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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 강진의 역사와 문화
◈ 20. 강진의 민담과 설화
강진의 민담과 설화
 
조선팔도의 8대 명당중 하나 잉어명당
 
벡련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용트림치고 힘차게 10여리를 뻗어 내려와 잉어명당이 있는데 명당의 우측산은 그물 봉이요 앞산은 작살봉, 회진마을 앞에는 다래기봉으로 명당을 에워싸고 있는 산들의 모양새 또한 이름과 어찌나 같은지 과연 잉어명당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물봉은 필봉에서 뻗어 내려온 날인데 그물이 잉어를 포위할여는 형태요 작살봉은 작살이 누어있는 형태고 다래기봉은 어디서 보아도 다래기(고기바구니)와 모양이 흡사하다, 지명을 어느 때 누가 지었는지는 알수 없으나 수 천년이 지난 지금도 지명과 일치한 점이 새삼 신기하다.
 
옛날에 잉어명당을 잡아 함양박씨가 명당을 쓰려고 천광 일을 할 때 2,3척을 파내려가자 반짝 같은 암반이 깔려 있었다고 한다. 암반을 들어내고 묘를 쓰려고 한쪽을 떠들 때 암반 밑에서 놀던 잉어 두 마리 중 한 마리가 튀어나오자 떠들던 암반을 그대로 놓고 묘를 썼다고 하며 그 후 명당바람에 장자가 태어났다고 한다.
 
박 장자(朴壯子)는 회진리 장자 터에 거주할 때 앞산 다래끼 봉에다 놀이터를 만들고 정자를 지어 풍류객들이 흥겹게 놀면서 줄을 매어 음식을 날라다가 먹으면서 즐기던 중 어느 어사가 지나가다보니 말놀이를 하는 것을 보고 임금께 상소하기를 군사훈련을 하고 있는 것은 차후 반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고 하자 어명을 내려 잡아들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박 장자는 우물 속에 귀중품을 넣고 묻어버리고 야밤을 이용하여 군산을 거쳐 중국으로 망명을 하였다고 한다.
 
박 장자는 그곳에서 살던 중 큰 벼슬(이부상서)에 올라 고국을 찾아온 사신이 임금에게 가달국(가단을 가달 국으로 잘못 부름)을 물었더니 임금께서는 가달국은 없다고 대답하자 찾지 못하고 되돌아갔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잉어한마리가 묘를 쓸 때 튀어 나갔기 때문에 외국으로 나가야 큰 벼슬을 할 명당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현재는 묘(墓) 2기가 있는데 위에 있는 묘는 비석에 절충장군용양위호군부사직상장함양박공기림지묘(折衝將軍龍驤衛護軍副司直上將咸陽朴公起林之墓)라고 쓰여진 비석이 있으며 말미(末尾)에는 세재 기미 시월상한(十月上澣)이라 적혀 있으며 외 후손 청주 한영석 근식(歲在己未十月上澣外后孫淸州韓榮錫 謹識)이라고 적혀 있어 이는 1919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십삼대손원석근서(十三代孫元錫謹書)라고 기록하여 비석을 세웠다.
 
 
강진면내에 전하는 명당
 
황계재(黃鷄峙) : 갈담에서 덕치면 사곡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함. 이 고개에 황계포란형(黃鷄抱卵形)의 명당이 있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묘를 써서 공동묘지가 되다시피 하였다. 일부는 사곡리 경주이씨의 종산이기도 하다.
국수봉(國樹峯.菊樹峯) : 부흥리 배남실 북쪽에 있는 산을 말하며 선인무수형(仙人舞袖形)이라고 부른다.
매지거리 : 부흥리 배남실 동쪽에 있는 산을 말하며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이라고 한다.
 
 
설보 이야기
 
설보는 원래 강진면 용수리 가리점을 들어가는 입구 주변에 위치해 있다. 설보는 덕치면 회문리의 함안조씨 입향조인 조평(趙平,1569~1647) 선생이 꿈에 선몽을 얻어 막았다고 하는 설화가 내려오고 있다. 강진면 갈천에 보(洑)를 막아 덕치면 회문리 큰 들에 관개를 하였는데 이 보를 이용하여 덕(德)을 본 사람 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한다.
 
이보는 1634년에 시작하여 1639년에 완공을 하였는데 실로 긴 세월에 걸쳐 완공을 하였다. 처음에 주민들이 말하기를 “우리들의 살길은 오직 여기에 보를 막아 넓은 들에 물을 이끌어 황무지를 옥토로 만드는데 있다고 하였다”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으나 누구 한사람 그처럼 힘든 작업을 할 수도 없었고 물이 급하여 공사 착수에 망설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 때 조평선생이 서둘러 오늘날의 설보로 완성한 것이다.
 
조평(趙平) 선생은 섬진강 물을 막아 수로를 타고 그 물을 이끌어 농토를 만들자고 주민들에게 호소를 하였으나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1639년 춘분날 밤 꿈에 노인이 나타나 “지금 갈천에 나가면 눈이 내린 흔적이 있을 것이니 그 눈길을 따라 보를 쌓으면 뜻을 이룰 것이이니라”하며 사라졌다고 한다. 꿈에서 깨어난 조평 선생은 희색이 만연하여 곧 갈천에 나아가 보았더니 과연 눈길이 환하게 보였다. 공은 눈이 녹아버리면 이 흔적이 없어질 것을 생각하여 눈길을 따라 말뚝을 꽂아서 표시를 하였다고 한다.
 
다음날부터 주민들과 힘을 합하여 돌과 나무 등을 마련하고 어제 표시해놓은 말뚝을 따라 수로를 파고 보를 막았더니 그렇게 어려웠던 보가 손쉽게 쌓아졌다고 한다. 이때 눈길을 따라 개척한 수로는 무려 8km에 이르고 이 보와 수로는 옛 모습으로 남아있어 볼 수가 있으며 일부수로는 지금도 활용되고 있다. 공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동지들과 의병을 크게 일으켰으며 후에 선생이 끼치는 업적을 찬양하는 뜻으로 아래와 같이 시를 지어보았다.
 
백성을 기름지게 하는 것
오직 선생의 뜻이어니
마음이 한결같지 못하면
어찌 깊은 산에 몸을 감추랴.
 
땅이 있어도 같지 못하고
들이 있어도 같지 못하여
밭은 높고 물은 얕으니
백성들은 땅을 가꾸기 어려워라.
 
이러한 때 조공(趙公)은 벌판을 살펴
하늘에 빌되 보를 쌓게 해 달라 하고
정성이 하늘을 통해 눈내리는 꿈을 얻어
수로를 뚫어 보를 이룩 하니라.
 
물은 수로에 넘쳐 흘러
사람마다 이롭게 되었노라.
조공(趙公)이 끼친 공 백성에게 돌아가니
이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더라.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높은 큰 공적
시절이 평화롭고 해마다 풍년이 들 때마다 공을 칭찬하네
趙公의 공적이라 우러러 보고
남녀노소 모두 칭찬이로다.
 
서로 서로 입에서 입으로
길이길이 전하여 온 것을
이제야 기록에 남겨 돌에 새기노니
후세 사람들아 趙公을 본 받으소서
 
 
성좌암 바위 구멍에서 쌀이 나왔다.
 
강진면 방현리 뒷산 성좌암(星座岩, 일명 별골절)에서 옛날 도승이 수도하고 있었는데 식량이 귀하고 산세가 험악하여 식량조달이 극히 어려웠다고 한다. 도승이 도술로(임실 서쪽 창고 서창 국고) 서창(西倉)에서 쌀을 달아다 성좌암 뒤 암벽 구멍으로 쌀이 나오게(약 2·3명분)하여 도승과 상좌가 살아오던 중 어느 날 점심때가 되었는데 많은 신도들이 찾아오자 철 불지(道僧에게 알 리지 않고)상자가 쌀 많이 나오라고 부지 갱이로 암벽의 쌀 나온 구멍을 쑤셨 더니 그만 쌀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후 도승과 상자는 어디로 떠나 버리고 6·25사변때 수복되면서 절은 소실되어 버리고 빈 절터와 옛 이야기만 남아 있을 뿐이다.
【향토사】 강진의 역사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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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7.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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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