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해주고 싶은 이야기들
강진 작고개 나루터 이야기
유적 작고개(遺跡作古介)는 강진면 갈담리의 일명 다래기봉 밑에 위치하는데 이는 나루터로서 전주와 광주를 왕래하는 중요한 교통요지이다. 이 나루터는 오랫동안에 걸쳐서 전남과 전북을 이어주는 나루터로 큰 역할을 하였으나 문명의 발달과 시대의 변화로 또한 항일투쟁기 신작로개설과 섬진강 다목적댐의 축조로 인하여 나루터를 이용하지 않고 있으며 지금은 설화만 남아있고 흔적조차 없어졌다.
황계재와 홍성문대사 이야기
강진에서 덕치 사곡리를 넘어가는 고개가 황계재[黃鷄峙]이다. 덕치면 사곡리 자경 마을에는 이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그 당시 회문산에서 도를 닦은 홍성문 대사가 많은 지역을 다니면서 명당을 잡아주고 또는 미리 봐놓은 명당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다시피 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사곡리 이씨 만은 명당을 잡아주지 않아 이 씨들은 꾀를 내어 홍성문 대사가 지나가는 곳에 있다가 장정 네명을 시켜 홍성문 대사를 두들기고 또 다른 몇 사람은 홍대사를 구출하여 치료를 해주었다고 한다. 물론 이 씨들은 계획을 세우고 행동대들이 두들겨 때린 홍성문 대사를 집으로 데려가 치료를 극진히 해주어 완쾌한 뒤 홍성문 대사는 고마워서 황계재에 좋은 명당 하나를 찾아 주어 이씨 들은 조상의 묘를 그곳에 썼다고 한다. 묘 이장 작업을 하던 중에 이 씨 들 중 홍성문 대사를 때렸던 사람이 함께 일을 하는 것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이때 홍 대사는 계획적인 음모라고 알아차린 후 묘를 쓰는 중에 마지막 봉축을 올린 과정에서 일을 중지시키고 마지막 뗏장 하나를 틀어지게 하여 올리게 한바 명당으로서 구실을 못하게 하였다는 설화가 이 지역에 내려오고 있다.
유관환선생의 이야기
유관환(柳琯煥) 선생은 본관이 고흥(高興)으로 조선 헌종 8년(1842) 임인 정월 17일에 부흥리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아버지이신 영식께서 불황가식(不遑暇食), 근검노작(勤儉勞作)으로 가산을 이루어 공에게 물려주시니 공께서도 역시 갖은 노력으로 더욱 더 증식하여 마침내 매년 3백석을 추수하는 부농이 되었다. 그 중 100석은 종친들과 출가한 딸들에게도 분배하고, 100石은 위선사업에, 그리고 나머지 100石은 선행에 아낌없이 사용하였다. 따라서 흉년에는 곡간(穀間)의 쌀을 풀어서 기민(饑民)을 구제하였고 인근 출산모 에게는 미역과 쌀 한 말을, 그리고 상가(喪家)에는 한지 한 질(帙)과 쌀 한 가마니씩을 부조하시니 지금까지도 그 칭송이 면면히 구전되어 오고 있다.
이목마을의 시승바위 이야기
도로에서 가목리 들어가는 마을입구 위쪽이며 부흥리와 갈담리 경계에 상당히 큰 바위가 있었는데 1982년 도로확장으로 인하여 바위가 물속으로 굴러 들어갔다. 이곳은 물이 바위를 세차게 스쳐 깊은 물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과거에는 자라 등 물고기가 많이 서식하고 있었다. 또한 그곳에는 6.25 한국전쟁의 아픔이 서려있는 곳으로 당시 이목리에 빨치산들이 약탈을 한다는 정보에 따라 밤에 경찰들이 갈담리에서 이목리로 가는데 빨치산 일부가 시승바위에 잠복하고 있다가 이목리로 가는 경찰들 6명이 빨치산들로부터 죽음을 당한바 전쟁의 큰 아픔을 간직한곳으로 유명하다.
가남실 뒷골 이야기
가남실 북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에는 100여호가 살았다고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는 곳이며 도둑들이 많아 서서히 폐촌이 되어 없어졌다고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는 곳이다.
용수마을 황해수터 이야기
용수마을 앞에서 물을 건너 백운마을 가리점으로 건너가는 길목으로 냇가에 바위가 넓게 깔려있어 항상 물이 잔잔하게 넘어 흐르는 곳으로 정읍으로 가는 길목이다. 댐이 없을 때에는 물이 많이 흘러 건너기 힘든 곳이지만 지금은 댐을 막아 항상 물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는 곳이다. 따라서 옛날에는 소를 몰고 가는 길로서 임실뿐만 아니라 정읍의 많은 사람들이 내를 건너 왕래하던 곳이다.
백여 마을의 생활이야기
백여 마을은 1986년 말까지는 마을이 둘로 나뉘어져 산에서 내려오는 개울을 경계로 임실군과 정읍군의 경계를 이루고 있었으며 회문산의 중간에 위치한 마을이다. 이 마을은 밭은 많으나 논이 없어 쌀이 없이 외부에서 조달을 해야 살 수 있는 마을이다. 그러나 지금도 이를 숙명으로 알고 밭에서 생산되는 잡곡류를 시장에 내다팔고 쌀로 바꾸어먹고 살았다고 한다. 특히 닥나무를 길러 닥피를 생산하여 껍질을 벗기고 말려서 주변의 한지공장에 팔았고(닥피120근에 쌀 3가마정도 교환) 꽂감을 만들어 식량과 교환하였으며 잎담배는 10짝식(1짝은 10발임)짊어지고 전북지방의 평야부에 또는 전남 해남까지 다니면서 팔아 식량을 확보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한 산에 나무가 많은 관계로 빨래방망이 등을 만들어 짊어지고 김제 부안 고창 등지에 다니면서 팔고 대신 쌀을 사왔다고 한다. 당시 생할상은 밤에는 등불을 켜는데 피마자기름이나 들깨기름으로 등불을 켜고 살았으며 옷은 여름에는 삼베옷이며 겨울에는 무명옷을 입고 살았다. 신발은 볏짚으로 짚신을 만들어 신고 다녔으며 오동나무 등으로 나막신을 만들어 신고 다니기도 하였다.
백여마을 환경 이야기
들과 산, 강 등 백가지 이름이 동서남북으로 형성된 가운데 희여티 마을이 형성되었고 마을 가운데로 도랑이 만들어져 한마을로 보이나 임실군과 정읍군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러나 행정적 불편함에 1987년 1월 1일자로 임실군으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옛날에는 도로가 없고 사람만 다니는 길만 있었기에 장사터 에서 오는 길이나 물골마을 앞 문턱바위 사이로 다녔으나 소 같은 경우는 다니기가 어려웠던 길이었다. 덕치면으로 흐르는 보 뚝으로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었고 장모퉁이 사이로 내왕하였던바 문턱바우, 장모퉁이라는 이름들이 전해지고 있다. 마을 앞의 강 이름은 섬진강이라고 불렀으며 지금도 뱃 마당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이는 구 땜을 설치하기 전에는 비만 오면 강물이 불어나 건너 들에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목선을 만들어 배를 이용하여 건너다녔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백여마을도 70여호가 살았으며 뱃사공은 1가구 1인씩 교대로 배를 운영하였고 관리를 잘못할 경우는 배가 덕치면 회문리 마을앞까지 떠내려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주민들은 떠내려간 배를 잡아 물 수위가 적어질 때 강을 타고 백여리 앞까지 끌어올렸다고 한다. 가을 수확기에는 큰 섬과 작은섬 사이에 나무다리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 후 1960년대 대 홍수 시 에는 신댐 다리로 아니면 강진교를 이용하여 다니면서 농사일을 하였다고 한다.
한국전쟁과 백여마을
1950년 6.25한국 전쟁시 북한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네것 내것 없이 노동력에 따라 토지분배를 평등하게 하고 현물세를 받으려고 벼나 다른 농작물의 알 개수를 세어 그 수확물을 환산하고 세율을 정하였다. 늦은 가을에 빨치산들이 마을로 몰려들어와 안방이며 사랑방이며 자기들 멋대로 숙식을 해결하였으며 당시에는 농우 소도 자기들 마음대로 그 당시 북한 돈인 빨간색의 돈을 주고 마을에서 주민들이 기르던 소를 마구 도살하여 산으로 가져갔다. 마을 주민들은 그 환경의 공포 속에서 매일매일 날자를 보내는 중 1951년 음력 정월 7일 우리군들이 처음으로 마을에 들어와 집을 반수이상 불태웠으며 주민들은 반수만 군인들을 따라 갈담 초등학교로 가서 피난생활을 하였으며 음력 2월 1일경 다시 우리 군인들이 들어와서 남는 집 모두를 소각 하였다. 그러는 중 남은 주민들은 군인들을 따라 갈담으로 피난을 나왔고 그 후에는 집으로 못들어오고 갈담과 회진리 장자터 마을에서 생활하던 중 업친데 덮친다는 격으로 사변난리와 배고픔, 또 장질부사인 전염병 등으로 생명을 잃은 사람들이 많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1952년 고향을 찾아와 오두막살이 집을 지어 몸을 의지하고 살았으며 농우소가 없이 논밭을 꽹이로 땅을 파서 농사일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배도 고프고 돈도 없이 생활하였지만 고향을 떠나지 않고 서글프게 살았다는 것이 추억으로만 남아있다.
백여 마을의 불이바탕 이야기
용수리 707번지는 불이바탕이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구엉창에서 흙을 가져다가 용광로를 만들고 이곳에서 쇠를 녹여 밥솥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구엉창에서 흙을 가져다가 썼기에 그 자리를 구엉창이라 부르고 그때 주명은과 최억대가 운영을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백여마을 지소동거리 이야기
백여 마을도 물이 좋아 한지를 뜨는 지소거리가 있었는데 그 위치는 용수리 482번지에서 항일투쟁기에 주명은과 조양옥이 지소를 운영하였으며 6.25사변 후에는 용수리 527번지에서 주명은과 박문찬이 지소를 운영하였다.
+ 제보자 최완우
백운마을 이야기
백운마을에는 400년전 이 마을에 사는 김만수씨의 13대조(金洙)가 피난을 하여 입향한 마을로 김해김씨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으며 6.25한국전쟁 때에는 35호정도가 살았다고 한다. 지금은 15호가 거주하고 있으며 1987년 1월 1일자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 3구에서 임실군 강진면 용수리로 합병된 마을이다. 따라서 정읍과 임실경계지역은 백운마을에서 약 700m지점에 있으며 마을 뒤쪽으로는 회문(回門)이 있고 1800년경 천주교 박해가 심할 때 우리나라 최초 신부인 김대건 신부의 동생과 조카가 피난을 하여 살다가 묻힌 묘지가 있어 많은 성직자들이 찾아오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가리점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름은 제철유적지로서 쇠를 만들 때 가려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주민들의 생활방법은 산속에 들어가 화전을 이루고 담배와 곷감, 한봉 등을 생산하여 외부사람들과 물물교환 등으로 생계를 이어왔다고 한다.
백운마을 느티나무이야기
백운마을 앞 882번지 주변에는 느티나무 한그루가 오래되어 12아름되는 큰 나무였는데 밥상을 만드는 목수는 상을 만들기 위하여 베다가 현장에서 즉사를 하였다고한다. 그 후로 나무는 죽어 없어지고 그 뿌리만 남아있었는데 지금은 흔적을 볼 수가 없다.
백운마을 숯굽는 이야기
백운마을 골짜기에는 국유지로서 참나무가 많고 굵어 숯 굽는 용도로 적합한 나무가 많은 곳이다. 따라서 백운마을 사람들은 2~3명씩 팀을 이루고 5~6팀이 산속에 들어가 나무가 많은 곳을 찾아다니며 숯 굽는 구덩이를 파고 참나무 숯을 구워 생산하였다. 이때 주변의 나무를 이용하다가 다 베어지면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숯 구덩이를 파고 숯을 구워 팔아 생계를 이어왔다고 한다. 숯은 주로 김제 정읍 태인 방면으로 출하를 하였으며 이 또한 인연 따라 판매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강진(江津)이란 이야기
강진면은 큰내 강(江) 나루터 진(津)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번 향토자료 조사과정에 지명 관련 조사 중 백련리 구역 모두는 강진이란 지명을 쓰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조사 결과에 의하면 현재의 백련리를 큰 강진이라 부르고 있다가 항일투쟁기 백련리로 지명을 바꾼 것으로 조사되고 있으며 상강진의 경우는 현재 신기마을 위쪽 지역을 말하고 있으며 과거에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하 강진은 작은 강진이라고도 하며 현재의 신기마을을 말하는데 이곳 또한 일본식 용어를 적용하여 항일투쟁기 신기마을로 바꾼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강진면 이란 지명이 이곳을 본 따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백련마을 화순최씨 선산이야기
백련마을에는 임진란때 피난을 와서 한때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던 화순최씨 선산이 있는데 입향조의 묘를 숙호혈(宿虎穴)에 조성하였다. 따라서 그 묘 주변에는 나무가 죽어도 베지를 못하고 돌 하나 가져다 놓을수 없다는 설화가 내려오고 있는 명당 자리 라고 한다.
백련마을 임장군 묘이야기
백련리 백련사 옆 동쪽으로 오래된 묘 1기가 있는데 이를 임장군 묘라고 불러왔다. 주인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50여년 전까지만 해도 작은 비석이 있었는데 누가 뽑아 없앴는데 비석을 찾지를 못하고 있다. 지금은 벌초도 아니 하고 묵은 상태의 묘로서 비석만 찾는다면 내용을 알 수 있다고 본다.
신기마을 하마석거리
청웅에서 서창을 거쳐 조금 내려가면 우측으로 신기마을이 나오고 마을 입구에는 작은 동산이있으며 동산 초입을 하마석이 있었다 하여 하마석거리라고 부른다. 이곳에는 마을을 상징하는 3개의 바위가 동산에 묻혀 있는데 이 바위의 흙을 걷어내어 돋보이게 해야만 마을이 좋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연화도수 명당이야기
웃강지 쪽으로 연화도수명당으로 부르는 묘소가 있는데 임실의 함양박씨 선산이며 입향조의 묘소라고 한다. 잣나무 골짜기라고도 부르는 이곳은 산세가 좋아 많은 풍수연구가 들이 찾고 있는 지역이라고 한다.
문방마을 민재 이야기
문방리와 학석리간의 재를 말한다. 문방리 수방리 옥정리 사람들은 강진 소재지를 다닐 때 민재를 넘어 다녔다고 한다. 특히 강진시장을 보러 다닐 때 마을 사람들은 민재를 넘어갔고 볼일을 다 본 후에는 막걸리를 많이 마시고 걸어서 오는데 반듯이 학석리 주막에서 또 술한잔씩을 마시며 담력을 키우고 사람들을 모아 술에 취한 상태로 함께 민재를 넘어 다녔다고 한다.
수방마을 귀신이야기
수방리에 살았던 박귀일씨는 옥정리에서 술에 취해 수방리를 찾아오는데 헛것(귀신)이 보여 안내하는 대로 따라갔다고 한다. 한참을 끌려서 걸어갔는데 깊은 산속이기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보니 어디인지 분간이 안 되어 무작정 오던 길을 찾아 걸어보니 작은 길이 보였고 그 길을 따라 마을로 왔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었다.
수방마을 진입로개설이야기
수방리는 강진 면에서도 오지에 속하여 항상 작은 길만 이용하고 살았다. 마을 사람들은 옥정리에서 수방리를 이어주는 2차선 도로를 원하였던바 면에서는 그럼 마을사람들이 원하는 위치로 말뚝을 박아놓으면 그 길을 따라 설계를 하겠다는 확약을 받았다고 한다. 이 말에 따라 마을 이장이었던 한성용씨는 주민들과 함께 현지에서 말뚝을 꽂으며 로선을 확정하는데 마침 산주들인 옥정리 사람들이 낫을 가지고 달려들어 이장과 맞장으로 방해를 놓았던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수방마을 마을숲 이야기
수방마을은 서쪽으로 약간 기울러진 지형으로 되어 있다. 옛날에는 이곳이 허 하다고 하여 소나무 숲을 비보(裨補)숲으로 조성하여 균형 잡힌 마을로 되어있어 부자도 많았는데 1980년대에 토지주로 하여금 베어져버려 지금은 서쪽이 약한 듯하다.
용수마을 소와 호랑이 이야기
용수리 큰 텃골에 살았던 송씨가 소를 가지고 밭에서 쟁기질을 하다가 쟁기를 벗고 쉬고 있는데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소하고 싸움이 벌어졌다. 이때 주인인 송씨는 소 아래에 숨어 있으며 소리만 지르고 있었는데 호랑이는 소를 잡아먹으려고 달려들고 물리지 않으려고 방어를 하는 중 주인은 소 아래에서 큰소리로 고함을 질러 호랑이를 쫓아냄으로서 싸움이 멈추어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호랑이는 아쉬움에 소가 있는 집에까지 뒤를 따라 어슬렁거리고 찾아와 다시 소를 물려고 하는데 주인의 고함소리로 되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또한 사람이 소 밑으로 숨으면 소는 절대 발로 밟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다고 한다.
댐 공사와 용수리
1945년 해방이후와 1960년대 초의 이야기이다. 당시 용수마을은 40여호가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댐 공사로 인하여 외지 사람들이 많이 몰려와 마을의 변화가 왔었고 변화의 형태는 반도시화로 이어졌다고 한다. 1945년 해방 후에는 댐 공사관련 하여 미군들이 주둔하여 댐 공사를 감독하였고 1960년대 후에는 본격적인 공사로 많은 사람들이 주거하였음은 물론 많은 위락시설이 들어와 마을이 흥성하는 분위기였다. 이때 이곳에는 지서(파출소)가 있었고 일반 가게집, 술집, 밥집, 빵집, 하숙집과 이발소, 다방, 당구장 등 많은 위락시설과 함께 교통을 해결하기 위하여 버스가 이곳 마을까지 정기적으로 다녔으며 대도시에서 원정을 온 불량배도 생겨 지역에 돈이 많았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또한 댐 공사 중에 직원 사택도 집단으로 많이 지어 직원들의 숙소로 활용하였다고 한다. 한편 해방 후 공사를 다시 시작할 때에는 유 대령이라는 군인이 총 책임자였고 추 대위라는 사람은 감독관으로 있었다고 한다.
용수봉과 옥정마을 이야기
용수봉은 정읍시 산외면 종성리에 있는 산이다. 옥정리에서 용수봉을 보고 노적봉이라 부른다고 한다. 노적봉은 산이 순하고 아담하여 옥정마을에서 볼 때는 부자가 많이 나올 것 이라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또한 댐이 막아져 산과 물의 조화가 이루어져 이곳에 부자들이 많이 생길 것이라는 예언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0여년 전에 옥정마을 출신이 복권을 샀는데 1등으로 당첨되어 23억 원이란 거액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솔솔 전해지기도 한다.
옥정마을 샘 이야기
현 마을의 뒤쪽으로 샘이 있었는데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은 샘이었다고 한다. 옥정이란 이름은 이곳을 지나던 도사가 옥정이라고 이름 지어 불렀으며 섬진강 댐을 막고 이름을 지을 때 옥정리가 있어 옥정호라고 하였다고 한다. 옥정이란 샘은 크지도 않았으며 날이 가물면 물이 풍부하지 않다고 한다. 옥정 샘물이 밑으로 빠져 흘러가면 동천샘이 있어 이곳으로 물이 모이는데 그 우물은 부자집에서 두레박을 이용하여 물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 후 부자가 망하면서 놋그릇과 금은을 모두모아 그것들을 샘에다가 밀어 넣어버렸다고 한다. 따라서 그 샘을 구리동자를 써서 동천샘이라 불렀다고 한다. 한편 옥정 샘은 도로를 내면서 없어져 흔적이 없이 사라졌는데 마을 사람들이 도로공사 중에 없어진 샘을 윗쪽으로 복원하자는 의견에 따라 도로 윗쪽 진료소 옆에 우물을 복원하여 놓았다고 한다.
옥정마을 명당이야기
마을 위에 올라가면 명당자리라고 하는 곳에 묘 3기가 있었다. 그 집안에 7살 먹은 놈이 팥 일곱 말을 짊어지고 전주장을 해장에 다녀왔다고 한다. 그러니까 7세인 어린놈의 행동을 보니 집안에 역적이 날것이라는 사람들의 말에 따라 명당의 생묘를 다 파버렸다는 것이다. 그 후에 7살 먹은 놈은 죽었다고 하며 명당자리에서 쭉지가 달린 사람이 나온다는 예언을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옥정리 송씨들이 묘를 파가지고 손해가 엄청나게 커졌으며 정상 꼭대기는 김씨들이 사가지고 다 부자가 되어버렸다고 하며 윗 쪽에는 청웅 바우개 박씨들이 묘를 쓰고 다니더니 이제는 안다닌다고 한다. 그러나 그 사람들도 부자가 나왔다고 한다..
옥정마을 호랑이 이야기
옥정리 양지마을에 살던 박씨가 정읍지역인 내 건너 선산에 벌초를 하러 가면서 아들을 데리고 갔다고 한다. 벌초를 하는 중에 아들은 밤을 줍고 있었으며 이때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아들에게 덤벼들어 물렸다고 한다.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집으로 가는데 아파 죽는다고 신흠을 하여 닭을 잡아서 뼈를 빼가지고 갈아서 물린데 바르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밤이면 호랑이가 집에까지 찾아와 난리를 치면서 시끄럽게 하고 가곤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윤마을 문턱바위 이야기
문턱바위는 이윤마을 입구로 마을 아래쪽에 산과 산이 이어질 정도로 계곡이 형성되어 있고 작은 계곡으로 물이 흐르는데 그곳으로 옛날부터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이 형성되어 있다. 예전부터 유명한 말이 있었는데 이 길을 이용하여 송아지를 시장에서 사가지고 몰고 들어갈 수는 있었는데 소가 자라서 큰 소가 되어 나올 수 없는 길로 유명하였다. 그럴 때에는 소바탕 이란 곳으로 우회하여 소를 몰고 넘어 올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문턱바위 자체가 없어지고 길을 넓게 내어 차량이 통과하는 아스발트 길로 만들어져 있다.
이윤마을 호랑이와 임달치 이야기
항일 투쟁기 이윤마을 임씨라는 사람이 백련산 중턱으로 농사일을 하기위하여 들어갔는데 밤 늦게 까지 내려오지를 않아서 마을 사람들이 찾으로 가봤더니 사람은 없고 뼈만 남아 있었는데 호랑이를 만나 호식을 당했다고 한다. 이 때 아버지인 임달치는 총 쏘는 것을 배웠는데 사격 기술이 뛰어나 날아가는 새들도 한 번에 몇 마리씩 잡을 정도로 명사수가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인 임달치는 원수를 갚기 위해 날마다 산을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호랑이를 쏘아 죽였다는 말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물수(水)자를 쓰지 못해 낙방한 이야기
이윤마을에 사는 노씨가 과거시험을 보러 갔는데 여러 차례 낙방을 했다. 몇 번의 시험을 치르는데도 계속 낙방이었다. 보다 못한 시험관이 노씨 옆에 가서 “오죽하면 그러겠느냐 물 한 그릇 갖다 줘라” 하고 힌트를 주었는데도 그 말의 의미를 알지 못하여 쓰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물수(水) 를 쓰지 못해 과거시험에 낙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졌고 몇 년 후 과거시험을 함께 치르고 합격한 친구들이 안타까워 사증을 만들어 줘서 진안 좌포에 있는 관아 일을 보다가 들통이 나서 결국 쫒겨나 죽을 때까지 벼슬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방현마을 폭포이야기
방현 마을에서 백련산 쪽으로 계곡을 타고 약400m쯤 올라가면 위쪽의 작은 폭포가 있다. 폭포 아래의 웅덩이를 용소(龍沼)라고 한다. 비가 많이 오면 웅장한 폭포를 이루지만 비가 오지 않을 때에는 폭포라는 것을 유지할 정도의 물이 흐르고 있다. 중간의 폭포는 아래쪽 바위사이로 낙차가 심한 폭포가 3~4단정도를 이루고 있으며 아래쪽에 있는 폭포는 용소와 함께 절경을 이루고 있다. 한 계곡에 띠엄띠엄 세 곳에 있는 폭포는 개발되지 않은 상태에 천연림으로 우거져 주위 환경과 폭포의 조화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방현마을 용소이야기
백련산에 구름이 어둡게 끼어 있는 어느 날 방현 마을에서 노씨 할머니가 빨래터에 나와 빨래를 하고 있는데 천둥소리가 나고 번개가 치면서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비가 개이고 날이 좋아 용이 올라간 곳을 가보니 윗 폭포아래에 깊은 소가 파여져 있었고 용이 있다가 올라간 자리라 하여 용소(龍沼)라 이름 지어 부르고 있다고 한다. 물 양이 많지 않으며 지금은 토사가 약간 메워져 있지만 깊이가 약2m 정도 된다고 한다.
방현마을 성굴암이야기
방현 마을에서 1.5km지점에 성굴암지가 있다. 현재는 폐사지로 남아 있는데 절이 왕성할 때에는 많은 신도들이 다녔으며 주지스님은 민가로 내려와 탁발수행을 하는 과정에 밤늦게 절을 향하여 가는데 중간에서 호랑이가 나타나 불을 켜줌으로서 스님은 호랑이의 안내로 절을 쉽게 찾아 갈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학석마을 스님이야기
빈터에 정씨들이 많이 살았다. 이 곳에도 부자집이 많았고 따라서 절에서는 스님들이 탁발(시주)을 하러 다니던 시절이었다. 어느 때인지는 모르지만 스님이 부자집에 시주를 요구하니 주인은 면박을 주면서 스님의 바랑에 곡식대신 오물을 넣어주는 행패를 부렸다. 이때 스님은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절에 돌아와 큰스님에게 자초지종 보고를 하였다고 한다. 며칠후 큰 스님은 그 마을로 가서 부자집에 찾아가 전하기를 이 마을이 대대손손 잘되려면 저기보이는 지네바위가 화근이니 지네바위를 떼로 입혀라 하니 부자집 주인은 그 말을 믿고서 하인들을 동원하여 떼를 떠다가 바위를 덮었다고 한다. 이때 마지막 한 장을 올리니 갑자기 마을에서 불이나서 마을 전체가 불에 휩싸여 망해버렸다고 한다. 그 후 정씨들은 상기마을에 옮겨 정착을 하였는데 또다시 스님이 와서 시주를 하라고 하니 시주는 하지 않고 몰매를 때려 스님을 쫓아내니 스님은 바로 학 바위의 머리를 떼어내고 가버렸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정씨들은 완전히 망하고 후손들은 뿔뿔히 흩어져 살고 있다고 한다. 이때부터 마을의 많은 돌들은 학 바위를 보고 머리를 두르고 따라가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지금은 많은 돌들이 없어지고 일부 바위 돌만 남아있으며 옛 스님과 부자집 주인의 스토리만 전해지고 있다.
학석마을 동래정씨의 묘 이야기
학석리에는 동래정씨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좋은 산에다 명당자리도 많았는데 정씨들은 일부 산을 이윤마을에 사는 강화노씨 들에게 묘를 파내는 조건으로 큰 황소 1마리를 받기로 하여 산을 팔았다고 한다. 그 후 정씨들은 약속한대로 선조의 묘를 파내고 있는데 멀리서 우연히 바라보는데 갑자기 묘에서 하얀 수증기가 올라오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 쫒아가서 묘를 파지 말고 다시 덮으라는 말을 하자 작업을 하던 정씨는 몸으로 묘를 감싸고 파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노씨들은 얼른 황소 한마리 더 줄게 하며 파묘를 강행하여 별수 없이 정씨조상 묘는 노씨 들의 묘 아래에 옮겨 매장을 하고 명당자리를 내어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성좌암과 선비들 이야기
백련산 아래에는 별골산이 있고 밤재에는 감투봉이 있다. 또한 별골산 자락에는 성좌암이 있었는데 과거 남쪽에서 전주로 향하던 선비들은 이곳을 지날 때 반듯이 갓을 벗고 지나갔다고 하는 설화가 내려오고 있다. 이는 성좌암과 별골산 그리고 감투봉은 당시 성스러운 곳으로 이곳을 지나갈 때 예의를 지켜야만 지나갈 수 있는 길이었다고 한다.
죽원마을 삼대 삶은 솥 이야기
오래전부터 삼[大麻]대를 삶던 솥이 지금도 원형을 보전한 채 보존되고 있다. 죽원마을은 산골짜기라 논이 거의 없다시피 하는 마을이다. 그나마 산허리를 개간하여 밭농사 중 삼 농사를 많이 지어 그것으로 삼베를 짜는 것이 생활수단이었다. 따라서 죽원마을 입구에 정사각형으로 돌을 쌓아 시멘트를 섞어 만든 삼을 삶는 솥이 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마을의 역사와 함께하고 있어 보호하고 되고 있다. 임실군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하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죽원마을의 엄나무이야기
마을 앞에 삼대 삶은 솥단지 뒤에 오래된 엄나무가 있다. 이 엄나무는 그늘이 넓어 옛날에는 마당에 곡식을 말리느라 펼쳐 놓으면 엄나무 그늘 때문에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베어버릴까 하는 의견이 많았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했지만 주인의 뜻에 따라 지금도 보호하고 있어 마을의 역사를 안고 있다.
죽원마을 이야기
죽원마을은 강진면 회진리 오두목 에서 출발하여 몇 고개를 넘고 상필을 지나 하필 재를 넘어 오다 쉬는 곳이며 죽원을 거쳐 민재, 삼막실재, 운암 금기리 시랑골로 가는 길목이다. 죽원마을은 옛날 어느 도승이 지나가다가 힘들어서 잠시 쉬어갔다는 곳이다. 한참 쉬고 나서 깜박 잊고 꽂아둔 지팡이를 그대로 두고 갔다고 한다. 훗날 꽂아둔 지팡이가 자라서 대나무가 되어 죽원이라는 마을 이름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오랜 기간 동안 주막이 유지되고 있었다. 이 주막은 민재, 삼막실 재을 넘어가는 사람들이 모여서 산 짐승들이 많아 무서움을 떨치기 위해 막걸리 몇 잔씩을 마시고 함께 산을 넘어가야 하기에 주막집이 잘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삼막실 넘어가는 재에는 부처바위가 있다. 서낭감 밭이라고도 한다.
회진마을 여우이야기
회진마을에 살고 있는 정필조 부인이 소 필봉 산하고 인접된 밭에서 여름에 김을 매고 있는데 갑자기 여우가 나타나 부인을 유인하여 정신을 잃게 한 후 바위에 눞여 놓고 여우가 발로 건드리며 혼을 뺐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부인에게 왜 그렇게 하고 있었느냐고 물으니 아는 사람 누구가 와서 가자고 하기에 따라갔는데 나중에 보니 여우한테 홀려 그렇게 되었던 것이라고 하였다.
회진마을 곽정씨 이야기
나이가 좀 많은 사람을 양반이라고 부른다. 곽정씨는 중학교 옆 큰 바위가 있는데 갈담 시장에 갔다가 늦게 술 한잔 하고 집으로 오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나타나 몸에 잘구를 씌웠다고 한다. 이때 정신을 잃고 허둥지둥 집으로 온다고 온 것이 안 터의 개굴창 에서 헤맸다고 한다. 이때 무릎에 상처가 나고 옷이 찢어진 채 헤매다가 집에 왔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달걀귀신에게 홀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회진마을 김영웅씨 부친 이야기
남원에서 회진마을로 이사를 하여 성장하면서 일을 하기 싫어 공부를 했는데 공무원이 되어 남원에서 근무를 하다가 정년퇴직을 한 후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 아버지가 회진리 장지터에서 술 마시고 집으로 걸어가는데 어떤 아주머니 한분이 나타나 어떻게 이렇게 늦었냐고, 하면서 여기서 좀 쉬었다가 가라고 하기에 쉬고 있었다. 그때 아주머니는 귓밥을 파준다고 하며 돌로 귀를 쫓아버렸다고 한다. 그러자 피가 낭설 되어 신음 중에 있었다고 한다. 해는 지고 아버지가 오지 않아 아들인 김영웅씨가 아버지를 찾으러 나서서 발견하고 보니 아버지의 얼굴에 피가 낭설이 되어 그 샘가에 쓰러져 있어 집으로 모셨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회진마을 장자터 이야기
회진마을은 오두목과 장자터로 구분되는데 윗마을이 오두목이고 아랫마을이 장자터 이다. 장자터란 옛날 5만석을 하던 박장자가 살았던 곳이며 현재 중학교가 있는 자리에 안 씨가 살았는데 안 씨는 약 1만석정도를 하였다고 한다. 박장자의 전답은 주로 담양 쪽에 많이 있었다고 하며 가을이면 소작인들이 모두가 한복을 입고 나락을 짊어지고 왔는데 빨랫줄에 빨래를 걸어놓은 듯이 길게 서서 나락을 짊어지고 왔다고 한다. 이때 박장자는 이곳저곳에 줄을 매고 음식을 달아 놓고는 유일하게 말을 타고 기생들하고 놀이를 하는 것이 그 박장자 취미였다고 한다. 이런 때에 지금의 고등학교 뒤에 있는 전의이씨 들이 그랬는지는 몰라도 청웅 원동에 지금으로 말하면 주재소가 있었는데, 박장자가 잘 살기는 하나 주재소에 뇌물을 상납하지 않으니까 암행어사가 임실에 왔을 때 말하기를 저 가단이라고 하는 동네에 가면 박장자라고 하는 사람이 살고 있는데 늘 말을 타고 활을 쏘며 군사 가무를 만을 하고 있다. 그 목적은 쉽게 이야기를 해서 조정을 내란 시키려고 하는 군사훈련만 계속 한다고 일렀다 한다. 그 후 암행어사는 조정으로 들어가 보고하기를 임실의 가단이란 곳에 박장자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을 놓아두면 안 되겠습니다. 하고 보고하면서 군사를 동원하여 잡아다가 조치를 해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한다. 이때 마침 조정에는 박장자 아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이 그때 순전히 도보로 며칠을 걸어서 박장자 에게 와서 당신이 이래저래 해서 조정에서 군사들을 동원하여 당신을 잡으러 오려고 하니까 당신은 피신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박장자는 그 사람의 말을 믿고 그날부터 가지고 있는 보물 모두를 우물에 넣고 메워버렸으며 봇짐을 싸가지고 중국으로 피신을 해버렸다는 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그 후 박씨들은 그 손들이 뿔뿔이 헤어져 살면서 박 씨라고만 하고 본관을 말하지 못하며 살았다고 한다.
장자터와 박장자이야기
박 장자는 당시 거부로 지금의 장자터의 마을회관 위쪽에 살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지금은 곽씨들의 선산(종토)으로 되어 있지만 박장자가 살았던 곳이며 보물들을 버리고 갔다는 우물까지도 짐작을 하고 있었다. 우물이 있던 곳을 옛날에는 도굴꾼들이 쇠꼬챙이로 찔러서 땅속에 있는 것을 찾는다고 사람들이 수없이 와서 뒤져가기도 하였다고 한다. 박 장자는 우물에다가 보물을 넣고 메워버리고 탈출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며 중국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망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잉어명당 덕으로 출세를 하여 그 후손들이 벼슬도 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출세 후 우리나라로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박장자 후손이 우리나라에 사신자격으로 와서 이곳을 찾으려고 임금한테 물었다고 한다. 이때 박장자 후손은 가달국이 어디냐고 물어본바 임금이 알지를 못하여 가르쳐주지를 못하였으며 할 수 없이 중국으로 되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설화로 내려오고 있다.
회진마을 작고개 이야기
작고개는 강진에서 덕치로 건너가는 나루터를 말한다. 항일투쟁기 일본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도로를 만들면서 옛길인 작고개는 추억 속으로만 남아있다. 옛날 덕치 가는 길 산 밑으로 쭉 가다가 냇가를 건너가는 길이다. 이 옛길에는 임실에서 현감을 지내다가 영전하신 분들의 공적비 7기가 있는데 자연 바위를 조금 정리하여 새긴 영세불망비가 있다. 이 불망비는 강진을 비롯하여 성수면 오류리 구역인 말치와 오수면 군평리 옛길에도 새겨져 있다. 영세불망비의 주인공은 현감 정동시, 현감 최천서, 현감 이문저, 현감 임성주, 현감 정규상, 현감 원세철, 이희기 현감의 영세불망비 이다.
하필마을 너머테 이야기
너머테는 지금의 하필마을이 맨 먼저 생긴 곳이라고 한다. 현재의 하필마을이 터가 아니고 이곳에서 조금 올라가 있는 곳이 본래의 마을로 지금은 그곳을 너머테라고 부른다. 지금의 60대 사람들이 어렸을 때의 기억으로는 마을의 집터에 주추돌도 보였는데 지금은 잔디와 잡초로 덮여져 형태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너머테라는 곳은 옛날에 길에서 보면 불이 반짝거리기에 동네가 큰 줄 알고 도적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도적들을 피하기 위하여 지금의 마을로 이거를 하였다고 한다.
하필마을 숲 이야기
진주 강씨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살면서 심었다는 떡갈나무 2주와 느티나무 1주가 하필마을 앞 동산에 자라고 있다. 이 나무들의 크기를 보면 임실에서는 제일 큰 것으로 보고 있다. 옛날에는 마을 사람들이 나무도 가꿨으며 그때는 경치가 좋으니까 그곳에 정자도 짓고 풍류를 즐겼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수령은 약 600년 정도를 보고 있다.
하필마을 소구시 바위 이야기
하필마을 입구의 밭뚝에는 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 바위를 소구시(소구유)바위라고 부른다. 이 바위는 아래쪽으로 파여져 소 구시형태를 보이고 있다. 또한 풍수적으로 말하면 마을 앞산이 소 머리 형상이라고 하며 머리 앞에 구시바위가 있다는 것이다. 구시바위가 바로 있어야 부자가 되는데 도사들이 엎어놨다고 하며 그래서 부자가 없이 못산다고 마을사람들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바위를 인위적으로 돌려놓았을 때 마을에 길흉이 올까하는 생각으로 손을 대지 못한다고 한다.
하필마을 사기점골 이야기
하필마을에서 서쪽으로 올라가면 저수지가 있고 저수지 위쪽에 사기를 굽던 곳이 나온다. 이 곳을 점골, 사기촌, 사기점골 등으로 불렀다. 이곳은 지난 2016년도에 임실의 도요지 조사과정에 임실군에서 삼계학정 도요지와 두 번째 덕치 구담도요지 세 번째가 하필 도요지라고 조사되었다. 그곳에는 지금도 벽채 흙덩어리와 사기파편이 많이 쌓여 있으며 도침 등이 발견되기도 한다.
율치 지명이야기
율치(栗峙) 하면 밤나무가 많았음을 표현한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학석리 율치 마을의 경우는 밤나무가 많아서가 아니라 마을 형태가 풍수상 밤송이가 익어서 버러진 모양이라는 것과 버러진 밤송이 어느 곳에 장군 대지가 있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어 율치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아주 옛날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지날 때면 장군대지가 있는 곳이라 하여 갓을 벗고 예를가추며 지나갔으며 홍성문 대사도 이 마을을 지날 때 썼던 갓을 벗어 들고 지나가다가 마을을 다 지나면 갓을 다시 쓰고 갔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이는 이 마을이 장군 대지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예를 갖추었다고 한다. 또한 감투봉이 율치마을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마을을 보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율치 돌탑이야기
율치(栗峙)마을은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구분되어있다. 아랫마을 입구에 돌탑 두 곳이 있었는데 돌탑사이로 큰 길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옛길이었다고 한다. 돌탑은 지금의 학석리 80번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가운데 큰길을 두고 양쪽에 조성된 돌탑은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매년 정월 열 나흩 날이면 음식과 밥을 차려놓고 농악을 치며 당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때 밥을 짓거나 반찬을 장만한 아낙네는 정결한 사람이 해야 된다고 하여 사람을 골라 밥과 음식을 장만 하였다고 한다. 그 무렵 아랫 율치 젊은 사람들은 결혼 후 딸만 많이 낳고 있었는데 하루는 마을 사람 중 문씨가 꿈을 꾸는데 하얀 옷을 입은 영감이 나타나 꿈속에서 선몽 하기를 아들을 낳고 싶으면 돌탑에 정성껏 공을 들여야 한다고 하며 사라졌다고 한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정성을 다하여 양쪽의 돌탑에 제사를 올린바 그 후부터는 아들을 많이 낳았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설화로 내려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