하는 모래재를 중심으로 북쪽에 백이산 봉수, 남쪽에 무제봉 봉수, 동쪽에 옥녀봉 봉수가 있다.
임실읍 성가리 용요산(해발 489.9m)에 자리하고 있다. 임실읍 성가리는 옛 임실군 터로 추정되고 있으며, 봉황산 또는 운수봉으로 불리는 산이 주산을 이루고 있다. 봉황산에서 서쪽으로 750m 정도 떨어진 곳에 용요산이 있는데, 이곳에 봉수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현재 봉수대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려우나 정상부가 평편하게 형성되어 있으며, 정상부의 면적은 30㎡이다. 이곳은 자연 암반층을 이루고 있는데 인공의 흔적이 확인된다. 성가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이곳에 봉수대가 있었다고 하는데 예전에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라고 제보해 주었다.
상 임실읍 성가리 용요산 봉수
하 임실읍과 그 주변 지역 봉수들
임실읍 장재리 장재마을 남동쪽 옥녀봉(396.2m) 정상부에 자리한다. 장재마을 주민들은 “언제 누가 쌓고 사용했는지 알 수 없지만 구전으로 옥녀봉에 위급할 때 서로 신호를 주고받던 봉수가 있다”고 제보해 주었다. 이 봉수의 북동쪽에 신안분지와 임실분지를 이어주는 질루고개와 공개재, 남서쪽에 임실분지와 청웅분지를 곧장 연결해 주는 모래재가 있는데, 이 고개들이 옥녀봉 정상부에서 잘 조망된다.
상 임실읍 장재리 옥녀봉 봉수
임실군 임실읍 두만리 무제봉(558.1m)에 자리하고 있다. 이 봉수에서 북쪽으로 옥녀봉 봉수, 동북쪽으로 봉화산 봉수와 동남쪽으로 매봉 봉수와 연결된다. 무제봉 정상부는 길이 11m, 폭 6m의 편평한 대지를 이루고 있으며, 이곳에는 봉수대를 축조하는데 이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일부 석재가 남아 있다.
하 임실읍 두만리 무제봉 봉수
임실읍 망전리와 오수면 주천리 경계를 이루고 있는 매봉(608.5m)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의 북쪽에는 임실군 오수면과 청웅면을 이어주는 되재와 봉화산 봉수가 자리하고 있으며, 서쪽에는 임실읍 두만리 무제봉 봉수가 있다. 망전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매봉에는 옛날부터 불을 피워 신호를 주고받던 봉화터가 있었다고 전한다”라고 제보해 주었다. 현재 매봉의 정상부는 수풀과 잡목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어 봉수와 관련된 유구나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정상부가 편평한 대지를 이루고 있으며, 주변의 교통로와 관방유적. 통신유적 등이 잘 조망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봉수가 자리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임실군 지사면과 성수면 경계를 이루고 있는 덕재산(487.1m) 정상부에 자리하고 있다. 덕재산 봉수의 동쪽으로는 임실 매봉 봉수·영태산 봉수, 서쪽으로는 임실 봉화산 봉수·매봉 봉수가 자리하고 있다. 안하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덕재산에는 옛날에 불을 피워 신호를 주고 받던 봉화가 있었다고 전한다”라고 제보해 주었다. 그러나 현재는 수풀과 잡목만이 무성할 뿐 봉수와 관련된 유구나 유물은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정상부가 평탄한 대지를 이루고 있으며, 그 주변 봉수가 잘 조망되는 것으로 보아 봉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 성수면 봉강리 덕재산 봉수
임실군 성수면 왕방리와 장수군 산서면 학선리의 경계인 영태산(666.3m) 정상부에 자리하고 있다. 영태산 봉수의 서쪽에는 임실 지사면 매봉 봉수가 자리하고 있으며, 남쪽에는 장수 사계리 봉수, 남서쪽에는 장수 원수봉 봉수가 자리하고 있다. 장수군 산서면 학선리 주민들에 의하면 “영태산에는 본래 봉화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그 터만 남아있으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무제를 지냈었다”라고 제보해 주었다. 현재 봉수와 직접 관련된 유구나 유물은 확인되지 않으나 산 정상부가 평편한 대지를 이루고 있으며, 주변의 봉수가 잘 조망되는 것으로 보아 봉수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하 성수면 왕방리 영대산 봉수
임실군 임실읍 금성리 중금마을의 북쪽에 우뚝 솟아 있는 용암산(355m) 정상부에 봉수가 자리한다. 이 봉수는 서쪽의 용요산 봉수, 남쪽의 봉화산 봉수와 6㎞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는데, 섬진강유역에서 관촌면을 거쳐 전주로 들어가는 길목을 감시하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봉수대는 그 원형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훼손된 상태이며, 산 정상부에 평탄대지를 조성하고 그 외곽에 장타원형의 토단이 둘러져 있다. 또한 토단 내에는 일부 석재들이 노출되어 있는데, 이 석재는 토석혼축의 방호벽을 쌓았던 부재로 추정된다.
임실읍 금성리 용암산 봉수
임실읍 대곡리 봉수는 대곡리 막음재 동쪽 봉화산(467m) 정상부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임실군 임실읍 대곡리와 임실군 오수면 봉천리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봉수의 남쪽으로는 임실군 오수면에서 청웅면을 거쳐 정읍시 칠보면으로 이어지는 내륙교통로가 통과하는 되재와 매봉 봉수가 한 눈에 조망된다. 봉화산의 정상부는 편평한 대지를 이루고 있는데, 봉수대의 축조에 이용된 것으로 보이는 석재들이 산재되어 있다. 「조선보물고적자료」에는 “둘레 144m의 토축으로 일명 두치斗峙 봉수대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임실읍 대곡리 봉화산 봉수
봉화산 봉수 정상부 장방형 토단
전북 동부 산악지대에는 장수군과 그 주변지역에 80여 개소의 봉수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배치되어 있다. 특히 200여 기의 가야계 중대형 고총이 밀집 분포된 장수군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으면서 그곳을 방사상으로 에워싸고 있다. 지난해 백두대간 영취산·봉화산 봉수 발굴조사를 통해 산봉우리 정상부에 장방형 단이 마련되고 6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조성된 삼국시대 봉수로 그 성격이 파악되었다. 섬진강유역에는 임실군을 중심으로 진안군 일부 지역에만 봉수가 분포된 것으로 밝혀졌다.
진안고원 속 장수군에서 시작된 한 갈래의 봉수로가 임실 봉화산 봉수까지 이어진다. 임실 봉화산 봉수는 산봉우리 정상부에 장방형의 단이 마련되어 유구의 속성이 장수군에 밀집 분포된 봉수와 상통한다. 임실분지를 중심으로 동쪽에는 임실 국화봉 봉수, 남쪽에는 임실 봉화산 봉수와 북쪽에는 임실 용요산 봉수, 서쪽에는 임실 무제봉 봉수가 있다. 청웅분지가 한눈에 잘 조망되는 임실 백이산 봉수를 지나 임실 학암리 봉수에서 섬진강을 건너 호남정맥의 임실 경각산 봉수에서 멈춘다.
임실군 중심부를 남북으로 갈라놓는 산줄기에도 봉수가 있다. 임실 봉화산 봉수에서 남쪽으로 3.1km 남짓 떨어진 임실 망전리 봉수와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5.5km 가량 거리를 둔 임실 세심리 봉수가 있다. 현재 임실군에서는 10여 개소의 봉수가 분포된 것으로 밝혀졌지만, 또 다른 봉수가 더 자리하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아직은 봉수의 설치시기와 설치주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지만 장수가야와의 관련성이 가장 높다. 가야계 중대형 고총과 봉수의 분포망이 서로 일치하고 있으면서 모든 봉수로의 종착지가 진안고원 속 장수가야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임실군에는 산성 및 봉수가 밀집 분포되어 있다. 삼국시대 때 교통의 중심지와 전략상 요충지라는 고고지리적인 요인과 관련이 깊다. 호남정맥의 슬치를 넘어 전주에서 임실군으로 진입하는 길목인 임실군 관촌면 일대와 섬진강 중류지역을 가로지르는 내륙 교통로가 통과하는 삼계면 일대에 산성이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임실 성미산성에서 그 초축 시기가 백제 웅진기로 밝혀져 임실군의 산성들이 삼국시대 때 초축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삼국시대 때 임실군의 역사성과 지역성을 이해하는 데 10여 개소의 봉수도 빼 놓을 수 없다. 진안고원의 장수군에서 시작된 한 갈래의 봉수로가 임실 봉화산 봉수에서 다시 서북쪽과 서남쪽으로 갈라진다. 임실군의 산성 및 봉수가 서로 연관관계를 보이고 있는 점에서 백제의 웅진 천도 이후 가야의 진출과 함께 한 동안 임실군이 가야의 영역에 속하였음을 추론해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백제의 정치적인 불안기를 제외하면 백제의 영향력이 줄곧 미쳤을 것으로 여겨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