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과 효·열편
이목마을 효열부 김해김씨 지려각
김해김씨 지려비는 강진면 부흥리 509번지 이목마을 앞 도로변 언덕에 1978년에 비와 비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비의 구조는 기둥이 두 개 있는 석 비각이고 효열부김해김씨지려(孝烈婦金海金氏之閭)라고 쓰였으며 비문은 임실군수 이상칠(李相七)이 짓고 글씨는 完山 이일형(李一珩)이 썼다. 규격은 높이135cm 폭44cm 두께15cm이다. 김해김씨는 김일손(金馹孫)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김정수 이며 남편은 이천 서유신(徐有信)이다.
시부모를 지극 정성으로 봉양을 다하였으며, 선조의 봉제사와 빈객(賓客)의 접대에도 그 정성이 극진하니 마을 에서도 칭송이 자자하였다. 결혼 5년 만에 남편이 괴질(怪疾)로 갑자기 죽자 남편을 따르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것은 시부모를 모셔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묘소에 풍우한설(風雨寒雪)을 불구하고 성심으로 성묘를 하니 무릎을 꿇은 자리에 잡초가 자연히 없어졌으며, 이러한 집례를 3년간이나 하였다고 한다.
부흥리 고흥 유관환유풍여열비
유관환유풍여열비(柳琯煥遺風餘烈碑)는 강진면 부흥리 백련산 자락이 내려온 부흥마을 앞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유관환 선생은 조선 헌종 8년(1842) 임인 정월 17일에 부 휘 영식과 모 남원양씨 사이에서 독자로 출생하셨다.
3형제 중 셋째인 휘 영식 內外분께서 불황가식(不遑暇食), 근검노작(勤儉勞作)으로 가산을 이룩하여 공에게 물려주시니 비차양친(非此兩親)이면 불생차자(不生此子)로 공께서도 역시 당석분음(當惜分陰), 수족변지(手足胼胝)의 노력으로 더욱 더 증식하여 마침내 매년 3백석을 추수하는 부농이 되었다. 그 중 100석은 종친들과 출가한 딸들에게도 분배하고, 100石은 위선사업에, 나머지 100石은 선행에 아낌없이 사용하였다.
흉년에는 곡간(穀間)의 쌀을 풀어 기민(饑民)을 구제하였고 인근 출산모에게는 미역과 쌀 한 말을, 상가(喪家)에는 한지 한 질(帙)과 쌀 한 가마니씩을 부조하시니 지금까지도 그 칭송이 면면히 구전되고 있다. 공께서는 비록 무위무관(無位無官)의 평민이었지만 연아유덕량(淵雅有德量)하여 소박하고 건전한 인도적 신념에 겸손하고 진실한 삶을 영위하셨으니 한마디로 인행에 진력하여 지덕(地德)을 세우려는 대의 였으리라. 장송하당유청풍(長松下當有淸風)으로 마침내 후손이 번창하였으니 공께서는 그야말로 한 세상 아름답게 살고 가신 분이다.
여열비는 2015년 遺風餘烈碑建立推進委員회를 구성하여 세웠는데 높이가 180cm이고 폭이 66cm 두께가 33cm로 되어있다. 또한 좌대는 거북좌대에 비수는 용두석으로 되어 있다.
高興柳公諱琯煥遺風餘烈碑
蘭은 幽谷에서 피어 그 香氣 山野에 퍼지고, 鶴은 九臯에서 울어 그 소리 九天에 이르듯, 여기 善行이 至極하여 온 고을에 稱頌되어 온 분이 계시니 그 분이 바로 高興柳公 諱는 琯煥이요, 字는 敬善이시다. 朝鮮 憲宗 八年(一八四二) 壬寅 正月 十七日에 父 諱 榮植과 母 南原楊氏 사이에서 獨子로 出生하셨다. 先代는 高麗 忠宣王 때 都僉議政丞 諡 英密公 諱 淸臣과 侍中公 諱 芬과 朝鮮 世宗 때 王子 師傅公 諱 龜山과 縣監 諱 淵이 顯祖이시다. 九代祖 執義公 諱 希津은 宣祖 때 任實縣監 在任 中 治績이 빛나 郡民이 善政碑를 세웠으니 지금도 任實 鳳凰山麓에 保存되고 있다. 公의 祖考 諱 匡源이 四十 未滿에 卒하시니 生計가 茫漠해진 祖妣 全州李氏는 井邑 承富에서 髫齔의 아들 三兄弟를 데리고 跋山涉水하여 親庭 任實로 移住, 一生所寄 唯在此兒라는 嫠婦의 悲願과 倚閭之望의 母性愛로 아들을 기르며 農事에 專念하던 중 暴雨山汰로 埋沒, 崎嶇한 生을 마감하셨으니 脩善尙不蒙福인데 不弔昊天이던가. 그 뒤 三兄弟 중 셋째인 諱 榮植 內外분께서 不遑暇食, 勤儉勞作으로 家産을 이룩하여 公에게 물려주시니 非此兩親이면 不生此子로 公께서도 亦是 當惜分陰, 手足胼胝의 努力으로 더욱 더 增殖, 마침내 每年 三百石을 秋收하는 富農이 되었다. 그 중 百石은 宗親들과 出嫁한 딸들에게도 分配하고, 百石은 爲先事業에, 나머지 百石은 善行에 아낌없이 사용하였다. 一尺布帛도 可縫而共衣하고 一斗米粟도 可舂而共食이라. 凶年에는 穀間의 쌀을 풀어 饑民을 救濟하였고 隣近 出産母에게는 미역과 쌀 한 말을, 喪家에는 韓紙 한 帙과 쌀 한 가마니씩을 賻助하시니 지금까지도 그 稱頌이 綿綿히 口傳되고 있다. 公께서는 비록 無位無官의 平民이었지만 淵雅有德量하여 素朴하고 健全한 人道的 信念에 謙遜하고 眞實한 삶을 營爲하셨으니 한마디로 人行에 盡力하여 地德을 세우려는 大意였으리라. 長松下當有淸風으로 마침내 後孫이 繁昌하였으니 公께서는 그야말로 한 세상 아름답게 살고 가신 분이시다. 嗚呼라 一九○八年 正月 八日 公은 動止合禮, 蹈禮立德의 고운 자취를 남긴 채 享年 六十七에 別世하시니 時人이 惜之하고 온 고을이 무거운 沈黙에 잠겼다. 古事에 一餐之惠가 恩今不忘이라 했듯이 亦是 恩惠를 입은 鄕民들의 弔問 行列이 葬地에 까지 長蛇陣을 이루었다. 이미 儒林이 善行으로 公을 薦擧하여 雲水誌에 實載되어 있으며, 산소는 靑雄面 九皐里 뒤 鷹峰山麓 壬坐原이다. 配 慶州金氏는 憲宗 五年(一八三九) 六月 一日에 出生, 一九二五年 八月 十日에 下世하시니 墓는 乾位 合兆이다. 所生은 五男三女인데 아들은 楥相 熙相 麒相 麟相 薰相이고, 사위는 玄風郭應奎 淸州韓琦錫 南原楊秉寬이다. 孫子 炳春 炳漢 炳暢 炳俊 炳道 炳旭과 孫壻 全州李康世 高靈申昌植은 長男 所生이고, 炳雨 炳汃 炳錄 炳東과 孫壻 海州 吳文泳과 全州李性根은 次男 所生이다. 炳天 炳仁 炳泰와 孫壻 南原 楊海克 淸州韓秉朝는 三男 所生이고 四男은 苗而不秀. 炳孝 炳海와 孫壻 豊川盧洵 礪山宋瓊燮 南原楊萬相 全義李漢旭 天安全炳和 全州李炳基는 五男 所生이다. 公의 曾孫子는 四十一名이며 以下는 省略한다. 公이 가신 지 於焉 百六個 星霜! 드디어 任實鄕校等 儒林들이 江津面 富興里 洞口에 公을 追慕하는 碑를 세우게 되어 不肖에게 碑文을 請함에 公의 懿行이 世敎에 보탬이 될 것을 企望하며, 儒林들의 純白高潔한 뜻과 後孫들의 崇祖尙門의 衷情을 담아 高興柳氏 世譜와 雲水誌를 參考하여 삼가 이렇게 斂袵讚述하나이다.
二○一五年 月 日 曾孫 準圭 謹撰 遺風餘烈碑建立推進委員 任實鄕校典校 : 尹 鳳 澤, 井邑儒道會長 : 柳 鍾 主 井邑鄕校典校 : 李 太 烈, 南原儒道會長 : 朴 淳 浣 南原鄕校典校 : 韓 能 洙, 任實宗中代表 : 玄孫 鍾文 五代宗孫 : 鍾冕 諮問委員 : 曾孫 經營學博士 奭圭, 億圭 玄孫 鍾集, 法學博士 鍾洛 井邑宗親 : 鍾三(井邑 承富里) 實務 : 曾孫 南圭, 有司 : 玄孫 鍾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