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의 구국운동사
강진의 의병활동
❀ 윤 정 오 (尹正午)
윤정오는 본관(本貫)이 파평(坡平)이며 1881년 3월 1일 임실군 청웅면 옥석리 320번지에서 태어나 1908년 3월 21일 성수면 태평리 대운재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순국하였다. 1907년 ‘정미7조약’(丁未7條約)이 일제의 책동(策動)에 의해 체결되고, 이 때 교환된 비밀각서에 의해 그해 8월 1일 한국군의 해산이 강행되었다. 윤정오는 그러한 일제의 내정간섭에 통분(痛憤)함을 금치 못하고 9월 12일에 진안 마이산에서 구국동지 수백 명을 규합하여 호남창의동맹단을 결성할 때 동참하였다.
이 때 같은 고향 출신인 이석용이 전해산과 더불어 의거(義擧)의 기치(旗幟)를 드높이 날리게 되자 그의 휘하(麾下)로 들어가 크고 작은 전투에 참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9월 13일 진안읍을 공격하여 무기 및 군수품을 노획(鹵獲)하여 의병활동 물품으로 보태었다. 9월 16일 진안 내원사에서 적과 접전하여 적 두 명을 사살하고 많은 적에게 부상을 입히는 등, 전과(戰果)를 올렸다. 10월 8일 화암리 후방산 위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였고 11월 17일 장수읍을 공격하여 적을 남원 쪽으로 후퇴시켰다.
12월 25일에는 진안 무술 촌에서 적 두 명을 사살하였다. 1908년 3월 5일 진안 시동(矢洞)[지금의 진안군 성수면 구신리]에서 토벌대(討伐隊)와 접전하여 적 한 명을 포살하였으며 3월 17일 수류산에서 적과 접전하여 적 세 명을 포살하였다. 윤정오는 이상의 전투에 참전하였을 뿐 아니라 임실군 석현면 유천리에 사는 한씨와 오지면 어은동[지금의 삼계면 어은리]에 사는 최씨 등 세금영수원들이 의병운동에 협조하지 않고 오히려 세금만 독촉하는 민폐(民弊)를 끼치므로 그들의 집에 방화(放火)하고 볼기를 쳐 일벌백계(一罰百戒)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의병 사상 특기해야 할 공로(功勞)가 있다. 이석용 의진에서는 화승총을 개조하여 양총과 비슷한 성능을 갖게 하는 기술을 개발, 사용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윤정오와 선봉부장 최덕일 이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왜적들의 기록에 나와 있다. 즉 1908년(융희 2년) 4월 30일에 남부 수비관구 사령관이 내부경무국장 앞으로 낸 ‘진안 수비대장이 4월 21일에 大村부근 전투에서 노획(鹵獲)한 총기에 관한보고’에 화승총을 개조하여 관타식(管打式)으로 하였는데 이상의 공법과 작업은 이학사의 부장 최덕일과 윤정오의 생각에서 나온 것 같으며, 그리하여 이석용 의진 에서는 재래식 화승총은 쓰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의군이 장비가 우수한 왜적과 대항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윤정오는 1908년 3월 21일 동지들과 더불어 임실군 성수면 운현 전투에서 적과 접전하던 중 16의사와 함께 순국하였으며 그의 손자 윤종락은 현재 강진면 필봉리에 거주하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을 기리어 198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 1券 792面≪全北義兵史≫ 下券 219面
❀ 김 종 삼 (金鍾三)
김종삼은 임실군 강진면 내동 출신이다. 그는 1909년 초에 정상현 의병대에 가담하여 동지 30여 명과 함께 임실, 태인, 김제 등지에서 항전하는 한편 군용금을 모금하다가 동년 5월경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09년 7월 13일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30세의 나이에 10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후손이 없고 기록이 불충분하여 포상이 안 되고 다만 국가보훈처의 미 포상자 명단에 기록되어 관리번호 12250번호를 부여하여 관리하고 있을 뿐이다.
註 : ≪全北義兵史≫ 下券 626面
❀ 김 성 룡 (金成龍)
김성룡은 1875년(고종 12)에 태어나서 임실군 강진면 밤재(栗峙)에서 살았다. 그는 의병장 양윤숙의 휘하로 들어가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다른 의병들과 함께 1909년 10월 29일에 당시 35세의 나이로 체포되었다.
註 : ≪高氏家門과 그 姻親≫ 871面의 當時 倭警 情報 記錄임.
강진면의 3·1만세운동
강진면 갈담리에서는 장날인 3월 23일 만세 시위를 했는바 청년 이중혁과 엄길영 등의 주도하에 농민 수백 명이 가담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註 : ≪全北地域獨立運動史≫ 266面 (2004年 發行)≪任實郡誌≫ 231面
❀ 엄 길 영 (嚴吉永)
엄길영은 1900년 2월 2일 임실군 강진면 갈담리 208번지에서 父 엄자명과 母 송선이 사이에서 5남으로 태어났으며, 오수면 대정리에서 거주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실문화≫ 6호 72面 참고) 그는 1919년 3월 23일 강진면 갈담리 장날을 이용하여 이중혁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으며 이날 오후 3시 30분경 장터에서 수백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 후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4월 24일 대구복심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1977년 8월 3일 77세의 나이로 고향에서 순직하였으며 고인의 孫子 엄기섭은 강진면에서 살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에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3券 228面
❀ 이 중 혁 (李重赫)
이중혁은 1899년 12월 11일 강진면 방현리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3월 23일 임실군 강진면 갈담리 장터에서 엄길영과 함께 장날에 운집한 다수의 군중을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활동하다가 피체(被逮)되었다. 1919년 4월 7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은 후 4월 24일 대구복심원에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 후 1935년 중국 북경에서 항일투쟁을 하던 중 일본군에 피체(被逮)되어 순국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7년에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 : ≪獨立有功者 功勳錄≫(國家報勳處) 第8券 482面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