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의 재실문화
재실의 의미
재실(齋室)을 재궁(齋宮)또는 재각(齋閣)이라고도 한다. 재실은 묘제(墓祭)를 지내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집으로, 제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이나 종원 들의 숙식과 제사음식 장만, 음복(飮福), 망제(望祭)를 지내는 곳이다.
시조나 중시조(中始祖)의 묘소 또는 지파(支派)의 회전(會奠) 근처에 세워진 건물이다. 보통 재실 근처에는 선산·종산·위토가 있다. 재실 에는 묘직(墓直)이 또는 산직(山直)이라는 관리인을 두는데 묘직이는 묘와 재실건물을 관리하고 문중의 토지인 묘전(墓田:묘제 및 묘지관리에 드는 비용을 조달하는 토지)을 경작한다. 재실은 문중 또는 지파의 공유재산이지만 재실의 유지와 보존은 종손이나 직계 장손이 책임을 진다. 종손이나 직계장손과 묘지기나 산지기 사이에는 유사(有司)가 2∼3명 있는데, 이들은 중간에서 실무를 담당한다.
재실은 삼국시대의 시조묘(始祖廟)와 신궁제도(神宮制度)에서 발생 기원을 찾을 수 있다.
1400년대를 전후하여 능을 지키기 위한 건물을 세우기 시작하였으며, 1456~1458년에 왕릉을 건립하는 규범인 산릉제도(山陵制度)를 정하였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숭유정책(崇儒政策)과 궁실의 산릉제도가 사대부의 재실건축 성립의 배경이 되었다.
재실의 내부공간은 특유의 기능을 담당하는 여러 공간으로 구성되는데, 이는 일반 주택의 기능과 공간을 비교해 볼 때 차이점이 많다. 따라서 재실내부를 용도별로 아래와 같이 분류한다.
① 루(樓) : 묘제를 지낼 때 주로 사용되는 공간으로 참제인(參祭人)들을 중심으로 문중회의, 제수(祭需) 점검 및 상차림도 하며, 비가 올 때 망제를 지내고, 묘제 후 참제인들이 음복하는 장소이다. ② 전사청(典祀廳) : 제사에 필요한 기구 및 제수를 보관하는 곳으로 유사방(有司房)으로 연결된다. ③ 유사실(有司室) : 회계 및 기록, 제수 마련 및 점검, 제사절차 협의, 문중회의 주관 등을 담당하는 유사들이 거처하는 방이다. ④ 종주실(宗主室) : 종손 방이라고도 하며, 종손이 머무는 방이다. ⑤ 참제인실 : 묘제에 참석한 후손들이 머무는 방으로, 연령에 따라 방을 구분하여 사용한다. ⑥ 수임방(受任房) : 매년 묘제 때마다 교체되어 임명되는 제관 또는 헌관이 머무는 방이다. ⑦ 전임실(前任室) : 전임 유사로 제례에 밝은 연로한 후손이 머무는 방이다. ⑧ 동서재(東西齋) : 참제인이 머무는 방이다. ⑨ 대청(大廳) : 제수를 장만하는 장소 또는 루의 기능을 보조하여 상차림과 음복 등이 행해진다. ⑩ 부엌 : 평상시에는 관리인의 취사용으로 이용되지만 묘제시에는 제사음식을 장만하는 곳이다. ⑪ 고방(庫房) : 제사에 드는 비용을 충당하는 문중의 토지에서 생산하는 수확물을 저장하는 곳으로, 제기의 보관도 한다.
배치 형식은 소규모의 재실인 경우에는 일자형(一字形)이며, 이보다 규모가 더 큰 재실은 트여 있는 구자형(口字形)이다. 과거의 재실은 시향제나 묘제의 준 비 장소, 제사와 관련된 여러 문제를 논의하던 장소, 때에 따라 음복과 문중회 의가 이루어지던 장소였지만, 현대에는 조상에 대한 의식이 희박해지고 묘직이 사라지면서 재실은 점차 소멸되고 있다.
묘제의 유래와 의미
가례에서는 묘제를 매년 3월 상순에 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음력 10월에 많이 행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고전에서는 없었던 것인데 중국 남송때의 주자가 그 당시의 세시풍속에 따라 가례에 수록하면서 중시된 것이었다. 당시 주자의 친구였던 장남헌(張南軒)은 그것이 옛법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매년 시절(청명, 한식, 단오, 추석)일에 묘소를 찾아가 제사하는 것이 관행이 되어 시제보다 더 중요한 제사가 됨으로서 식자들의 탄식을 사게 되었다. <사례편람>에서는 4철일의 묘제를 사당에서의 시제로 바꾸고 묘제는 1년에 한차례만 행하도록 권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묘제를 시제라고 칭하며 음력 10월에 기제사를 지내지 않는 그 윗대의 조상 즉 5대조 이상의 조상에 대한 제사를 1년에 한번 지내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그러나 시제와 묘제는 원래 전혀 다른 제사였다. 예법상의 제사는 1년에 4번 춘하추동의 4계절의 가운데 달에 사당에 모신 4대조를 향사하는 제사 이며 우리 속습의 10월 시제란 것은 5대조 이상의 먼 조상을 제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10월의 묘제(시제)는 “가례”에서 매년 1회씩 시조나 선조에 대해 집안에서 지내는 정규 제사와 흡사하다.
이 시제(묘제)는 예서에는 없는 제사이나 우리나라의 경우 전통적으로 엄격히 지내지는 것으로 보아 관습적인 제사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묘제는 그 조상의 묘소에서 지내는 것이 원칙이다. 산소를 잃어버렸거나 갈 수 없을 때에는 연고지에 제단을 설치하여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시제에는 직계자손, 방계자손을 포함하여 누구라도 참례할 수 있다.
묘제는 그 제사의 장소가 산소 이므로 그 진행 차례도 집안에서 지내는 제사와 다르며 또 산신에 대한 제사가 따로 있었다. 예문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우리의 전통풍습에는 묘제가 끝난 후에도 제사음식 나누기를 하였다.
시제의 의미
시제는 원래 사시제(四時祭)라고 부르던 것으로서 1년에 네 번 즉 춘하추동의 계절마다 고조 이상의 조상을 함께 제사하던 합동 제사의 하나이다. 시제는 고전 예법에서 정제(正祭)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제사이다.
고대 중국에서의 제사는 곧 시제를 말하는 것으로서 마치 국가의 종묘에서 춘하추동 사계절마다 대향(大享)을 올리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시제는 제사의 으뜸이자 표상이었으며 일종의 축제와도 같이 이날은 제사를 마친 후에 친지와 이웃을 초청하여 술과 음식을 대접하는 잔치를 벌리기도 하였다. 시제는 이처럼 주공(周公)에 예를 정할 때부터 있던 제도이며 후대에 생긴 기일 제사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후 기제사가 중시되면서 시제의 중요성은 점차 퇴색되어 갔다. 그리고 고조부모 이하 4대조의 기일제를 행하게 되면서 각종 명절의 차례와 합해져 1년에 행하는 제사의 횟수가 너무나 많아지게 된 것도 시제의 주요성을 악화시킨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조선시대의 많은 유학자들은 정규 제사로서 시제가 지니는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1년에 네 번씩 지사를 거행하는 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집은 흔하지 않다. 이 때문에 성호(星湖)와 다산(茶山)같은 학자들은 1년에 봄 가을에 두 번만 시행토록 권고하기도 하였으며 실제로는 1년 한번만 행하는 집이 많았다. 시제는 조상을 모신 사당에서 거행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사당에 협소할 경우에는 정침의 대청에서도 행해졌다. 일부 지방에서는 10월에 묘지에서 행하는 묘제를 시제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묘제는 그 예법이 다른 것으로 사당에서 행하는 시제와는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묘제를 춘하추동 4절기마다 행하는 것이 유행하여 사당에서 지내는 시제가 잘 행해지지 않기도 하였다. 유교 제례의 원형을 유지하자면 제사는 고조부까지 4대를 모시지 않을수 없다. 1973년에 반포 시행된 <가정의례준칙>에서 제사의 대수를 부모와 조부모에게만 한하도록 한 것은 라무런 근거가 없는 법의 횡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년에 최소한 8회에 이르는 기제사를 봉행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성이 극진한 사람이 꼭 하고자 한다면 물론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예에는 시의성이 중요하므로 이는 변통의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니다.
백련리 모의재
백련리 모의재(慕義齋)는 백련산 아래 신기마을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집으로 현판이 1개 걸려있다. 함양박씨의 재실이며 1964년에 10월 1일 건립하였다.
백련 모의재기(慕義齋記)
우리 임실에 뿌리를 둔 함양씨족은 교수관(敎授官)를 지낸 평(枰)에서 시작하여 그 손자 수심재(收心齋) 훈(薰)에 이르렀는데 기묘명현(己卯名賢) 저정공(楮亭公) 순달(順達)이 수심재의 손자이다. 임진왜란 때에 충신이 된 저정공이 묻히신 곳은 고을의 남쪽 백련리(白蓮里)의 쌍학봉(雙鶴峰) 아래로 부인과 부묘되었다. 해마다 제사를 지낸 지 200여 년이 되었는데 제사 지내는 사람들이 재숙(齋宿)할 곳이 없었고 제수를 마련한 공간도 없었다.
무릇 우리 고을이 이른바 오래된 집안이 사는 곳이기는 하지만 빈곤하고 보잘 것 없어졌으니 제사를 드리는 때가 되면 아! 차마 말을 할 수 있으리오. 옛사람들이 말하기를, ‘전인(前人)이 현달하였기 때문에 후배들이 열심히 배울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내가 그 말에 이어서 말하니, ‘선조가 현달하였기 때문에 후손들이 덕을 닦을 수 있는 것이다.’이리라. 지금 우리 종족이 생산과 이해(利害)에 종사하여 도의(道義)로 자처하지 못하고 저잣거리 사람으로 끝마치고 있어서 선조의 덕업을 천 길 구덩이에 파묻히게 하였다.
가문이 칠흑같이 어두운 한밤중 보다 적막(寂寞)하기를 어찌하여 백년이었으며 나의 몸은 나의 선조가 아니라면 어떻게 생겼겠는가? 근본이 상하면 오래도록 지탱할 수가 없는 것이며 친생(親生)에 부박(浮薄)하면 떨칠 수 없는 것이니 내가 매번 두렵게도 끌리지 않은 것은 이미 다시 맞이하였기 때문이다. 얼마나 다행인지 종족의 의견이 모두 같아서 몇 칸 재사를 짓기로 하여 1년 만에 공사를 마치었다.
문장(門長) 동엽(東燁)이 도유사(都有司)이었고 태식(泰植)이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힘을 기울였다. 재동(在東), 재영(在英), 재림(在淋), 재만(在萬) 및 종문(鍾文)과 병기(炳琦)가 전후로 일을 주관하여 비로소 우리 종중 안에서 할 말이 있게 되었다. 내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비록 오늘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지키는 사람이 없다면 무너져 썩어 버리게 될 것이니 우리 종족은 일이 다 끝났다고 하지 말고 더욱 선조를 받드는데 더욱 마음을 다해야 할 것이다. 선조가 닦은 덕업을 생각하여 조상께서 이루신 것을 생각하며 고심노력하여 이어받아서 수리해 간다면 낳아주신 분을 욕되게 하지 않고1) 이 재각도 장차 영원히 지켜가게 될 것이다. 서로 힘써야 할 것이다.
단기 4298년(1965) 을사년 4월 10대손 박상엽이 재배하고 삼가 기록하다.
慕義齋記
我咸陽氏之根於任實 實自敎授官諱枰 至其孫收心齋諱薰 而爲己卯名賢 楮亭諱順達 收心齋孫 而爲壬辰忠臣 楮亭公衣履之葬 在縣南白蓮里之雙鶴峰下 以配祔焉 歲祀之已關二百餘禩 而但祭員無齋宿之所 祭饌無可需之廚 夫以吾鄕 所謂故族 而貧苦迷孱 尤着於奉祭之日 鳴可忍言哉 古人有言曰 前人之所以顯 後輩之能勉學 余竊繼之曰 先祖之所以顯 後孫之能修德 今我宗族從事于生産利害 而不以道義自居 故鷟□是市夫街人而終 使先祖之感德 埋於千仞坑塹 家門之寂寞 甚於三更柒夜 何以則百年 我身非我祖也 何自以生焉 傷其本根 而未有能支遠也 薄於親生 而未有能自振也 余每懼然不牽者 已富來欣矣 何幸宗議僉同 搆數間齋舍 周一年卽迄其功 門長東燁卽都有司 泰植之始終同力 在東在英在淋在萬及鍾文炳琦 前後幹事 始可以有辭於吾宗中也 湘燁竊念雖始於今日 守設之無人 則傾敗腐朽而止 吾宗族勿謂能事已畢 尤盡心於奉先思孝 念祖修德 仍思父祖作成之 苦心努力 繼之而修葺 則可謂不失於無忝所生而此齋將永久 守設矣 盖相勉之哉
檀紀四二九八年 己巳四月上澣 十代孫湘燁再拜謹記
백련리 봉사재
백련리 봉사재(奉思齋)는 청웅면 소재지에서 강진 방향으로 가다가 우측에 첫 신기마을이 있고, 신기마을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봉사재는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 종중 재실로 ‘기자가 동쪽 땅에 봉해진지 3,045년째 계해 3월 12일’이라고 써져 있는 것으로 보아 1923년에 지은 것으로 보이며, 팔작지붕아래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지붕은 시멘트 기와지붕이다. 재실 안에는 봉사재기 등 현판이 2개가 있고, 주련이 5개가 있다. 대문에는 태극 모양의 그림이 있고, 대문 잠금장치는 거북 모양으로 특이한 점을 표현하고 있다. 거북 모양의 뜻은 재실의 화마를 방지하기 위한 뜻으로 표현된다.
백련 봉사재기(奉思齋記)
이 재실은 우리 9세조와 그 부인 해주 오씨의 무덤 아래 지은 재실이다. 무덤은 백련산 아래 서창 마을 뒤 임방(壬方)을 등진 언덕에 있었다. 백년이 지나도록 재숙(齋宿)할 곳이 없었다. 종숙부(從叔父) 상영(尙榮)이 문장(門長)이 되었는데 당시 옛 묘전(墓田)마저 남아 있지 않게 되자 장차 건축하려고 하였는데 불행히 세상을 떠나셨다. 계부(季父) 문영(文榮)이 드디어 족질(族姪)과 더불어 적대(炙臺)을 세우고 수습하여 몇 년 동안 모은 곡식이 60여 석에 이르렀고 종중(宗中)에서 뜻을 모아 각 호에서 돈 5000원씩을 내어 비로소 공사비용을 마련할 수 있었다.
아! 재실 한 곳 짓는 것이 이와 같이 어려우니 하늘이 정성껏 지키려는 도리에 대하여 반드시 먼저 삼가 봉분을 만들고 사초를 입히고 그 송추(松楸)를 아름답게 가꾸고 수석(樹石)으로 살피고 풍향(豊享)으로 받드는 것이다. 그런 연후에야 재실에서 자손이 재숙할 수 있기 때문에 정성을 지키는 것이며 재실이 있어야 위선(爲先)을 능히 다 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종족이 가난하여 선세(先世)를 위한 일을 하지 못해도 정성을 드리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 정성을 드리는 곳을 반드시 먼저 해야 되는 것은 될 한 가지인데 갖추지 못한 바 있었으니 바로 재실이었으니 앞에 홀로 서 있기도 어려웠다. 먼저 힘써야 할 것을 알지 못하고 외관(外觀)만 일삼으며 제사를 빠뜨리게 되고 무덤가 나무를 말라죽게 하며 집 한 칸 수리하는데 게으르고 자손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이것이 어찌 선조를 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 종족으로 이 재실에 오르는 사람은 더욱 먼저 힘써야 할 바를 아는데 뜻을 두고 정성껏 힘써서 바꾸지도 말고 어지럽히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후일에 선조를 위하려고 한다면 집안의 은감(殷鑑)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때문에 기문을 지으며 생각하노니 여러 부형제(父兄弟)과 더불어 힘써야 할 것이다.
봉사재를 건축하고 6년이 지난 무진(戊辰) 3월 29일 무오에 이긍의(李亘儀) 삼가 씀.
奉思齋記
齋寔我九世祖妣海州吳氏墓下 所築也 墓在白蓮山下 西倉村後負壬之原 而歷數百年 無齋宿之所 從叔父 尙榮爲門長 時歲舊墓田零餘 將爲營建而 不幸喪逝季父文榮遂與族姪起梡收拾幾年穀至六十餘石 又謀宗中戶出錢五千始得辦功 嗚呼 一齋之難有如是也 天夫守誠之道 必先謹其封莎 美其松楸 樹石以議之 豊享以事之 夫然後乃齋以爲子孫 齋宿之所 故守誠而至於有齋 則爲先之能事 可謂畢矣 今以若貧宗得爲先世未能之事 非不誠思勸矣 而其守誠之所 必先者一有所不備則是齋也 難以孤立於前矣 若乃不知先務而末事 外觀至以落祭呂赫丘木而倦修一屋子之不眼者 則足豈爲先之是稱云乎哉 惟吾宗之登新齋者 尤常知先務之爲志而誠勤無替 無或爲後日爲先家之殷鑑可矣 故敢爲之記而 思與諸父兄弟共勉云爾
奉思齋 建築後六年 戊辰 三月 二十九日 戊午 李亘儀謹記
백련 봉사재기(奉思齋記)
운수(雲水) 고을은 호남의 명승(名勝)이다. 백련산(白蓮山)이 굽이굽이 동쪽으로 내달려 쌍학봉(雙鶴峰)이 돌연히 기운을 모아들여 산수(山水)가 수려하여 감여가(堪輿家)가 길강(吉岡)라고 점지하는 곳이다. 그 아래 조그마한 재각이 있는데 굉걸(宏傑)하지는 않지만 매우 완미(完美)한 재각으로 기와를 얹은 지붕 모서리가 날개를 펴고 나는 듯 소나무와 가래나무 사이에서 휘영찬 모습이다.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반드시 누가 주인이냐고 물을 것이니 바로 완산(完山) 이문영(李文榮)씨의 8세조와 부인 해주오씨(海州吳氏)가 안장된 재사(齋舍)이다.
집안이 본래 청빈한데 어떻게 재실을 짓는 비용을 마련하여 이런 재실을 지었을까? 하늘이 내린 정성이 아니라면 유연(油然)히 힘을 다해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저 사람이 선조를 받드는 절개는 성심(誠心)을 위주로 해야지 재력(財力)은 그 다음인 것이다. 진실로 성심이 있으면 재력이 이르지 못함을 어찌 근심하겠는가! 만약 재력은 남아도 성심이 부족하면 비록 굉걸한 재각에 풍성한 제향을 올린다고 해도 어찌 도리를 다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때문에 왕상(王祥)의 잉어와 맹종(孟宗)의 죽순2)처럼 때가 아닌데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니 지성(至誠)의 소치로 하늘이 필연적으로 응답하신 것이다.
또한 시호(豺猢) 같은 미물(微物)도 능히 보본(報本)의 도리를 알기에 그런 물건으로써 제사를 드리는 것이니 하늘이 주신 양지(良知)를 사람으로서 그만도 못해서야 되겠는가?
아! 우리 종족 문영씨는 대군(大君) 선조 장방(長房)의 후손이다. 호남 고을로 내려온 지 10여세가 지나도록 그 덕을 닦으며 시예(詩禮)의 가르침과 효제(孝悌)의 행실을 실로 가법(家法)으로 전수하였다.
법도 밖으로 벗어나지 않고 완연히 시골의 처사(處士)로 살아서 같은 마을의 종족이 대부분 수신(修身)하며 깨끗한 행실로 주경야독(晝耕夜讀)을 업으로 삼았다. 집은 비록 가난하였지만 선영(先塋)에 대한 일에 있어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묻고 논의하였으며 집에 행랑이 있듯이 무덤에 교사(郊祀)를 지냈다. 매번 비 맞고 서리 맞는 서러움에 처량한 마음으로 슬퍼하며 예로써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재각을 완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씨의 묘사(墓舍)를 세우지 못한 지 오래 되어 걱정스럽고 마음이 어둡고 소심하게 움츠려 들어 충분히 의견을 내지 못하여 미안하였다. 여러 종족이 약간의 재력을 모아서 계해년 봄에 건축을 시작하여 재각에 ‘봉사(奉思)’라는 편액을 걸게 되었다. 대개 선조를 받들고 효를 생각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당시에 효향(孝享)할 뿐만 아니라 후대에 자손으로 하여금 이름을 돌아보고 그 의미를 생각하여 그 뜻과 사업을 이어가서 가업을 발전시키는 도리를3) 다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재각도 영원할 것이니 『시경』에 이르기를, “길이 효심으로 사모하니 효심으로 사모하는 것이 곧 법칙이 되니라.”하였으니 이것을 가리킴이 아니겠는가?4)
병인년 7월 상순에 족손(族孫) 전국자박사(前國子博士) 삼가 씀. 문장(門長) 문영(文榮), 도유사(都有司) 정의(廷儀), 장재(掌財) 기완(起梡)
奉思齋記
雲水之鄕 湖南名勝也 白蓮山逶迤東走 而雙鶴峰突然聚氣 山明水麗 爲堪輿家卽占吉岡 而 下有數椽斯齋 制不宏傑 而甚完美 瓦鱗屋角 翼然如飛 輝咉於松梓之間 行路之過此者 必指號而問豈主 則乃完山李文榮氏八世祖 妣海州吳氏壽藏之原齋舍也 家本淸貧 何以辦結構之費 而有此俎豆之所耶 莫非根天之誠 油然而殆竭力所致也 蓋人於奉先之節 誠心爲主財力次之 苟有誠心 何憂乎財力之不逮也 若力有餘 而誠不足 則雖傑舍豊享 何足以稱道哉 故王鯉孟筍非時而發見者 以豈至誠所致 天必然應者也 旦夫豺猢微物也 能知報本之義 以其物而祭獸魚 此亦天賦之良知也 可以人而不如乎 噫吾族文榮氏 大君先祖長房支裔也 流落湖鄕者 十餘世之修闕德 詩禮之訓 孝悌之行 實爲傳授家法 而不逾守繩墨之外 宛然爲一鄕處士 同里諸族擧皆 修身潔行 以耕讀爲業 家雖不貨 若有事先壟 則必詢謨而出議 家有廊而郊有墓 每於雨露霜露之哀 必凄慘怵惕而祭之 以禮享需祭 閣無不完備 唯吳氏之墓舍 未遑者久矣 庸足憂懼洞洞 小心縮縮 未安於足輪議 諸族鳩得若干財 迺於癸亥春 經始建築 遂扁其齋曰奉思 蓋奉先思孝之義也 此不但孝享於當時 使後世子孫顧名思義 繼志述事 克盡堂構之道 則此亦長遠之齋也 詩云永言孝思 孝思維則 其斯之謂歟
丙寅七月上澣 族孫前國子博士 謹識 門長 文榮 都有司 廷儀 掌財 起梡
백련리 영사재
백련리 영사재(永思齋)는 청웅에서 강진 방향으로 가다가 중간에 호국원을 지나 백련리가 있고, 백련마을을 거쳐 북쪽으로 300m 정도에 영사재가 있다. 영사재는 전주 이씨 통정공 10세조를 모신 재실로 상영(尙榮)의 10대조부이시다. 상량문을 보면 ‘숭정기원후 5무신 5월초’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908년에 세운 재실이며 문간 또한 단기 4316년이라고 적혀 있어 서기 1983년에 세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집으로 영사재기 현판 1개와 주련이 4개 걸려있다.
백련 영사재기(永思齋記)
묘에 재실이 있는 것은 지당한 것인데 근세 이래로 가분(家墳)과 묘방(墓芳)이 더욱 성대해졌다. 자손(子孫)이 가난하여 겨우 먹고 살고 있지만 경영(經營)에 힘을 쓰지 않을 수 없어서 추모(追慕)하는 정성을 부친다.
운수의 강진(江津) 마을 계좌원(癸坐原) 기슭은 우리 10세조 통정공(通政公)이 안장된 곳으로 세장지(世葬地)가 되면서 우리 이씨가 비로소 남쪽에서 살게 되었다.
통정공의 아들 죽천공(竹泉公)이 학행(學行)이 있어 고을 사람들이 그를 향사하였다.
아! 후손들이 오랫동안 조잔(凋殘)해져 무덤 아래 재숙(齋宿)하는 곳 없이 매년 제사를 모시되 항상 맹동(孟冬)이었고 눈비가 내리면 옷이 젖고 형용이 보잘것없어 황급하게 설행하였으니 그 처량함을 어찌 다하겠는가.
옛날에 어떤 사람이 무덤 옆에 재실을 지어 이런 때를 만나 시제(時祭)의 의식에 따라 제사를 드리는 것에 대해 물었더니 퇴옹(退翁)께서 좋다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무덤 가에 재각이 있는 것이 자손들이 재숙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더욱 없을 수 있겠는가. 이에 앞서 족형 가의대부(嘉義大夫) 경우(璟宇)씨가 무덤 옆에 재실이 없는 것을 항상 개연히 여겨 종족들의 의견을 물어 거의 완성될 무렵 돌아가셨다.
종제(從弟) 한영(漢榮)이 가의공(嘉義公)의 아들 성의(聲儀)와 함께 남기신 계획을 조심스럽게 따라 무신년 봄 비로소 재실을 건축하였다. 규모는 비록 검약하지만 자못 정결하였다. 12년 후인 기미년 가을 온 종족이 재실에 기와를 올리지 못한 점에 대해 말하면서, 묘전(墓田)에서 해마다 나오는 이바지가 얼마 안되지만 밑천으로 삼아 도와서 여러 종족들이 뜻을 내어 기와 70을 구해 얻어 덮을 수 있었다.또한 우리 집안이 남쪽으로 내려온 지 300여 년이 지나 비로소 무덤 아래 재실 한 채 지었으니 그 문장(門墻)이 누추하다고 할 수는 없었는데 기와까지 올렸으니 완미함을 겸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내가 가난한 종친으로 어려워하자 여러 종친에서 출금(出金)하고 부역(赴役)하여 완성하였으니 대저 선세(先世)에서 미처 하지 못하였던 일로 인하여 후손의 마음 속에 오랫동안 쌍여 있었다. 그래서 여러 종족들이 힘써 선조의 뜻을 이어 마침내 서로 알리게 되었다. 무릇 무덤 아래 재각이 있게 되었으니 추모(追慕)하는 곳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랴.
만약 그런 곳이 있어도 추모하는 정성이 없다면, 그것은 그런 곳이 없이도 더욱 정성을 드리는 것만 같지 못하니 밝은 세상에서 미처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예속(禮俗)이 날로 무너지는 시대를 당하여 후생소년 가운데 제기(祭器)를 구분하여 배열할 수 있고 항렬의 높고 낮음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그래서 한갓 재각 한 채 지어놓고 위선(爲先)의 일을 다 했다고 하면 이것은 옛사람들이 말한 폐학(廢學)이라고 할 만하니 부자(夫子)께서 묘(廟)를 지은 것을 옳다고 하겠는가. 오직 우리 가문의 젊은 사람들은 끊임없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 사업은 종제 문영(文榮)이 가장 애썼다.
경신년 봄 3월 갑자 통정공(通政公) 10세손 상영(尙榮)이 삼가 쓰다.
齋記
墓之有齋尙矣 而近世以來 尤盛人家墳墓呀有子孫十數而稍貯擔石者 無不極力經營以寓追慕之誠焉 雲水江津村 癸麓卽 我十世祖 通政公之壽藏也 而因爲世葬之阡 我李之南 始於通政公 公之子竹泉公 有學行而鄕人 俎豆之 嗚呼 雲仍之彫殘久矣 阡下無齋宿之所 每歲一祭時 常孟冬雨雪易降霑服 失容忽遽苟行 其所悽愴庸有旣乎 昔有問構屋墓側而遇如此之時 依時祭儀祭之者 退翁以爲吾矣 因此而知墓之有齋 非特爲子孫齋宿之所 而已矣 其尤可無也 哉先是族兄嘉義璟宇氏以墓無齋恒 切慨然合族 詢謀幾於有成而歿從弟漢榮 乃與嘉義公之子 聲儀恪循遺晝 戊申春始得建齋 制雖儉約頗完潔後 十有二年 己未秋擧宗咸以齋 未瓦爲言乃以墓田 歲供嬴餘爲資助以諸宗出義求得 瓦 七十將 以覆之也 而又以爲吾家之南也 三百有餘年 始得建一屋於墓下 而不可以陋其門墻矣 及其瓦也 開使完義可矣 余以貧宗難之而諸宗 卽又出金赴役以成之 盖先世未遑之事 因仍潜積於後昆 心中者久矣 故也 窃因諸族述先之勤意 有以相告者 夫墓之有齋 不過曰追慕之所而 已矣 若但有其所而 無追慕之誠 是不若無其所 而有其誠之爲愈也 此先行長者 所以未遑於凞世者也 今當禮俗日壤之時 後生少年其能辯俎豆之列 而識齒行之奠者 鮮矣 乃徒然以建一齋爲口先事畢了 則是古人所謂廢學而作夫子廟也 其可乎哉 惟吾宗少輩湥念之哉 此役也 從弟文榮爲㝡力焉
歲庚申春 三月 甲子 通政公 十世孫 尙榮 謹序
백련리 추모재
청웅에서 강진면 경계를 지나 첫 마을인 신기마을에서 백련산 쪽으로 1.5km쯤 가면 함양박씨 재실인 추모재(追慕齋)있다. 상량문에 단기4283년 庚寅 2월 13일 입주(立柱)하고 2월 25일 정축4시 상량(上樑)을 올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1950년에 지어진 것으로 되어있다.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시멘트기와 팔작지붕이며, 추모재기 등 7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추모재(追慕齋)’란 편액은 각을 하지 않고 써져 있는 상태로 박봉희의 낙관이 있다.
함양박씨 추모재 실기
추모(追慕)라는 것은 먼 선대의 자취를 쫓아 순임금이 요임금을 그리워 하듯이 후손이 조상을 사모하는 것이다.5) 우리 박씨의 원류는 심히 아득하여 다 기록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 고을에 들어온 것은 십수대이니 만약 실적(實蹟)에 대한 기록이 없다면 뒤에 고증하기 어렵게 되기에 간략하게 말해 두고자 한다.
우리 선조 좌령산원(左領散員) 부군 박득지(朴得止)의 부인 전주 최씨가 세 아들을 데리고 내려와 처음 임실에 거처하였으며 강진면 백련산 동쪽 기슭 임좌원에 묻혔다.
큰 아들 박예(朴隸)는 감찰(監察)을 지냈으며 부인은 순창 조씨인데 정랑(正郞) 조권(趙權)의 딸이다. 무덤은 순창 마흘리(馬屹里)에 합장하였다. 딸 하나를 두었는데 대사간을 지낸 광산 김씨 극유(克忸)에게 시집갔다. 외손이 봉사(奉祀)하였다.
둘째 아들 박정(朴楨)은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부인은 흥덕 장씨이다. 무덤은 덕치면 가곡(柯谷)에 합장하였다.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장자는 수림(秀林)으로 진사(進士)이었고 이분이 박승후(朴承後) 진사(進士)를 낳았다. 둘째는 박창림(朴昌林) 상장군(上將軍)을 지냈다.
셋째는 박기림(朴起林)으로 호군(護軍)과 부사직(副司直)을 지냈다. 부인은 문화 유씨(柳氏) 문함(文咸)의 딸이다. 무덤은 강진면 갈담(葛潭) 잉어(鯉魚) 명당에 합장하였다.
이분은 아들 넷을 낳았는데, 장자는 진사 맹호(孟豪)로 진사 박주(朴주)와 진사 박교(朴嶠), 진사 박기(朴岐)를 낳았다. 딸은 경주 이씨 임(荏)에게 시집갔다. 둘째 박중호(朴仲豪)는 문과에 급제하였고, 셋째는 진사 박계호(朴季豪)이며, 네째는 진사 박승호(朴承豪)로 이분에게는 박윤(朴潤), 박준(朴俊), 청주 한씨 대호군(大護軍) 축(軸)에게 시집간 딸이 있다.
넷째 진사 박종림(朴從林)의 무덤은 재궁동(齋宮洞)에 있으며 이분이 진사 박천호(朴千豪)를 낳았다. 무덤은 같은 곳에 있다.
다섯째 진사 박의림(朴義林)으로 막내가 박평등(朴枰登)으로 사마시와 문과에 입격하여 선교랑(宣敎郞)과 행남원교수(行南原敎授)를 지냈다. 무덤은 청웅면 구상동 손좌(巽坐)에 있다.[원래 옥전 죽방리에 있었다.] 부인은 광산 김씨로 사직(司直)을 지낸 김옥(金阿)의 딸이다. 무덤은 공이 안장된 백호등(白虎嶝) 간좌(艮坐) 언덕이다. 2남 1녀를 두었다.
장자 박현(朴玄)은 어려서 사마시에 등과하여 봉직랑(奉直郞), 군자감(軍資監) 봉사(奉事)를 지냈고 부인은 고령 신씨로 서령(署令)을 지낸 맹주(孟舟)의 딸이다. 무덤은 백련동 선영 아래 임좌원에 함께 안장하였다. 이분이 박훈(朴薰)을 낳았다. 박훈의 호는 목심재(收心齋)로 갑자년에 사마시에 입격하고 기묘년에 ‘근실유행(謹實儒行)’으로 현량(賢良)으로 추천되었다. 정암 조광조의 문인이시다. 또한 ‘탁이효행(卓異孝行)’이 조정에 알려져 호역(戶役)이 면제되고 정려가 내려졌다.
사론(士論)이 계속 일어나 학정서원(鶴亭書院)에 배향되었으며 『기묘명현록』에 그 이름이 실렸다. 부인은 부안 김씨로 판관(判官)을 지낸 김팽석(金彭石)의 딸이며 무덤은 부안에 있다. 광산 이씨로 수찬(修撰)을 지낸 이호선(李好善)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는데 무덤은 선영 아래에 합장하였다.
둘째 박현몽(朴玄蒙)은 선교랑과 풍천교수(豊川敎授)를 지냈다. 부인은 남원 윤씨로 직장(直長)을 지낸 윤계승(尹繼承)의 딸이다. 무덤은 구상동에 합장하였다.[간좌원] 이분이 박번(朴蕃)을 낳았다. 박번의 호는 인덕정(仁德亭)으로 무오년에 사마시에 입격하여 행공주교수(行公州敎授)를 지냈다. 기묘년에 효행과 학술로 현량과에 천거되었다. 호역이 면제되었고 정려가 내려졌으며 학정서원에 배향되었고 『기묘명현록』에도 수록되었다. 부인은 기계 유씨로 내금위(內禁衛)를 지낸 유문손(兪文孫)의 딸이며 무덤은 선영 아래 합장하였다. 딸은 함양 오씨 관찰사 오응(吳凝)에게 시집갔다.
수심재공(收心齋公)은 2남 1녀를 두었다. 장자 박원영(朴元英)은 군자감(군자감) 직장(直長)을 지냈다. 부인은 동복(同福) 오씨로 참봉을 지낸 오자권(吳自權)의 딸이다. 무덤은 선조비(先祖妣) 최씨의 무덤 오른쪽 쌍분[雙兆]으로 안장하였다. 둘째는 진사 박원개(朴元凱)이며 딸은 전주 이씨 이원(李轅)에게 시집갔다.
인덕정공은 2남 2녀를 두었다. 장자는 박수해(朴壽海)이며 부인 남원 양씨이며 무덤은 구상동에 합장하였다. 둘째는 박수건(朴壽乾)이고 무덤은 같은 곳에 있다. 딸들은 각각 양천 허씨 귀문(貴文)과 연안 김씨 광국(匡國)에게 시집갔다.
직장공(直長公)은 3남 4녀를 두었다. 장자는 박효달(朴孝達)이며 무덤은 백련동 왼쪽 기슭에 있다. 둘째 박충달(朴忠達)은 군자감 봉사를 지냈으며 부인은 청주 한씨로 호조참의를 지낸 한전(韓傳)의 딸이며 무덤은 같은 곳에 합장하였다. 막내 박순달(朴順達)의 호는 저정(楮亭)이다. 타고난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고 강개하며 절의가 있었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군자감 참봉으로서 의병을 일으켜 극념당(克念堂) 김천일(金千鎰)과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과 더불어 함께 전란 중에 순절하였다. 강진면 강잠(康岑) 자좌(子坐)에 안장하였다. 병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절의삼강록』에 게재되었다. 부인은 경주 이씨로 주부(主簿)를 지낸 이종문(李宗文)의 딸이다. 무덤은 합장하였다. 딸들은 각각 경주 김씨 김취련(金就鍊), 도강 김씨 원모당(遠慕堂) 김후진(金後進), 임성회(林成檜), 임성백(林成栢)에게 시집갔다.
봉사공(奉事公)은 세 아들을 두었다. 장자 박사온(朴思溫)은 봉사(奉事)에 임명되었다. 무덤은 같은 곳에 있다. 둘째는 박사량(朴思良)인데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무덤은 청웅면 향교동 자좌에 있다. 막내는 박사공(朴思恭)이며 무덤은 청룡리(靑龍里) 서쪽 기슭에 있다.
저정공(楮亭公)은 세 아들을 두었다. 장자는 박사묵(朴思默)이다. 둘째 박사숙(朴思淑)은 부군이 순절하는 모습을 보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형제가 다시 의려(義旅)를 모았다가 전란에서 순절하여 충효를 둘다 온전하게 하였다. 이사익(李思益)의 호는 동고(東皐)이다. 전란이 끝난 시기에 가법(家法)을 근수(謹守)하였다. 매년 선공(先公)의 기일(忌日)에는 피를 토하며 흐느끼며 식음을 물리쳤다. 방백(方伯)이그 충문(忠門)의 효를 안타깝게 여겨 여러 차례 천목(薦目)에 올랐다. 마침내 은덕(隱德)하여 출사하지 않았다. 무덤은 강잠(康岑)의 선영 아래 있다. 그 나머지 분역(墳域)은 분파(分派)에서 수호(守護)하고 있다.
아! 한 집안에서 삼강(三綱)이 세상에 나왔다. 삼충구효오열(三忠九孝五烈)에 이르기까지 많아 여기에 전부 세세히 기록할 수가 없다. 품은 추감(追感)이 어찌 감히 말로 하겠는가. 오직 우리 가문이 충효(忠孝)를 이어가고 가업을 이어가며 닦아 화목하게 지내는 가풍을 삼가 힘써 없어지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무오년 9월 상순 후손 종헌(琮憲)이 삼가 지음 유사 혁근(爀根) 정두(廷斗) □□ 글씨를 씀.
咸陽朴氏 追慕齋 事實記
追慕者追遠代之蹟而後孫 羹墻之慕寓焉 我朴之源流甚遠 不能盖錄 然入玆鄕十數代 若無實蹟之記則 難以證後 故略言之 惟我先祖 左領散員 府君諱得止 配全州崔氏 率三子始居任實 墓江津面白蓮山 東麓 壬坐 長曰諱隸 監察 配淳昌趙氏 正郞 趙權女 墓淳昌馬屹里合兆 只有一女 適光山金氏 大司諫諱忸 外孫奉祀 次曰諱楨縣監 配興德 張氏 墓德峙面柯谷合兆 有五子 長諱秀林進士 寔生諱承後進士 次諱昌林上將軍 諱起林護軍 副司直 配文化柳氏文咸女 墓江津面葛潭鯉魚明堂合兆 寔生四子 長諱孟豪進士 寔生諱주進士 諱嶠進士 諱岐進士 女慶州李氏諱荏 次諱仲豪文科 次諱季豪進士 次諱承豪進士 寔生諱潤 諱俊 女淸州韓氏 大護軍諱軸 四諱從林進士 墓齋宮洞 寔生諱千豪進士 墓上同 五諱義林進士 季曰諱枰登 司馬兼文科宣敎郞行南原敎授 墓靑雄面九相洞 巽坐【元玉田 竹坊里】配光山金氏 司直 諱阿女 墓公兆白虎嶝艮坐 有二子一女 長諱玄 童登司馬 奉直郞 軍資監 奉事 配高靈申氏署令孟舟女 墓白蓮洞先塋下任坐合兆 寔生諱薰 號收心齋 甲子登司馬 己卯以謹實儒行 薦賢良科 卽靜菴趙先生門人也 且以卓異孝行 事聞于朝 給復命旌 士論繼起 俎享鶴亭書院 昭載己卯賢錄 配扶安金氏 判官 諱彭石女 墓在扶安 配鑛山李氏修撰諱好善女 墓先塋下合兆 次諱玄 蒙 宣敎朗 豊川敎授 配南原尹氏 直長繼承女 墓九相洞合兆 寔生蕃 號仁德亭 戊午中司馬 行公州敎授 己卯以孝行學術 薦賢良科 以爲旌復俱享鶴亭書院 亦載己卯名賢錄 配杞溪兪氏 內禁衛諱文孫女 墓先塋下合兆 女咸陽吳氏 觀察使諱凝 收心齋公有二男一女 長諱元英 軍資監直長 配同福吳氏 參奉諱自權女 墓先祖妣崔氏墓右雙兆 次諱元凱進士 女全州李氏諱轅 仁德亭有二子二女 長諱壽海 配南原楊氏 墓九相洞合兆 次諱壽乾 墓上同 女陽川許氏諱貴文女 延安金氏諱匡國 直長公有三男四女 長諱孝達 墓白蓮洞左麓 次諱忠達 軍資監奉事 配淸州韓氏 戶曹參議諱傳女 墓上同合兆 季諱順達 號楮亭 天性俊邁慷慨有節 當壬辰之燹 以軍資監參奉 應募擧義 與克念堂金公千鎰 霽峰高公敬命 同殉于戰亂 ?葬于江津面康岑子坐 贈兵曹參判 載節義三綱錄 配慶州以氏主簿諱宗文女 墓合兆 女慶州金氏諱就鍊 道康金氏遠慕堂諱後進 女林成檜 女林成栢 奉事公有三子 長諱思溫奉事 墓上同 次諱思良通政大夫 墓靑雄面鄕校洞子坐 季諱思恭 墓靑龍里西麓 楮亭公有三子 長諱思默 次諱思淑 見先父君死節 不勝憤恨 兄弟更募義旅 亦殉于戰亂 忠孝雙全 季諱思益 號東皐 搶攘之餘 護守家法 每當先公忌日 泣血却食 方伯憐其忠門之孝 屢登薦日竟隱德不仕 墓康岑先塋下 其餘墳域分派 守護 嗚呼 一門 三綱聞世出焉 至於三忠九孝五烈之多 而擧未細錄于此 追感之懷曷勝敢言 惟願吾族克紹忠孝緖業式修敦睦家風恪勤勿替云
歲戊午 九月 上旬 後孫 琮憲 謹識 有司 爀根 廷斗 □□ 書
백련 추모재기(追慕齋記)
증자(曾子)가 이르기를, “부모의 장례를 신중하게 치르고 조상을 추모하면, 백성들이 모두 두터운 덕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자손이 많아서 비록 천만인에 이른다고 하더라도 그 근본은 하나이다. 천만인이 한 가지에 정성을 돌린다면 추모하는 마음이 아무리 천만년이라도 하루와 같다. 화목하는 마음은 비록 천만인이라도 한 사람 같으니 그 덕이 중후(重厚)하지 않겠는가!
학고(鶴皐)의 서쪽, 연산(蓮山)의 동쪽은 우리 선조(先祖)와 그 부인 전주 최씨의 유택지(幽宅地)이며 대대로 계속 안장된 곳이다. 묘 아래 오래된 재각(齋閣)이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기울고 무너져 비마저 새서 위로는 비가 몰아치고 바람이 들이치는 염려를 면할 수 없었다. 여러 종족이 의견을 내서 보수하였다. 오래된 기둥을 새로운 재목으로 바꾸고, 처마가 새서 새 띠로 덮었다. 전보다 다섯 배나 깨끗하고 청결해져 더욱 유사(有司)가 사람을 얻었음을 알 수 있겠다. 이름을 걸기를, ‘추모(追慕)’라고 하였다. 대개 증자에게서 취한 뜻이다. 다만 봄이슬 가을서리가 내리는 철에 우리 자손들이 무덤을 살피고 쓸며 모든 소목(昭穆)이 많고 성대하구나.6) 추모하는 정성이 유연(油然)하여 당헌(堂軒)에 가지런히 늘어서서 형이라고 하고 동생이라고 하니 즐겁고 기쁘구나.
돈목(敦睦)하는 가풍이 왕성하게 일어나서 ‘백성들이 모두 두터운 덕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이라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물의 흥망성쇠가 사물의 이치이니 역에는 건곤(乾坤)이 있고 건곤도 늙지만 천지마저 오히려 장구하지 못한데 하물며 사람이 만든 재실(齋室)이겠는가! 부디 힘써야 할 것이다. 후손들이 잘 이어받아 쫓아야 할 것이다. 드러나지 않은 선조의 뜻을 아름답게 추모하며 조상의 숨은 덕을 밝혀야 할 것이다. 서까래 하나 하나 변질되면 지붕을 완전하게 할 것이며 소나무 한그루 가래나무 한그루 정성껏 마련하여 보호하고 길러야 할 것이다. 항상 변하지 마음이 있어야 하니 학고와 연산과 더불어 천년토록 무궁할 것이다.
무오년 9월 상한(上澣)에 후손 홍근(泓根)이 삼가 쓰다. 문장(門長) 준근(準根) 유사(有司) 일근(泆根), 정모(廷謨) 간사(幹事) 정두(廷斗), 종헌(琮憲)
追慕齋記
曾子曰愼終追遠 民德歸厚 子孫之多 雖至千萬人其本則一也 以千萬人歸誠于一則追慕之心 雖千萬年一日也 惇睦之情 雖千萬人一身也 其德不重 且厚歟鶴皐之西 蓮山之東 卽我先祖妣 全州崔氏幽宅之地 而屢世繼葬之所也 墓下舊有齋閣 歲月滋久欹漏傾頹未免上雨旁風之虞矣 諸宗出義修補棟之舊易以新材檐之漏 盖以新茅 瀟洒淸淨 倍蓗於前益知有司之得 人焉 因揭號曰追慕 盖取曾子之意也 第當霜露之節 惟我子孫 瞻掃封瑩 咸昭咸穆洋洋焉 濟濟焉 遠慕之誠油然而生序列堂軒曰 兄曰弟怡怡也 嬉嬉也 惇睦之風 藹然而發 民德歸厚 寔在於此矣 然而物之盛替物之理也 易有乾坤而乾坤亦老天地猶不能長久 况人所作爲之齋屋乎 勗哉後昆克紹而趾美追先志之徵闡祖德之幽一榱一椽隨渝而完葺之一松 一楸設誠而 護養之常有勿替之心 則與皐之鶴山之蓮將無窮於後千秋云爾
戊午 九月 上澣 後孫 泓根 謹記 門長 準根 有司 泆根 廷謨 幹事 廷斗 琮憲
백련 추모재(追慕齋) 중건기(重建記)
운수(雲水) 서쪽 옥천의 북쪽에 산이 하나 있는데 울창하게 우뚝 서 있는 백련산(白蓮山)이다. 이 산은 우리 박씨의 선조 좌령공(左領公)과 그 부인 최씨가 재난을 피하여 내려와 사셨던 곳이다. 세대가 쌓여 내려오면서 재사를 중건하였는데 그 사실(事實)에 대해서는 전에 적어 잘 갖추어 두었기에 다시 쓸 필요는 없겠다.
산의 동쪽 기슭에 홀로 우뚝한 빼어난 것이 선조와 그 부인 최씨께서 친히 정한 유택지(幽宅地)이다. 이후 증손, 현손 후손들이 잇달아 안장된 곳이기도 하다. 수호하는 사람들이 오백여 년 시간 속에 여러 무덤과 재각이 기울어져 무너지는 것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후손들이 통탄하였다.
기축년 가을에 중건하자고 발의하여 모든 종족이 힘을 다해 의연금을 내어 경인년(於庚寅) 연초에 공사를 시작하여 6월에 마치었으니 어찌 부지런히 일한 유사(有司) 홍린(泓麟)의 정성과 종규(宗規)를 엄정하게 세운 대공(大功)이 아니겠는가!
가장 한스러운 것은 홍린이 일찍 세상을 떠나 버렸고 기와마저 충분하지 못해 3년이 되지 않아 물이 새서 스며드는 근심이 생긴 것이다. 유사 홍룡(泓龍)이 즉시 회의를 열어 소나무를 팔아 마련한 6만원을 기본으로 민의원(民議院) 세경(世徑) 특별히 10만원을 내고, 각지에 거주하는 여러 후손들이 형편에 따라 성의를 내어 재실 공사를 마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모두 추모하는 지극한 정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뒤를 이어갈 자손들도 뜻을 계승하는 정성으로써 힘써 잘 관리한다면 이 재각은 영원할 것이리라.
단기 4288년 을미 10월 상한 후손 영선(泳善)이 삼가 짓다.
문장(門長) 성현(聖賢) 도유사(都有司) 홍룡(泓龍) 고문(顧問) 홍구(泓龜), 상엽(湘燁), 세남(世南) 유사 용철(容喆), 재남(在南), 창헌(昌憲), 순연(順然) 泓□, 동일(東泆), 동용(東龍), □□, 華□
追慕齋重建記
雲水面 玉川之北 有一山鬱然特立者 白蓮山也 玆山惟吾朴氏先祖左領公 夫人崔氏避禍棲息之所也 世代之籍縷來歷 齋舍之重建事實前記之述備也 不必疊床 而山之東麓兀然深秀者 先祖妣 夫人崔氏自占幽宅之地 而伊後孫曾玄蓮葬之處也 守護者五百餘年 星霜累度齋閣 未免傾頹 實是雲仍之痛歎 己丑秋 以重建發議 僉族盡力捐金 始役於庚寅歲初 六月而工訖 此豈非有司泓麟之誠 勤嚴立宗規之大功哉 最恨者泓麟 已爲蚤世 瓦不充分 未三年而有滲漏之患 有司泓龍 卽開會議基 以賣松金六万圓 而民議員世徑 特出十万圓 各居諸孫隨分出義 齋役乃得完了 此皆出於追慕之至誠也 後之子孫亦以繼志之誠 勉黽嗣葺 則庶斯齋之不杇矣
檀紀 四二八八年 乙未 十月 上澣 後孫 泳善 謹識
門長 聖賢 都有司 泓龍 顧問 泓龜 湘燁 世南 有司 容喆, 在南, 昌憲, 順然, 泓□, 東洙, 東龍, □□, 華□
백련 추모재(追慕齋) 중건기(重建記)
아! 우리 16세조 좌령산원공(左領散員公)이 여말(麗末)에 태어나셨는데 충의(忠義)는 일월보다 밝았고 지조는 빙설(氷雪)보다 늠름하였는데 현달하지 못하고 생을 마치셨다. 그 부인 최씨가 아들들을 데리고 임실군 강진면 백련산 아래에 거처하였다가 청웅면 구고리(九皐里)로 옮기셨다.
지금 그 유지(遺址)가 눈앞에 완연하게 있으니 자손된 자로 누군들 공경함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부인의 무덤은 백련사 동쪽 기슭에 임방(壬方)을 등진 언덕에 있다. 모두 오백여 년을 지켜오다 보니 재사(齋舍)는 성상(星霜)을 겪으면서 거의 기울어 무너졌다. 후손들이 각처에 흩어져서 중건하고자 하였으나 그 뜻을 미처 이루지 못하였다. 작년 가을 묘제(墓祭)를 지낼 때 문장(門長) 및 용식씨(庸植氏)와 몇 사람이 그 일에 대해 앞장서서 말하였는데 온 종족이 즐거이 따르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이것이 어찌 오래전부터 추모하였던 똑같은 마음이 아니겠는가? 서로 다투듯이 앞장서서 힘을 다해 연금을 내고 송추(松楸)를 내놓았다. 연초에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몇 개월 되지 않아 공사를 마쳤다.
아무리 물건이 있으면 성사되지 않을 수 없겠지만 정성 없이는 성사되지 않는 법이다. 족형(族兄) 홍린(泓麟)씨가 아니었다면 이 재각을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홍린이 유사의 책임을 담당하여 바야흐로 이렇게 바쁜 농사철에 개인적인 일을 돌아보지 않고 엄직하고 규모있게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았다. 이것은 진실로 깊이 추모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후인들은 진실로 그 뜻을 계승하여 힘쓰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이 재각의 이름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불초(不肖)도 후손으로서 비록 그 발자취를 쫓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 성심(誠心)에 감동하여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어서 삼가 위와 같이 쓴다.
경인년 4월 하순에 후손 홍래(泓來) 삼가 적음
문 장(門 長) 박성희(朴聖熙) 도유사(都有司) 박홍린(朴泓麟) 발기인(發起人) 박병헌(朴炳憲), 박홍구(朴泓龜), 박용식(朴庸植), 박홍두(朴泓斗) 박동교(朴東敎), 朴□□, 朴□□, 박세남(朴世南), 박재희(朴在熙) 박홍룡(朴泓龍), 박용철(朴容喆), 박병문(朴炳文)
追慕齋重建記
嗚呼 惟我十六世祖 左領散員公 出於麗末 而忠義昭乎月 節操凜於氷雪 而身不容顯跡而終 夫人崔氏率二子焉 任實郡江津面白蓮山下 後徙靑雄面九皐里 今其遺址 宛在目前 爲之子孫者 孰不起敬也哉 夫人墓在白蓮山東麓 負壬之原 守護五百有餘年 而齋舍累經星霜 幾至傾頹 雲仍散在各處 見欲重建有志未遑矣 昨秋墓祭時 門長及庸植氏數人 倡言其事 而僉族無不樂從 此豈非追慕之夙所一般者哉 乃相爭先盡力捐金 又放松楸補其不足 始役於歲首 不數閒而訖工 雖曰有物則無不可成 無誠亦不能就 若非族兄泓麟氏 此齋幾乎不成 泓麟擔當有司之責 方此農殷 不顧私事 嚴直規模 終始如一 此乃寔出於追慕之源也 後人苟能繼其志而 黽勉不己 則此齋之名永爲不杇也 不肖亦苗裔 而雖不能追踵感其誠心 不能無一言 而謹記如右
歲庚寅 四月 下澣 後孫 泓來 謹撰
門長 朴聖熙 都有司 朴泓麟 發起人 朴炳憲, 朴泓龜, 朴庸植, 朴泓斗, 朴東敎, 朴□□, 朴□□, 朴世南, 朴在熙, 朴泓龍, 朴容喆, 朴炳文
부흥리 풍천임씨 재실
이 재실은 부흥마을 앞 도로에서 3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마을 안길을 따라 들어갈 수 있다. 이 재실은 풍천임씨(豊川任氏) 재실로 30여년전에 지어졌으며 편액은 걸려있지 않고 있다. 규모는 정면 3칸이며 측면 2칸으로 되어 있고 함석기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임씨들이 부흥리에 정착한 연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50년전 임정주씨의 조부께서 이마을에 정착하여 자손이 번창 하였으며 30여세대가 살다가 각처로 분산하여 살고 있다고 한다.
상필마을 영효재
상필마을 영효재(永孝齋)는 필봉농악의 발상지로 유명한 상필 마을 뒤쪽으로 밀양박씨 규정공파 집안의 재실이 있는데 영효재이다. 이 재실은 상냥문에 4292년 己亥 10월 3일 입주라고 기록되어 있어 1959년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영효재는 정면 3칸으로 되어 있고 측면은 2칸으로서 팔작 기와지붕으로 지어졌다. 편액과 함께 주련은 2개만 걸려 있고 앞에 일주문이 지어졌다.
갈담마을 영모재
감담마을 영모재(永慕齋)는 사곡리 자경마을 경주이씨 재실로 갈담 마을에서 동남쪽으로 군우교를 건너면 우측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이 재실은 정면이 3칸이며 측면이 1칸으로 되어있고 사방으로 돌아가며 기둥을 세워 툇마루를 조성하였다. 비교적 견고한 재실이지만 관리가 안되고 있는듯 하였다. 재실 상냥문에는 세재 辛酉 12월 15일 庚辰 신시 입주(立柱)라고 적었으며 동월 29일 갑오 인시에 상냥(上樑)이라고 적혀있어 1921년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재실 안에는 현판이 3개가 있고 재실밖에도 2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백련마을 영사재
백련마을 영사재(永思齋)는 백련마을 안에 위치하고 있다. 안동권씨의 재실로 전면 4칸 측면 3칸으로 1989년 기사(己巳) 4월 29일 입주하여 동월 4월 30일 갑오 4시 상냥 이라고 적혀 있음을 확인하였다. 지붕은 옹기기와로 반영구적이며 정면 4칸에 측면 3칸으로 되어있고 주련이 5개가 걸려있다. 문살은 정교하게 조각되어 정면이 4짝이며 옆면이 2짝씩으로 있어 고풍스럽게 지어져 있다. 솟을대문이 있으나 관리가 부족한 면을 발견 할 수 있고 일부 부서진 면도 확인 할 수 있다.
1) 원문의 무첨소생(無忝爾所生)은 《시경》 〈소완(小宛)〉에 “내 날로 매진하거든 너도 날로 매진하라. 일찍 일어나고 밤 늦게 자서 너를 낳아 주신 분을 욕되게 하지 말라.〔我日斯邁 而月斯征 夙興夜寐 無忝爾所生〕” 하였다. 늘 노력하여 부모를 욕되게 하지 말라는 뜻이다 2) 원문의 王鯉孟筍은 진(晉)나라 때 효자인 왕상(王祥)의 고사(故事)와 오(吳)나라의 효자(孝子) 맹종(孟宗)의 고사를 가리킨다. 왕상은 계모가 병이 들어 한겨울에 잉어〔鯉魚〕가 먹고 싶다고 하자, 강에 나가 옷을 벗고 얼음 위에 엎드리니 얼음이 스스로 녹으며 물속에서 잉어가 뛰어나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맹종은 늙고 병든 어머니가 겨울에 죽순을 먹고 싶어 하자 안타까운 마음에 대숲에 들어가서 슬피 울었는데, 갑자기 땅 위로 죽순 두어 줄기가 나왔으므로 가지고 돌아가서 어머니에게 드려 병을 낫게 하였다고 한다. 3) 원문의 堂構는 긍당긍구(肯堂肯構)의 준말로, 가업(家業)을 이어받아 발전시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서경》 〈대고(大誥)〉의 “아버지가 집을 지으려 하여 이미 설계까지 끝냈다 하더라도, 그 자손이 집터도 닦으려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집이 완성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若考作室 旣底法 厥子乃不肯堂 矧肯構〕”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4) 《시경(詩經)》 〈하무(下武)〉에 “길이 효심으로 사모하니 효심으로 사모하는 것이 곧 법칙이 되니라.〔永言孝思, 孝思維則.〕”라 하였다. 5) 원문의 갱장(羹墻)은 어진이를 사모하는 말이다. 《후한서(後漢書)》 이고전(李固傳)에, “순(舜)이 요(堯)를 사모하여, 앉아 있을 적에는 요 임금을 담에 뵙는 듯하고, 밥 먹을 적에는 요 임금을 국에서 뵙는 듯했다.” 하였다. 6) 昭穆) : 주(周)나라 문왕(文王)과 아들 무왕(武王)이 소목(昭穆) 관계를 이루며 태묘(太廟)에 봉안된 차례를 말함. 소목은 종묘 등 사당에서 적용하는 신주의 배열 순서로 왼편은 소(昭), 오른편은 목(穆)이라고 하는데, 이를테면 아비가 소(昭)이면 아들은 목(穆), 손자는 소, 증손은 목으로서 서로 엇갈리게 배열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