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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 강진의 역사와 문화
◈ 23. 강진의 금석문
강진의 금석문
 
갈담리 이영선 묘비
 
이영선(李榮先,1588∼1655) 묘비는 강진면 갈담리 임실 한국치즈고등학교 서쪽 능선에 위치하고 있다. 이영선은 본관이 전의(全義)로 자는 극가(克家)이며 만암 이상진의 아버지이다. 석계 최명룡과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광해군의 혼란기 등을 거치면서 몸조심 하였으며 남과 다투기를 싫어하였다. 만년에는 시골에 은거하였는데 60이 넘어서 경기전 참봉에 제수되기도 하였다.
 
이영선은 전주 동서학동 전주교육대학교 뒤편에 있는 반곡서원에 배향되었다. 이 비문은 명재 윤증이 짓고 조상우가 두전과 함께 음기를 썼다. 윤증은 조선 후기 소론의 영수로 활동했던 인물이며, 조상우는 1657년(효종 8) 17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천거되어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연천현감(連川縣監)을 지냈다. 비문을 지은 사람과 쓴 사람이 당대의 이름 있는 사람들로 매우 가치 있는 금석문이라 할 수 있다.
 
 
방현리 노방용 묘비
 
강진면 소재지에서 전주 가는 방향으로 1.5km지점에 방현리 용봉마을에서 이윤리로 가는 길목 왼쪽 산언덕에 노방용(魯邦龍)묘비가 있다. 비의 규격은 높이 138cm 폭 41cm 두께 16cm이며 비문은 ‘증통정대부돈영부도정행종사랑의금부도사강 화노공방용지묘,증숙부인행공인삭녕최씨부우쌍폄(贈通政大夫敦寧府都正行從仕郞義禁府都事江華魯公邦龍之墓 贈淑夫人行恭人朔寧崔氏祔右雙窆)’이라고 적혀 있으며, 옆면에는 ‘계유시월 일전진사남원양기형찬융희 사년경술춘(癸酉十月 日前進士南原梁基衡撰隆熙四年庚戌春)’이라고 적혀 있어 1910년에 남원 양기형이 글을 지어 세운 비이다.
 
 
갈담리 박기림 묘비
 
이 비는 강진면 갈담리 속칭 잉어명당이라고 부르는 곳에 있는 함양박씨 박기림(朴起林)의 묘비이다. 이곳은 갈담리의 유일한 암자인 구룡사를 끼고 돌아가면 작은 길이 있으며 구룡사에서 서쪽으로 약 100여m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비석의 전면은 절충장군용양위호군부사직상장함양박공기림지묘(折衝將軍龍驤衛護軍副司直上將咸陽朴公起林之墓)라고 썼으며 말미(末尾)에는 세재 기미 시월상한(十月上澣) 외 후손 청주 한영석 근식(歲在己未十月上澣外后孫淸州韓榮錫 謹識)이라고 적혀 있어 이는 1919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십삼대손원석근서(十三代孫元錫謹書)라고 기록하여 비석을 세웠다.
 
고창현감을 지냈던 박정(朴楨)은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장자는 수림(秀林)으로 진사(進士)이었고 이분이 박승후(朴承後) 진사(進士)를 낳았다. 둘째는 박창림(朴昌林) 상장군(上將軍)을 지냈다. 셋째는 박기림(朴起林)으로 호군(護軍)과 부사직(副司直)을 지냈다. 부인은 문화 유씨(柳氏) 문함(文咸)의 딸이다. 박기림은 아들 넷을 낳았는데, 장자는 진사 맹호(孟豪)로 진사 박주(朴주)와 진사 박교(朴嶠), 진사 박기(朴岐)이다.
 
 
백련리 함양박씨 묘정
 
이 묘정(墓庭)은 강진면 백련리 상강진이란 곳에서 100m쯤 우측으로 올라가면 함양박씨의 묘정이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백련산의 산줄기가 북쪽으로 향하여 매친 곳으로 상단에는 군자감 직장 함양박공원영 배 공인동복오씨(軍資監直長咸陽朴公元英配恭人同福吳氏)의 묘가 있으며 다음으로는 좌영산원박공영인전주최씨지묘(左領散員朴公令人全州崔氏之墓)라고 비석을 세웠다. 세 번째에는 봉직랑군자감봉사함양박공현동지묘배의인고령신씨합폄(奉直郞軍資監奉事咸陽朴公玄童之墓配宜人高靈申氏合窆)이라고 비를 세운 묘가 있다.
 
맨 아래에는 성균진사함양박공훈지묘(成均進士咸陽朴公薰之墓) 배의인광산이씨부우(配宜人光山李氏祔右)라고 기록한 비를 세워 묘정을 이루고 있다. 위의 비석은 대부분 단기4316(1983)계해춘개수(癸亥春改竪)라고 적혀있다. 또한 구비가 두 곳에 있는데 직장박공지묘 공인동복오씨지묘(直長朴公之墓 恭人同福吳氏之墓)라고 적혀있으며 또 하나는 봉직랑군자감봉사박공지묘공인신씨지묘(奉直郞軍資監奉事朴公之墓恭人申氏之墓)라고 적힌 작은 구비(舊碑)가 있다.
 
 
백련리 전주이씨 묘정
 
전주이씨(全州李氏) 묘정(墓庭)은 백련마을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묘정은 당초 함양박씨들의 종산이었는데 함양박씨의 딸이 전주이씨에게 시집을 간바 재산으로 산을 떼어준 것으로 추측 할 수 있다. 많은 면적의 산을 받아 소유하게 된 전주 이씨들은 이 산을 종중산으로 보존 관리하게 되어 오늘에 까지 왔다고 한다. 이 종산에는 전주이씨 조상들이 명당을 찾아 묘정을 이룬바 제일 윗 쪽에는 통정대부 전주 이 공 원(轅)과 숙부인 함양박씨를 모셨으며 묘전에는 통정대부이공지묘 숙부인함양박씨지묘(通政大夫李公之墓 淑夫人咸陽朴氏之墓)라고 쓴 구비(舊碑)가 세워져있다.
 
두 번째로는 나주 나(羅)씨 할머니의 묘가 조성되어 있으며 세 번째로는 전주이씨 휘 덕순(德純)과 配 양주 조(趙)씨의 묘가 조성되어 있다. 네 번째로는 전주 이기우(李奇宇)와 유인 안동권(安東權)씨 묘가 있고 다섯 번 째로는 전주 이기룡(李起龍)과 配 청해이씨(靑海李氏)와 配 동래정씨(東萊鄭氏)의 묘가 있으며 여섯 번째로는 전주 이강주(李康珠)와 배 칠원윤씨(漆源尹氏 기남(基男)의 묘(墓)가 조성되어 있다.
 
 
부흥리 현감 조성희 선정비
 
임실에서 순창 간 중간지점인 강진면 부흥리 313-4번지 국도변에 있었으나 도로확장공사로 인하여 1982년에 마을회관 옆 공터의 은행나무 밑으로 이건하여 보호 관리 중이다.
 
비의 규격은 높이 148cm 폭 43cm 두께 17cm이며 비석 전면에는 ‘현감조후성희청덕선정비(縣監趙侯性喜淸德善政碑)’라고 적혀 있는데 현감 조성희(趙性喜)는 본관이 함안으로 고종 23년(1886) 7월 14일부터 고종 26년(1889) 1월 19일까지 임실현감을 지냈다. 비석 후면에 기축(己丑) 12월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현감이 떠난 후인 1889년 12월에 세운 것으로 본다.
 
 
갈담리 현감 정동시 영세불망비
 
현감 정동시 영세불망비(縣監 鄭侯東時 永世不忘碑)는 강진면 갈담리 589-4번지 일원 산 아래 농로와 겹친 밭 옆의 바위 면에 각을 하여 마애 선정비라고 한다. 갈담에서 사곡리로 가는 길 다리를 건너 우측 농로 길로 향하면 200여m떨어진곳 좌측에 위치해 있다. 정동시 이 비문에는 도광(道光) 2年壬午 10月 日 로 적혀있어 1822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정동시(鄭東時)현감은 통훈(通訓)으로 순조 18년(1818)戊寅10月 11日 政 除拜 同年 11月 初 6日 부임(赴任)하여 순조 22년 (1822)壬午 9月 13日 서울로 떠났다.
 
 
 
갈담리 현감 최천서 영세불망비
 
이 비는 정동시 선정비에서 약 20여m정도 떨어진 곳에 6기의 비석군에 함께 있는 비석이다. 같은 바위에 함께 새겨진 비석군(群)으로 현감 최천서 영세불망비(縣監 崔侯天瑞 永世不忘비)가 새겨져 있는데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어려운 형태 이다. 강희(康熙) 45年 12月 日로 새겨져 1706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최천서(崔天瑞)는 숙종(肅宗)28년 1702(壬午) 6月 初 6日 정제상(政除祥)7月 初3日 부임(赴任)하여 숙종(肅宗) 33년(1707) 丁亥3 月 11日 삭녕군수(朔寧郡守)로 영전하였다.
 
 
갈담리 현감 이문저 영세불망비
 
이 비는 강진면 갈담리에서 덕치 사곡으로 넘어가는 고개아래에서 우측 농로를 따라 200여m정도에 정동시 선정비가 있고 그곳에서 약 20여m정도 떨어진 곳에 6기의 비석들이 함께 새겨져 있다. 현감 이문저 영세불망비(縣監 李侯文著 永世不忘碑)는 계해년(癸亥年)2月 日(1683)에 세워져 있는 바 현감으로 재임 시에 세워진 것으로 본다. 이문저(李文著)현감은 서울사람으로 통훈(通訓)이며 숙종(肅宗) 6年1680(庚申) 8月 初10日 부임(赴任)하여 1684(甲子)年 2月 15日 병중(病重)으로 인하여 사임하였다.
 
 
갈담리 현감 임성주 영세불망비
 
정동시 선정비가 있고 그곳에서 약 20여m정도 떨어진 곳에 6기의 비석들이 함께 새겨져 있다. 현감 임성주 영세불망비(縣監 任侯聖周 永世不忘碑) 경진년(庚辰年) 7月 日 즉 1760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임성주(任聖周)현감은 공주사람으로 통훈(通訓)이며 英祖 30년(1754)甲戌 8月 初 8日 정제배(政除拜)하여 9月 25日에 부임(赴任)하여 영조(英祖) 34년(1758) 무인(戊寅) 12月17日에 퇴임하였다.
 
 
갈담리 현감 정규상 영세불망비
 
정동시 선정비가 있고 그곳에서 약 20여m정도 떨어진 곳에 6기의 비석들이 함께 새겨져 있다. 현감 정규상 영세불망비(縣監 鄭侯奎祥 永世不忘碑)는 경진년(庚辰年)7月 日 1760년에 세워졌을 알 수 있다. 정규상(鄭奎祥)은 서울사람이며 통훈(通訓)으로 이공조정랑(以工曺正郞)이다. 영조(英祖)34년 (1758)무인(戊寅) 12月 30日 政 除拜 己卯 2月 12日 赴任 영조(英祖) 39년(1763) 계미(癸未)12月 20日 임실을 떠났다.
 
 
갈담리 현감 원세철 영세불망비
 
정동시 선정비가 있고 그곳에서 약 20여m정도 떨어진 곳에 6기의 비석들이 함께 새겨져 있다. 현감 원세철 영세불망비(縣監 元侯世徹 永世不忘碑)는 신미년(辛未年) 5月 日(1871)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원세철(元世澈) 통훈(通訓)으로 고종 5년(1868)戊辰 閏 4月 14日 구전(口傳) 정이한성부주부(政以漢城府主簿)로 本月 18日 사조(辭朝) 5月初 2日到任하여 고종 7년(1870)庚午 11月 전주판관 (全州判官)으로 영전하였다.
 
 
갈담리 현감 이희기 영세불망비
 
강진면 갈담리에서 덕치사곡으로 가는 길목에서 우측농로를 따라가다 보면 전동시 선정비가 있고 20여m떨어진 곳에 6기의 선정비가 같은 바위에 새겨져 있다. 현감 이희기 영세불망비(縣監 李侯羲耆 永世不忘碑)는 신사(辛巳) 11月 日(1821)에 세워진 것으로 본다. 이희기(李羲耆)현감은 통훈(通訓)이며 순조1년(1801)辛酉 6月 日부임하여 순조 4년(1804)甲子 6月 23日 떠났다.
 
 
백련리 현감 구연익 선정비
 
구연익 선정비는 강진면 백련리 서창마을 앞 샘이 있던 곳 밭둑에 위치해있다. 과거 이곳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던 길목이었지만 지금은 마을안길로 변하여 소로 길이 되었다. 이곳에 있는 선정비는 풍우에 마모가 심하여 잘 알아 볼 수 없으나 자세히 보면 읽을 수가 있다. 구연익(具然翼)현감은 통훈(通訓)으로 고종 13년(1876)丙子 12月 25日 정이사복사주부(政以司僕寺主簿) 제배(除拜)하여 고종 14년(1877)丁丑 正月 21日 도임(到任)하여 고종 17년(1880)庚辰 4月 25日 정이배(政移拜) 경상도(慶尙道) 금산군수(金山郡守)로 떠났다.
 
 
옥정호 운암댐 건립 기념비
 
강진면 용수리 옥정호 신 댐에서 정읍시 쪽으로 호반도로를 따라 1km 쯤 가다보면 구(舊) 댐이 있는데 1965년에 다시 건설한 신(新) 댐이 만수위가 되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갈수기에 물이 많이 빠지면 먼저 운암호(雲岩湖) 건립 기념비가 보이며, 물이 더 많이 빠지면 구 댐의 모습이 드러나 윗부분부터 보인다.
 
이곳 운암호는 단기 4258(1925)년 11월에 착공을 하고, 단기 4262년(1929) 11월까지 당시 205만 원을 투자하여 4년간에 걸쳐 준공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운암호(雲岩湖)라는 글씨는 화강암에 새겨 콘크리트로 탑을 세우고 중간에 끼워 넣었다. 콘크리트 구조물은 3단으로 되어 있는데 하대는 153×153×66cm이며 중좌대는 128×128×113cm이고, 상대는 80×80×300cm이다.
 
‘운암호(雲岩湖)’라는 글씨는 1929년 당시 동진수리조합장으로 시·서·화(詩·書·畵)에 뛰어난 김제 성덕 출신 오당(吾堂) 강동희(姜東羲)가 쓴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일제는 운암제를 완공한 이후 1931년 10월 정읍 산외면 종성리에 도수터널을 뚫고 운암발전소를 건설하였다. 이는 남한에서 최초로 건설한 수력발전소이다. 한때는 전국적으로 명성을 날렸지만 이제는 노후로 인하여 1985년도에 가동을 멈추고 54년간의 긴 역사를 마감하였다.
 
 
옥정호 운암대제 암각서
 
운암제(雲岩隄)는 일제 강점기인 1925년 11월에 착공을 하여 1929년 11월에 준공을 하였으며, 당시 205만 원을 투자하여 4년간에 걸쳐 준공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댐은 임실군 강진면 옥정리와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 사이를 막은 길이 305m에 높이 33m 규모의 댐인데 동진강 유역에 안정적인 수리시설의 필요성을 느낀 조선총독부가 섬진강의 수원을 동진강 유역 쪽으로 돌리기 위하여 막은 아치형 콘크리트 중력식 댐이다. 이 댐이 건설됨으로 써 전북의 서부지역인 정읍과 김제 부안까지 넓은 평야지역에 수리 안전답으로 탈바꿈되었다.
 
댐을 막고 일제는 여기에 준공기념의 흔적을 남기기 위하여 댐 좌안(左岸)에 있는 자연석 암벽에 ‘운암대제(雲岩大隄)’라는 글씨를 새겼다. 이 글씨는 당시 조선총독이었던 사이토마코[齋藤實]가 행서체(行書體)로서 그 크기가 매우 크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댐 우안(右岸)인 정읍 종성리에는 1929년 당시 동진수리조합장으로 강동희(姜東羲)가 쓴 운암호(雲岩湖)라는 글씨를 새긴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부흥리 고흥 유관환유풍여열비
 
유관환유풍여열비(柳琯煥遺風餘烈碑)는 강진면 백련산 자락이 내려온 부흥마을 앞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유관환 선생은 조선 헌종 8년(1842) 임인 정월 17일에 부 휘 영식과 모 남원양씨 사이에서 독자로 태어나셨다. 이 여열비는 2015년 유풍여열비건립추진위원회(遺風餘烈碑建立推進委員會)를 구성하여 세웠는데 높이가 180cm이고 폭이 66cm 두께가 33cm로 되어있다. 또한 좌대는 거북좌대에 비수(碑首)는 용두석으로 되어 있다.
 
유관환 선생은 흉년에 곡간(穀間)의 쌀을 풀어 기민(饑民)을 구제하였고 인근 출산모 에게는 미역과 쌀을, 상가(喪家)에는 한지 한 질(帙)과 쌀 한 가마니씩을 부조하시니 지금까지도 그 칭송이 면면히 구전되고 있다. 공께서는 비록 무위무관(無位無官)의 평민이었지만 연아유덕량(淵雅有德量)하여 소박하고 건전한 인도적 신념에 겸손하고 진실한 삶을 영위하셨다.
 
 
백련리 봉사재 편액
 
청웅면 소재지에서 강진 방향으로 가다가 우측에 첫 신기마을이 있고, 신기마을 안쪽 백련리 408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봉사재(奉思齋)는 규격이 가로 122cm 세로 50cm이며 전주이씨 효령대군 종중 재실로 ‘기자가 동쪽 땅에 봉해진 지 3,045년째 계해 3월 12일’이라고 써져 있는 것으로 보아 1923년에 지은 것으로 볼 수 있으며, 팔작지붕아래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지붕은 시멘트기와지붕이다. 재실 안에는 봉사재기 등 현판이 2개가 있고, 주련이 4개가 있다. 대문에는 태극 모양의 그림이 있고, 대문 잠금장치는 거북 모양으로 특이한 점을 표현하고 있다. 거북 모양의 뜻은 재실의 화마를 방지하기 위한 뜻으로 표현된다. 담장은 조선식 담장으로 되어 있다.
 
 
백련리 영사재 편액
 
청웅에서 강진 방향으로 가다가 중간에 호국원을 지나 백련리가 있고, 백련마을 911번지의 북쪽으로 300m 정도에 영사재(永思齋)가 있다. 영사재는 가로 121cm 세로 45cm의 크기이며 전주이씨 재실로 통정공 10세조를 모신 재실로 상영(尙榮)의 10대조부이시다. 상량문을 보면 ‘숭정기원후 5무신 5월초’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908년에 세운 재실이며 문간 또한 단기4316년이라고 적혀 있어 서기 1983년에 세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재실에는 영사재기를 기록한 현판이 있고, 주련이 4기둥에 걸려 있다. 영사재 편액의 글씨 쓴이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백련리 추모재 편액
 
청웅에서 강진면 경계를 지나 첫 마을인 신기마을에서 백련산 쪽으로 1.5km쯤 가면 함양박씨 재실인 추모재(追慕齋)가 있다. 상량문에 단기4283년 경인(庚寅) 2월 13일 건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1950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시멘트기와 팔작지붕이며, 추모재기 등 7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규격은 가로 80cm 세로 37cm의 ‘추모재(追慕齋)’란 편액은 각(刻)을 하지 않고 써져 있는 상태이며 박봉희가 쓴 것으로 낙관이 되어있다.
 
 
백련리 모의재 편액
 
이 모의재(慕義齋)는 강진면 백련리 백련산 아래 신기마을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집으로 현판이 1개 걸려있다. 함양박씨의 재실이며 1964년에 건립하였다. 편액의 글쓴이는 알 수 없다.
 
 
필봉리 영효재 편액
 
이 재실은 강진면 필봉리 상필마을 뒤쪽에 있는데 밀양박씨 규정공파 재실인 영효재(永孝齋)가 있다. 정면 3칸에 측면 2칸으로 세워진 재실에는 편액만 세워져 있다.
 
이 재실은 상냥문에 4292년 己亥 10월 3일 입주(立柱)라고 기록되어 있어 1959년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영효재는 정면 3칸으로 되어 있고 측면은 2칸으로서 팔작 기와지붕으로 지어졌다. 편액과 함께 주련은 2개만 걸려 있고 앞에 일주문이 지어졌다. 편액의 글쓴이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향토사】 강진의 역사와 문화
• 22. 섬진강다목적댐의역사
• 23. 강진의 금석문
• 24. 강진의 재실
(2024.01.27.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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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