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의 갈담 역지驛址
운수지의 기록에 의하면 갈담원이라고 하였고 현의 치소 서쪽 40리 지점인 강진에 있었으며 이규보(李奎報:1186~1241) 김극기(金克己)의 시가(詩歌)현판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갈담역지(葛潭驛址)는 갈담리 강진마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누가 확실하다는 증언은 없는 상태이다. 다만 기록에는 삼례찰방(三禮察訪) 소속에 두었던 길딤역(葛潭驛) 이라고만 전해지고 있다.
임실현 내의 찰방역(察訪驛)에 관련사항은 1392년 태조실록에서부터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세조3년(1457) 9월 12일의 기록에도 전라도의 오수도역과 삼례도역 소속의 작은 역들의 변경내용이 나오며 세조8년(1462)에는 전라도 삼례역과 오수역원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조선왕조실록의 역원의 1462년(세조8년) 8월 5일 기록에 병조(兵曹)에서 임금에게 아뢰기를 “이보다 먼저 제도(諸道)의 참·역(站·驛)을 혹은 역승(驛丞)을 파(罷)하고 각각 그 부근에 합하여 하나의 길을 만들어서 찰방(察訪)을 두었으나 관할하는 역이 많고 길이 멀리 떨어져서 찰방이 두루 살피기가 어려우므로 역로(驛路)가 조잔(凋殘)하니 이제 다시 마감하여 대·중·소의 역로 및 원근(遠近)을 나누어서 그 전의 역승을 각 역로에 차견(差遣)하여 1찰방마다 역승 1명을 두게 하소서” 라고 아뢰었다. 라는 기록이 있다.
당시 삼례찰방(參禮察訪)은 삼례역(參禮驛), 앵곡역(鶯谷驛), 반석역(半石驛), 오원역(烏院驛), 갈담역(葛潭驛), 소안역(蘇安驛), 촌곡역(寸谷驛), 양재역(良才驛), 거산역(居山驛), 천원역(川原驛), 영원역(瀛原驛), 부흥역(扶興驛), 내재역(內才驛) 등 13역으로 되어 있었다. 오수찰방(獒樹察訪)은 오수역(獒樹驛), 창활역(昌活驛), 동도역(東道驛), 응령역(應嶺驛), 인월역(引月驛), 지신역(知申驛), 전수역(潺水驛), 양율역(良栗驛), 낙수역(洛水驛), 덕양역(德陽驛), 익신역(益申驛), 섬거역(蟾居驛) 등 12역으로 되어있었다.
갈담 역지(驛址)는 지금의 강진면 갈담리 새마을금고가 자리하고 있는 곳으로 추정되며 이 역은 삼례찰방(參禮察訪)의 관할 하에 있었다. 임실 현에서 순창현에 이르는 중심이고 정읍과 동계에 이르는 곳으로 사통으로 되었고, 전주와 광주에 이르다 머무는 곳으로 역마를 바꾸어 타는 곳이었다. 갈담 역에는 역리(驛吏)가 8名이었고, 역노(驛奴)가 9名, 역보(驛保)가 14名이었다. 역마(驛馬)가 5필정도로 기록되어 있다. 머물렀던 명인(名人)의 시(詩)중에 김극기(金克己, 高麗明宗 때詩人, 李太祖 功臣)의 詩와 설표수(薛表壽, 조선개국공신)시가 남아 있을 정도로 유명한 역 이었다.
갈담 역에 대한 김극기의 시문은 아래와 같다.
十里溪山一眼中 십리 시내와 산이 눈 안에 있으니 遊人發興古今同 유랑객 흥취 고금이 한가지로세 霜筠拂檻差差綠 서리 맞은 대 난간을 스쳐 들쭉날쭉 푸르고 白萼飜階漫漫紅 옥잠화 섬돌에 질펀하게 붉구나 綺席更誰邀酒客 비단 자리에서 다시 누가 주객을 맞아줄까 紗籠空自憶詩翁 사롱 속에서 헛되이 스스로 시옹을 추억 하네 憑軒靜兀都忘返 마루에 기대어 우두커니 돌아갈 것을 잊으니 滿樹蟬聲響晩風 온 나무의 매미 울음소리 저녁 바람에 들리네
김극기는 1379~1463년 고려 중기의 시인으로 “동문선”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등에 200여수의 시를 남겼다. 김극기는 전국의 산하와 정서를 담은 시를 창작하였는데 여기서 임실지역을 배경으로 시를 많이 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