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마을별 유래
강진면의 유래
강진면은 임실군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섬진강의 우안에 해당되어 ‘섬진강을 건너는 나루터’라는 뜻의 지명을 얻어 ‘강진면(江津面)’이라고 하였다. 강진면을 둘러싸고 있는 지역은 동쪽으로 청웅면이요 서쪽으로는 정읍시 산내면이며, 남쪽으로는 덕치면이고 북쪽으로는 운암면이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돌평 현에 속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구고현에 속하였다. 1354년 구고현과 임실 현이 통합되었으며 조선시대인 1413년에 임실 현이 되면서 임실에 속하게 되었다.
임실군의 서부권 중심지이며 소재지 북쪽으로 백련산(754m)과 서쪽에는 필봉산(583m)이 솟아 있다. 청웅면 청계리에서 발원하여 청웅면과 백련산 동쪽으로 흘러 내려오는 천(川)은 갈담천(葛潭 川)을 이루다가 옥정호수에서 흐르는 섬진강물과 회진리에서 만난다.
조선시대 삼례찰방 소속의 갈담 역원(驛院)이 있어 과거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또한 순창과 정읍 일부 주민들의 생활 중심지 역할을 하던 곳으로 예부터 갈담 장은 인근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여 상권을 형성하였던 곳이기도 하였다. 또한 회문산을 중심으로 그 아래에서 정읍 전주 임실 순창과 남원을 이어주는 교통의 중심지역할을 하였으며 호남 좌도농악은 국가지정 무형문화재인 동시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서 농악의 발상지인 동시에 우리나라의 농악 중심지이기도 하다.
1789(정조13)년 <호구총수>에는 강진면에 소강진리(小江津里), 대강진리(大江津里), 부흥리(富興里), 가목리(柯木里), 갈담리(葛潭里), 상중방리(上中方里), 천곡리(千曲里), 교항리(橋項里), 하중방리(下中方里), 손곡리(孫谷里), 창리(倉里), 죽원리(竹院里)가 기록되어 있다. 조선후기에는 상강(上江), 신촌(新村), 대강(大江), 서창(西倉), 부흥(富興), 이목(梨木), 가목(柯木), 갈담(葛潭), 장동(壯洞), 교항(橋項), 상중방(上中方), 하중방(下中方), 용산(龍山), 수동(水洞), 대기(大基), 양지(陽地), 주소(舟所), 옥정(玉井), 문방(文峙), 용강(龍江), 빙방(氷方), 산막(山幕), 죽원(竹院), 내동(內洞), 상기(上基), 율치(栗峙), 용동(龍洞), 오치(烏峙) 등 28개 동리를 관할하였다. 항일투쟁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구고동(九臯洞)의 이윤동(伊尹洞)이 편입되어 백련, 부흥, 갈담, 회진, 필봉, 용수, 옥정 문방, 학석, 방현 등 10개 법정리로 개편되었다. 구 후 1987년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 종성 3리가 강진면 용수리에 편입되었다.
현재의 행정구역은 10개 법정리에 21개 행정리가 소속되어 있다. 백련리에는 신기와 백련마을을, 부흥리에는 부흥, 이목, 가목마을, 갈담리에는 갈담, 강진, 강서마을로, 회진리에는 회진마을, 용수리에는 백여, 용수, 백운마을이 있다. 옥정리에는 옥정마을, 문방리에는 문방, 수방마을로, 학석리에는 학석과 율치마을, 방현리에는 방현, 이윤마을, 필봉리에는 상필과 하필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강진면은 옥정리에 1929년에 준공된 운암 댐이 있으며 이후 물 부족으로 인하여 운암댐 아래 2km지점에 새로 조성하여 1965년에 완공된 섬진강 다목적댐이 있는 곳이다. 이로 인하여 강진면에서도 운암면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수몰민으로 전략되어 각처에 이거하여 살고 있다. 이로서 강진면은 국가관리청인 섬진강다목적댐과 국립임실 호국원이 있으며, 호남 좌도농악의 발상지로 우리나라의 좌도농악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마을별 유래
백련리(白蓮里)
백련리(白蓮里)는 조선시대 임실현 강진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상강리, 신촌, 대강리, 서창리, 부흥리의 일부를 합하여 백련산의 이름을 따서 백련리라 하였다. 2017년 12월 31일 기준으로 백련리 전체 면적은 6,013,407.2㎡이고, 이중 밭은 519,490.8㎡, 논은 752,559.3㎡이다. 인구는 81세대에 153명(남 85, 여 68)이다. 백련리에는 삼국시대 고분군 4개소, 백련리 사지, 세 곳의 선돌이 조사, 보고되었으며, 재각은 함양박씨의 모의재와 추모재, 전주이씨 효령대군파의 봉사재, 백련재, 영사재가 있다. 비석은 부흥마을에 현감 조성희 선정비가 있고 서창마을에는 현감 구연익의 선정비가 있으며 백련산 아래에 백련사가 있었다.
○ 신기(新基) 마을 강진면 소재지에서 북동쪽으로 약 5㎞ 떨어져 있으며, 상강진(웃강진), 신기, 서창(西倉)으로 구성되어 있다. 백련산 영봉 아래 동쪽 산기슭에 상강진이란 마을이 형성되었으나, 마을이 전답과 멀리 떨어져 생활이 불편하여 이곳에 터를 잡아 신기리가 되었다고 한다. 서창은 상강진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며 임실의 서쪽으로 창고가 있었다고 하여 서창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서창은 청웅면 소재지인 구고리와 인접된 마을로 과거에는 사람이 많이 살았으나 지금은 거의 없다시피 한다. 그러나 구연익 현감의 선정불망비는 서창마을 구 길을 따라 논가에 지금도 세워져있다. 상 강진은 함양박씨가 청웅면 구고리에서 이곳으로 와서 정착하였다. 마을에서 백련산 쪽으로 들어가면 웃 강진마을이 있고 이곳에 2가구가 살고 있다. 신기마을 입구에 느티나무, 서어나무, 팽나무 등으로 구성된 마을 숲은 마을 북쪽을 막아주는 비보 숲으로 조성되었다. 마을 내에 있는 공동우물에서는 정월대보름 새벽이면 우물가에 떡도 하고 밥도 지어 깨끗한 짚 위에 올려놓고 기름불 또는 촛불을 켜고 가족들의 무사함과 많은 복을 주라는 소원을 빌기도 하였다고 한다. 우물에 불을 켜고 소원을 빌 때에는 물을 떠가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 백련(白蓮)마을 강진면 소재지에서 북동쪽으로 약 4㎞ 떨어져 있으며, 백련산 상봉에서 동쪽으로 뻗은 청웅지맥과 남쪽으로 뻗은 산줄기가 병풍처럼 놓여 있어 마치 안방과 같아서 마을이 형성되기에 적합한 곳이다. 백련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여서 백련리라 부르게 되었다. 한때는 화순최씨 집성촌으로 그 수가 많았었다. 백련마을은 예부터 큰 강진이라고 불렀으며 신기마을을 작은 강진이라고 하여 지금도 부르고 있는데 강진면이라는 지명 자체가 이곳에서부터 불러져 왔을 것이라는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가 남아있음을 확인하였다. 앞 도로 건너편에 2007년 1월 1일에 국립 임실호국원이 개원되어 전국에서 국가유공자 가족들이 많이 찾고 있다.
부흥리(富興里)
부흥리(富興里)는 조선시대 임실현 강진면에 속하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범데미와 배남실, 그리고 가남실을 합하여 부흥리라 이름 변경하여 부르고 있다. 2017년 12월 31일 기준으로 부흥리 전체 면적은 5,067,074.4㎡이고, 이중 밭은 575,869.0㎡, 논은 460,146,8㎡이다. 인구는 113세대에 217명(남 111, 여 106)이다. 부흥리(범데미)에는 삼국시대 고인돌과 조선시대에 도요지와 옹기요지가 조사 보고되었으며, 풍천임씨 재실과 유인김해김씨 정려비, 현감 조성희 청덕선정비, 그리고 2015년 3월 1일에는 고흥 유관환 유풍여열비가 세워져 있다.
○ 부흥(富興) 마을 강진면 소재지에서 북동쪽으로 약 3㎞ 떨어져 있는 마을이다. 원래 방언으로는 범데미라고 하였다. 뒷산이 백련산 상봉에서 남쪽으로 뻗어 마치 범이 쪼그리고 앉아 있는 형국이라 하여 범데미라 하였으나, 행정구역 개편으로 부흥리로 바꾸었다고 한다. 1800년대에 안씨가 정착하여 살고 있었으며. 조선후기에는 4개 성씨들 40여 세대가 세거를 이루며 살았다고 한다. 항일투쟁기 마을 동쪽에는 부흥광산이 청웅면 남산리 까지 이어져 있다. 부흥광산에서 금을 채굴하여 성황을 이룰 때는 부흥마을이 80여 세대까지 살았으며 항일투쟁기 말기 폐광되면서 사람들이 이곳을 떠나갔다고 한다. 이후 50여 세대 200여 명이 거주하였다고 하며 농요로 논매는 소리, 일명 방계소리가 전해지고 있다. 한편 부흥광산에서는 6.25한국전쟁당시 폐 광산에 많은 사람들이 잠입하였다는 추정에 따라 빨치산 소탕작전에 의하여 1주일간 불을 지펴 많은 사람들이 질식사 하는 피해를 입은 지역이기도 하다.
○ 이목(梨木) 마을 강진면 소재지에서 북동쪽으로 약 2㎞ 정도 떨어져 있으며, 큰 배나무가 있어 마을 이름을 배나무실, 배남실이라 부르게 되었다가, 이후 한자로 이목리(梨木里)라 고쳤다. 1664년(현종 5)에 김해김씨 김성은이 방현리 새재 마을에서 이주하여 이목마을에 정착하였다. 최근까지도 삼베를 짰던 동네로 알려져 있으나, 2015년이후 대마를 심었다는 기록은 없다. 마을 앞 모정 옆에 삼굿 터를 두고 있었으며 겨울이면 마을 아낙네들로 하여금 부업으로 삼베를 짰던 마을이기도 하다. 마을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이곳에서 난 삼 피를 덕치 천담, 삼계 학정과 택승, 운암 선거, 청웅 구고, 성수 오봉과 효촌 등지에서 삼피를 사다가 삼베를 짤 정도로 생산량이 많았으나 지금은 삼베를 짜는 농가가 1가구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마을 회관 겸 삼베를 짜는 부업단지로 지정을 받아 반자동식의 기계를 설치하여 삼베단지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마을 내에 있는 우물에서 정월대보름에는 꼭 샘굿을 쳤으며, 소원을 빌며 우물에 동전을 던지기도 했다고 한다.
○ 가목(柯木) 마을 강진면 갈담리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올라오다가 우측으로 다리를 건너 약 2㎞ 정도 떨어진 곳의 마을이다. 백제 때부터 도사가 찾아와 살면서 가남실 이란 이름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현재의 마을의 뒷 골짜기에 큰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도둑이 심하여 폐촌이 되었으며 이후 다시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면서 가목이라 불렀다고 한다.
갈담리(葛潭里)
갈담리(葛潭里)는 조선시대 임실현 강진면 지역으로서 가단, 가달 또는 갈담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갈담리라 하여 강진면 소재지가 되었다. 2017년 12월 31일 기준으로 갈담리 전체 면적은 2,777,012.1㎡이고, 이중 밭은 250,683,0㎡, 논은 238,101.3㎡이다. 인구는 292세대에 627명(남 331, 여 296)이다. 갈담리에는 조선중기부터 1894년까지 삼례찰방 소속의 갈담 역원(驛院)이 있었다. 갈담리에는 5일시장이 크게 열렸는데 정읍, 순창, 임실지역의 중심지로 시장이 크게 형성되어 있었다. 또한 강진 갈담에서 순창으로 가는 옛길의 바위암벽에 불망비군이 있는데, 여기에는 현감 원세철, 현감 이문저, 현감 이희기, 현감 임성주, 현감 정규상, 현감 정동시, 현감 최천서 등의 영세불망비가 바위암벽에 새겨져 있어 이곳이 지역 교통의 중심지이며 물류의 중심지이다 라는 것이다. 사찰로는 구룡사가 있다. 항일투쟁기 신사가 현 갈담 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고 전한다.
○ 갈담(葛潭) 마을 강진면 소재지 마을이다. 가단, 가달, 갈담(葛潭)이라고도 한다. 신라왕족인 박씨가 정착하여 왕박(王朴)골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갈담마을 앞 구우실의 산세로부터 보면 거북이가 다락방에 올라와 앉은 형태라 한다. 갈담리 서북쪽에 잉어명당이 있고, 그물 봉이 있으며 작살봉, 다래끼봉이 있다. 청웅면 옥전리에서 발원한 구고천(九皐川)이 강진면 갈담리에서 백련산 706고지에서 발원한 이윤천(伊尹川, 필봉천)과 합수하고, 다시 서쪽으로 1.5㎞를 흘러가 장자터 마을 앞에서 섬진강 본류와 합수된다. 갈담은 섬진강의 물줄기가 칡넝쿨같이 구불구불 휘어져 내려와 흐르는 곳에 연못이 많아 갈담(葛潭)이라고 하였다. 이 마을에는 삼례찰방 관할의 갈담원이 있었으며 갈담 시장이 형성되었던 곳이다. 1730년 필사본『운수지』를 비롯한 여러 읍지에는 갈담역과 갈담원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운수지』에는 갈담역에 ‘대마(大馬)1필, 기마(騎馬) 3필, 복마(卜馬) 2필’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여기에 소속된 ‘아전은 550명이고 노(奴)는 6명, 비(婢)는 1명’이라고 하였다. 소속된 토지로 ‘마위전답(馬位田沓)은 모두 455두락이고 짐수는 16결’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갈담원 혹은 갈담관사(葛覃館舍)의 규모를 ‘대청 3칸 가(架) 3칸이고, 대문 3칸, 공사문(公事門) 1칸’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그 규모의 대략을 살필 수 있다. 갈담 마을에 있는 웃샘은 물이 맑고 물맛이 좋아 마을 사람들은 공을 들일 때 모두 이 우물을 떠다가 공을 들였으며, 대보름 전날에는 마을 아낙들이 접시에 기름을 넣고 우물 앞에다가 많은 불을 켠 후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고 한다.
○ 강진(江津) 마을 강진면 소재지 마을이다. 본래 갈담에 속하였으나 인구가 증가하여 1972년 1월 1일 갈담리에서 분리하여 강진마을이란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갈담천과 학석리, 율치에서 흐르는 이윤천이 갈담리에서 합류하여 섬진강으로 유유히 흐르므로 강진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강진면사무소, 강진파출소, 강진우체국, 전주완산소방서 강진119지역대 등 각종기관들이 들어서 있어 강진면 생활의 중심지이다. 3·1운동에 참여한 엄길영(嚴吉永 1900~1977)의 출생지이기도 하며 강진교회가 있다.
○ 강서(江西) 마을 강진면 소재지 마을로서 이윤천(일명 필봉천)의 서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강서마을이라 구분한다. 강진면 5일장이 서고, 강진공용버스정류장 그리고 강진파출소 등이 있다. 인구 증가로 1978년 1월 1일자로 강진에서 분리하였다. 최근에는 강진시장 공터에는 작은 목욕탕, 강진농악 전수관, 천주교 강진공소, 농기계임대사업장 등을 조성하였다.
회진리(會津里)
회진리(會津里)는 조선시대 임실현 강진면에 속하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장동, 교항리, 갈담리 일부를 합하여, 섬진강과 갈담천이 합쳐지는 곳이므로 회진리라 하였다. 2017년 12월 31일 기준으로 회진리 전체 면적은 1,676,036㎡이고, 이중 밭은 288,174.0㎡, 논은 102,502.0㎡이다. 인구는 55세대에 91명(남 47, 여 44)이다. 회진리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조성된 두 곳의 고분군이 있다. 한편 조선말기에 지금의 회진리 오두목 마을 아래 장자터에는 당시 5만석을 하였다는 박장자가 살았던 마을로 유명하여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설화 속에 장자터의 유래를 기억하고 있다.
○ 회진(會津) 마을 장자터 강진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약 1㎞ 떨어져 있으며, 강진교를 건너기 전 오른편으로 장동(壯洞, 장자터), 교항(橋項, 다리목), 갈담(葛潭)을 합쳐 섬진강과 갈담천이 합류한다는 뜻으로 회진(會津)이라 하였다. 회진마을은 장자터 마을과 오두목(鰲頭目) 마을로 이루어졌는데, 장자터 마을은 조선후기 갈담천 너머 회진교를 지나면 강진면 갈담리에 위치한 다래끼봉 밑에 동메 라는 마을이 형성되었다가 이곳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옛날 박장자(朴長者)가 거주하였다고 하여 장자 터라 부른다고 한다. 박장자는 조선전기 이곳에 입향한 함양박씨 삼형제 박예, 박정, 박평 중 둘째 박정의 증손 박형신을 박장자라고 소개하고 있다. 박장자는 갈담리 잉어명당과도 관련이 있는 사람인데, 다래끼봉에 정자를 짓고 빈객들과 풍류를 즐기며 손님을 맞이했다고 한다. 그리고 오두목 아랫마을인 자신의 본가와 다래끼봉에 있는 정자 사이에 긴 줄을 연결하여 음식을 날랐다고 한다. 그러다가 젊은 시절에 이곳에 자기 아버지를 암매장했다가 함양박씨 문중으로부터 핍박을 받았던 이씨 성을 가진 어사가 이곳에 들렀다가 상경하여 임금에게 상소하기를 ‘갈담의 백만장자 박형신이 기마병을 키우며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그 바람에 박씨 가문은 풍지 박산이 되었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숨어살다가 박장자의 장손이 중국으로 망명하여 이부상서를 지냈다고 한다. 후에 그 후손에 조선에 사신으로 와서는 조정에 ‘가달’이란 곳을 찾아달라고 하였다가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물론 가달은 가단, 갈단을 뜻하는 지명 이었겠지만 당시 이를 알지 못하던 조정으로서는 이를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래끼봉은 강진면 갈담리 남쪽 산사면의 갈담천 끝자락으로 뻗어져 마치 누에가 누워있는 잠두(蠶頭)의 모습이자 청웅으로부터 이어지는 갈담천이 섬진강 본류와 합류하는 지점이다. 이 다래끼봉 아래로 섬진강을 건너는 나룻터가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런데 1730년 필사본『운수지』 누정조에는 갈담에 있는 견훤대(甄萱臺)를 설명하고 있는데, ‘갈담 위 잠두(蠶頭)에 있다. 사람들이 전하길, 견훤(甄萱)이 대 위에서 말타고 놀았다고 하여 달리 희마대(戱馬臺)라고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강진면 갈담 위의 견훤대는 이야기만 전하고 그 위치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강진면에 전하고 있는 박장자의 전설에 말이 등장하고 있고, 전설에도 이(李) 어사가 박장자에게 앙갚음을 하기 위하여 모략을 하였다는 부분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고, 다래끼봉에서 실제 기마병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언급이 없다는 점에서 견훤대에 전하는 희마대, 즉 ‘말타고 놀았던 곳’에 대한 이야기가 이 지역 함양박씨 가문의 이야기와 혼용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판단된다.
○ 회진마을(오두목) 오두목은 마을의 바위가 거북이 머리와 같다고 하여 오두목이라 하였다고 하며, 마을 남쪽으로 구미평(龜尾坪,거북이 꼬리)이 있고, 동으로 구등무형(거북이등)이 있고, 동북방에는 지굿치(至龜峙)가 있고 보동굴(步洞屈)이 있어 물형으로 보아 마을이름이 오두목(鰲頭目)이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일찍부터 동래정씨가 정착하여 세거하고 있다. 오두목 마을에 있는 가운데 샘에서는 정월대보름날에는 꼭 샘굿을 치고, 보름 전날에는 할머니들이 기름을 이용하여 불을 켜고 공을 드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곳에서부터 재를 넘으면 상필과 하필이 나오며 학석리 죽원까지 옛 길로 사람들이 많이 다니던 길이었다. 또한 학석리 죽원의 주막에서 문방 수방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여럿이 모여 민재를 넘어 문방리 수방리 옥정리까지 다니던 길이 있다고 한다.
용수리(龍水里)
용수리(龍水里)는 조선시대 임실현 강진면에 속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용산리, 수동, 대기리를 합하여 용산과 수동의 이름을 따라 용수리라 하였다. 1987년 1월 1일에 정읍군 산내면 종성리 종성 3리가 용수리에 편입되었다. 서쪽과 서북쪽으로는 정읍시 산내면과 인접해 있고, 남서쪽으로는 순창군 구림면, 남동쪽으로는 임실군 덕치면과 인접하고 있다. 2017년 12월 31일 기준으로 용수리 전체 면적은 10,129,869.㎡이고, 이중 밭은 789,723.0㎡, 논은 152,803.0㎡이다. 인구는 66세대에 142명(남 71, 여 71)이다. 용수리에는 삼국시대~고려시대 제철유적지가 3곳이나 있다고 조사되었으며, 1965년 우리나라 최초의 다목적댐인 섬진강다목적댐이 조성된 지역이다. 백운마을 가리점 들아래 섬진강변에는 1639년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설보(雪洑)가 있었던 흔적이 지금도 완연하며, 1.7㎞ 아래로 2012년에 조성된 덕치보는 설보를 대신하여 새로 조성된 것으로 덕치면 회문리 앞들과 강진면 희여들을 관개하는 중요한 보이다.
○ 백여(白如) 마을 강진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약 5㎞ 떨어져 있으며, 본래 수원백씨가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하여 흰 백자를 써서 백여(白如)마을 또는 희엿터라 불렀으며 이후 삭녕최씨(朔寧崔氏)가 이거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용수리가 되었으며 용수리라는 말은 회문산 상봉에서 북쪽으로 뻗은 용두봉(龍頭峰) 아래에 옥정호수가 있으며 섬진강댐 아래로 흐르는 맑은 물이 좋다는 뜻으로 용수리라 하였다고 한다. 용수리는 용산〔龍山,희여터〕, 수동〔水洞,물골〕, 대기〔大基,큰터골)를 말한다. 또한 백운마을과 함께 백여 마을도 마을 중앙에 도랑이 나있는데 이곳 또한 도랑을 중심으로 정읍군 종성리와 용수리 배여마을로 되어 있었다가 1987년 1월 1일자로 백운리와 함께 백여 마을도 통합을 하여 한마을을 이룬 지역이다. 마을은 토질이 좋아서 예부터 밭을 일구고 살았으며, 담배와 한지, 삼베농사 등 밭작물을 주로 하였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한때 이 마을에는 하루에 천냥이 들어오고, 천냥이 나가는 곳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부자마을이었다고 한다. 인구수가 제일 많을 때에는 가구 수가 100여 호에 이를 정도로 상당히 큰 마을이었으나 한국전쟁 중에 마을에 큰 불이 난 뒤부터 마을 사람들이 많이 떠나갔다고 한다. 윗마을과 아랫마을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느티나무는 당산나무이며 마을에서는 음력 정월 대보름날에 마을 굿을 하였으나, 1970년대부터 없어졌다고 한다.
○ 백운(白雲) 마을 강진면 소재지에는 서쪽으로 약 7㎞ 떨어져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태인군 종성리 백운동이라 하였고 백운동에는 묵동, 울령동, 사자동 등 3개 마을로 형성되어있었다. 그 후 1987년 1월 1일 정읍시 산내면 종성 3리에서 임실군 강진면 용수리로 행정구역이 개편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은 1600년대 김해김씨 삼현파 김수(金洙)가 형조참의로 있다가 임진왜란 때 전사하자 부인 옥천 조씨가 둘째 아들을 데리고 김해에서 이곳으로 피난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 마을을 가리점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는 제철유적지가 있어 부른다고 한다. 또한 30번 지방도로에서 백운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오른쪽 섬진강변에는 1639년 덕치면 회문리 앞들에 관개하기 위하여 보를 막았다는 옛 설보(雪洑)가 위치하고 있는 곳이다. 임진왜란 당시 덕치 회문리로 입향 하였던 조평(趙平) 선생은 1623년 이괄의 난과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 등 국가변란이 있을 때마다 의병활동을 하였으며, 1625년에는 정사원종공신에 오르기도 했다. 1639년경 덕치면 회문리 사람들의 오랜 숙원이던 덕치 보(洑)를 조성하는데 앞장을 섰던 조평 선생은 당시 꿈에 선인이 나타나 설흔(雪痕)를 따르도록 하였던 것이 원인이 되어, 덕치면 회문리 수구 맥이로 부터 약 8㎞가 떨어진 이곳 용수리 가리점 앞까지 수로를 내고, 섬진강변 자연장애물을 이용하여 보를 막을 수 있었다. 이 보를 설보(雪洑)라 하고 있으며 2010년경 설보로 부터 약 1.7㎞ 하류 쪽에 콘크리트로 조성한 덕치 보를 설보로 명명하였다.
○ 용수(龍水) 마을 강진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약 8㎞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회문산 상봉에서 북쪽으로 뻗어 내려온 산이 마치 용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용두산이 마을 남서쪽을 감싸고 있으며, 섬진강 건너 맞은편으로는 백련산 상봉에서 서쪽으로 뻗은 필봉산이 자리하고 있다. 필봉산과 용두봉을 기둥삼아 1965년 섬진강 다목적댐을 조성하였으며, 그 아래에 마을이 형성되어 용수리라 불렀다. 용수리 안에는 절골〔寺洞〕, 큰터골〔大基〕, 물골〔水洞〕이 이에 속하며, 6.25한국전쟁 이후 마을이 소실되면서 폐촌이 되었다. 이후 섬진강 댐 아래쪽에 띄엄띄엄 거주하는 사람이 있어 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절골 위쪽에 섬진강댐 관리사무실이 건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섬진강다목적댐 재개발사업 일환으로 댐의 여수로를 조성하여 물이 많을 때에는 자동적으로 용수리 쪽으로 흐르도록 개발하였다.
옥정리(玉井里) 옥정리는 조선시대 임실현 강진면 지역으로 손실이라고 부르다가 어느 날 이곳이 머지않아 옥정(玉井)이 될 것이라는 예언에 따라 이름을 옥정리라고 하였다는 설과, 마을위쪽에 옥같이 생긴 맑은 샘이 있어서 그 샘을 옥정이라 불렀다고 한다. 아마 후자가 신빙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옥정리라 하고, 배소〔舟所〕가 있으며, 옥정초등학교에 신사(神社) 터가 있고, 항일투쟁기 운암호를 막고 일본 총독이 쓴 운암대제(雲巖大堤)란 암각서가 있다.
○ 옥정(玉井) 마을 강진면 소재지에서 북서쪽으로 약 10㎞ 떨어져 있으며, 처음에는 손씨라는 사람이 거주하면서 마을 이름을 손실〔孫實〕이라 부르다가 어느 날 이곳을 지나던 도사가 이곳이 머지않아 옥정(玉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으며, 마을위쪽에 옥같이 생긴 맑은 샘이 있어서 그 샘을 옥정이라 불러 1914년 행정구역 개편할 때 옥정리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건네 까끔, 고랑골, 공두산재, 너추실, 뒷재, 매바우, 매살미골, 배소, 소승날, 양지리, 왕바우골 등으로 마을내의 이름이 불러지고 있다. 옥정리 배소와 정읍시 산외면 종성리 황토리 마을을 연결하는 운암 구댐이 1925년 착공하여 1929년 11월에 준공되었으며, 길이 305m, 높이 40m로 아치형 콘크리트 중력식 댐으로 조성되었다. 운암 구댐은 동진수리조합 관개용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운암면 운정리 취수구에서 정읍군 산내면 종성리 팽나무골에 이르는 성옥산 중턱에 운암수로를 뚫고 수계를 돌려 동진강에 유입케 하였다. 이렇게 도수되는 잉여수량에 대한 일종의 수리사용료를 남선 수력으로부터 징수하는 조건으로 발전소를 건립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운암발전소이다. 운암발전소는 1931년 10월 조성되어 1985년까지 운영되었으며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 팽나무정의 성옥산 밑으로 795m의 도수터널을 뚫고 해발고도 100m 지점에 유효낙차 75.2m, 발전용량 5.120kw 규모의 남한 최초의 수력발전소를 조성하였다. 1929년에 완공된 운암 구댐은 1965년 섬진강 다목적댐이 조성됨에 따라 폐기되었으며, 가믐으로 인하여 담수 량이 줄어들면 당시의 골조와 운암댐 건립기념비, 운암대제(雲巖大堤)라고 씌여진 암각 서를 볼 수 있다. 1965년 최초의 다목적댐으로 건립된 섬진강댐은 운암 구댐으로부터 하류 쪽으로 약 2㎞ 남쪽에 강진면 용수리와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를 이어 새로 축조되었다. 댐의 높이는 63m, 댐길이는 344.2m, 계획홍수위는 197.9m, 상시 만수위는 196.5m, 저수면적은 26.5㎢, 저수위는 175m이다. 이렇게 옥정리 옥정마을은 1965년 섬진강댐의 축조로 인하여 수몰되었기 때문에 수몰선 위로 마을을 옮겨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섬진강 다목적댐이 1965년 12월에 준공되고, 준공식장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하여 운암댐은 항일투쟁기에 만들어진 구댐을 말하는 것이므로 다른 이름을 찾아보라고 지시하여, 새로 조성한 댐을 마을 이름을 따서 옥정호(玉井湖)와 옥정댐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문방리(文方里) 문방리(文方里)는 조선시대 임실현 강진면에 속하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용강리, 수방리, 산막리와 문치리, 옥정리의 각 일부를 합하여 문치와 수방의 이름을 따서 문방리라 하였다. 2017년 12월 31일 기준으로 문방리 전체 면적은 3,352,725.0㎡이고, 이중 밭은 711,787,0㎡, 논은 295,468.0㎡이다. 인구는 58세대에 104명(남 56, 여 48)이다. 문방리에는 나루터 흔적으로 용강천 배나루가 있었다.
○ 문방(文方) 마을 강진면 소재지에서 북서쪽으로 약 10㎞ 떨어져 있으며 문방과 산막으로 나뉘어져 있다. 처음에는 문치(文峙,민재)라고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문방(文方)으로 고쳐 불렀다. 병자호란 당시에 동래정씨 정덕보가 피난해 왔다가 정착하였으며, 여산 송씨도 함께 이거 하였다고 한다. 산막마을은 산이 병풍처럼 우뚝하게 둘러쳐진 모양으로 산수가 아름답고 양지바른 곳에 위치한다. 조선시대에 강진면 에서는 이 마을에서 처음으로 참봉이 나왔다고 한다.
○ 수방(水舫) 마을 강진면 소재지에서 북서쪽으로 약 11㎞ 떨어져 있다. 수방산(해발 500m)의 동남방에 자리하고 있어서 수방(水方) 또는 소방(艘舫)이라고 불렀다. 마을 뒷산이 수박모양과 같이 둥글게 생겼을 뿐만 아니라 수박명당이 있어서 수박, 또는 수방이라고 불렀다고 하며, 한편으로는 마을의 형국이 배와 같다하여 수방(水舫)이라 하였다. 마을 뒤쪽에 북쪽의 바람과 나쁜 기운을 막기 위해 서어나무, 느티나무 등으로 조성된 숲이 있다. 수방마을에 있는 우물에서는 정월대보름에는 샘굿도 치고, 보름 전날에는 마을 아낙네들이 기름불을 만들어 불을 켜고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학석리(鶴石里)
학석리(鶴石里)는 조선시대 임실현 강진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죽원, 내동, 상기리, 율치, 용동 일부를 합하여, 학 바우의 이름을 따서 학석리라 하였다. 2017년 12월 31일 기준으로 학석리 전체 면적은 6,507,322.0㎡이고, 이중 밭은 912,285.0㎡, 논은 273,810.0㎡이다. 인구는 76세대에 181명(남 93, 여 88)이다. 학석리에는 조선시대 두 곳의 도요지가 있었는데, 도요지에 제공하던 백토를 생산하던 곳이 있다. 죽원마을에는 과거 삼나무와 닥나무를 삶는데 사용하였던 삼굿 솥이 지금도 남아있다.
○ 학석(鶴石) 마을 강진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4㎞ 떨어져 있으며 죽원, 내동, 상기(웃터), 산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웃터인 상기마을 입구에 있는 바위가 마치 학 같은 모양이어서 학석 이라고 불렀다. 김씨라는 사람이 이거한 이후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어떤 사람이 웃터 첫 집에서 동냥을 달라고 하였으나, 주지 않자 학의 머리를 잘라버리는 일이 발생하였고, 그 이후 마을이 점차 빈촌이 되자 시멘트로 머리 모양을 만들어 붙인 후로 빈촌을 면하였다고 한다.
○ 율치(栗峙) 마을 강진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5㎞ 떨어져 있으며, 강진면 소재지 북쪽으로 운암대교를 지나는 27번국도로 밤재를 넘기전 학석리 구간의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마을에서 하운암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밤재 또는 율치라고 하였다. 장수황씨 후손이 이거하여 정착하였다고 하며, 상율치 마을 저수지 위쪽 장수황씨 묘역이 있으며 묘역 주변에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 비보 숲으로 조성된 것이다.
방현리(訪賢里)
방현리(訪賢里)는 조선시대 임실현 강진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오치, 용동, 하중방리의 각 일부와 구고면의 이윤리를 합하여 방현리라 하였다. 방현리 오른쪽으로 백련산(759m)을 경계로 청웅면 두복리와 인접해 있으며, 북쪽으로 백련산 706고지를 경계로 운암면 청운리와 맞닿아 있다. 2017년 12월 31일 기준으로 방현리 전체 면적은 6,590,746.0㎡이고, 이중 밭은 626,966.0㎡. 논은 128,076.0㎡이다. 인구는 81세대에 204명(남 96, 여 108)이다. 방현리에는 삼국시대~고려시대 고분군이 조사, 보고되었으며, 성좌암 터가 남아있다.
○ 방현(訪賢) 마을 강진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4㎞ 떨어져 있으며, 27번 국도로 필봉리를 지나 오른쪽에 있으며 방현과 이윤마을로 나뉘어져 있다. 조선 중기에 천안 전씨가 정착하였으며, 마을 뒤편에 용소 폭포가 있으므로 마을 이름을 수동이라 하였다. 마을에서 400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용소와 폭포는 임실군에서도 드물게 생성한 폭포로 3단의 폭포와 함께 2개의 용소를 이루고 있다. 폭포 주변에는 자연림으로 숲을 이루고 있으며 그 숲은 하류의 마을까지 이어지고 있다. 마을 뒷산에 있는 성굴암(성좌암)에 어진 도사가 찾아왔다고 하여 방현(訪賢)리라 이름 불렀다고 한다.
○ 이윤(伊尹) 마을 강진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6㎞ 떨어져 있으며, 27번 국도로 필봉리를 지나 오른쪽으로 이윤마을 입구에 용동마을이 있고, 백련산 706고지 방향으로 산을 오르면 백련산 해발 300m~400m 구간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니 이곳이 이윤마을이다. 이윤마을은 조선시대 강화노(江華魯)씨가 피난 차 이곳에 안착하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며, 마을이 믿을 수 있는 피난지라 하여 이윤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윤 선생이 다녀갔다 하여 마을이름을 이윤이라 하였다고도한다. 용동마을도 역시 노(魯)씨가 거주했으며 갈용음수(渴龍飮水), 즉 용이 목말라 물을 찾는 형국이라 용동이라 하였다고 한다.
필봉리(筆峯里)
필봉리(筆峯里)는 조선시대 임실현 강진 면에 속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상중방리와 하중방리, 갈담리의 각 일부를 합하여, 필봉산(筆峯山)의 산 이름을 따서 필봉리라 하였다. 2017년 12월 31일 기준으로 필봉리 전체 면적은 5,892,092㎡이고, 이중 밭은 633,960㎡, 논은 440,601㎡이다. 인구는 71세대에 134(남 74, 여 60)이다. 필봉리에는 삼국시대~조선시대 고분군, 청동기시대 고인돌군, 조선시대 도요지, 그리고 산돌과 누석단이 조사 보고되었으며, 이외에 당산목이 있으며 이곳에서 지금도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 상필(上筆) 마을 강진면 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약 2㎞ 떨어져 있다. 마을 서쪽에 있는 산이 붓끝과 같다고 하여 필봉이며, 마을이 임실현(任實縣)으로부터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기에 상필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중방리, 혹은 중뱅이 골이라고 하였다. 동쪽에 있는 산이 암소 같은 형국이고, 마을 위치가 외양간 같다고 하여 중방리(中方里)라 하였다고 한다. 엄씨, 박씨, 송씨, 김씨들이 정착하여 살고 있다. 마을 앞 70m 지점에 있는 느티나무는 상필 마을의 당산나무로 매년 정월이면 마을에서 왼새끼를 꼬아 당산나무에 띠를 두르고 숯과 솔가지, 댓잎가지 등을 꽂고 당산제를 지내다가 1970년대 없어졌다. 그러다가 임실필봉농악이 호남좌도농악으로서 1980년대 전국 민속예술 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이래, 전주대사습놀이 등에 출전하면서 지평을 넓혔고, 1988년에 국가지정무형문화재 제11-5호로 지정되었다. 1대 상쇠 양순용의 뒤를 이어 2대 상쇠 양진성이 필봉농악을 이어받았다. 이후 양진성 보유자는 임실군과 함께 필봉문화촌 조성, 필봉농악전수관 및 한옥체험시설을 갖추는 등 다양한 지원을 받았으며 명실공히 호남좌도농악의 전승지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처럼 임실필봉농악보존회의 활성화와 함께 매년 정월대보름에 상필 마을에서 매년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주민들에 의하면 마을에는 할머니 당산나무와 할아버지 당산나무가 있었는데, 할머니 당산나무는 항일투쟁기에 일본인들에 의해서 베어지고, 할아버지 당산나무만 남아 있다. 마을 입구에 누석단과 선돌이 있다. 마을 앞 개울가 건너편에 주민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던 우물에서는 대보름이면 마을 굿과 함께 이 샘에서 샘굿을 쳤다고 한다. 샘굿을 치기전의 구음은 “아따 그 물 좋구나. 아들 낳고 딸 낳고 미역국에 밥 마세”라고 소리하였다고 한다.
○ 하필(下筆) 마을 강진면 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약 3㎞ 떨어져 있다. 필봉산 아래 있다고 하여 필봉(筆峯)이라고 불렀으며, 상필 마을의 북쪽에 위치하였고, 현(縣)으로부터 상필 마을 보다 약간 떨어진 위치에 있다고 하여 하필마을이 되었다. 600여년 전에 진주강씨가 터를 잡았으며 그 뒤 경주김씨와 나주임씨가 들어왔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너먼 터라고 하여 지금의 하필마을에서 약 1㎞ 떨어진 곳에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곳에는 도둑이 어찌나 심한지 살 수가 없어서 강성수라는 사람이 지금의 하필마을에 터를 잡아 이사한 후 온 마을이 옮겨졌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는 강진면의 한 가운데에 있다고 하여 중방리(中方里)라고 불렀다. 전설에 의하면 마을 앞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임진란때 이곳을 지나는 한 도승이 바위를 없애야 마을에 재앙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은 이 말만 믿고 큰 바위를 없애버렸다고 한다. 그 후 큰 재앙은 없었으나 마을은 마도지석(磨刀之石)처럼 가난해졌다는 말이 전해온다. 그러나 마을 앞에 당도하면 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 바위를 구시바위라고 부른다. 또한 이 바위는 엎어져 있다고 하며 엎어져 있는 바위를 뒤집어 바르게 놓고 싶어도 혹시나 재앙이 따를까봐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는 주민들의 이야기이다. 또한 하필마을에 있는 찬샘 에서는 정월 대보름이 돌아오면 이른 새벽에 우물가에 기름으로 불도 켜고 저녁에는 샘굿도 빠지지 않고 쳤다고 한다. 한편 하필마을 앞에는 600여년전 진주 강씨 3형제가 심었다고 전하는 고목이 있는데 떡갈나무 2주와 느티나무 1주가 자라고 있다. 이 3그루의 나무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큰 나무로 하필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보고 있는 숲이다. 이 나무들은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국가에서 관리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