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과 강진의 하천
임실의 지형과 자연
전라북도는 우리나라 서남부에 위치한 道이며 북으로는 금강을 경계로 충청남도와, 동으로는 소백산맥으로 경상남도와, 남으로는 노령산맥을 경계로 전라남도와 접한다. 도의 서부 지역은 서해와 접하며, 동진강과 만경강이 흘러 새만금을 경유하여 서해바다로 유입된다. 이들 두 江 유역은 우리나라 제1의 곡창지대인 호남평야를 이루고 강 하구에는 새만금 방조제가 축조되어 지금은 매립공사가 계속 진행되고 있다. 동쪽으로는 장수군 水分里에서 금강이 발원하여 북쪽으로 흐르면서 형성된 고을이 무주·진안·장수군이며, 이 일대를 무진장이라고 한다.
전라북도의 남쪽인 임실은 남해로 유입하는 섬진강의 상류에 위치하고 있다. 이 강(江)은 팔공산(八公山, 1,151m)아래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 데미샘 에서 발원하여 진안 마령을 거치고 임실 관촌과 신평을 지나면서 오원천을 이룬다. 그 후 신평 원천리 부터 섬진강으로 명명되어 옥정호를 이루고 강진면과 덕치면을 지나 순창과 남원을 거쳐 전라남도와 경상남도의 하동포구로 이어져 남해로 흘러 나간다.
전라북도 지명은 1896년(고종33) 전국이 13도로 개편되면서 이전의 전라도를 분리하여 전라북도와 전라남도로 나뉘면서 처음 사용되었다. ‘전라도’란 지명이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시대부터이다. 통일신라시대의 9주 5소경 체제하에서 전라도 일대는 전주와 무주에 해당되었다.
고려 시대에 들어와 12목(牧)에서는 전주목·나주목·승주목이 해당되었으며, 10도에서는 강남도(江南道,현 전라북도 일대)와 해양도(海陽道,현 전라남도 일대)로 불렀다. 이후 행정구역 변경을 거쳐, 현종 때 5도 양제를 실시하면서 이전의 강남도와 해양도를 합쳐‘전라도(全羅道)’라 칭하며 처음 사용되었다. 道 지명은 강남도와 해양도의 소속 州였던 全州와 羅州의 머리글자를 합성하여 만든 것이다. 당시 전라도에 속한 郡縣은 1牧 2府 18郡 81縣으로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407년(태종7)에 8도제가 실시되면서 다른 지역은 지명이 대부분 바뀌었으나 전라도와 경상도의 지명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당시 행정 편의상 전라도를 좌·우도로 나누어 동부 산악지대를 좌도로, 서쪽의 평야지대를 우도로 일컬었다. 인조 때에는 全南道·光南道라고 하다가 1728년(영조4)에 全光道라고 하기도 하였으나 일시적이었다. 1895년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제가 실시되면서 행정지명으로서‘전라도’는 없어지게 되었다. 이 제도는 불과 1년 2개월 만에 폐지되고, 1896년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이전의 전라도를 전라북도와 전라남도로 나누면서 지명이 생긴 것이다. 이때에 남원부의 구례를 전라남도로 편입시키고 북면 6개방이 임실로 편입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을 통해 25개였던 郡ㆍ縣은 1부 14군으로 통폐합되었다. 광복이후인 1963년 금산군을 충청남도로, 편입시키는 등 몇 차례의 행정구역 변경을 통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전라북도는 현재 6개시 8개 군으로 형성되었다.
임실군은 전라북도의 동 남쪽 내륙에 위치하고 대부분 섬진강 상류의 중산간지로 전체면적 597㎢중 75%가 임야에 속하며 20여%가 농경지이다. 노령산맥에 속하여 북동쪽으로 진안군, 남동쪽으로 남원시, 남쪽으로 순창군, 북서쪽으로 정읍과 완주군에 접해 있다. 노령산맥이 군을 지나고 있어 산지가 많은 편이고, 일부 지역에 분지가 발달되어 있다.
동쪽으로는 성수산에서 발원한 둔남천이 서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남쪽으로 흐르고 섬진강 상류인 오원강은 중간에 관촌 방수리에 장제무림(長堤武林)을 이루며 성미산성과 방현 산성의 사이를 지나 사선대(四仙臺)에 풍광을 이룬다. 다시 신평면 대리와 원천리를 지나면서 넓은 평야를 관개하고 있으며, 운암면에 이르러 규모가 큰 옥정호가 1965년 에 준공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역사적으로 임실은 삼국시대 마한의 구고현(九臯縣)에 속해 있었다가 임실현(별호인 雲水縣이라고도 함)으로 개칭하였다. 또한 통일신라시대 남원부에 속해 郡이 되었다가 임실縣이 되었다. 임실군에 현(縣)이 둘이었는데 마령현(馬靈縣)과 구고현(九臯縣)이라는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이를 통해 본다면 임실은 그 이전부터 지명을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는“백제시대에 잉힐(仍掱)이었던 임실이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임실로 다시 고쳐졌다.”고 하는 기록이 있어 잉힐(仍掱)이라는 이명(異名)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최근의 유적을 통해 살펴본 임실은 가야시대의 문명이 존재했던 지역으로 평가되기도 하며 중국의 기록에는 백제와 가야의 중간에 기문(己汶)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이는 지금의 임실이라는 학자들의 견해도 이어지고 있다.
『삼국사기지리지』에 “임실은 본래 백제의 郡이었는데, 경덕왕이 주군(州郡)의 이름을 고칠 때에도 임실은 고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고려사지리지』에 “고려시대에 와서 남원부(南原府)에 소속시켰으며, 명종 2년(1172)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고 하였다. 이때 수령관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공민왕 3년(1354)에는 구고현이 郡으로 승격되었으나 구고군은 지군사(知郡事)가 배치되어 수령관이 된 것은 아니었으며, 거령현과 함께 여전히 남원부에 속해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임실 현으로 수록되어 “태종 13(1413) 계사(癸巳)년에 감무를 고쳐서 현감(縣監)으로 하였다.”라고 하였다. 또한 임실에는 역참(驛站,찰방역)으로는 전국 22역도에 525개소의 역이 있었는데 임실에는 오수역참[察訪]이 있었고 역참에 11개의 역을 관할하였다. 한편 임실에는 오원역(烏院驛)과 갈담역(葛潭驛)도 있었는데 이는 삼례역참(찰방)에 속하여 현재의 임실군에는 총 3곳의 역이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후기의 동국여지지(현종11년,1670년)의 기록에 의하면 面수가 12면으로 나와 있고, 1789년의 면수와 인구수를 보면 18개면에 里수는 145리이고 호수는 6,408호이며, 인구수는 27,516명으로 기록되어 있어 지금의 인구수와 비슷한 통계로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이 백제와 통일신라, 그리고 고려와 조선왕조를 겪어오면서 많은 변화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임실이란 지명은 역사시대 초기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쓰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전국 자치단체 중 순 우리말로 지명을 쓰고 있는 곳이 서울과 임실이 유일하다고 한다. 1400년 전부터 임실은 백제의 임실로 불리어 졌는데 지금도 당시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적이라고 한다.
하천과 강의 정의
하천(河川)이란 일정한 물길, 즉 하도(河道)를 따라 흐르는 류수(流水)를 말한다. 국어사전에서는 하천을 작은 것부터 큰 것 순으로 각각 시내(골짜기나 평지를 흐르는 과히 크지 않는 내), 내(시내보다는 크고 강보다는 작은 물줄기), 강(크고 길게 흐르는 내)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토목용어사전같은 전문서적에는 강, 내, 시내 같은 단어는 없고 ‘하천’이라는 용어에 대해 ‘비나 눈이 되어 공중에서 내려온 天水가 중력에 의하여 여러 가지 저항을 물리치고 낮은 곳을 향하여 유하(流下)하여 호수, 또는 바다로 들어가는데 이 물이 흐르는 가늘고 긴 요지(凹地)를 하도(河道)라고 하며, 하수(河水)에 접하는 부분을 하상(河床)이라 하고, 이것과 유수를 합하여 하천이라 칭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강과 하천이란 용어가 일부 혼동되어 사용되기도 하지만 시내와 내, 강을 총칭하는 말로서 하천이란 용어가 쓰이고 있으며, 자연현상이나 인위적인 작용에 의해 지구표면에 만들어진 물이 흐르는 길이 바다로 이어지기 전까지를 하천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하천의 이름을 규모가 큰 하천이나 본류를 강, 그보다 규모가 작거나 지류를 천(川)으로 부르고 있다. 중국에서는 하천이름에 하(河)와 강(江)을 붙이고, 일본에서는 모든 하천을 천으로 부르고 있어 우리나라와 다소 차이가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물의 흐름에 따라 부르는 용어의 순서를 정리하면 먼저 천(泉)→ 곡(谷)→ 계(溪)→ 천(川)→ 하(河)→ 강(江)→ 해(海)의 순서로 부를 수 있다. 즉 샘[泉]에서 물이 솟아나 골짜기(谷)를 이루어 흐르다가 합수되어 작은 시내(溪)를 이루고, 다시 여러 시내에서 합수되어 천(川)이 형성되며, 다시 합수되면 보통의 강[河]이 된 후 큰물줄기(江)를 이루다가 바다(海)를 이룬다는 뜻이다.
우리는 흔히 물이 많으면 강이나 강의 본류이고, 물이 적은 하천은 천(川)이나 지류(支流)라 알고 있으나, 동진강, 영산강, 탐진강, 인천강 등은 안성천, 삽교천보다 길이와 물의 양이 적어도 강이라 부르고 있다. 이 때문에 하천의 규모(크기)를 규정하는 기준은 강의 길이인가, 아니면 수량인가가 문제이다. 그리고 하천지리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사항은 그 하천의 발원지와 이곳으로부터 바다로 이어지는 하구까지의 흐름의 길이, 즉 유로연장, 그리고 공중에서 내려온 강수가 그 하천으로 흘러들어 오는 유역 면적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 하천에 대해 그 발원지로부터 하구까지 본류, 또는 원류와 지류 및 그 합류되는 지점들에 대해 물의 흐름을 따라 내려가면서 그의 명칭과 경유하는 지역의 역사적 사건, 고적, 전설 등 그 지역에 관련된 일체의 것을 서술한 대표적인 지리서는 1814년 조선 말기 실학파 학자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의 대동수경(大東水經)이 있다. 다만, 우리나라 10대강 중에서, 북한지역의 6대강(압록강, 두만강, 대동강, 청천강, 예성강, 임진강)만 서술하고 남한지역의 4대강(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섬진강)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아쉬운 점이 있다. 우리나라 하천 유로 연장과 유역 면적에 관한 기본적인 조사와 수치작업은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졌고, 1918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에서 발간한 조선지지자료를 현재까지 학계나 행정기관, 그리고 교과서에 지금도 금과옥조 격으로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잘못된 점은 유역의 구분과 하구의 위치를 잘못 선정한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우리나라 학계나 행정부처에서 이러한 사실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왜곡된 자료를 인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때부터 1900년대까지 국가의 공인개념으로 사용되었던, 실존하는 우리 전통지리서인 산경표(山經表)의 15개 산줄기(백두대간, 1정간 13개 정맥)가 이 땅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항일투쟁기에 왜곡시킨 땅속의 지질구조선을 그린 ‘13개 산맥’이 우리나라 지리를 대표하게 되었고, 100년이 가까워지도록 개정되지 않고 있다. 일제가 왜곡시킨 ‘13개 산맥’의 가장 중요한 오류는 땅 위의 실존하는 지리를 따르지 않고, 땅속의 지질개념으로 되어 있으며, 하천이 산맥을 넘나들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아무런 객관적, 공개적 검토 없이 그대로 따르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전통지리를 대표하는 지리서인 산경표(山經表)의 기본원리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다. 즉, 산은 스스로 물을 가르고, 물은 산을 넘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 산은 물길의 젖줄이자 울타리라고 정의할 수 있다. 산경표는 이러한 원리를 적용하여 우리나라 물줄기를 유역별로 나누어 물의 흐름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산경은 산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흐름, 즉 산줄기를 말한다. 그리고 산이 있으면 강이 있어 서로 조화를 이룬다. 따라서 산줄기를 일컫는 산경(山經)이 있으면 반듯이 물줄기를 일컫는 수경(水經)이 있게 마련이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산도 흐르고 물도 흐른다.’는 뜻이다.
전라북도 하천
전북지역은 산줄기〔山經〕과 물줄기〔水經〕의 요충지라 할 수 있다. 전북의 주요 산줄기는 백두대간, 금남호남정맥, 호남정맥, 금남정맥 등 4대 산줄기는 전북의 하천유역을 가르는 분수령이 된다. 백두대간(무주 삼도봉-지리산 삼각고지)은 동쪽에 낙동강, 서쪽에 섬진강을 가르고, 금남호남정맥(장수 영취산-완주 모래재 위 주화산)은 북쪽에 금강, 남쪽에 섬진강을 가른다.
호남정맥은 좌측에 섬진강, 우측에 만경강, 동진강을 가르고, 실질적인 금남정맥은 남쪽에 만경강, 북쪽에 금강을 가른다. 그 밖에 영산기맥(내장산 호남정맥 분기점 530봉-입암산-문수산-고산)은 남쪽에 영산강, 북쪽에 인천강을 나누며, 모악산 줄기(호남정맥분기점-국사봉-모악산-성덕산-진봉면 국사봉)는 남쪽에 동진강, 북쪽에 만경강의 분수령이 된다.
전북은 동고서저(東高西低)지형으로 동부지역은 대부분 산간으로 유량(流量)이 풍부한 반면, 인구가 적고 농경지가 적다. 반면 서부지역은 대도시와 산업단지, 그리고 넓은 평야지가 집중되어 생활, 산업, 농업용수가 가장 많이 필요한 지역이다. 하지만 만경강과 동진강 유역에는 유량이 턱없이 부족하여, 자력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금강에 용담댐, 섬진강에 섬진강다목적댐을 건설하여, 이를 해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전북지역의 물줄기를 이루는 국가하천은 11개, 지방1급 하천이 4개, 지방2급 하천은 471개이다. 아울러 전북지역은 직할하천, 지방하천, 준용하천을 포함한 우리나라 하천 총 연장의 15.4%를 점유하여, 16%를 점유하고 있는 경남에 이어 하천의 길이가 2위이다.
전북에서 발원하는 5대강 중에서 4개는 서해, 1개는 남해로 흘러간다. 임실 운암을 관통하는 섬진강은 전북 진안군 백운면 원신암 마을 뒤, 데미샘에서 발원하여 전남 광양만의 남해까지 225.0km를 흘러간다. 금강은 장수군 장수읍 원수분 마을 뒤 ‘뜬봉샘’에서 발원하여 충북, 충남을 거쳐 군산의 금강하구 둑을 지나 서해까지 397.3km를 흘러간다.
만경강은 완주군 동상면 사봉리 밤티 마을 남쪽 계곡 밤샘에서 발원하여 김제군 진봉면 국사봉 옆 서해까지 81.7km를 흘러간다. 동진강은 정읍시 내장면 내장산 까치봉 북동계곡 ‘까치샘’에 발원하여 부안군 동진면의 서해로 51.0km를 흘러간다. 인천강은 고창군 고수면 은사리 칠성 마을 수량동 뒤 ‘명매기샘’에서 발원하여 고창을 관통하고 경수산과 소요산 사이의 줄포만의 서해까지 31.0km를 흘러간다.
전북의 동쪽인 남원시 운봉읍, 산내면, 인월면은 낙동강수계 유역이며, 지리산 고리봉(1,305m)과 세걸산(1,300m) 등에서 흘러드는 계류와 주천, 인월, 산내 사이의 협곡을 통과 뱀사골에서 흘러나오는 계류가 산내면에서 합류된다. 이곳부터 만수천으로 불리며 낙동강 수계의 남강의 지류인 임천강(臨川江)상류이다. 뱀사골지류는 노고단(1,507m)에서 산내까지 20.0km의 급류이며, 뱀사골산장에서 반선까지의 10.0km를 뱀사골이라 한다.
또한 전북의 서쪽은 서해바다를 인접하고 있는데, 68개의 섬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중 41%인 28개 섬이 사람이 살고 있고, 51%인 40개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이다. 그러나 군산에서 부안의 변산까지 33.0km의 방조제를 막는 새만금 사업이 완공되고 있어, 섬의 수가 줄어들고 만경강과 동진강의 유역과 강의 길이에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천의 발원지는 역사적으로 어느 한 곳을 지정하여 실증적인 검증 없이 문헌에 막연히 발원지로 기록된 역사. 문화적인 발원지가 있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증적인 방법으로 측량하고 계측한 발원지가 있다. 전북의 하천지리에 대한 대부분의 자료는 1918년 조선총독부의 임시토지조사국에서 발간한 조선지리자료에 근거하고 있는데, 하천지리와 강의 발원지에 대한 오류가 많음을 알 수 있다.
<섬지강의 발원지 데미샘>
섬진강(국가하천 1급)
섬진강이라는 이름은 오원천과 신덕면 지장천의 합류지점인 신평면 원천리에서 부터 덕치면 구담마을까지 49.4km가 임실군 지역을 흐르고 있다. 섬진강의 지류로는 신덕면 지장리에서 발원한 지장천과 오궁리 상촌에서 발원한 오궁천이 지장천과 합류하여 흐르다가 신덕면 금정리에서 발원한 주치천이 합류하여 신평면 원천리에서 오원천과 합류한다.
섬진강 유래와 발원지
섬진강은 고려 우왕 11년(1385년) 왜구가 섬진강 하구에 침입했을 때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 떼가 울부짖어 왜구가 광양만 쪽으로 피해갔다는 전설이 있다. 이때부터 두꺼비섬(蟾), 나루진(津)을 쓰게 됐다. 현재 전남 광양군 도사면에는 섬진리와 섬진나루가 있다.
1458년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에는 강 하구에 모래가 많아서인지 모르지만 광양 다사강(多沙江)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486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섬진은 남원부 진수진이 남쪽으로 흘러 진주 화개현에 이르러 서쪽으로 용왕연(龍王淵)이 되었는데, 그 동쪽 언덕이 곧 진주 악양천 경계이다. 동남쪽은 바다로 들어갔는데, 고려 때에 이물이 거슬러 흐르는 3대강이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지리전고 편에는 ‘섬진강의 근원은 진안의 중대 마이산에서 나와서..(중략). 고려 때에는 이 물이 배류(背流)하는 3대강의 하나라 하였고, 이름을 두치강(斗峙江)이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었다. 1861년에 제작된 「대동여지도」에는 하구에 섬진이 있고 하동. 화개를 지나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져 서쪽으로 보성으로 향하고, 북쪽으로 전북 순창을 지나 진안에 이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섬진강의 발원지가 위치해 있는 상초막이 골 위의 1,080고지는 금남호남정맥 상의 천상데미 이다. 천상데미는 하늘로 오르는 봉우리라는 의미이다. ‘데미’는 전라도 방언으로 ‘더미’를 뜻하며, 더미는 봉우리를 의미한다. 발원 샘인 ‘데미샘’은 한국 땅이름학회 회장이었던 고 이형석박사에 의해 천상데미에서 따와 지은 이름이며, 아무리 가물어도 샘물이 그치지 않는다. 아울러 상초막이 골이란 지명은 옛적에 사람들이 이곳에 초막을 짓고 살았는데, 위쪽에 초막이 있던 곳이 ‘상초막이 골’이고, 아래쪽에 있던 곳을 ‘하초막이골’이라 불렀다.
1918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에서 발간한 「조선지지」에는 ‘섬진강수원은 전북 진안군 부귀면, 하구는 전남 광양군 진월면과 경남 하동군 금남면, 길이 212.3km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강의 하구인 경남 하동군 금남면 갈도 삼각점(52.2m)은 같으나, 발원지를 진안군 부귀면 이라고 오류를 범하여, 강의 길이가 225.0km보다 12.7km나 짧게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오늘날까지 금과옥조 격으로 국어사전, 백과사전, 지리 관계 서적을 비롯한 각 급 학교 사회과부도에 활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의 강(이형석 저)’에 의하면, “1:50000 지형도를 가지고 섬진강 상류 물줄기가 합수되는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 월운마을에서 물줄기의 끝(발원지)까지, 정밀 계측한바, 팔공산과 상초막이골이 비슷하여, 1:25000 지형도로 재 계측하였더니, 상초막이골이 약 250m가 더 길었다.”고 기록되었다. 그리고 “1986년 8월6일, 건설부 국립지리원에 확인 요청하여, 섬진강 발원지는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라는 회신을 받았고, 섬진강 하구의 종점인 경남 하동군 금남면 갈도(葛島)의 삼각점(52.2m)까지 정밀 계측한바 225km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건교부에서 발간한 ‘2000년 한국하천일람’도 우리나라 10대 하천 중 섬진강의 발원지는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 팔공산 북쪽 1080고지 서쪽계곡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섬진강은 3개도 11개 시.군(전북-진안. 임실. 순창. 남원, 전남-구례. 곡성. 승주. 광양. 보성. 화순. 담양군, 경남-하동)에 걸쳐 흐르고, 길이는 225km, 유역넓이 4,489,㎢ 전북 44%, 전남 47%, 경남이 9%를 점유하고 있다. 섬진강은 동쪽에 낙동강, 서쪽에 동진강과 영산강, 북쪽에 금강과 만경강을 접하고 있다.
섬진강을 계속 왼쪽으로 가르는 산줄기는 호남정맥이며, 완주 주화산에서 전남 광양의 백운산까지 398.7km를 뻗어 가는데, 남쪽 산줄기(주화산-사자산)는 전라좌도와 우도를 나누는 중요한 분계이고, 서쪽산줄기(사자산-백운산)은 낙남정맥과 함께 우리나라 남부해안의 문화권을 가르는 경계선이다.
섬진강의 지리적 역사와 문화
섬진강은 모래가 고와 두치강(豆恥江:또는 豆直江)·모래가람·모래내·다사강·대사강·사천·기문하 등으로도 불렸다. 1965년 12월 한국 최초의 다목적댐인 섬진강댐이 완공되어 중류·하류의 홍수피해를 방지하게 되었다.
섬진강유역은 동경 126°51′41″∼127°52′56″, 북위 34°40′9″∼35°49′60″에 걸쳐 한반도의 남부 중서부에 위치해 있다. 지리적으로는 전라남도와 전라북도, 경상남도의 3도에 걸쳐 있고 역사적으로는 고대 가야문화와 백제문화의 충돌지대, 신라와 백제의 경계, 임진왜란과 정유왜란 때는 왜군의 침입경로였으며 조선 말기에는 동학농민항쟁이 승화되기도 한 곳이다. 노령산맥의 동쪽 경사면과 소백산맥의 서쪽 경사면인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 데미샘 에서 발원하여 백운면과 마령면 등에 충적지(沖積地)를 발달시킨다. 또한 진안 성수면에서 구불구불하게 흘러 임실군 관촌면과 신평면을 거쳐 운암면에서 옥정호수를 만들고 있다.
섬진강 유역의 권역별 경사 분석결과 20∼60%에 해당하는 면적은 유역 면적의 56.6%를 차지할 만큼 대체적으로 경사가 급하다. 평균경사는 32.57%이다. 섬진강유역의 토양종류는 암쇄토가 3,191.77㎢, 회색토 및 충적토가 639.95㎢, 암석 노출지는 321.79㎢, 암쇄토 및 적황색토가 72.55㎢를 차지하고 있다. 섬진강 유역의 연평균 강우량은 1,408.3㎜이고 이중 67%가 우기인 6월과 9월의 4개월 동안에 집중되어 내린다. 섬진강 유역의 지질은 크게 지리산계 편마암층으로 된 변성암과 이들 암석층을 뚫고 올라온 중생대 쥬라기 백악기 화강암 또는 제4기 충적층으로 구분할 수 있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하동, 보성, 진안 등에는 편마암계 지질이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고, 남원, 오수, 순창 등에는 중생대 대보화강암과 백악기 화강암이 분포되어 있다. 갈담 등에는 중생대 사암과 혈암 또는 역암 등이 분포되어 있고, 제4기 충적층은 주로 구례와 남원 등 하천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다.
1928년 동진농업주식회사(동진농조)가 임실군 강진면의 해발고도 200여m에 운암제(雲巖堤)를 축조한 뒤, 1965년 운암제 아래 섬진강다목적댐이 새로 건설되었다. 이 댐은 유역변경식 발전을 하며 정읍시민들의 생활용수와 농업용수로 활용하고 부안군 청호저수지에 모여 다시 계화도(界火島) 간척지의 농업용수로 이용되고 있다. 섬진강 하구인 광양만에는 광양제철소가 있다. 하류의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에는 840년에 중창된 신라의 고찰인 쌍계사(雙磎寺)와 불일암(佛日庵)·불일폭포가 있다. 명산물로는 은어와 참게를 들 수 있다.
섬진강 하류에서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98년까지 골재가 채굴되었고 광양·순천·여수· 등지의 토목공사에서 섬진강의 모래를 많이 사용하였다. 이로 인해 하천 생태계가 큰 변화를 겪고 있다. 하동읍 하류 하상이 낮아져서 바닷물이 올라오고 특산물인 재첩은 사라지고 있다. 염도가 높아져 농업용수로 쓸 수 없게 되었다. 1990년 대비 2001년 섬진강유역 주변의 토지이용현황을 살펴보면 대지, 공장용지, 공공용지, 기타 등이 증가하고 농경지, 임야 등이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공장면적의 증가율이 높다.
섬진강댐의 건설로 정읍시와 임실군에서 5개면 28개리가 수몰되었으며, 주민의 대부분은 계화도간척지와 부안군내 동진유지 그리고 조포지구를 개답하여 이주 정착케 하였다. 또한 경기도 안산에 있는 반월단지 폐 염전을 개답하여 많은 세대가 이주 정착케 하였다. 이 강의 유역 내에는 많은 사찰과 관광지를 비롯하여 문화유산들이 산재되어 있다. 특히 섬진강 다목적 댐을 조성하면서 많은 고대유물들이 물속에 잠겨 유실됨으로서 역사와 문화를 잊어버리는 모순을 낳기도 하였다.
옥정호의 조성
옥정호 주변의 수몰지역에는 많은 유물들이 수장되어 있으며 특히 고대 고인돌유적은 훼손된 상태가 심해 알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운암은 고대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멀리 고흥반도에서부터 전주와 한양을 오가는 남쪽사람들의 주요 길목이었다. 정유재란 때 남원출신 양대박 장군의 승전지가 강진면 율치를 넘어 바로 운암 벌정이며 임진왜란 때 낙향한 최응숙이 세운 양요정이 있다. 양요정 옆으로 운암면민들을 달래는 망향시비와 망향 탑이 세워져 있으며 양요정 주변을 요산공원이라 이름 짓고 개발하여 많은 관광객을 부르고 있다.
우리나라 아름다운 도로 100선중에 18선으로 뽑힌 운암 호반도로 14.9㎞는 많은 도시민들이 찾고 있으며 호반도로 주변에는 양대박 장군의 승전비와 조선 선비 이흥발의 효자 설화를 기록한 조삼대비(釣蔘臺碑)가 세워져있다. 또한 옥정호 국사봉은 해맞이 장소로 유명하고 옥정호 외얏날은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붕어섬이라 부르며 사진촬영을 위해 찾고 있다. 운암 운종리에는 임실군 지정 향토문화유산 기념물 1호인 이상형묘비가 있으며 항일투쟁기 추수(秋水) 김제득(金濟德)선생이 종암정사(鍾巖精舍)를 짓고 많은 선비들과 교류하였던 장소도 있다. 그 뒤로 나래산[翼山]이 있어 청운리까지 임도가 개설되었다. 운정리에는 고대 유물이 많이 출토되어 현재 군산대학교 박물관에 보존되고 있으며 물속에 수장되어 있는 바위에 ‘타암도기’란 글씨도 있다.
옥정호는 1급수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지정하여 관리되다가 2015년도에 부분 해제되어 상류에서부터 수상관련 사업을 시행중이고 전주와 순창을 잇는 구 도로의 운암교는 1984년에 착공하여 1989년에 완공되었으며 옛 휴게소 자리에 물 박물관을 조성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또한 2004년에 착공하여 2011년에 완공한 자동차전용도로에 새로운 운암대교를 건설했으며 옛 운암교를 건너기전 마암리에서 부터 운정리와 정읍 산외면을 잇는 호반도로가 개통되어 지역민들의 편리성을 높여주고 있다.
구 옥정호 운암댐
섬진강다목적 신댐
섬진강다목적댐
섬진강다목적댐의 지나온 과정을 보면 1917년으로 올라갈 수 있다. 당시 일본인들은 지금의 동진강유역의 넓은 평야에 수원이 부족함을 느끼고 이를 해결하기위한 방안으로 기초조사를 하던 중 항공촬영에서 섬진강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때 유역 변경식으로 댐을 조성하자는 방안이 확정되어 1925년에 착공하게 되었고 당시 205만원을 들여 1928년에 완공이 되었다.
그러나 또다시 물 부족함을 느끼고 다시 시도한 것이 댐 아래 2km지점에 더 높은 댐을 구상하고 설계하여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댐 건설을 시행하다가 전쟁물자 부족으로 중단하게 되었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고 1948년부터 댐 건설을 시작하였으나 6.25사변이 발발되어 다시 중단되었다.
그 뒤 정부에서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일환으로 1961년부터 시작하여 1965년에 드디어 다목적댐이 완공되었다. 구 댐 주변에는 일본 총독의 글씨인 운암대제(雲岩大隄)란 암각서가 있고 정읍 쪽으로는 운암호(雲岩湖)라는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섬진강다목적댐의 건설로 정읍시 관내에 식수와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게 되고 동시에 수력발전을 통해 많은 전기를 생산하고 있다. 섬진강은 옥정호수에 잠시 몸을 쉬었다가 강진면 용수리로 큰 내를 이루며 흐른다. 섬진강 다목적댐은 우리나라 다목적댐의 효시로 높이 64m, 길이 344.2m, 체적 41만㎦의 콘크리트 중력식 댐이다. 이 댐에는 국내 최초의 수력발전소인 칠보발전소(34,800kw)와 운암발전소(1985년 3월 폐쇄)가 있으며, 칠보발전소용 취수터널과 동진강유역의 계화도간척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터널을 갖추고 있다. 이 댐은 1965년 12월에 완공하여, 호남지역에 전력을 공급하고, 발전에 사용한 물을 동진강 유역에 방류하여 호남평야를 기름지게 하고 있다. 또한 섬진강 유역의 홍수 피해를 경감시키면서 하류지역의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
섬진강 수리와 치수시설
옥정호는 임실군 운암면 일대를 흘러가는 섬진강 상류의 물을 강진면 옥정리에 댐을 막아 반대쪽인 칠보로 끌어들여 수력발전을 하고, 그 물로 계화도와 호남평야를 살찌운다. 옥정호에는 붕어, 잉어 등이 잘 잡히는 낚시터로 유명하다. 운암교(舊)와 운암대교(新)가 있고, 벼락바위와 댐 주변의 자연경관이 수려하며, 가을철의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장관을 연출한다. 1928년에 옥정호를 완공하였고, 그 뒤 제1차 경제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섬진강다목적댐으로 확장하였으며, 1970년부터 관광지와 낚시터로 개발하였다.
그리고 60여 년 동안 전주와 하운암을 잇는 나룻터 역할을 하던 이곳에 1988년 운암교(구대교)가 개통되면서 음식점과 숙박시설, 휴게소 등이 들어서게 되었고, 수많은 차량과 관광객, 강태공들로 붐비는 곳이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전주 순창 간 자동차 전용도로와 함께 운암대교(신대교)가 신설되어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강진면의 하천은 섬진강으로 들어가는 갈담천과 이윤천이 있다. 이어서 강진의 소하천은 갈담천과 이윤천에 소하천이 합수하여 섬진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지류가 된다. 따라서 강진면의 소하천은 달구천을 비롯하여 26개소에 이르고 있다.
강진 갈담천
1960년 임실군지의 기록에 의하면 葛潭川은 在郡西南源出斗滿南麓至江津入大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두만산 남쪽기슭에서 발원하여 강진에 들어와서 큰 강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청웅면 청계리 발원하여 19.0km를 흐르다가 강진면 회진리에서 섬진강과 합류하는 지방하천으로 2급 하천이다. 또한 청웅면 향교리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백이천과 청웅면 청계리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구례천, 청웅 옥석리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주치천이 갈담천에 합류하여 섬진강으로 흐른다.
하천구역면적은 444,597㎡이다. 갈담천 주변에는 청웅면 소재지를 이루는 구고리와 1904년경 동학이 천도교로 개명되면서 성밭 마을에 천도교 제2교구가 세워지기도 하였으며 1919년 3.1독립만세를 불렀던 곳이 구고리 양지마을에 지금도 터가 남아있어 그곳에 2019년 3·1만세운동 기념탑을 세우고 공원을 조성하여 쉼터 역할을 하고 있다. 청웅면 구고리는 소재지마을로서 효자인 함양박씨 집안의 박번과 박훈을 모셔놓은 쌍효 정려각이 있고 하천변에는 압구정이라는 정자도 세워져 있다. 청웅면은 고대 구고현이 있었던 곳이고 구고산성이 남아있다.
한편 이곳에는 임실동학의 성지로서 김영원 선생을 비롯하여 최승우선생 박준승 선생 그리고 한영태선생과 많은 천도교인들이 활동하던 무대였다. 당시에는 삼화학교가 세워졌던 곳이기도 하고 1905년 성밭에는 임실군 천도교 2교구가 세워졌고 운암면 지천리에 있었던 제1교구가 세워졌는데 3년만인 1907년 교구를 통합하여 청웅 구고리에 임실교구를 세웠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갈담천 주변인 부흥리에 국립 임실군 호국원이 있고 고흥류씨 유관환유풍여열비(柳琯煥遺風餘烈碑)가 강진면 부흥마을 앞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1951년 6.25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집단학살지인 부흥광산이 있으며 이목리에 유인김해김씨 효열각이 있다. 강진면 소재지와 이곳에 임실치즈고둥학교와 갈담 초등학교 섬진중학교가 있다.
강진 이윤천
강진면 방현리 이윤마을 427번지에서 발원하여 6.4km를 흐르다가 강진면 갈담마을 앞 갈담천에 합류하는 지방하천으로 2급 하천이다. 하천구역면적은 262,385㎡이다. 이윤천은 백련산 줄기인 이윤마을에서 하천으로 흐르는 하천으로 백련산은 높이가 적당하고 등산로도 많아 전국 등산 동호인들이 많이 찾는 산이다. 하류에는 강진 필봉농악 전수관이 조성되어 전국의 명소로 각광받고 있으며 겨울과 여름철 방학기간 중에는 전국에서 수많은 대학생들이 찾아와 장기간 우리고유의 전통 놀이인 농악을 배워가고 있는 곳이다. 또한 이윤천 주변에는 학석리와 필봉리에서 내려오는 세천이 많고 도요지등 문화유산이 많은 곳이다.
학석리 상기천
학석리 구역 안에 있는 하천으로 죽원마을부터 학석리 내동까지 내려와 이윤천에 합류하는 하천이다. 약 1,5km를 이어주는 상기천은 서출동류수(西出東流水)로 물이 좋기로 유명하여 한지를 많이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하천 정비작업이 시행되고 있어 옛 하천의 모습은 찾아볼수 없다.
섬진강댐 하류
옥정호를 지난 섬진강은 강진면 용수리를 지나서 백여마을 가리점 골짜기 앞으로 흐른다. 이곳은 회문리 조평 선생이 막았다는 설보가 맨 처음 시작되는 지점이다. 청웅 중산리에서 발원한 갈담천이 강진 회진리에서 섬진강에 합류한다. 청웅 향교리에서 발원한 백이천이 갈담천에 합류하며 청계리에서는 구례천, 옥석리에서 발원한 주치천이 갈담천에 합류하여 강진 회진리에서 섬진강으로 합류한다.
또한 강진면 이윤마을에서 발원한 이윤천과 학석리 율치에서 시작된 율치천도 갈담리에서 갈담천에 합류한다. 덕치면 두지리에서 발원한 평지천은 사곡리를 거쳐 가곡리 앞을 지나 천담에서 섬진강에 합류한다. 순창 구림면 운북리에서 부터 흐르는 구림천은 일중리 앞에서 섬진강으로 합류한다.
덕치면 물우리 에서 진뫼 마을을 거쳐 천담, 구담마을로 이어지는 물줄기는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내는 섬진강 물줄기라고 할 수 있다. 덕치면 물우리에는 밀양 박씨들이 지은 월파정이 섬진강을 바라보며 서 있고 덕치초등학교는 농촌의 전형적인 학교로 많은 도시 학생들이 부모와 함께 유학을 오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덕치면 일중마을은 과거 질 좋은 한지 생산으로 유명한 마을이며 덕치면 장암리 신촌마을 김일수는 한지장으로 전라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아 지금도 전통 한지공장을 운영되고 있다.
진뫼 마을은 김용택 시인의 출생지로 유명하며 최근에 문학관이 건립되었다. 천담 마을을 지나 순창군으로 이어지는 섬진강 끝자락에 구담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어 영화촬영지로 유명하며 봄이면 매화꽃이 만발하여 도시민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는 곳이다.
강진면의 소하천 현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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