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의 종교문화
불교문화
갈담리 구룡사
구룡사지는 강진면 갈담리 산 28번지(갈담1길 12-15)에 위치한다. 구룡사는 1938년 곽주덕(郭洙德)이 창건한 산제당을 모체로 하여 곽수덕의 양자로 대처승인 김해운(金海雲)이 1958년 구룡암(九龍庵)으로 개칭하여 하나의 암자가 되었다. 그 뒤 이 암자는 비구승에게 매도되어 경영하였다. 1978년 비구니 김법현(김순례)스님이 인수하여 운영하면서 지금의 대웅전과 산신각, 요사채 그리고 식당 등을 건립하여 사찰의 면모를 갖추고 구룡사로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구룡사는 조계종으로 선운사 말사이다. 그러나 절을 지은 터가 동계에 살고 있는 함양 박씨들의 종중산으로서 재산의 가치를 나타낼 수 없어 아쉬움이 있다.
백련리 백련사지(址)
이 백련암은 강진면 백련리 산15번지 백련산(754.5m) 동남쪽 기슭의 중단부에 위치하고 있다. 강진면 백련리 신기마을 안쪽에 위치해 있는 백련사는 대한불교 태고종단의 사찰로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백제 때 창건되었다가 어느 때인지는 알 수 없지만 폐사되었던 것을 1945년 다시 중건하였다고 한다. 슬레이트지붕 아래 정면 4칸 측면 2칸의 만거로 가운데 기둥에 백련사 현판을 걸고 방 한 칸을 극락전으로 활용하였다. 본래 마을 뒤편 산속에 있던 백련암(白蓮庵)으로 길이 멀고 험하여 왕래가 불편하여 현 위치로 내려왔다고 한다. 오래된 목불상과 탱화가 있었는데 도난을 당하였다고 한다. <범우고>에는 ‘지금은 폐사가 되었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사지에는 크기가 다른 할석으로 쌓은 석축과 초석이 남아 있으며 돌절구가 출토되었다고 한다. 주변에는 기와편이 산재되어 있기도 한다.
방현리 성좌암지(址)
이 사지는 강진면 방현리 산 57번지 수동마을 동북쪽 능선에 위치한다. 수동마을의 북동쪽에 우뚝 솟아있는 봉우리(585.0m)의 8부 능선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창건 연대는 알수 없으나 <문화유적총람>에 진묵대사가 수도했다는 암자가 있었다고 전하며 한국 전쟁 때 소실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지는 자연암반을 이용한 석굴사원으로 자연암반을 지붕삼아 그 아래에 작은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폐허가 되어 건물의 흔적은 확인할 수 없지만 주변에 기와 편들이 다량으로 산재되어 있다. 수동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찾아와 성좌암지에서 기도를 드리곤 했다고 전한다.
백련리 천태암지(址)
사찰에 대한 정확한 내력과 위치는 알 수 없다. <임실읍지불우조>와 운수지에 의하면 천태암은 재백련산남록금무(在白蓮山南麓今無) 백련산 남쪽 기슭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이 사지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다.
백련리 성굴암지(址)
백련리 성굴암지는 <임실읍지>와 운수지에 의하면 재백련산서록천작암혈간고고청절비인경(在白蓮山西麓天作巖穴間孤高淸絶非人境)라는 기록이 있다. 즉 성굴암은 백련산 서쪽에 있었는데 천혜의 암벽 사이에 지어져 고고하고 청절하여 사람들이 찾지를 않는다고 하였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사지의 위치를 알수 없다.
강진의 동학
동학의 임실 전래
천도교 임실교사1)에 의하면, 임실에 동학이 전래된 시기는 포덕 14년(1874년, 酉)3월(日字未詳)에 해월신사(海月神師)께서 조항치(鳥項峙)라는 마을에 장수도인(長水道人) 김신종(金信鍾)을 데리고 찾아와 허선(許善) 씨 가(家)에 거처를 정하고 도장(道場)을 베풀어 설법포교(說法布敎)를 하였다고 한다.
이때 소문이 널리 퍼져 원근 인사들이 운집(雲集) 배알(拜謁)하고 그 중에서 최봉성(崔鳳成), 허선(許善), 표응삼(表應三), 최봉항(崔鳳項), 최봉관(崔鳳官), 김영원(金榮遠), 신명화(申明嬅), 김학원(金學遠)등이 35일 동안이란 장기적(長期的) 설법(說法)과 교리(敎理)를 배우는 도중 불길비(不吉非)가 있어 신사(神師)님의 명교(命敎)에 의하여 섬진강원천(蟾津江源川) 425리(里) 냇물로부터 약 5리쯤 되며 임실읍에서 40리 지점인 갈담(葛潭)으로 장소(場所)를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갈담 마을은 그 당시 역촌(驛村)으로 정부(政府)의 소식을 알기 쉬운 시장이 있어 많은 장꾼들이 드나들며 역마교체(驛馬交替)와 파발꾼이 교체하는 곳으로서 각 지방 소식도 빨리 들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는 전주군계(全州郡界)가 30리 태인(泰仁), 순창(淳昌) 군계(郡界)가 각 20리길 이어서 이곳은 사통오달(四通五達)로 타 군의 많은 사람들과 연락을 통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해월신사(海月神師)께서 15일간 이마을을 표응삼가(表應三家)에서 도장(道場)을 베푸는 동안 임실(任實), 전주(全州), 태인(泰仁), 순창(淳昌)의 많은 선비들이 참석하여 교리와 설법을 배웠다 하는데 그 중 태인(泰仁) 출신(出身)옹택규가 훗날 해월(海月)께서 동경대전(東經大全)을 강서(降書)로 저술할 때 주필(主筆)이 되었다고 전해질 뿐 그 외 선비들은 전혀 그 뒤 내력을 알 도리가 없다.
갑오농민혁명 전[甲午前]에 그 당시를 기록한 일성록(日省錄)이 소실(燒失) 또는 유실(流失)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해월신사(海月神師)께서 임실군(任實郡)이 좋다고 하였고 조항리(鳥項里) 갈담리(渴潭里)는 봉황(鳳凰)의 의미가 있고 섬진강변에 자리함은 섬진강 물처럼 앞으로 천도교(天道敎)가 융성(隆盛) 대발전(大發展)하여 간다는 뜻이 있다고 보았다. 조항(鳥項) 갈담(渴潭)에서 포교(布敎)하신 바가 곧 전라남북도(全羅南北道) 동학(東學) 최초의 근원지지(根源之地)라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임실(任實)의 동학(東學)은 수운 대신사(大神師)께서 1861년11월 남원 은적암에 피신하여 포교한 것을 제외하면 전라도에서 동학이 가장 먼저 포교된 지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임실교사(任實敎史) 외에는, 천도교 측 자료 어느 곳에도 기록되지 않고 있어 일부 학계에서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특히 이 시기는 이필제(李弼濟)의 난으로 인해 ‘해월신사’가 도피생활을 하던 중이라 한 곳에 오래 정착할 수가 없는 처지인데 어떻게 임실에서 장기간 포교활동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이필제의 난으로 도피생활을 하던 해월 최시형은 강원도 주변에서 더 이상 피신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였기 때문에 전북 지역에 잠적하였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동학 천도교 약사(東學天道敎略史)(龍潭淵源編著.1990발행)에 의하면 “시(時)에 필제(弼濟)의 여화(餘禍)로 영남(嶺南), 충청(忠淸),강원(江原), 경기(京畿) 등 각지의 도인(道人)이 안도(安堵)치 못하였다. 기록으로 보아 전라도만이 이필제난의 영향 밖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이 무렵 해월은 심산(深山)에 잠입하여 기한(飢寒)을 상비(常備)하고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태백산(太白山)으로 들어가 14일 동안 식사도 못하고 나뭇잎을 씹으면서 지내다가 찾아간 곳이‘영월군 직곡리’ 박용걸(朴龍傑)의 집에 임시 거처를 정하자, 각처의 두목들이 찾아와 배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시(時)에 영월군(寧越郡), 포청행수(捕廳行首) 박성자(朴姓者) 포교(捕校)에게 위(謂)하여 왈문(曰聞)한 즉 계하(啓下) 죄인(罪人) 최(崔),강(姜) 양인(兩人)이 직곡리(稷谷里) 박용걸(朴龍傑) 가(家)에 은적(隱迹)하였다 하니 명일(明日)에 체포(逮捕)하라 한대 수이(首吏) 지달준(池達俊)이 박(朴)을 책(責)하여 구사내지(具事乃止)하니 시이(是以)로해월신사(海月神師) 화(禍)를 면(免)하시다.
시월초(是月初)에 소밀원도인(蘇密院道人) 장기서(張基瑞)의 꿈에 수운대신사(水雲大神師) 위의엄정(威儀嚴正)히 기가(其家)를 왕(往)하시거늘 장기서(張基瑞) 배알(拜謁)하고 기소향(其所向)을 문(問)한대. 수운신사(水雲神師) 왈(曰) 오(吾) 영월군(寧越郡) 지달준(池達俊)에게 소탁(所託)이 유(有)한고로 기가(其家)로 향(向)하노라. 장기서(張基瑞), 찬(饌)을비(備)하여 공궤(供饋)코저 하다가 미과(未果)라 하거늘 해월선사(海月神師) - 장기서(張基瑞)의 몽(夢)을 문(聞)하시고 전일(前日) 면화(免禍)하심은 전(專)혀 수운대사(水雲大師)의 명조(冥助)이신줄 지(知)하시다.
그 후(其後)에 지달준(池達俊)의 말을 듣건대 몽(夢)에 일선관(一仙官)이 녹옥장(綠玉杖)을 특(特)하시고 기가(其家)에 강림(降臨)하시니 의관(衣冠)이 학여(鶴如)하고 풍채(風采)가 옥여(玉如)한지라. 지달준(池達俊)이 경(驚)하여 복배(伏拜)하니 선관(仙官)이 왈(曰) “오(吾)의 문제(門弟) 최경상(崔慶翔)과 강수(姜洙)가 무죄(無罪)히 지목(指目)에 리(罹)하여 령(令)에 직곡리(稷谷里) 박용걸(朴龍傑) 가(家)에 은(隱)하였으니 설혹(設或) 현발(現發)되는 사유(事有)할지라도 여(汝) 선(善)히보호(保護)하라. 오(吾) - 반드시 후보(厚報)하리라. 기각(旣覺)에 대이(大異)하였더니 미기(未幾)에 향수(鄕首) - 발포(發捕)의 사(事)가 출(出)하였다.”하더라.
해월신사(海月神師) - 강수(姜洙)로 더불어 지달준(池達俊)에게 왕사(往謝)하신대 지달준(池達俊)이 왈(曰). 인(人)이 인(人)을 구(救)함은 인(人)이 당연(當然)히 할 바라. 어찌 이같이 왕사(往謝)하시뇨. 하고 대접(待接)하기를 심(甚)히 관곡(款曲)히 하더니 작별시(作別時)에 전이백문(錢二百文)과 필이병(筆二柄)과 묵이매(墨二枚)로써 해월선사(海月神師)께 정(呈)하더라.” 이처럼 당시 상황은 강원도 영월 산골에까지 관의 수배망이 펼쳐지고 있어 더 이상 피신할 곳이 없는 위급한 처지에서 영월 수이(首吏) 지달준(池達俊)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수운대사(水雲大師)의 제삼녀(第三女)와 세정(世貞, 수정의 장자)의 처(妻)가 장춘포(張春浦) 가(家)에 재(在)하다가 병(竝)히 인제옥(隣蹄獄)에 피인(被因)되어 차(此)는 도인(道人) 김덕중(金德中)이 포졸(捕卒)을 교사(敎唆)함 일러라….” 동년(同年 1872년) 5月 12日에 세정(世貞)이 양양옥(襄陽獄)에서 옥사(獄死)되고 김덕중(金德中), 이일여(李逸汝), 최혜근(崔惠根)은 각(各)히 유형(流刑)되다. 해월신사(海月神師) - 차보(此報)를 문(聞)하시고 강수(姜洙)에게 위(謂)하사 왈(曰) 지도자(知道者)는 가(可)히 명(命)을 말하지 아니하나 차시차보(此時此報)는 실(實)로 인정(人情)에 불인문(不忍聞)이라 하시다.
동년(同年 1872년) 9月에 소밀원(蘇密院)에도 또 지목(指目)의 혐(嫌)이 있어 해월신사(海月神師) - 강수(姜洙)로 더불어 박씨 사모주(朴氏師母主)를 배(陪)하시고 유인상가(劉寅常家)에 왕(往)하사 미천리(米川里)에 안접(安接)하시게 하시고 수 일 후(數日後)에 그 가권(家眷)을 솔래(率來)하시었더라.”
그러나 당시의 상황은 도인(道人)들조차 배신을 하는 급박한 위기가 닥쳤다. 즉 수운의 3녀(女)와 장자(長子) 세정(世貞)의 처가 도인(道人)김덕중(金德中)의 배신으로 ‘인제옥’에 갇히는 상황에 이르렀고 1872년5월에는 수운의 장자 세정(世貞)이 양양 감옥에서 매를 맞고 죽었으며 ‘김덕중, 이일여, 최혜근’은 각기 유형되니 해월은 이 비보를 듣고 강수(姜洙)에게 말하기를 도(道)를 알고 있는 자는 가히 명(命)을 말하지 아니하나 이 때에 이 소식은 실로 인정에 불인문(不忍聞)이라 하였다.
또한 동년 9월에는 영월군 소밀원에 있는 수운의 가족들에게 지목의 혐의가 있음을 전해 듣고 강수와 같이 박씨 사모주를 모시고 정선군 유인상 가(家)에 들러 다시 미천리(米川里)에 안접(安接)하시게 하고 수일 후에 그 가권을 거느리고 왔다고 기록된 후 1년간 해월의 행적은 알 수가 없으나 이 기간에 임실에 담입 포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해(1873년, 포덕 14년) 癸酉 10월 24일에 해월은 강수(姜洙), 유인상(劉寅常), 전성문(全聖}文), 김해성(金海成)을 거느리고 태백산 갈래사(葛來寺) 적조암(寂照庵)에 들렀다는 기록에서 이 기간 중에 임실에서 활동하였을 가능성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해월의 1870~73. 행적참조)이 때의 상황은 수운이 1861년 경주에서 잠적하여 남원 은적암에 들러 이곳에서 포교(布敎)한 전례가 있어 해월 역시 강원도 지역에서는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어 홀로 잠적하여 가장 안전지역이라 할 수 있는 전라도에 잠입하여 장수(長水)의 도인(道人) 김신종(金信種)을 찾아 그의 안내로 임실에 찾아와 조항치(鳥項峙)에 머물면서 포교(布敎)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실 지역 동학(東學)의 정착(定着)
임실 지역의 동학은 1861년 수운 최제우(1824~1864) 선생이 남원 은적암에 피신하고 있으면서 포교한 것을 제외하면 도내에서 가장 빠른 시기인 포덕 14년(1873) 3월 해월 최시형(1827~1898)이 장수 김신종의 안내로 청웅면 조항치(鳥項峙) 허선(許善) 댁에 거처를 정하고 설법 포교하자 이 지역(운암)에서 덕망과 학식이 있고 전답 1천여 두락(세수500여 석)의 재력이 있는 최찬국이 장수 김신종의 주선으로 허선의 댁을방문하여 해월 최시형을 만나 동학(東學)의 종지(宗旨) ‘人乃天’과 ‘사인여천(事人如天)’, ‘강령(綱領)’, ‘포덕천하광제창생(布德天下廣濟蒼生)', '보국안민(輔國安民)’, ‘목적지상천국건설(目的地上天國建設)’과 ‘세계극락(世界極樂)’의 대의(大義)를 듣고 찬동하여 입교하면서 은도(隱道)로서임실을 위시하여 진안, 장수, 무주, 용담, 순창, 남원, 구례, 곡성, 옥과 등10여 군에 잠입하여 포교(布敎)하니 교도 수가 수천 호에 달하였다.
이 지하조직에 동량(棟梁)역할을 한 분은 사위인 김홍기(金洪基)와 아들 최승우(崔承雨), 최유하(崔由河), 최동필(崔東弼) 그리고 김영원, 한영태 등으로 이들 6인은 ‘결의형제’의 의(義)를 맹약(盟約)하고 포덕 사업에 전력하였다. 당시 동학은 ‘좌도난정율(左道亂政律)’로 지목되어 발각되면 참형에처하였으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실행하였다. 이처럼 임실 지역에서 동학의 세력이 활발하게 포교활동을 하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첫째, 이 지역에서 덕망과 학식이 있고 재력이 있는 최찬국이 그의 전 재산을 구국운동과 종교사업에 써 달라는 유지(遺志)에 따라 재정적 뒷받침으로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었으며 최씨 일가를 주축으로 결의형제의 맹약으로 비밀보호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특수한 요건을 가지고 있다.
둘째, 지리적 여건으로 동부 산악권과 서부 평야 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 섬진강의 상류로 교통의 요충지로 산간지역이면서도 비산비야로 인접 진안, 장수보다 경제상태가 비교적 좋아 외부의 지원이 없어도 독자적 운영을 할 수 있는 지역적 특성이 있다.
셋째, 타 지역과 달리 일찍부터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최찬국의 재정지원으로 청웅에 삼화학교와 전주에 창동학교를 신설하여 새로운 교육을 실시하며 인재를 양성하였기에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대표 33인 중 임실 출신의 ‘박준승’과 ‘양한묵(전남 화순)’이 학교의 출신이란 사실이 증명하듯 3․만세운동과 항일운동 유공자가 전국에서 가장 많이 배출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넷째, 임실 지역은 타 지역보다 일찍 해월의 포교활동으로 이론에 밝은 많은 동학 간부들이 배출되어 탄탄한 조직력으로 도내에서 가장 많은 교인을 확보하고 있으며 타 지역과 달리 북접(北接)으로 분류되고 있으며, 또한 동학이 천도교로 개칭되면서 신․구파 갈등 속에 구파로 분류되고 있어 중앙 교단과 대립, 독자노선을 고수하여 구파의 간부들이 주로 임실 출신으로 한때는 구파의 천도교 중앙기관을 임시로 임실교회에 존치하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포덕 33년(1892) 임진(壬辰) 11월 3일 충청, 전라, 양도에서 일만여 교인이 모인 삼례 집회에서 전라, 충청 양 감사에게 수운(水雲) 사신원(師伸寃)과 동학도(東學道)에 대한 탄압금지를 요청하는 집회에 최승우, 김영원 등 많은 도인들이 참석하였으며 이 때 임실출신의 ‘김영원’, ‘최유하’에게 호소문을 만들게 하고 식량 공급과 모든주선을 전담하였으며 포덕 34년(1893) 계사(癸巳)에는 보은 집회에 참여하였고 다수(多數)의 교인(敎人)들이 상경(上京)하여 ‘박광호’를 소두(疏頭)로 하여 복합(伏閤)상소를 벌였으며 이 때에도 모든 준비의 비용을 제공하였다.
포덕 35년(1894) 갑오(甲午)에는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이 일어나 백산을 점령하자 2세 교주 해월(海月) 최시형은 1차 봉기 시에는 어디까지나 정교(政敎)분리의 입장을 고수하여 무력항쟁을 거부하고 있었기에 해월을 중심으로 하는 북접(北接)과 전봉준(全琫準)의 남접(南接)과는 미묘한 분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임실의 경우 그 같은 입장을 초월하여 1894년 3월 20일 전봉준, 김개남 , 손화중 등 동학교인들이 무장에서 기포를 하였을 때 임실에서도 대접주 최봉성을 비롯하여 도접주, 접주 김신종, 이병춘, 김학원, 김영원, 최유하, 허신, 박경무 등이 동학교인들을 이끌고 1차로 기포하였으며 이해 7월 7일에는 임덕필, 양경보, 엄종성, 문길현, 이만화, 이용거, 한영태, 이병용, 곽사회, 한군정, 최봉항, 최봉구, 최동필, 박성근, 김교칠, 이종현, 이용수, 박정환, 최봉관, 최성필, 김경환, 우성오 등이 관내 동학교인들과 함께 동학혁명전투에 참여하였다.
당시 임실 및 남원의 상황에 대해 주한일본공사관 기록에는 “임실은 모두가 동학도이고 오수역도 또한 모두가 동학당에 가담하였다. 오수역에 들어가 동학당 5명을 붙잡았다. 임실에서 붙잡은 동학도도 7, 8명이었다. 이와 같이 한 개의 현이 모두 통틀어 동학도인 지방은 동학도가 역적임을 알지 못함으로 인민들이 취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따라서 민심을 바로잡기 위해 접주 5명을 죽임으로 해서 인민들은 비로소 동학에 가담한 것이 잘못이라고 깨닫게 된 것같다고 하여 이처럼 당시 임실과 남원은 동학교인의 세계였던 것이다.
‘구국항일(救國抗日)’이라는 기치하에 남북접(南北接)이 연합하여 공동전선을 펼쳐 이에 참여한 ‘접주(接主)’, ‘접사(接使)’들은 봉기하는 농민군과 규합하여 집강소(執綱所)를 임실읍에 설치하고 12계명(戒名)으로 민정(民政)까지 펼치고 15,000여 군(軍)이 동년 8월 동도대장(東徒大將) 전봉준(全琫準)과남원을 석권한 남원도접주(南原都接主) 김홍기[(金洪基, 최찬국의 사위로 최찬국으로부터 수도(受道)], 접주(接主) 유태홍(柳泰洪, 태인(泰仁)접주(接主) 김개남(金開南) 군(軍)과 합류하여 공주에서 일본군과 연합한 관군과 대전하다 패퇴하여 ‘최승우’, ‘최유하’, ‘김학원’, ‘김영원’, ‘한영태’, ‘최동필’ 등은 순창 회문산까지 패주하여 6년을 집거하며 숨어 지내다가 하산을 하였다.
또 포덕(布德) 45년(1904) 갑진(甲辰) 진보회(進步會)로 개혁운동에 동참하여 국정개혁 생활운동을 전개하여 임실 청웅면 남산리(홈도리)에서 500여 명이 삭발하는 데 주동하였고, 을사(乙巳, 1905) 12월 1일 동학(東學)이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게 되자 당시 전라도 두령 인물 중 임실 출신으로 ‘최승우(崔承雨)’, ‘김영원(金榮遠)’, ‘조석휴(趙錫烋)’, ‘이기동(李起東)’, ‘최유하(崔由河)’, ‘최봉관(崔鳳官)’, ‘허선(許善)’,‘박준승(朴準承)’, ‘김화일(金和一)’, ‘최여필(崔如弼)’, ‘최동필(崔東弼)’,‘우성오(禹成五)’ 등이 참여하여 전라도를 대표하고 있었다.
포덕 47년(1906) 병자 3월에 운암면 지천리에 교구를 설치하고 교구장에 최승우(崔承雨)선생을 임명하고 청웅면 향교리 성전마을에 교구를 설치하여 교구장에 박준승(朴準承)선생을 임명하여 임실에 교구가 2개였으나 포덕49(1908) 무신 3월에 2개 교구를 합하여 청웅면 양지리에 교구를 건립하여 교구장에 ‘최승우’가 임명되어 포교활동에 전념하였다.
제3세 교조 손병희(孫秉熙) 선생께서 일본 신호(神戶)에 도일 학생들에게 구국 정신 육성에 여념이 없던 차에 박인호(朴寅浩)로 하여금 강제로 일진회(一進會)와 합하게 되었다는 상세한 내용을 듣고 즉시 귀국하여 1905년 12월 1일 동학이 금일 ‘천도교(天道敎)’라고 만천하에 포고(布告)하고 교율(敎律)을 새로 정하였다.
과거 ‘접주(接主)’, ‘대정(大正)’, ‘중정(中正)’ 등 여러 가지 법을 폐지하고 ‘집강(執綱)’은 그대로 두고 ‘봉훈(奉訓, 현 信訓)’, ‘교훈(敎訓)’, ‘도훈(道訓)’, ‘도사(道師)’ 또는 ‘오의법(五疑法)’을 제정하였다. 오의법(五疑法)이란 ‘주문(呪文)’, ‘청수(淸水)’, ‘대월(待月)’, ‘성미(誠\米)’, ‘기도(祈禱\)’이다.
교조신원운동과 갑오동학농민운동 참여
1864(고종 원년)년 3월 교조 수운 최제우가 대구에서 효수형에 처형된 뒤, 동학은 2세 교주이신 해월 최시형에 의하여 지하에서 포교를 하였지만 그 교세는 급성장하였다. 1893년(고종 30년) 3월 동학교도 상당수가 서울로 올라가 박광호를 전봉준이 각 마을 동학집강소에 들려 궐기를 촉구한 사발통문 주모자를 가려내지못하도록 원둘레에 각자 서명하는 것이 사발통문이다
소두(疏頭)로 하여 ‘복합 상소’를 벌렸다. 이 ‘복합 상소’는 국왕의 효유로 해산하였으나 교인들이 계속하여 서울로 올라왔기 때문에 한때 서울의 인심이 흉흉하였다. 교도들은 일본인 공관을 포위하여 시위를 벌이면서 때로는 기독교 교회당에 괴서를 붙이고 척양 척왜를 외치며 국정의 자주 자립을 호소하였다. 이때 교도들의 뜻이 관철되지 않아 전국교도 1만여 명이 충남 보은에 모여 돌담장을 쌓고 ‘척양척왜창의’ 라는기치를 세우고 교조의 원한을 풀어 줄 것을 조정에 호소하는 한편 일본인을 국내에서 모조리 추방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주모자를 체포하게 하였다. 이에 격분한 교도들은 다시 보은에 2만여 명이 모여 조정의 탄압령에 대응책을 강구하였다. 한편 전봉준을 위시한 남접의 강경파는 실력행사를 주장하고 2세 교조 최시형이 이끄는 북접에서는 좀더 정세를 관망하자고 주장하니 양론이 대립되었다. 양론이 대립되고 있을 때 최봉성을 중심으로 하는 임실 지역의 동학교도들은 최시형의 북접 편에 기울어졌다.
2세 교조 최시형은 정교분리를 고수하여 무력항쟁을 거부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최시형이 이끄는 북접과 남접 사이에는 미묘한 대립과 분열양상이 있게 되었다. 충남 보은의 2만여 명의 회합은 곧 정부에 알려져 이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어윤중을 선무사로 파견하여 동학교도들을 효유하므로 교도들은 일단 해산 하였다.
그들은 해산에 앞서 일본인을 배척하는 것은 끝까지 버리지 않을 것을 강조하였다. 그것은 민족의 자주를 되찾자는 동학의 근본이념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고부의 전봉준은 남접의 대 접주의 한 사람으로 이듬해 정월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시달리다 못해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켰는데 이에 동학교도와 함께 동조하여 고부군수를 추방하고 동헌을 점령함으로써 동학농민운동 발단의 계기가 되었다.
이로부터 동학농민군은 정읍, 고창, 장성 등, 가는곳 마다 대승을 거두어 삽시간에 전남북 일대를수중에 넣게 되었다. 마침내 4월에는 전주성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이때까지만 해도 임실 지역의 교도들은 처음부터 최승우를 중심으로 온건한 북접에 속하였기 때문에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보다 먼저 1892(고종 29년) 11월 3일 전국의 교도들이 삼례 역에 모여 교조의 신원운동을 전개하려 할 때 임실 지역 교도대표로 이 회합에 참가한 사람들은 최승우, 김신종, 김영원, 김병옥, 최유하, 헌선, 조석휴, 황희영, 박경무, 이종근, 김학원 등이다. 이듬해 교인 대표들이 서울에 상경하여 왕에게 상소할 때 임실 지역의 교인 최승우, 김신종, 김영원, 조석휴, 이병춘, 허선, 한영태 등이 참여했다.
전봉준의 동학농민운동이 가열되고 이에 따른 조정의 동학에 대한 탄압이 극심하게 되자 남, 북접이 혼연일체가 되어 제폭구민의 대열에 뭉치게 되었다. 이때 기포한 임실의 지역대표 인물은 최찬국을 위시하여 도접주의 책임을 맡고 있던 최승우, 최유하, 김영원, 허선, 조석휴, 박경무 등이었다.
동학농민군은 전주성을 점령한 후 국제정세가 변하여 사대당의 요청에 의하여 일본군이 입국하여 동학농민군의 토벌에 참전하니 조정의 간당을 물리치고 일본인을 몰아내는 것이 도리어 청일 양국 군대를 불러들이는 결과가 된지라. 전봉준은 동학농민군을 일단 자진 해산해서 해산하였으나 조정의 간신들이 탐관오리로 가렴주구를 일삼으면 언제라도 재 궐기할 것을 조건부로 하였다.
이때 임실 지역에서 기포한 교인 대표는 최승우, 김영원, 최유하, 임덕필, 양경보, 엄종성, 문길현, 이만화. 이용거, 이병춘, 곽사회, 한군정, 한영태 등이었고, 접주로는 박성근, 김교필, 최동필, 이종현, 이용수, 박정환, 김병환 등이며 동몽사찰로는 우성오 등이다. 이들 각 접주 접사들은 농민들을 규합 통솔하여 임실읍에 집강소(지금의 군청과 같은 동학의 행정기구)를 설치하여 민정을 약 6개월간 집행하였다. 임실에 집강소를 처음 설치한 것은 1894년(고종31년) 7월 7일 이었다.
이 해 9월 전봉준이 재기하자 오수면 접주 김홍기는 태인 접주 김개남과 합세하여 1만여 대군을 편성하여 남원을 석권하고 남원 교룡산성에 은거하였다. 그들은 운봉으로 진격을 하려다가 여원치에서 박봉양이 이끄는 운봉의 민보군에게 크게 패하고 작전을 바꾸어 전주, 삼례, 논산을 거쳐 전봉준 군대와 합류,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일대접전을 전개하였으나 처참한 혈전 끝에 끝내 패전하여 혁명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보다 먼저 남원성의 싸움에서 김홍기는 포도대장 이응백에게 체포되어 참수형을 당하였다. 이밖에 최승우, 최유하, 김학원, 한영태, 김영원은 관군에 쫒겨 회문산으로 깊숙이 숨어 6년간을 지내야 했다
임실(任實)의 동학과 3·1운동
임실 삼화학교와 전주 창동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천도교 347교리 강소소장’, ‘교훈’, ‘훈도’ 등 요직을 맡아 진안, 전주, 전남 장성 등 여러 고을의 천도교 교구장을 차례로 역임한 임실의 김영원(金榮遠)은 배일(排日) 지하운동을 계속하면서 지금까지 지방(地方)에서만 구국항일(救國抗日) 운동을 벌여오다가 1918년 1월 서울로 상경(上京) 이제부터는 중앙요인(中央要人)들과 함께 지하운동을 함으로써 독립운동의 차원을 달리하였다.
그리하여 교우들 중 가장 인망이 높은 ‘오세창(吳世昌)’, ‘권동진(權東鎭)’, ‘나용환(羅龍換)’, ‘홍병기(洪秉箕)’ ‘홍기조(洪箕兆)’, ‘최린(崔麟)’ 제씨(諸氏)들과 천도교(天道敎) 중앙총부(中央總部)에서 날마다 밀의(密議)하고 선생의 문하생 ‘박준승(朴準承)’, ‘양한묵(梁漢黙)’과도 밀의 (密議)를 거듭하여 장차 거국적 민족궐기를 함에 있어 그에 파견할 민족대표(民族代表) 중(中) 천도교(天道敎) 측(側) 인선작업(人選作業)을하는 데 동지(同志)들이 밀회(密會)하던 장소는 서울교외(郊外) 우이동(牛耳洞) 소재 봉황각(鳳凰閣)과 도선사(道先寺)를 번갈아 사용해 왔다.
처음에는 제1차로 105인의 대표(代表)를 뽑았다가 그 다음 49인 그다음에 45인으로 최종 선발하여 전 국민 총궐기를 지도(指導)하기 위해 계획하였는데 때마침 고종(高宗)의 인산날을 기해 각계각층의 대표로 국민을 총 지도하자는 여망에 따라 조선 민족대표로 17인을 파견키로 하였다.
김영원 선생은 전기(前記) 여러 동지들과 밀회를 거듭하여 17인을 확정하였는데 이 작업은 1918년 8월말까지 끝마쳤다. 이 때 그의 나이 66세의고령이므로 문하생 ‘박준승’, ‘양한묵’ 2인을 17인 대표로 참여토록 하고 자신은 지방 책임을 맡아 그 해 9월초에 하향(下鄕) 전주부중(全州府中) 현(現) 고사동(高士洞)(임실교사에는 노송동으로 기록) 이군필(李君弼) 교우(敎友) 집에서 전북도내(全北道內) 천도교(天道敎) 간부회의를 거듭하였다.
이 때 참가 인사로는 전주에서 ‘김봉년(金奉年)’, ‘민영진(閔永軫)’, ‘천두만(千斗萬)’, ‘이병춘(李炳春)’ 순창(淳昌)에서 ‘우치홍(禹治洪)’, ‘차상갑(車祥甲)’ 익산의 ‘정용근(鄭容根)’ 남원에서 ‘유태홍(柳泰洪)’, ‘이기동(李起同)’, 금구(金溝)의 ‘김화일(金和日)’ 임실에서 ‘최승우(崔承雨)’, ‘한영태(韓永泰)’, ‘강계대(姜啓大)’, ‘박성근(朴成根)’, ‘우성오(禹成五)’ 이상 제씨(諸氏)들이었다.
이들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대성미(大誠\米)를 거출키로 하되 어디까지나 교인 각자의 생활정도에 따라 자발적 출연(出捐)을 하도록 하고 도내활동 조직상황을 수시로 손병희(孫秉熙) 교주(敎主)에게 보고하였다.
김영원(金榮遠)선생은 150만 도민(道民)들을 한 덩어리로 뭉쳐 거국적 민족운동을 위한 중대한 협의를 위해 1919년 2월 중순 최승우(崔承雨)와함께 상경하여 손병희(孫秉熙) 교주(敎主)를 비롯 ‘오세창(吳世昌)’, ‘권동진(權東鎭)’, ‘최린(崔麟)’, ‘박준승(朴準承)’, ‘양한묵(梁漢黙)’ 등 45인의 지도급 인사들과 우미동 ‘봉황각’에서① 거사일자 ② 거사 준비 방법 ③ 민중 동원 ④ 자금 거출 ⑤ 보안조치 ⑥ 거사 후 왜경과의 옥중(獄中) 투쟁 등등 중대 기밀사항을 최종 결의하고 곧 하향(下鄕)하여 동월 27일 운암면 지천리(전도실)에서 최승우(崔承雨), 김영원(金榮遠), 한영태(韓永泰) 등이 3․ 독립운동거사(獨立運\動擧事) 준비위원회를 개최하고 각 면책(面責)이나 각 부서(部署)를 조직하였다.
그 당시 부서는 봉화책(烽火責), 선서책(宣書責), 동원(動員) 및 연락책(連絡責) 3부로 정하여 3월 1일 자시(子時)에 봉화(烽火)로 신호하여 각 지방에 선언서를 부칠 것, 3월 2일 일제히 동원하여 각면 소재지에서 대한독립만세를 호창(呼唱)할 것을 결의하고 제1봉화(烽火)는 운암 국사봉, 제2봉화는 강진면 백련산, 제3봉화는 덕치면 회문산, 제4봉화는 삼계면 원통산, 제5봉화는 성수면 생암리, 제6봉화는 신덕면 치마산으로 정하여 봉화를 올리고 선언서며 동원까지 물샐틈없이 진행되어 마치 일반 군중들은 이제 곧바로 조국광복독립(祖國光復獨立)이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맹령(猛烈)히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군경합동(軍警合同)으로 경찰과 헌병들이 동원되어 그들의 총검하에 모두 일시 해산되었으나 그 후 6개월간 임실군 관내 각 면에서 계속 독립만세 호창(呼唱)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수백 명이 체포되고 4명이 옥사(獄死)하고 100여 명이 실형(實刑)을 받았다. 이 때 김영원(金榮遠) 씨는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종시(終始) 단독소행(單獨所行)이라 하며 정당한 우리나라 독립을 위함이나 당연지사(當然之事)라 하고 불굴(不屈)하매 극심한고문으로 불구(不救)의 몸이 되어 옥고(獄苦)를 치르다가 동년 8월 26일 사망하였다.
또한 한영태(韓永泰)는 당시 임실 교구장으로 3월 2일 체포되어 혹독한 신문을 당하면서도 모든 것은 본인의 단독행사라 주장하며 당시 조사관 경부(警府) ‘박용(朴龍)’을 향하여 “너는 삼천리강산 조선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냐? 조선 사람으로서 빼앗긴 내 나라를 찾겠다는 것은 정당지사(正當之事)라.” 하며 대통을 던져 머리를 때리면서 말하기를 “내가 너를 가르칠 때 그렇게 가르쳤느냐” 하고 호통을 치니 박용은 사제지간(師弟之間)이 되어 더 이상 조사를 못하고 전주로 이송하였다.
그러나 전주에 이송된 후에도 불굴(不屈)하고 시종일관(始終一貫) 조직일체(組織一切)를 부인(否認)하다가 3월 9일 자정(子正)을 기하여 혀를 깨물고 옷을 찢어 새끼를 꼬아 목을 매어 순절했다. ‘최봉상(崔鳳商)’, ‘허박(許樸)’ 역시 불굴(不屈)하고 끝까지 우리가 한일은 정당하다고 반항하다 혹독한 고문을 못이겨 옥중에서 순절하였다.
❏실형(實刑)을 당하신 분의 명단(名單)
강계대, 김일봉, 고택기, 최기현, 최종수, 최세철, 최영섭, 최병태, 최상학, 최영옥, 최원호, 성준섭, 최응삼, 최영열, 정평조, 박용식, 한기수, 한노수, 한도수, 한인석, 한일봉, 한정교, 이기섭, 이기송, 이강세, 이중혁, 이만의, 이영곤, 이윤의, 이주의, 이회열, 이용의, 이기우, 김용식, 하용봉, 허 업, 김종창, 허 섭, 오대환, 문명근, 박태업, 우성오, 김인식, 김구영, 한준석, 곽병민, 곽병희, 이동열, 오병용, 엄길영, 문성술, 박창준, 박성근, 이성의, 황성학, 라학용, 송귀남, 김제룡, 최극삼, 송성학, 황성기, 정기태, 박판덕,
한편 1938년도 천도교 임실교구의 현황을 보면 임실군에는 255명이 있었으며 지역별로는 청웅면이 옥전, 향교, 구고, 옥석리에 45명이었으며, 운암면 마암리와 입석리에 54명, 임실면 이도, 현곡, 성가, 갈마리에 27명, 신덕면 지장, 오궁리에 15명, 신평면 가덕, 창인, 원천리에 69명, 덕치면 사곡리에 4명을 비롯하여 강진면의 경우는 부흥리 4명, 학석리 10명, 방현리 17명, 옥정리 4명으로 나타나있다.
이때 개인별로 동학에 가담한 강진면의 동학교도들을 기록으로 아래와 같이 정리하였다.
안 경 열 (安敬烈) 도호는 낙암(樂庵) 교훈 종법사 강진면 부흥리 출신이다. 갑진 기미무인 3대 운동에 적극 활동하고 기미 3․운동 당시 각처에 독립선언서를 붙이고 회문산 봉화책임자로 지정을 받아 그 책임을 다하였으며. 무인 배일운동에도 적극 활동하여 왜경에게 수차 신문을 당하였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일평생을 구국운동과 종교발전에 전력을 다하였다.
임 재 수 (林再洙) 선생은 나주임씨(羅州林氏) 25세 손으로 본명은 재수(再洙)이고 字는 여경(汝敬)이다. 1840년 5월 10일 임실군 강진면 방현리 457번지에서 출생하였으며, 54세가 되던 1894년 3월 25일 전라우도 일대의 농민군이 참여하여 고부군 백산에서 봉기할 때를 같이하여 임실군 동학농민군이 같은 날 운암면 지천리에서 기포할 때 참여를 하였다. 임실읍내에 도접주 최승우 선생이 세운 임실 도소에서 폐정을 바로잡는 집강소 일을 도우며 폐정개혁과 동학의 포덕활동에 힘썼으며, 8월 25일 남원에서 김개남 장군이 주도한 동학농민 대회에서 교인들을 안전하게 안내 및 인솔하였다.
10월 중순 김개남 장군이 남원을 떠나자 남원을 지키고 있다가 11월 남원 운봉 전투에 참여하여 패한 뒤 다시 남원 운봉 민보군이 남원을 공격하여 올 때 남원을 지키기 위하여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완전히 패하여 목숨만 겨우 부지한 채 고향으로 돌아와 동학군의 토벌을 피해 덕치면 회문산을 중심으로 6여 년간을 은신하다가 동학농민군에 대한 소탕령이 잠잠해지자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동학과 천도교화를 위해 활동하였다. 고손자인 임종수는 임실군 청웅면 구고리 530번지에서 살고 있다.
임 판 산(林判山) 임재수 선생의 손자로 무인멸왜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그 공이 지대하다.
조 영 수 (趙英洙) 도호는 영암(英菴)이며 교훈도사(敎訓道師)이다. 강진면 옥정리 출신으로 갑진, 기미, 무인 3대 운동에 적극 동참하였고 기미 3․독립만세운동 시 강진면 옥정리, 문방리, 백암리 등지를 돌아다니며 독립선언서를 붙였으며 천도교 포덕 사업과 구국운동에 일평생을 헌신한 특신자이다.
노 인 섭 (魯仁燮) 도호는 인암(仁菴)이며 봉훈도사이다. 강진면 방현리 출신으로 기미, 무인 양대 운동에 적극 동참하여 그 공이 지대하고 천도교 포덕 사업에 전력을 다하여 그 공이 지대하며 특신자이다.
노 병 철 (魯柄轍) 선생은 1859년 강진면 방현리 493번지에 태어났으며 본관은 강화(江華)이다. 동학에 입교한 후 35세인 1894년 3월 25일 전라우도 일대의 농민군이 참여하여 고부군 백산에서 봉기할 때를 같이하여 임실군 동학농민군이 같은 날 운암면 지천리에서 기포할 때 같은 마을 임재수와 함께 참여하였다. 임실읍내에 도접주 최승우 선생이 세운 임실 도소에서 폐정을 바로잡는 집강소 일을 도우며 폐정개혁과 동학의 포덕활동에 힘을 썼다.
8월 25일 남원에서 김개남 장군이 주도한 동학농민대회에 임재수와 함께 교인들을 안전하게 안내와 인솔하여 참가했으며, 10월 중순 김개남 장군이 남원을 떠나자 남원을 지키고 있다가 11월 남원 운봉 전투에 참여하여 패한 뒤 다시 남원 운봉 민보군이 남원을 공격하여 올 때 남원을 지키기 위하여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완전히 패하여 목숨만 겨우 부지한 채 고향으로 돌아와 동학군의 토벌을 피해 덕치면 회문산을 중심으로 6년여를 은신하였다.
동학농민군의 소탕령이 잠잠해지자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동학과 천도교화를 위해 활동하는데, 1981년 2월에 발행된 천도교 임실교사에는 노용섭(魯龍燮)이라는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노용섭은 도호는 용암(龍菴)이며 봉훈도사 전교사이다.” 강진면 방현리 출신으로 기미 3․만세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방현, 필봉, 학석리 일대에 붙였고 무인배일운동 당시에도 각 교 댁을 방문하여 적극 활동하고 일평생을 천도교 포덕 사업과 구국운동에 전력을 다하셨으며 1922년에 환원하셨다. 손자인 노현식은 임실군 강진면 방현리 324번지에서 살고 있다.
정 성 권 (鄭成權) 도호는 권암(權菴)이며 신훈도사(信訓道師)이다. 강진면 학석리 출신으로 갑오 갑진 기미 3대 운동에 전력하여 활동하고 천도교화 발전사업에 일평생을 헌신한 특신자이다.
정 판 석(鄭判錫) 도호는 판암(判菴)이며 신훈(信訓)이다. 강진면 학석리 출신으로 기미 무인 양대 운동과 구국사업에 그 공이 지대하고 천도교 발전사업에 전력한 특신자 이다.
박 경 무 (朴京武) 선생은 함양박씨 69세 손으로 본명은 호적상 혁근(爀根)이고 字는 정모(正模)이며 호는 경은(耕隱)이고 동학에 참여 당시는 경무(敬武)로 불렀다. 1862년 1월 18일 강진면 백련리 837번지에서 출생하였으며 32세가 되던 1894년 3월 25일 전라우도 일대의 농민군이 참여하여 고부군 백산에서 봉기할 때를 같이하여 임실군 동학농민군이 같은 날 운암면 지천리에서 기포할 때 참여를 하였다.
임실읍내에 도접주 최승우 선생이 세운 임실 도소에서 폐정을 바로잡는 집강소 일을 도우며 폐정개혁과 동학의 포덕활동에 힘썼으며, 8월 25일 남원에서 김개남 장군이 주도한 동학농민 대회에서 이광의, 이종인 등과 함께 교인들을 안전하게 안내 및 인솔하였다. 10월 중순 김개남 장군이 남원을 떠나자 남원을 지키고 있다가 11월 남원 운봉 전투에 참여하여 패한 뒤 다시 남원 운봉 민보군이 남원을 공격하여 올 때 남원을 지키기 위하여 사력을 다해 싸웠다.
그러나 완전히 패하여 목숨만 겨우 부지한 채 고향으로 돌아와 동학군의 토벌을 피해 청웅면 향교리 백이산을 중심으로 6여 년간을 은신하다가 동학농민군에 대한 소탕령이 잠잠해지자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동학과 천도교화를 위해 활동하였는데, 1981년 2월에 발행된 천도교 임실교사에도 박경무(朴敬武)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어 있다. 증손자인 박정진은 임실군 청웅면 구고리 211-2번지에 살고 있다.
박 노 철 (朴魯哲) 도호는 월암(月菴)이며 법도사(法道師)이다. 강진면 출신으로 갑진 기미 양대 운동에 맹렬히 활동하고 일평생을 천도교화 발전에 불고가사하고 헌신한 독신자(篤信者)이다.
이 백 우 (李伯雨) 본명은 백우(伯雨)이며 이명은 인화(仁化), 字는 종삼(宗三)으로 정하여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시어 활동을 하시었으며 도훈(道訓)이다. 본관은 경주이다. 선생께서는 1865년 8월 4일 강진면 학석리에서 출생하여 29세의 나이인 1894년 3월 25일 전라우도 일대의 농민군이 참여하여 고부군 백산에서 봉기할 때를 같이하여 임실군 동학농민군이 같은 날 운암면 지천리에서 기포할 때 친 아우인 헌우와 같은 마을에 사는 박순만과 박용운(朴龍雲) 형제 그리고 이기완 등 다섯 분이 함께 참여하였다.
임실읍내에 도접주 최승우 선생이 세운 임실 도소에서 폐정을 바로잡는 집강소일을 도우며 폐정개혁과 동학의 포덕활동에 힘을 썼다. 8월 25일 남원에서 김개남 장군이 주도한 동학농민대회에 친아우인 헌우와 같은 마을 박순만과 박용운 형제 그리고 이기완과 함께 교인들을 안전하게 안내와 인솔하여 참가했으며, 10월 중순 김개남 장군이 남원을 떠나자 남원을 지키고 있다가 11월 남원 운봉 전투에 참여하여 패한 뒤 다시 남원 운봉 민보군이 남원을 공격하여 올 때 남원을 지키기 위하여 사력을 다해싸웠지만 완전히 패하여 목숨만 겨우 부지한 채 고향으로 돌아와 동학군의 토벌을 피해 덕치면 회문산을 중심으로 6년여를 은신하였다.
동학농민군의 소탕이 잠잠해지자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동학과 천도교화를 위해 활동하였는데, 1981년 2월에 발행된 천도교 임실교사에는 이백우(李白雨)라는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이백우 도호 백암(白庵), 도훈(道訓) 강진면 학석리 갑오 갑진 기미 3대 운동에 적극 활동하고 3․운동에 그 공이 지대하고, 천도교 발전에 전력을 다한 특신자"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손자인 이맹학은 임실군 청웅면 석두리 364번지에서 살고 있다.
이 준 상 (李俊相) 도호는 준암(俊菴)이다. 강진면 학석리 출신으로 갑진 기미 양대 운동에 그 공적이 많고 일평생을 천도교 신앙에 불고가사하고 헌신한 독신자이다.
이 희 우(李喜雨) 도호는 희암(희암)이며 신훈도사(신훈도사)이다. 강진면 학석리 출신으로 갑진 기미 무인 3대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그 공이 지대하고 천도교 사업에 전력을 다한 특신자이다.
이 헌 우 (李憲雨) 본명은 헌우(憲雨)이며 이명은 창화(昌化)와 종기(宗奇)로 정하여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시어 활동을 하시었으며 교훈도사(敎訓道師)이다. 본관은 경주이다. 선생께서는 1875년 8월 28일 강진면 학석리에서 출생하여 19세의 나이인 1894년 3월 25일 전라우도 일대의 농민군이 참여하여 고부군 백산에서 봉기할 때를 같이하여 임실군 동학농민군이 같은 날 운암면 지천리에서 기포할 때 같은 마을에 사는 박순만과 박용운(朴龍雲)형제 그리고 이기환, 친형인 이백우 등 다섯 분이 함께 참여하였다.
임실읍내에 도접주 최승우 선생이 세운 임실 도소에서 폐정을 바로잡는 집강소 일을 도우며 폐정개혁과 동학의 포덕활동에 힘을 썼다. 8월 25일 남원에서 김개남 장군이 주도한 동학농민대회에 친형인 백우와 같은 마을 박순만과 박용운 형제 그리고 이기완과 함께 교인들을 안전하게 안내와 인솔하여 참가했으며, 10월 중순 김개남 장군이 남원을 떠나자 남원을 지키고 있다가 11월 남원 운봉 전투에 참여하여 패한 뒤다시 남원 운봉 민보군이 남원을 공격하여 올 때 남원을 지키기 위하여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완전히 패하여 목숨만 겨우 부지한 채 고향으로 돌아와 동학군의 토벌을 피해 덕치면 회문산을 중심으로 6년여를 은신하였다.
동학농민군의 소탕이 잠잠해지자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동학과 천도교화를 위해 활동하였는데, 1981년 2월에 발행된 천도교 임실교사에는 이창화(李昌化)라는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이창화 도호 백암(伯庵), 도사(道師) 강진면 학석리 갑오 갑진 기미 3대 운동에적극 활동하고 3․운동 시 강진면 일원에 독립선언서를 붙이고 면민을 동원하여 만세호창을 하였고 일평생을 천도교화 발전에 전력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들인 이우상(李禹相) 역시 천도교에 입도하여 도호는 상암(相庵)이며 교훈종법사로 신평면 용암리에서 활발한 교화활동과 무인 배일운동시 적극 활동하고 왜경에 수차 신문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왜경의 눈을 피하여 구국운동과 벌여왔으며, 천도교 교화발전사업에 일평생을 불고 가사하고 전력을 다하였다고 한다. 손자인 이형규는 현재 신평면 용암리 에서 조부와 부친의 유업을 받아 천도교 교화사업에 전념하고 있다.
이 기 환 (李起煥) 본명은 기완(起完)이며 字는 사여(士汝) 기환(起煥), 기한(起漢)은 참여 이름이고 족보에는 기수(起壽)로 되어 있다. 선생께서는 1872년 2월 23일 강진면 학석리에서 출생하여 22세의 나이인 1894년 3월 25일 전라우도 일대의 농민군이 참여하여 고부군 백산에서 봉기할 때를 같이하여 임실군 동학농민군이 같은 날 운암면 지천리에서 기포할 때 같은 마을 박순만, 박용운 형제와 이백우, 이헌우 등 다섯 분이 함께 참여하였다.
동학농민군의 소탕령이 잠잠해지자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동학과 천도교화를 위해 활동하였는데, 1981년 2월에 발행된 천도교 임실교사에는 이기환(李起煥)이라는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이기환(李起煥) 도호 한암(漢庵), 교훈도법사(敎訓道法師道) 갑진, 기미,무인 3대 운동에 적극 활동하고 천도교 발전에 전력을 다한 특신자"라고 기록되어있다. 그의 손자인 이성재는 임실군 청웅면 석두리에서 살고있다.
손 복 만 (孫福萬) 도호는 영암(榮菴)이며 신훈도사(信訓道師)이다. 강진면 출신으로 기미 무인 양대 운동에 적극 활동하여 그 공이 지대하고 일평생을 천도교사업에 불고가사하고 헌신한 독신자이다.
손 용 만 (孫龍萬) 도호는 용암(龍菴)이며 도사(道師)이다. 강진면 출신으로 기미 무인 양대 운동에 적극 노력하여 그 공이 지대하고 종교사업에 일평생을 불고가사하고 헌신하였다.
정 성 만 (鄭成萬) 도호는 신암(信菴)이며 도사(道師)이다. 강진면 출신으로 기미 무인 양대 운동에 적극 활동하여 구국운동과 종교사업에 일평생을 불고가사하고 헌신한 특신자이다.
이 우 상 (李禹相) 선생께서는 강진면 학석리에서 출생하였으나 신평면 용암리에 거주지를 옮겨 살았으며 천도교에 입도한 후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도호는상암(相庵)이며 교훈종법사로 활발한 교화활동과 무인 배일운동 시 적극 활동하고 왜경에 수차 신문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왜경의 눈을 피하여 구국운동과 천도교사업을 벌여왔으며, 포덕 111(1970)년 경술에 천도교 임실교구 제 30대 교구장을 역임하셨으며, 천도교 교화발전사업에 일평생을 불고가사하고 전력을 다하였다. 손자인 이형규는 현재 신평면 용암리에서 조부와 부친의 유업을 받아 천도교 교화사업과 농사일에 전념하고 있다.
손 형 순 (孫炯順) 도호는 형암(炯菴)이며 신훈(信訓)이고 강진면 학석리 출신이다. 기미, 무인 양대 운동에 그 공이 지대하고 일평생을 구국운동과 천도교 교화발전사업에 헌신한 독신자이다.
이 기 운 (李起雲) 도호는 운암(雲菴)이며 봉훈도사(奉訓道師)이고 강진면 학석리 출신이다. 갑진, 기미, 무인 3대 운동에 그 공이 지대하고 일평생을 천도교 포덕사업과 교화발전사업에 불고가사하고 헌신하였다.
박 순 만 (朴順萬) 일명(一名) 성래(聖}來)라고 하며 字는 국당(國瑭)이며 호는 운담(雲潭), 도호는 상암(常菴)이고 신훈법도사(神訓法道師)이다. 선생께서는 1851년 9월 23일 강진면 학석리 4번지에서 본관은 밀양으로 출생하여 43세의 나이인 1894년 3월 25일 전라우도 일대의 농민군이 참여하여 고부군 백산에서 봉기할 때를 같이하여 임실군 동학농민군이 같은 날 운암면 지천리에서 기포할 때 아우인 박용운(朴龍雲)과 같은 마을의 이백우 이헌우 형제, 이기완 등 다섯 분이 함께 참여하였다.
임실읍내에 도접주 최승우 선생이 세운 임실 도소에서 폐정을 바로잡는 집강소 일을 도우며 폐정개혁과 동학의 포덕활동에 힘을 썼다. 8월 25일 남원에서 김개남 장군이 주도한 동학농민대회에 친형인 순만과 같은 마을 이백우 이헌우 이기완과 함께 교인들을 안전하게 안내와 인솔하여 참가했으며, 10월 중순 김개남 장군이 남원을 떠나자 남원을 지키고 있다가 11월 남원 운봉 전투에 참여하여 패한 뒤 다시 남원 운봉 민보군이 남원을 공격하여 올 때 남원을 지키기 위하여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완전히 패하여 목숨만 겨우 부지한 채 고향으로 돌아와 동학군의 토벌을 피해 덕치면 회문산을 중심으로 6년여를 은신 하였다.
동학농민군의 소탕이 잠잠해지자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동학과 천도교화를 위해 활동하였는데, 1981년 2월에 발행된 천도교 임실교사“에는 갑오 갑진 기미 무인 4대 운동에 적극 활동하여 그 공이 지대하고 일평생을 불고가사하고 구국운동과 천도교 포덕사업에 전력하였다고 적고 있다. 갑진 기미 양대 운동에 적극 활동하고 일평생을 구국운동과 천도교 교화사업에 불고가사하고 헌신한 특신자이다. 라고 적혀있으며, 부친 노철(魯哲) 역시 천도교에 입도하여 활발한 교화활동을 벌여왔다고 전하고 있다. 손자인 박기상(朴起相)은 현재 임실군 청웅면 구고리 416번지에서 살고 있다.
박순만 선생의 비화 남원 운봉전투에서 패하여 고향인 강진면 학석리 강대동에서 피신하던 중 1895년 1월 15일경 강진 주재 왜경 2명에게 순만과 용운은 체포를 당하여 상 율치 마을에 끌려가 그 곳의 소수 주민을 모아놓고 두 형제를 멍석말이를 하여 심한 구타(매질과 고문)를 하므로 실신한 형제를보고 불에 태워 죽이려 장작더미에 올려놓아 불을 지른 후 왜경은 퇴각을 하였다고 한다.
이를 주민들이 발견하고 불을 진화하였으며, 다행히 심한 부상만 당하고 목숨은 건졌다고 한다. 아마 마을 주민들이 없었으면 죽었다고 전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당시 순창군의 동학 지도자 장승희 선생이 이끄는 동학도가 있어 왜경은 강진 주재소로 도망을 하였다고 한다.
강대동에는 순만과 조카인 노봉 선생이 항시 총을 휴대하고 있었으며 왜경은 총을 압수하려고 누차 수색을 하였지만 실패를 거듭하였는데 노봉 선생은 총을 휴대하고 다니다가 1898년 2월 6일 오수면 주천리 주막집에서 체포되어 현장에서 총살형을 당하였고 순만 선생은 강대동에서 1898년 2월 말 총을 빼앗아간 후에 왜경이 강진에서 철수를 하였다고 한다. 기미년에는 율치 마을에서 정선권 선생과 함께 주민들을 모아놓고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후손 박종호 자료제공)
박 용 운 (朴龍雲) 일명(一名) 학래(鶴來)라고 하며 字는 국당(國瑭)이다. 호는 운담(雲潭), 도호는 상암(常菴)이고 신훈법도사(神訓法道師)이다. 선생께서는 1851년 9월 23일 강진면 학석리 4번지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밀양이다. 43세의 나이인 1894년 3월 25일 전라우도 일대의 농민군이 참여하여 고부군 백산에서 봉기할 때 같이하였으며 임실군 동학농민군이 같은 날 운암면 지천리에서 기포할 대 아우인 박용운(朴龍雲)과 같은 마을의 이백우, 이헌우 형제, 이기완 등 다섯 분이 함께 참여하였다.
4월 7일 황토재 전투와 4월 23일 장성 황룡천 전투에 참여한 뒤 4월 27일(양력 5월 31일)에는 전주성에 입성하여 전투에 참여하였다. 6월 중순경 임실읍내에 도접주 최승우 선생이 세운 임실 집강소(1897년 7월 7일 세움, 지금의 군청과 같은 동학의 행정기구임)에서 폐정을 바로잡는 일을 도우며 폐정개혁과 동학의 포덕활동에 힘을 썼다. 7월 15일과 8월 25일 두 차례에 걸쳐 남원에서 김개남 장군이 주도한 동학농민대회에 친형인 순만과 같은 마을 이백우, 이헌우, 이기완과 함께 교인들을 안전하게 안내와 인솔하여 참가했다.
10월 중순 김개남 장군이 남원을 떠나자 남원을 지키고 있다가 11월 14일의 남원 운봉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패한 뒤 다시 11월 28일 남원 운봉 민보군이 남원을 공격하여 올 때 남원을 지키기 위하여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완전히 패하여 목숨만 겨우 부지한 채 고향으로 돌아와 동학군의 토벌을 피해 덕치면 화문산을 중심으로 6년여를 은신하였다. 농민군의 소탕이 잠잠해지자 고향으로 돌아와 1905년 동학이 천도교로 개칭되면서 다시 천도교를 위해 활동하였다.
1981년 2월에 발행된 「천도교 임실교사」에는 갑오, 갑진, 기미, 무인 4대 운동에 적극 활동하여 그 공이 지대하고 일평생을 불고가사하고 구국운동과 천도교 포덕사업에 전력하였다고 적고 있다. 갑진, 기미 양대 운동에 적극 활동하고 일평을 구국운동과 천도교 교화사업에 불고가사하고 헌신한 특신자이다 라고 적혀 있으며, 아들 노철(魯哲) 역시 천도교에 입도하여 활발한 교화활동을 벌여왔다고 전하고 있다.
박 상 래 (朴相來) 도호는 상암(相菴)이고 도법사(法道師)이며 강진면 학석리 출신이다. 갑오, 갑진, 기미 3대 운동에 그 공이 지대하고 일평생을 구국운동과 천도교 교화사업에 헌신한 독신자이다.
정 판 식 (鄭判植) 도호는 판암(判菴)이며 신훈도사(信訓道師)이다. 강진면 출신으로 기미 무인 양대 운동에 그 공이 지대하고 천도교화사업에 일평생을 불고가사하고 헌신한 특신자 이다.
이 종 업(李鍾業) 강진면 학석리에서 출생, 갑진 기미 양대 운동에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기여한 공이 크며 일평생을 천도교 발전과 구국운동에 헌신하였다.
조 병 선 강진면 갈담리 출신으로 기미 무인 양대 운동에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기여한 공이 크며 일평생을 천도교 발전과 구국운동에 헌신하였다.
박 동 래 강진면 학석리 출신으로 갑오 갑진 양대 운동에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기여한 공이 크며 일평생을 천도교 발전과 구국운동에 헌신하였다.
박 학 래 강진면 학석리 출신으로 갑오 갑진 양대 운동에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기여한 공이 크며 일평생을 천도교 발전과 구국운동에 헌신하였다.
우 상 선 강진면 갈담리 출신으로 갑오 갑진 기미 3대 운동에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기여한 공이 크며 일평생을 천도교 발전과 구국운동에 헌신하였다.
최 경 선 강진면 갈담리 구의실 출신으로 갑오동학 운동에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기여한 공이 크며 일평생을 천도교 발전과 구국운동에 헌신하였다.
오 순 오 강진면 갈담리 출신으로 갑오 갑진 기미 3대 운동에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기여한 공이 크며 일평생을 천도교 발전과 구국운동에 헌신하였다.
강진의 천주교 문화
임실군에 천주교는 1882년부터 일정한 지역의 교회를 담당하면서부터 신도들의 집단 거주지인 교우촌을 방문하여 신앙을 지도하고 성사를 집전한 결과를 일정한 양식으로 작성하여 교구본부에 보고한 교세 통계표 가운데 임실지역에는 1913년까지 15개의 공소가 설립되었다. 임실의 15개 공소중 첫 번째 공소는 운암면 청운리 거뜸이(거둔이)공소로 1882년에 설립되었다. 이곳의 신자수는 1883년에는 75명이었다가 1886년에는 64명, 1890년에는 38명으로 줄었다. 이웃하고 있는 순창 정읍 완주군의 산간지역에 일찍이 천주교 신자들이 거주했음을 고려할 때 박해를 피하여 안전지대를 찾아온 신자들이 공동체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임실지역의 두 번째 공소는 1866년 병인박해 때 김난식과 그의 당질인 김현채가 피신하여 들어와 교우촌을 형성한 강진면 용수리 회문산 공소로 1884년에 설립되었다. 리우빌 신부가 1884년에 작성한 교세통계표에 처음으로 나오는 회문산 공소의 신자수는 1884년 35명이었고 1889년에는 48명, 1894년에는 81명이었다. 베르모렐 신부는 1888년과 1889년에 작성한 교세통계표에서 회문산 공소에 대하여 신부가 거주할만한 공소로 회장 김 토마스는 착한 사람이고 신자들은 열심히 하였다고 평했다.
또한 회문산 자락의 가리점 골짜기에는 1893년에 먹구니 공소가 추가로 설립되었다. 죠조 신부가1893년 작성한 교세 통계표에 처음으로 나오는 먹구니 공소의 신자수는 1893년 17명이었고 1895년 35명, 1899년 36명이었다. 그러나 먹구니 공소는 1900년 이후로 회문산 공소는 1901년 이후로 교세 통계표에 나오지 않는다. 이는 신앙의 자유가 진전됨에 따라 먹구니와 회문산 공소 신자들이 살기가 좋은 곳을 찾아 문수동, 평내, 능교리 등지로 이사를 갔기 때문으로 본다.
아울러 강진지역에는 1902년에 문방리 수박매에 공소가 다시 추가로 설립되었다. 빼네 신부가 1902년 작성한 교세 통계표에 처음으로 나오는 수박매 공소의 신자수는 1902년 14명, 1903년에는 26명이었다. 그러나 수박매 공소는 1909년 이후로 교세 통계표에 나오지 않는다. 역시 신앙의 자유가 진전됨에 따라 수박매 공소의 신자들이 살기가 좋은 곳으로 옮겨갔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임실군에 세 번째 공소는 오수면 대명리에 1885년에 세워졌으며, 네 번째 공소는 관촌면 방수리 방골 공소로 1890년에 세워졌다. 1897년에는 다섯 번째로 신전리 공소가 세워졌고, 여섯 번째는 1898년 신덕면 조월리 효공동 공소가 세워졌다. 일곱 번째는 1901년 월성리 쑥재에 여덟 번째로는 1900년 성수면 성수리 공소, 1901년 아홉 번째로는 신평면 원천리에, 그 후 임실군의 공소는 1913년에 열 다섯 번 째로 임실읍 두곡리에 세워지게 되었다.
한편 강진면 현재의 천주교 공소는 1962년에 갈담리 현재의 터미널 부근에 있었는데 여건이 좋지 않아 현재의 곳으로 옮겨 세움으로서 천주교의 교세를 이어가고 있다.
강진 공소는 1956년도쯤 삼례가 고향인 김한우씨 라는 분이 강진 금융조합에 근무를 했었는데 가족 모두가 천주교 신자로서 가족과 주민들이 저녁마다 모여서 덕치공소 전교회장 김수명(바오로)의 지도로 기도를 하고 지냈다고 한다. 그때 당시는 임실성당도 전주 전동성당이 관할을 했었다고 한다. 그때는 구호물자를 가져다주고 했었는데 그 뒤 1960년대에는 박병요 회장 중심으로 예비신자 20여명을 모아 함께 흙벽돌을 찍고 여기저기서 지원을 받아 신축을 준비하였다. 최길석, 이종엽, 박종철, 이런 사람들이 학교를 다닐 때 나무틀에다가 논에서 흙을 넣고 벽돌을 찍었다고 한다.
1961년 박성운(베네딕도) 신부의 주관으로 신자 30여명이 힘을 모아 70평정도의 공소를 신축하였다. 그 후 1980년 신자수 감소로 공소건물을 매각하였으며 1984년에는 용수리 가리점에사는 신자 박병주 회장을 중심으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였고 주일 예배를 임실성당으로 다녔다. 이를 본 익산 창인동 성당 사목회장이었던 지문홍(미카엘)께서 옥정호에 낚시를 왔다가 주일에 임실까지 미사를 보러가는 것을 보고 부지 300평을 봉헌하였다. 1991년에는 박규식(요한)회장으로 하여금 성우회를 창설하였으며 강진공소 신자 45명이 미리내 성지로 성지순례를 다녀오기도 하였다.
1998년에는 오정수(베네딕도) 공소회장이 취임하였고 2005년에는 김만수(요셉) 회장이 취임하였다. 2010년 12월 3일 지문홍(미카엘)회장이 봉한한 부지 300평과 이재권 성우회총무 소유(현공소부지)를 교환하였으며 김만수 회장과 총무, 신자, 방의성(베드로)신부, 사목회장 노재진(사도요한), 전 신자 합심으로 축성을 하고 유장훈(몬시뇰) 신부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올렸음. 2011년에는 이상윤 회장이 취임을 하고 2016년에는 박규식 회장이 취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의 터미널 자리에 세웠던 건물이 공소건물이었는데 그 당시 신자가 줄어드니 임실성당에서 강진공소건물을 팔아서 공원묘지를 조성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고 한다.
강진의 기독교 문화
갈담마을 갈담교회
갈담 교회는 강진면 호국로 49 (갈담리 308번지)에 자리 잡고 있다. 갈담교회는 1922년 미국 남장로회 소속의 윈(Winn Samuel Dwight : 위인사, 韋仁仕)선교사가 김석조 장로를 파송하여 교회를 개척하였다. 1924년 12월 15일 윈(위인사)선교사가 초가3칸 주택을 구입하여 강성진 남궁선 이봉의씨가 모여 예배를 드림으로서 갈담 교회가 창립되었다. 1927년에는 엄길영씨를 순회전도사로 시무케 한 후 1932년 4월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1932년 봄에는 갈담리 산 300번지를 매입하여 예배 처소를 마련하고 예배를 드렸으며 1934년 5월에는 당회장인 윈(위인사)선교사가 강성진씨를 영수로 임명하였고 본 교회가 원래 주택용 건물로 협소하여 이를 맥각 처분하였으며 갈담리 산 300번지에 대지를 구입하여 정지 작업을 하고 선교부 보조와 성도들의 헌금으로 목조주택 8칸 한 채를 헌당하였다. 1939년 9월에는 윈(위인사) 선교사가 신사참배를 함으로서 문제가 되어 미국으로 추방당하고 교회는 폐쇄되었다. 엄길영 전도사도 이때 사임을 하였다.
그러나 1946년 조요섭 선교사가 임실지역 담당 선교사로 부임하면서 청웅교회, 강진교회 등을 순회하면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1947년에는 인돈 선교사가 당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49년 가을 흩어진 교인들이 다시모여 강진면 산업조합을 빌려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갈담교회는 그동안 선교사의 체제로 운영하면서 전도사와 강도사 체제로 운영하다가 1959. 10월 오원근 목사가 부임함으로서 목사체제로 운영하였다.
이때부터 오원근 목사체제로 운영하다가 1960년 4월 오원근 목사가 사임함으로서 다시 전도사와 강도사 체제로 운영 중에 갈담 교회는 신자들이 분리되어 강진교회라 칭하고 1960년 5월 300번지 대지 50평에 건평 18평의 예배당을 신축함으로서 사실상 「강진교회」로 명명하여 운영하게 되었다. 그 후 갈담 교회는 강진교회가 분리되어 나간 후 1978년 4월 17일 갈담리 308번지 대지 353평을 구입하여 1979년 4월 신축 기공 예배를 드림으로서 오늘에 갈담교회가 운영되었고 2017년 2월 12일 최철기 목사가 부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갈담교회 연혁
1922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위인스 선교사가 갈담리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하다. 1924년 12월15일 위인스 선교사가 강성진 주택에서 강성진 남궁선 이봉의씨와 함께 예배드림으로 갈담교회가 시작되다. 1927년 위인스 목사의 조사로 엄길영씨를 갈담교회 순회 전도사로 시무케 하다.(1년) 1931년 4월 엄길영 전도사 부임(8년 시무) 1932년 봄에 초가삼간 1동을 빌려 예배 드리다가 교회 건물로 매각하다. 갈담리 300번지 대지에 동년 가을 목조8간 1동을 건축하고 종을 달고 예배 드리다. 1950년 3월 박조양 전도사 부임 1950년 박조양 전도사 사임 1952년 봄 박석기 전도사 부임 1953년 박석기 전도사 사임 1958년 4월 고영근 전도인으로 부임 1959년 10월 고영근전도사 사임 1959년 10월 오원근 목사 부임 1959년 12월5일 엄길영 장로 장립(기념으로 성찬기 기증) 1960년 4월 오원근 목사 사임 1960년 3월 이의정 전도사 부임 1962년 이의정 전도사 사임 1960년 5월 300번지 대지 50평에 건평 18평 예배당 신축함으로서 갈담 교회가 강진교회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름 1970년 7월 이호규 전도사 부임 1971년 1월 이호규 전도사 사임 1971년 1월 이재순 전도사 부임 1971년 6월 이재순 전도사 사임 1973년 2월 장상봉 전도사 부임 1974년 2월 장상봉 전도사 사임 1975년 2월 이양노 전도사 부임 1976년 2월 이양노 전도사 사임 1975년 3월6일 엄주영 장로 장립 송옥순 권사 취임 1977년 3월 최귀철 강도사 부임 1979년 최귀철 강도사 사임 1978년 4월17일 308번지 대지 353평 구입 1979년 4월 이진용 강도사 부임 1980년 10월 이진용 목사 사임 1979년 4월 교회당 신축 기공 예배드리다. 1980년 박용조 전도사 부임 1981년 5월 강인구 목사 부임 1986년 5월 강인구 목사 사임 1986년 5월14일 임남기 목사 부임 1989년12월27일 임남기 목사 사임 1989년 12월27일 김창주 목사 부임 1990년 10월20일 김창주 목사 사임 1990년 12월27일 이종철 목사 부임 1995년 이종철 목사 사임 1995년 박상필전도사 부임 2000년1월5일 박상필목사 사임 2000년 1월9일 이경선 전도사 부임 2005년12월 이경선 목사 사임 2006년 1월4일 김성권 목사 부임 2017년2월5일 김성권 목사 사임 2017년 2월12일 최철기 목사 부임 2018년 4월4일 위임목사 : 최철기 목사 장로 : 윤상균, 정인영 장로 장립, 권사 : 정요순, 강경애, 김희순 권사 취임 명예권사 추대 : 서정이, 조순임, 박정옥, 차영애, 정양례, 정보순, 김순애, 윤성자 권사 취임 2019년 4월13일 장로 : 신보길 장로장립 명예집사추대 : 박막동 집사, 고인석 집사
역대 목사 재임기간
초대 오 원 근 1959년 10월 ~ 1960년 4월 2 이 진 용 1979년 4월 ~ 1980년 10월 강도사로 부임 3 강 인 구 1981년 5월 ~ 1986년 5월 4 임 남 기 1986년 5월 ~ 1989년 12월 27일 5 김 창 주 1989년 12월 27일 ~ 1990년 10월 20일 6 이 종 철 1990년 12월 27일 ~ 1995년 7 박 상 필 1995년 ~ 2000년 1월 5일 전도사로 부임 8 이 경 선 2000년 1월 9일 ~ 2005년 12월 전도사로 부임 9 김 성 권 2006년 1월 4일 ~2017년 2월 5일 10 최 철 기 2017년 2월 12일 ~ 현재
강진마을 강진교회
강진교회는 강진면 갈담 2길4-3(갈담리 280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강진교회는 1922년 미국 남장로회 소속의 윈(Winn Samuel Dwight : 위인사, 韋仁仕)선교사가 김석조 장로를 파송하여 교회를 개척하였다. 1924년 12월 15일 윈(위인사)선교사가 초가3칸 주택을 구입하여 강성진 남궁선 이봉의씨가 모여 예배를 드림 으로서 강진교회가 창립되었다.
1927년에는 엄길영씨를 순회전도사로 시무케 한 후 1932년 4월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1932년 봄에는 갈담리 산 300번지를 매입하여 예배 처소를 마련하고 예배를 드렸으며 1934년 5월에는 당회장인 윈(위인사)선교사가 강성진씨를 영수로 임명하였고 본 교회가 원래 주택용 건물로 협소하여 이를 맥각 처분하고 갈담리 산 300번지에 대지를 정지 작업을 하여 선교부 보조와 성도들의 헌금으로 목조주택 8칸 한 채를 헌당하였다.
1939년 9월에는 윈(위인사) 선교사가 신사참배를 함으로서 문제가 되어 미국으로 추방당하고 교회는 폐쇄되었다. 엄길영 전도사도 이때 사임을 하였다. 1946년 조요섭 선교사가 임실지역 담당 선교사로 부임하면서 청웅교회, 강진교회 등을 순회하면서 활동을 하였다. 1947년에는 인돈 선교사가 당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49년 가을 흩어진 교인들이 다시모여 강진면 산업조합을 빌려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강진교회는 그동안 선교사의 체제로 운영하면서 전도사와 강도사 체제로 운영하다가 1959. 10월 오원근 목사가 부임함으로서 목사체제로 운영하였다. 강진교회는 그동안 일본의 탄압과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았으며 2011년에 부임한 8대 소인용 목사가 부임하여 발전된 모습으로 교회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강진교회 연혁
1922. 12. 미국 남장로회 소속 원(Winn Samuel Dwight : 偉仁仕, 위인사) 선교사가 김석조 장로를 파송하여 교회를 개척하다. 1924. 12. 15 윈(S D Winn ; 偉仁仕, 위인사) 선교사가 초가삼간 주택을 구입하여 강성진 남궁선 이봉의 제씨가 모여 예배를 드림으로 갈담교회가 창립되다. 1927. . 당회장 윈(S D Winn ; 偉仁仕, 위인사) 선교사가 엄길영씨를 순회 전도사로 시무케 하다 1932. 04. 엄길영 전도사 부임하다(8년간 시무) 1932. 봄. 갈담리 산 300번지를 매입하여 예배 처소를 마련하고 예배드리다. 1934. 05. 당회장 윈(S D Winn ; 偉仁仕, 위인사) 선교사가 강성진씨를 영수로 임명하다. 1935. 03. 장성애 전도부인 시무하다. 1939. 09. 윈(S D Winn ; 偉仁仕, 위인사) 선교사 신사참배 문제로 미국으로 추방당하고 교회는 폐쇠되다. 1939. 09. 엄길영 전도사 사임하다. 1949. 가을. 흩어진 교인들이 다시 모여 강진면 산업조합을 빌려 예배드리기 시작하다. 1950. 03. 당회장 인돈 선교사, 박조양 전도사 부임하여 시무하다. 1952. 11. 박석기 전도사 부임하여 시무하다. 1957. 02. 박석기 전도사 시무 사임하다. 1958. 04. 고영근 전도사 부임하여 시무하다.(시무중 본교회에서 결혼함.) 1959. 10. 고영근 전도사 시무 사임하다. 1959. 10. 오원근 목사 부임하여 시무하다. 1959. 12. 05 엄길영 장로 임직하다. 1960. 04. 오원근 목사 시무 사임하다. 1960. 04. 갈담 교회에서 강진교회로 분리하여 쓰라린 아픔을 겪게 되다. [기독교대백과사전, 합동측 갈담교회 연혁 등을 참고하여 수정하고 당회에서 채택함.] 1961. 02. - 이종안 강도사 시무하다 1961. 03. 01 강진리 294-3번지에 대지 136평을 구입하다. 1961. 04. 28 목조건물 18평을 건축하여 (김동균, 박점련, 박동현, 차순례, 정한나, 유성춘 집사 등등)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1961. 09. 25 오대흔 장로 임직하다. 1962. 08. 이종안 강도사 시무 사임하다. 1962. 09. 허판노 강도사 시무하다. (청웅교회 동시 시무) 1963. 04. 박찬기 전도사 시무하다. (청웅교회 동시 시무) 1963. 12. 김판님 여전도사 부임하여 시무하다. 1966. 09. 김판님 여전도사 시무사임하다. 1966. 12. 장균철 전도사 부임하여 시무하다. 1967. 03. 장균철 전도사 시무사임하다. 1967. 08. 13.송용학 전도사 부임하여 시무하다. 1968. 05. 교회 명칭을 “갈담 중앙교회”로 개명한다. 1970. 04. 03 이기성 전도사 부임하여 시무하다. 1973. 06. 전우춘 전도사 부임하여 시무하다. 1974. 12. 29.고승일 전도사 부임하여 시무하다. 1977. 02. 06.찬양대 조직하다. 1978. 04. 11.교회 명칭을 “강진교회”로 변경하고 새롭게 지역복음화운동을 전개하다. 1979. 03. 권태호 목사 시무사임하고 경기도 성남 중탑 교회로 전출하다. 1979. 04. 15.“강진 교회당”을 연건평 70평으로 건축, 봉헌하다. 1981. 05. 권태호 목사 시무사임하고 경기도 성남 중탑교회로 전출하다. 1981. 05. 이남규 목사 부임하여 시무하다. 1982. 12. 이남규 목사 시무사임하고 군산노회 화평교회로 전출 1983. 02. 이희진 목사 부임하여 시무하다. 1983. 04. 03.박규곤 장로 임직하다. 1986. 05. 11.한창현, 이춘생, 김두성 장로 임직하다. 1986. 10. 이희진 목사 시무사임하고 전북노회 신광교회로 전출 1986. 10 강복근 목사 부임하여 시무하다. 1987. 01. 06.교회 동산 구입하다. (덕치면 회문리 산 88-7, 10,012㎡) 1990. 06. 28.강진리 294-5번지에 대지 90평을 매입하다. 1991. 11. 17.주바라기 찬양단이 창립되다. (창단기념 발표회를 갖음.) 1992. 10. 11.어린이 주보 발행 시작하다. (꽃동산 주보) 1993. 04. 24.목사관 32평을 적벽돌 스라브조로 건축하여 봉헌하다. 1995. 10. 강복근 목사 시무사임하고 전북노회 영락교회로 전출 1995. 10. 이윤영 목사 부임하여 시무하다. 1996. 02. 04.교회 자동차(12인승 승합차 “그레이스”)를 구입하다. 1996. 03. 강진리 노인회관 1동(대지 53평)을 구입하고, 동년 동월 사택전면에 위치한 74평의 대지를 매입하여 총 127평의 대지에 교육관 건립준비 1996. 11. 09.이종구, 김진규, 안수집사 임직하다. 김경숙, 김명숙, 정금단, 정명숙 권사 임직하다. 1999. 12. 04.이종구, 김진규 장로 임직하다. 이준우, 김종만, 유창국 안수집사 임직하다. 정양임, 한순자, 유승순, 서순님, 김성순 권사 임직하다. 2000. 07. 이윤영 목사 시무사임하고 전북노회 주전대광교회로 전출 2000. 07. 윤갑식 목사 부임하여 시무하다. 2000. 10. 29.전주에 학사관을 건립하다. 2001. 07. 01.교회 차량 구입 (15인승 승합차 “이스타나”)를 구입한다. 2001. 09. 김성준 교육전도사 부임하여 시무하다. 2002. 05. 18.교회 교육관 건립 시작하다. (2002. 12. 16. 준공검사) 2003. 01. 25.입당예배로 하나님께 봉헌하다. 2003. 12. 김성준 교육전도사 시무사임하고 남원노회 사곡교회로 전출 2004. 01. 이정웅 교육전도사 부임하여 시무하다. 2005. 12. 이정웅 교육전도사 시무사임하다. 2006. 11. 12.엄성철 교육전도사 부임하여 시무하다. 2009. 04. 16-23.일본 목회자 초청세미나 및 교회 탐방하다. (11명) 2011. 01. 31.이종구 장로 별세하다. 2011. 05. 03.김진규 장로 별세하다. 2011. 05. 14.사랑의 바자회 (외부 300명 211만원 내역서 별지와 같음) 2012. 12. 27.윤갑식 목사 시무사임하고 군산노회 월연교회로 전출하다. 2012. 12. 27.소인용 목사 부임하여 시무하다. 2012. 10. 31.엄성철 전도사 시무사임하다. 2013. 07. 16.교회 부동산을 정춘모씨에게 매각하다 (덕치면 회문리 산 88-7) 2013. 11. 23.강진교회가 아래와 같이 큰 행사를 진행하다. 목 사 위 임 : 소인용 장 로 임 직 : 정춘모, 이춘선, 유창국, 김종만 안수집사임직 : 박종하, 김남석 권 사 임 직 : 김포자, 고영자, 박순분, 박요자, 박선자, 최소희, 황순금, 이혜경, 조명란, 김미남, 곽수림, 윤연순(취임) 명예안수집사추대 : 서영내, 박영배, 양귀선, 조동인, 박종근 명예 권 사 추 대 : 홍난희, 김종례, 정순덕, 홍영례, 강문정, 서영순, 장정옥, 이용례, 김숙자 2013. 12. 22.근속기념예식 , 추대예식, 은퇴예식 거행하다. 장 로 근 속 기 념 : 박규곤(30주년), 이춘생(27주년) 명예안수집사추대 : 정경모, 김종렬 명예권사추대예식 : 정순례 안수집사은퇴예식 : 이준우 권 사 은 퇴 예 식 : 정양임, 유승순 2014. 03. 01.나윤호 교육전도사 부임하여 시무하다. 2014. 04. 01.스타렉스 구형 처분하고 (전북 더 32 6165) 스타렉스 신형 구입하다. (72 구 2325, 차량가격 : 2500만원) 2014. 06. 12.전북 임실군 강진면 갈담2길 10-8 대지 66평 매입하다. 상기 지번 주차장 공사하다.(2014년 7월 12일 완공) 2015. 05. 15.교육관 3층 지붕공사 및 체육실 공사하다. 2015. 09. 01. 스타렉스 12인승 구입하다. 2015. 12. 31.나윤호 교육전도사 목사 안수받고 시무사임하다. 2018. 03. 01.이세현 교육전도사 부임하다.
역대 목사 재임기간
초대 오 원 근 1959년 10월 ~ 1960년 4월 2 권 태 호 1979년 3월 ~ 1981년 5월 3 이 규 남 1981년 5월 ~ 1982년 12월 4 이 희 진 1983년 2월 ~ 1986년 10월 5 강 복 근 1986년 10월 ~ 1995년 10월 6 이 윤 영 1995년 10월 ~ 2000년 7월 7 윤 갑 식 2000년 7월 ~ 2011년 12월 27일 8 소 인 용 2011년 12월 27일 ~ 현 재
옥정리 옥정교회
강진면 옥정호로 757-15(옥정리 218-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옥정교회는 1991년 12월 25일 김대식 전도사가 옥정리 마을회관에서 이의정 목사 예배인도로 송용섭, 송은섭, 박원식, 박원준 등 어린이 4명과 함께 설립 예배를 드림으로서 개척을 하였다.
1992년 4월 장년 성도 17명, 중고등부 8명, 어린이 37명으로 교회가 성장하여 1993년 4월 5일 현 위치에 중고조립식건축을 완공하여 입당예배를 보았다. 1993년 4월 19일 임실군에 “대한예수교 장로회(개혁)옥정교회”를 종교단체로 등록하였으며 1994년 2월 28일 옥정리 218-1번지(258m²)와 옥정리 213번지(전, 261m²)를 예배당 부지로 매입하였고 2011년 10월 1일 총건평 204m²(62평)에 교회당을 신축하였다. 그 후 2015년 6월 6일 옥정교회 3대 담임목사로 강대훈 목사가 부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옥정교회 연혁
1991년 12월 25일 김대식 전도사 구 강진면 옥정리 마을회관에서 옥정교회를 개척하여 이의정 목사 예배인도로 송용섭, 송은섭, 박원식, 박원준 등 어린이 4명과 함께 설립예배를 드렸다. 1992년 4월 장년 성도 17명, 중고등부 8명, 어린이 37명으로 교회가 성장하였다. 1993년 4월 5일 강진면 옥정리 218번지에 중고조립식건축을 완공하였다. 1993년 4월 19일 임실군에 “대한예수교 장로회(개혁)옥정교회”를 종교단체로 등록하였다. 1994년 2월 28일 강진면 옥정리 218-1번지(258(m²)를 이동칠로부터 예배당 부지로 매입 하고 옥정리 213번지(전, 261(m²)를 송영동씨로부터 예배당 부지를 매입하였다. 2001년 12월 31일 초대 옥정교회 담임목사인 김대식 목사가 사임하였다. 2001년 1월 6일 옥정교회 2대 담임목사로 장인철 목사가 부임하였다. 2011년 10월 1일 강진면 옥정리 218-1번지에 교회당을 신축하다. (총건평 204m²(62평), 1층 예배당, 2층 사택) 2015년 5월 31일 장인철 목사가 사임하여 남원신정교회에 부임하였고. 2015년 6월 6일 옥정교회 3대 담임목사로 강대훈 목사가 부임하였다. 2015년 10월 16일 전주 세향교회 후원으로 식당(컨테이너 1동)과 부엌을 신축하였다.
역대 목사 재임기간
초대 김 대 식 1991년 12월 25일 ~ 2001년 12월 31일 2 장 인 철 2001년 01월 06일 ~ 2015년 05월 31일 3 강 대 훈 2015년 06월 06일 ~ 현 재
부흥리 부흥 교회
부흥리 교회는 강진면 호국로 319(부흥리 289-4번지) 109평을 1992년 3월 2일에 주영애 집사가 땅을 매입하였고 3월 5일 경량철골 판넬 지붕으로 공사를 착공하여 35평의 규모로 4월 3일 예배당을 준공하였다. 그 후 4월 28일 초대 오원록 목사가 부임하여 설립 예배를 보았으며 1996년 5월 20일 4대째 강준희 목사가 부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2009년 3월 20일 부흥리 291-14번지의 부지 66평을 확보하였으며 2014년 3월 10일 구 건물을 철거하고 교회건물을 착공하여 9월 20일 건축물을 완공하였으며 10월 20일 교회 입당예배를 보았다.
역대 목사 재임기간
초대 오 원 록 1992년 04월 28일 ~ 1994년 04월 28일 2 박 완 순 1994년 04월 29일 ~ 1995년 04월 20일 3 이 성 섭 1995년 04월 21일 ~ 1996년 05월 20일 4 강 준 희 1996년 05월 21일 ~ 현재
율치마을 섬진교회
강진면 학석3길 24(학석리 395-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 교회는 대한예수교장노회합동교단으로서 황호문목사가 운영하고 있다. 황목사는 2000년 3월경에 이교회에 부임하였는데 사택은 1990년쯤 지어진 것으로 알고 있으며 교당은 1995년에 지어진 건물로서 유지되고 있다. 이러한 건축물은 당시 전주 서문교회의 지원으로 이루어 졌으며 지금도 선교후원금에 의존하고 있다.
갈담리 예수중심교회
이 교회는 강진면 강동로 1310(갈담리 397-2번지)으로 갈담에서 덕치 사곡리로 넘어가는 길 좌측에 자리하고 있다. 당초에는 1995년경 강진면 갈담리 시장 안에 교회를 마련하고 목회활동을 하였으나 강진면 시장주변에 하천 개수사업으로 인하여 2015년 현재의 곳으로 이사를 하였다. 전도사인 이종순(80세)할머니는 서울의 예루살렘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남편인 노일홍을 따라 강진까지와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외에도 강진면에는 축복교회(강운로 322-5)와 순복음 교회가 이윤길 98(방현리357-1번지)에 있다고 기록은 있으나 조사하지 못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