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거수와 마을 숲
임실군의 역사와 지리적 조건
임실군(任實郡)은 지형적으로 전라북도의 동 남쪽 내륙에 위치하고 대부분은 섬진강 상류 의 중산간지로 전체면적 598㎢중 75%가 임야에 속하며 20여%가 농경지 이다. 백두대간의 호남정맥에 속하여 북동쪽으로 진안군, 남동쪽으로 남원시, 남쪽으로 순창군, 북서쪽으로 정읍과 완주군에 접해 있다. 노령산맥이 군을 지나고 있어 산지가 많은 편이고, 일부 지역에 분지가 발달되어 있다.
동쪽으로는 성수산에서 발원한 둔남천이 흐르고 섬진강 상류인 오원강은 중간에 관촌 방수리의 숲을 이루고 성미산성과 방현 산성의 사이를 지나 사선대에 풍광을 이루다가 신평면 대리와 원천리를 지나면서 넓은 평야를 관개하고 있으며, 운암면에 이르러 전라북도 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는 옥정호가 1965년 말에 준공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요 산으로는 고려를 건국한 왕건과 태조 이성계가 기도를 하고 등극하였다는 성수산을 비롯하여 고덕산, 임실의 용요산과 두만산, 강진의 백련산, 덕치의 회문산, 청웅의 백이산, 신덕의 정각산, 운암의 나래산은 그 위용이 대단하여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주요 산들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임실군은 삼국시대 마한의 청웅현靑雄縣 이었다가 임실현(일명 운수현雲水縣이라고도 함)으로 개칭하였다. 통일신라시대 남원부에 속해 군이 되었다가 임실현이 되었다. 그 후 조선말인 1896년 남원부의 둔덕방屯德坊·오지방梧枝坊 말천방, 아산방, 석현방 등 5개방이 임실군에 편입 되었다가 1914년 일제강점기 지사방只沙坊이 다시 남원南原으로부터 임실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삼국사기지리지』에“임실군任實郡은 본래 백제의 군郡이었는데, 경덕왕이 주군州郡의 이름을 고칠 때에도 임실은 고치지 않고 지금 까지도 모두 그대로 쓰고 있다. 또한 영현이 둘 이었는데 마령현馬靈縣과 청웅현靑雄縣”이라는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이를 통해 본다면 임실은 그 이전부터 지명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고려사지리지』에“고려시대에 와서 남원부南原府에 소속시켰으며, 명종 2년(1172)에 감무를 두었다.”고 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임실 현으로 수록되어“태종 13년(1413) 계사에 감무를 고쳐서 현감縣監으로 하였다.”라고 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백제시대에 잉힐仍掱이었던 임실이 신라 시대에 이르러 임실任實로 고쳐졌다.”고 하여 잉힐仍掱이라 는 이명異名도 확인할 수 있다.
노거수와 마을 숲
노거수의 형태
노거수는 노수老樹와 거수巨樹의 합성어로 오래 된 나무, 또는 큰 나무라고 말한다. 노거수는 수령이 오래된 고목古木을 뜻하는 말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노거수를 경배敬拜의 대상으로 신성시 했는데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떠받들고 있다 하여 하늘과 통 하는 통로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노거수의 신성神聖한 기운氣運에 대한 많은 전설傳說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나라의 변고가 있을 때마다 울었다는 용문사 은행나무,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 준다는 행궁 느티나무, 말없는 믿음의 신뢰 그 속에서 마음의 중심을 찾을 수 있는 깨달음을 전해주었던 노거수, 옛 선조들이 노거수에서 깨달았던 마음의 중심은 무엇인가.
농촌마을 곳곳에 심겨진 이 노거수들은 수령이 오래 되고 모양새도 풍성해 봄·여름·가을·겨울 마을의 풍요로움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존경을 받았다. 수백 년 고령으로 이 정자나무는 누구든 나무를 상하게 하면 벌을 받고, 나무를 위하면(마음으로) 흥興 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잎이 무성한 이 나무는 그늘이 마을 주민 전체를 덮어줄 만큼 넓고 짙다. 아무리 더운 날이라도 이 나무 아래에 앉아 있으면 땀이 가신다.
잠을 자지 않는 사람은 짚신을 삼거나 새끼를 꼬았고, 장기를 두거나 아이들은 공기놀이를, 그리고 어떤 날은 큰 싸움이 발생하기도 했다. 물론 화해의 장소도 이곳이었다. 이 정자나무 아래에서는 마을의 크고 작은 일들이 발생했다가 일정 시일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해결되는 해결장소이기도 했다. 노거수는 나무의 수령이 오래되고 커다란 나무로 대개 속이 비어있어 수령을 정확히 판단하기가 어려워 대부분 구전을 따라서 수령을 추정한다. 우리나라의 노거수에 대한 조사는 일제강점기이 1938년 조선총독부 임업시험장(현 국립산림과학원)이 발행한 ‘조선의 임수“가 처음이며, 그 후 1972년에 내무부가 발간한 ‘보호수’에 따르면 수령100년 이상 된 나무가 13만 784주로 나와 있다. 이들은 대부분 한마을의 전설과 사연을 가지고 있으며 당제목堂祭木,신목神木으로 존엄성을 지니고 있다.
노거수는 역사, 문화, 생태학적으로 그 지역에서 오랜 동안 꿋꿋이 자리를 지켜옴으로서 마을이나 지역의 당산목, 치목, 신목, 성황목 으로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가진 그 지역의 수호신과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또한 과거 그 지역 주민의 생활에 힘이 되는 존재였으며 신화, 설화, 전설, 종교 등 민속 민담 민족종교에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해서 그 마을의 기원이나 주민들의 생활상을 짐작케 하거나 보여주는 사료적 가치가 크다.
마을 숲의 형태
마을 숲은 마을 주민들의 공동체적 삶을 담아 의도적으로 목적을 갖고 조성된 숲’을 의미한다. 또한 마을 숲은 우리선조들의 문화적인 가치와 규범, 토지에 대한 태도 등을 종합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조상들의 지혜와 숨결이 집약된 한국적 문화경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문헌상에 나타난 최초의 물 피해를 막는 수방림은 1428년(세종10) 평안남도 안주에 안주임수가 처음 조성되었다. 우리나라의 마을 숲은 첫째 그 지역의 자연환경과 기후조건에 맞는 환경생태경관이고, 둘째 그 지역 향토수종을 이용한 향토 지표경관 으로서의 의미하며, 셋째 마을주민들의 이념과 신앙을 통합하는 토속신앙경관으로서 문화적 보전 가치가 있다. 따라서 우리가 보전하고 가꾸어야할 소중한 문화유산이자 향토경관 문화재이다.
전북지역에 ‘조선의 임수’에 기재된 곳은 전주 건지산, 덕진지, 고산임수(현 고산초운동장 동편)3곳이 있고, 임실지역에는 조사 된 게 없다. 그러나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임실 지역의 조선시대 이전에 형성된 자연마을엔 거의 모두에 마을 숲이 조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임실지역의 보호수는 대부분이 느티나무이며,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는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으나 지정이 안 된 노거수와 대부분의 마을 숲은 주민 편의시설 설치 ,도로개설과 포장, 농기계 적치, 농산물 및 부산물 등을 나무 주위에 쌓아놓아 생육에 심각한 지장을 주고 있다.
하루속히 나무 주변에 깔린 콘크리트 포장재와 복토된 흙을 걷어내고 주변에 쌓아둔 농기계나 거름 등을 치우고 배수가 잘되도록 배수로를 정비하여야 한다. 또한 최근에 나무 주변을 조경의 목적으로 복토한곳이 많은데 이 역시 속히 걷어내어 뿌리가 숨 쉬도록 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하며, 이로서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문화유산인 보호수와 마을 숲을 보존하여 후세에 물려주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마을 숲과 인간과의 관계
첫째 인류와 숲의 관계로서 인류는 집단생활을 통하여 침구나 의류를 나뭇잎이나 나무의 껍질, 짐승의 가죽 등으로 만들어 겨울의 한기를 막아낸 것이다. 그 후 나무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면서 나무는 의식주의 중요한 요소가 되어 왔다고 보여 진다. 즉 인간의 인체를 한기로부터 보호하고 나무 열매나 나뭇잎 껍질 등으로 식생활을 해결하고 나무를 이용하여 기거할 가옥을 마련하는 등, 나무는 인간의 필수적인 존재로 등장하게 되면서 씨족 집단체가 구성되었으며 우리 민족은 3세기경부터 부족의 통합 운동과 국가 집단 체제를 이루게 되면서 숲에 대한 체계적 인식을 갖게 되었다고 본다.
두 번째 고대민족 생활과 숲의 관계에 있어서는 원시적 민족사회에서는 혈연으로 사회공동 집단체를 형성하고 이들 민족사회는 혼인의 관계에 의하여 민족 상호간의 서로 접촉하고 연결되면서 지연적 공동 집단체로 뭉쳐서 확대되는 과정에서 부족사회의 집단 체를 형성하였다. 이로 인하여 인간의 유목생활에서 농경생활로 정착하면서 부족 간에 집단 마을이 형성되고 무성했던 산림은 농경지나 목초지 또는 맹수 등을 방지하기 위한 인간 집단생활 주거지를 확보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로 인하여 숲의 유래는 기록에 의하면 삼국시대 이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었고 마을을 보호하고 풍수해 또는 외세로부터 보호 주민생활의 안녕들을 위한 숲이 조성되었으리라고 본다.
세 번째로 인간 취락과 마을 숲의 관계에 있어서 마을 숲의 의미를 둔다면 마을 숲이 지니는 문화적 의미는 아주 다양하다. 민속으로는 마을 사람들의 신앙의 대상으로서 , 풍수지리 적으로는 좋은 땅을 조성하는 구조물로서 심미적으로는 풍치의 장소로서 이용후생으로는 휴식, 집회, 놀이, 운동 등과 같은 여러 가지 활동을 수용하는 터전으로서 그리고 방풍림, 방제림, 등과 같이 바람과 홍수 등을 막아 마을을 안락하게 해 주는 방패로서 외부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고 시각적으로 가리는 구조물로서 또는 마을의 영역을 경계 짓는 상징적 장소로서의 역할을 하는 문화 통합적 시설인 것이다.
마을 숲의 개념을 적어본다면 마을 숲이란 자생하여 산림이나 목재를 이용할 목적으로 가꾼 단순한 산야의 일반적인 숲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마을 숲은 마을의 역사, 문화, 신앙 등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진 마을 사람들의 생활과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고 있는 숲으로서 마을 사람들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조성되어 보호 또는 유지되어 온 숲을 말한다. 그런데 우림나라는 근현대의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 속에서 특히 1970년대 새마을운동으로 마을길을 확장하고 농로를 내면서 전통적인 경관과 요소들이 많이 파괴되고 훼손되어 왔다.
앞으로도 도시화 경향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며 이에 따라서 농촌에 대한 불확실성과 불안이 기증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농촌은 아직 전통이 살아 숨 쉬고 있고 산업화의 여파가 덜 미친 삶의 터전으로 인식이 남았으며 이 시대를 구원 할 성스러운 공간으로서의 기능이 어느 때보다. 요청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모둠 살이의 구체적 단위이며 마을공동체 삶의 표출로 마을 주변에 조성되고 보호되어 온 숲이 마을 숲이다.
따라서 마을 숲의 상징적 기능으로는 마을 숲의 풍수적 수구막이 역할을 택리지(擇里誌)의 복거총론(卜居叢論)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무릇 수구가 엉성하고 넓은 한 곳에 비록 좋은 밭 만 이랑과 넓은 집 천 간이 있다 해도 다음 세대까지 내려가지 못하고 저절로 흩어져 없어진다. 그러므로 집터를 잡으려면 반드시 수구가 꼭 닫힌 듯하고 그 안에 들이 펼쳐진 곳을 눈여겨보아서 구할 것이다. 그러나 산중에서는 수구가 닫힌 곳을 쉽게 구할 수 있지만 들판에서는 수구가 굳게 닫힌 곳이 어려우니 반드시 거슬러 흘러드는 물이 있어야 한다. 높은 산이나 그늘진 언덕이나 역으로 흘러드는 물이 힘 있게 판국을 가로 막았으면 좋은 곳이다.
이런 곳이라야 완전하게 오랜 세대를 이어나갈 터가 된다. 여기서 길지(吉地)를 이루기 위해서는 수구가 닫힌 곳을 찾거나 수구막이를 하여야 하는데 이럴 경우 마을 숲이 가장 현실적이다.」 수구막이 혹은 수구맥이는 풍수적 배경을 갖는 마을 숲이다. 여기서 수구막이는 마을 앞쪽으로 물이 흘러가는 출구나 지형 상 개방되어 잇는 마을의 앞부분을 은폐하기 위해 가로로 길게 선형으로 심은 인공의 마을 숲을 지칭한다.
또한 숲은 마을이 형성될 무렵에 입지적으로 허함이 있는 곳을 비보(裨補)하기 위해서 조성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숲은 거의 모든 마을에서 나타난다. 마을 숲은 일반적으로 수구막이 역할을 하는데 그 활용에 있어서는 비보림과 엽승림이 있다. 비보림 이란 풍수상의 흠, 즉 부족한 점을 인위적으로 조작하여 보완한다는 개념이다. 엽승림이란 풍수적으로 불길한 기운을 눌러서 제압하는 의미의 풍수용어인데 불길한 요소가 있는 방향을 가로막아 불길한 기운이 마을에 미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숲을 엽승림이라 한다. 요사이 답사를 하다보면 예전에 마을 숲을 훼손하였다가 마을에 불길한 일이 발생하자 다시 숲을 조성하는 마을도 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마을 숲의 신앙성, 신성성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마을 숲은 신앙적 배경도 있다고 본다. 인간과 마을 숲의 문화에 대해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인류가 마을을 형성하면서부터 공존하여 왔다고 보며 숲으로부터 사상과 이념을 창출해 내며 인간과 숲의 자연윤리가 존립되면서 숲을 숭상하게 되었고 숲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나무나 인간이 신성 시 여겼다. 숲에 민속신앙을 조화시켜 천신천신, 목신(木神), 석신(石神), 산신(山神) 등을 안치하여 마을의 안녕과 평화와 재앙을 막는 곳, 조탑과 솟대와 장승을 세우고 조탑제와 당산제를 지내며 마을의 안녕과 가정의 건강을 축원하는 곳으로서 마을 숲은 수호신의 역할을 하여 왔다고 본다.
이어서 강진면 관내의 노거수와 마을 숲의 개별적인 내용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강진의 노거수
갈담마을 당산목
강진소재지를 예전에는 가단으로 불렀다. 신라 때 왕족인 박씨가 이곳에 찾아와 거주했다 하여 왕박골 이라고도 하고 조선조에는 광주 목에서 전주를 오고 가는데 마방인 갈담원葛潭院 설치되었던 곳이다. 갈담은 칡 갈葛자와 못 담潭자를 쓴다. 갈담리 당산목은 갈담리 357-5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강진 면에서 갈담 마을을 분리 하며 경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식재했다고 한다. 콘크리트와 아스콘 포장으로 생육공간이 매우 불량하다. 뿌리가 완전 덮이고 몸통이 1m이상 토사로 덮여 있다. 당산 목의 수령은 약 350년 정도이고 수고는 18.0m 흉고는 4,0m로 조사되었다. 마을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경관을 조성하여 주민들의 유일한 휴식처이며 화합의 공간으로 1982년 9월 20일 9-10-10-3-1으로 마을보호수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이 마을에는 왕박골, 벼락바위 섬바위 그물봉 다래끼봉, 작살봉, 등이 있다.
상필마을 당산목
이 나무는 필봉리 상필마을 입구 당산 터에 있다. 수령은 약250년 정도이고 수고는 20.0m 나무둘레는 4.43m이다. 나무아래에는 모정이 지어져 평소에는 쉼터역할을 하고 있으며 매년 정월 대보름에는 필봉농악 보존회에서 주관하여 전국의 풍물패들을 모아 마을 안에서 굿을 치다가 당산나무 아래에 옮겨 당산 굿을 치는 곳이다. 필봉 당산 굿은 전국적으로도 유명하며 매년 참가하는 숫자가 불어날 정도로 대규모 행사가 벌어지는 곳이다.
필봉마을에 사는 양봉순(81세)씨의 말에 의하면 원래 마을에 할매 당산나무와 할아버지 당산나무가 있었는데 할매 당산나무는 항일투쟁기에 베어져 지금은 없으며 현재 당산제를 지내는 나무는 할아버지 당산나무로 이곳에서 당제를 지낸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는 조탑이 있고 선돌과 고인돌 윗돌도 어디서 가져다가 놓여져 있다. 이 나무는 마을에서 볼 때 동남쪽을 막은 비보 숲이다.
오두목마을 정자목
회진리는 섬진중학교가 있는 마을이고 아랫마을은 장동마을이라고 하며 윗 마을은 오두목이라고 하는데 항일투쟁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회진리라 이름 지어 부르고 있다. 느티나무가 서있는 마을은 오두목 마을이며 도로에서 한참을 올라오면 마을입구에 다달아 느티나무가 서 있고 그 옆에는 운조정이란 이름으로 모정도 있다. 마을 앞에 심어진 것으로 보아 비보 숲으로 본다. 수령은 250년 정도이고 수고는 25.0m 나무둘레는 4.10m이다.
옥정마을 정자목
옥정마을에서 수방리로 가는 도로 아래에 옛 길 옆으로 오래된 느티나무가 서 있다. 이 나무는 수령이 약 250년 정도이고 수고는 18.0m 나무둘레는 4.60m이다. 이곳은 2차선 도로가 개설되기 전에 수방마을 사람들이 옥정리를 거쳐 강진으로 향하는 길목 이었다. 한편 최근에 옥정호 여수로 공사 중 발생한 토석을 쌓아 큰 운동장으로 조성되었으며 그 뒤쪽에 나무가 서 있다. 이 나무는 주민들의 쉼터로 지금도 이용되고 있다. 한편 공사에 의하여 적치된 토석으로 나무뿌리 부분이 덮여진 상태로 되어 있기에 생장에 다소 제약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
수방마을 쉼터목
수방리를 당하여 약간 아래쪽에 서 있는 느티나무는 습지에서 자라는 관계로 생육이 불량한 편이다. 그러나 그동안은 바위위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온 것으로 판단되나 지금은 생육이 지극히 불량하여 죽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수령은 약250년 정도이고 수고는 25.0m 나무둘레는 4.70m이다. 또한 나무 한 가지는 찢어져 떨어지고 누워있는 가지는 썪어 가고 있는 실정인데 이유는 나무 옆으로 이름 모를 시설물 설치에 의한 원인인 듯 하였다.
백여마을 당산목
강진 소재지에서 정읍으로 가는 길 중간쯤에 위쪽으로 올라가는 작은 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 산위에 매달린 집들이 보이며 입구에 느티나무 2그루가 서 있는데 마을 쉼터로 이용되고 있다. 나무의 수령은 300년 정도이고 수고는 20.0m 나무둘레는 3.60m이다. 현재도 15호정도가 살고 있는데 삭녕 최씨 집성촌으로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나무가 서있는 주위를 살펴보니 마을 입구의 길을 확장하면서 뿌리 일부가 잘리고 시멘트로 포장함에 좋은 환경은 아닌 것 같다. 10년전 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당산제를 지냈으며 이 나무는 마을 앞이 허하고 낭떠러지형태에 마을을 지키는 비보 숲 겸 풍치림으로 이용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이윤마을 느티나무
이윤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백련산 아래에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을 들어서면 경사진 좁은 공간에 좁은 길이 나있고 중간 언덕 우측에 느티나무 한그루가 자라고 있다. 나무의 수령은 150년 정도이고 수고는 20.0m 흉고둘레는 3.0m이다. 이 나무는 길옆에 자연 그대로 자라기에 수세가 강하다. 약간의 그늘이 있어 여름철 쉼터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이나 나무아래 시설물은 없다.
웃강진마을 느티나무
강진면 백련리 신기마을에 들어서 백련산 쪽으로 약 1.5km지점에 웃강진 마을이 있고 1923년에 지었다는 함양박씨 재실인 모의재가 있다. 마을에 들어서면 인가는 없고 재실만 있는데 그 앞에 느티나무 1그루가 이곳을 지키는 듯 외롭게 서있다. 당초에는 마을 주민들 15호 정도가 살았으나 지금은 한집만 남아 함양 박씨들의 선산을 관리하고 있다. 이 나무는 수령이 200년 정도이고 수고는 20.0m 흉고둘레는 3.70m로 쉼터역할을 하던 나무이었으나 지금은 주민들이 모두 떠나 모의재와 함께 마을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부흥마을 당산나무
부흥리 당산나무는 마을 앞 도로변을 넘어 자리하고 있다. 그리 크지 않지만 어느 때 당산제를 지냈는지는 모르며 다만 마을에서 부르기를 당산나무라고 부른다.
상필마을 느티나무
강진 소재지에서 필봉농악 전수관 앞을 지나 구 도로를 따라 조금 가면 축복기도원이 있고 기도원 입구에 있다. 나무가 서있는 곳은 도로옆 노견으로 보이며 오래전부터 도로를 사용하면서 아스콘 포장 등으로 나무에 무리가 있었다고 본다. 측면의 공간으로 인하여 그래도 잘 자라고 있는 이 나무는 수령이 250년 정도이고 수고는 20.0m 흉고는 4.30m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기도원 입구를 들어가는 도로를 내면서 뿌리의 손상이 보이나 그래도 잘 자라고 있는 편이다. 이 강진 쪽에서 아니면 인근 주민들이 전주로 향하는 길목에 있어 나무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쉼터 목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상징성으로만 남아있다.
학석마을 정자목
학석 마을에 들어서면 좁은 듯한 마을안길에 다다르면 모정이 있고 마을 앞에는 계곡과 전답이 함께 있다. 이 마을은 상기마을로 가는 길목이고, 죽원마을로 가는 길목에 마을 정자나무가 서있는데 주민들의 쉼터역할을 하고 있는 곳에 느티나무가 서있다. 나무의 수령은 200년 정도이고 수고는 15.0m 나무둘레는 3.80m이다. 나무들 또한 마을을 지켜주는 비보 숲 형태로 윗 뜸으로 가는 길목에도 느티나무가 자라고 있어 한편으로는 윗 뜸과 연결되는 형태의 숲도 이루고 있다. 학석 아래 마을의 정자목은 주변에 뿌리를 덮고 있는 콘크리트 포장으로 나무 가지가 고사하는 등 생육이 저조한편이다.
갈담마을 왕버드나무
강진마을 3거리에서 좌측으로 산 아래 사곡리로 가는 옛길을 따라 작은 다리를 건너면 좁은 길 옆 하천 쪽으로 서있는 왕버드나무기 있다. 수령이 약 200년 정도이고 수고는 15.0m 나무둘레는 3.30m정도 이다. 또 하나의 느티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수령이 100년정도 되었다. 길옆에 서 있는 나무들은 수해로 인하여 냇가 쪽으로 나무가 가라앉아 아래쪽에서 간신이 자라고 있다. 현재도 생육이 지극히 불량한 편으로 하천 개수공사로 인하여 겨우 살려놓은 상태로 하천변에서 자라고 있다.
학석마을 윗터 팽나무
학석마을 상기(上基)는 원 학석리를 당하면 첫 마을이 나오고 그곳을 지나 우측으로 올라가면 윗터 라고 부르는 마을이 있다. 이곳 마을 입구를 당하면 100여년정도 되는 20여주의 느티나무 숲으로 조성되어 있다. 나무 사이로 팽나무 한그루가 서있는데 이 또한 마을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는 나무이다. 수령은 약300년 정도이고 수고는 13.0m 나무둘레는 2.10m정도이다. 숲속에 함께 있는 이 나무는 마을의 연대를 짐작 할 수 있는 노거수이다.
학석마을 윗터 산뽕나무
학석마을 상기동에는 팽나무가 있고 팽나무에서 조금 떨어진 나기복씨(78세)집 옆 아래 밭에는 산뽕나무 한그루가 있는데 이 나무 또한 희귀성이 있는 나무로 12.0m의 높이에 흉고 둘레가 약 2.0m정도가 된다.
방현마을 벚나무
강진 소재지에서 필봉마을을 지나 방현 마을로 진입하면 서어나무 숲이 있고 마을 안으로 더 들어가면 학석보건지소 건물 앞에 벚나무 한그루가 우뚝서있다. 수령은 약120년 정도이고 수고는 20.0m 흉고는 2.20m정도이다. 이 나무는 토종 벚나무로서 수형이 잘 잡혀 보이나 고목의 형태를 띠고 있다. 벚나무의 꽃이 피면 마을 안에 온통 꽃잎이 날려 장관을 이루기에 마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나무이다.
강진파출소 살구나무
임실경찰서 강진 지구대 앞에 나지막한 살구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몸통은 온통 덕지덕지 마치 종기부스러기가 돋은 듯 매끄럽지 못하지만 봄이면 연분홍 꽃을 피워내고 많지는 않지만 가을까지 잎을 내려놓지 않는다. 한국전쟁 때 빨치산 6명을 묶어서 처형시킨 나무라고 주민들은 증언하고 있다. 수령이 약 120년 정도이고 수고는 약5.0m 흉고는 1.30m 이다.
가지가 거의 다 잘려나가 몸통만 남은 모습이 몹시 안쓰럽다. 지구대에서 철책 보호대를 두르고 정성으로 돌보고 있다. 회문산은 지리산과 더불어 한국전쟁 전후에 빨치산 활동으로 유명한 산이다. 빨치산 토벌 당시 그들을 잡아 머리를 잘라서 살구나무에 걸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주민들이 머리를 걸어 놓았던 그들의 원혼이 서려 있는 가지를 모두 자르다 보니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동족상잔의 슬픈 민족의 애환을 담고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해마다 꽃을 피우고 있다. 살구가 열려도 누구 하나 살구를 따는 사람은 없다.
갈담 마을에 나이 많은 살구나무 살구 알이 제법 오독오독하니 열렸다. 그 곁으로 다가가 연연해 했더니 유록빛 잎마다 숨결이 느껴졌다. 해뜩 발긋한 알알들이 촘촘한 게 불온한 사람 손이 관여했던들 저토록 고운빛깔로 열렸을까. 누가 풋살구를 함부로 딸 것인가. 중천 뙤약볕이 넘어가고 그 나무 아래 고요가 잦아든다.
살구나무의 ‘살구殺狗’는 ‘개를 죽인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살구나무 열매의 독성이 개를 죽일 수 있기 때문에 붙인 것이라고 한다. 살구나무의 꽃은 중국 당나라 두목의 시 ‘행화촌杏花村’에서 유래한 덕분에 ‘술집’을 상징한다. 이 살구나무는 2015년 강진 지구대가 이전을 하면서 함께 옮겨져 지라고 있다.
중원마을 엄나무
학석리를 들어서면 아랫마을을 지나 한참을 더 올라가면 중원마을로 마을 입구정도의 위치에 엄나무 한그루가 서있는데 수령은 약 100년 정도이고 수고는 25.0m 나무둘레는 1.30m 정도이다. 이 엄나무는 근래에 보기 드문 큰 나무로 매우 희귀하며 이를 보호하는데 소홀하지 않도록 행정적 지도가 필요하다고 본다. 또한 엄나무 아래 조금 떨어진 곳에는 닥나무를 삶던 솥이 걸려 있고 조금만 수리를 한다면 사용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이 요망되는 사항이다.
마을 숲
하필마을 숲
이 숲은 하필마을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산이 암소 형국이라 하며 마을 위치가 양간과 같다고 하여 상, 하로 나눠져 있어 고을 원님이 원이 가까운 곳을 상 중방, 하 중방이라 이름하여 나눴다고 한다. 물이 아래 강진으로 흘러가는데 마을은 하필 아래 하下를 쓴다. 필봉산 꼭대기에서 볼 때 높은 곳은 상필, 조금 낮은 곳은 하필이라고 1914년 행정개편 때 붙인 이름이다. 원래 물의 흐름에 따라 지명이 붙긴 하지만 이곳은 산에서 본 그대로 붙인 마을 지명이다. 마을이 하필 뒤편에 있었는데 마을에 악산이 넘겨다보면 도둑이 끓는다 하여 자연스럽게 현재 자리로 옮겨졌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실제로 도둑이 많았다고 한다.
하필마을 앞의 숲은 남쪽을 막는 비보 숲이다. 또한 주민들의 쉼터이었다. 바위로만 형성된 동산에 뿌리를 내리고 성장을 하고 있다. 오래전에 아이들이 느티나무 동공 속에 불을 놓아 화재로 인해 속이 시꺼멓게 다 버렸다. 고사위기에 처해 있었는데 시나브로 살아나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뿌리부분이 크게 뚫어져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 비를 피할 만큼 구멍이 크다. 느티나무 옆으로 벚나무 한그루가 있다. 세나무의 수령은 약 300년 정도이고 수고는 모두 30m 정도에 나무둘레는 졸참나무가 3.1m 상수리나무는 4.07m 느티나무는 5.3m로 되어 있다. 또한 이곳의 특징은 임실에서는 보기 드문 졸참나무가 이 마을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는데 워나 오래되고 커서 별도관리가 필요하고 보호수로 지정은 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백련마을 숲
강진면 백련리 마을 안에 서 있는 3그루의 느티나무는 작은 숲을 이루고 있으며 나무가 서있는 곳은 상당히 높은 단(壇)위에 있어 나무를 중심으로 둘레 단이 형성되어 있다. 나무의 수령은 약 300년 정도이고 수고는 15.0m이다. 나무가 서있는 옆에는 마을 회관이 있고 회관 2층을 올라가야 나무가 서있는 곳으로 갈 수가 있다. 이 나무는 멀리서 보면 마을 속에 깊숙이 박힌 나무 같다. 마을 내에서는 쉼터로 이용되고 있으며 백련마을의 상징적인 숲을 이루고 있다. 한편 백련(白蓮)이란 말이 이 동산 숲을 말하는 듯하다.
신기마을 숲
백련리 신기마을은 청웅 소재지에서 강진을 향하여 가다가 첫들머리 마을 입구에 숲이 조서되어있다. 이 숲에는 느티나무 11주, 서어나무 5주, 소나무 1주, 팽나무 1주가 있는데 각각 높이가 20~25m이며 수령은 100~50년생이다. 마을과 숲의 형태로 북쪽을 막아주는 비보 숲으로 조성되었고 숲 가장자리에는 모정이 세워져 주민들의 쉼터로 이용되고 있다. 다만 최근에는 각종 농기계가 숲속에 자리하고 있어 정비가 필요하다.
율치마을 숲
강진면에서 학석리 끝자락 학석 3길 2-98(율치마을)에 있는 마을로 이 재를 넘으면 운암면 운암리가 나온다. 이 재를 밤재라고 부르고 있다. 숲이 조성되어 있는 곳은 상 율치 마을로 저수지 위쪽 묘 주변에 숲을 이루고 있다. 이 숲은 장수황씨 종중 산으로 현재는 14주의 노송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수령은 약 120년 정도이고 수고는 25.0m 정도이다. 이 숲은 이곳을 지나는 객들로부터 부러움의 대상으로 상 율치마을의 상징 숲이다. 마을로 보아서는 비보 숲으로 서향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학석 상기(윗터)마을 숲
학석리 윗터는 학석리를 당하여 첫 마을을 지나 우측으로 올라가면 상기(上基) 라고 부르는 마을이 있다. 이곳에 마을 입구를 당하면 100여년정도 되는 20여주의 작은 느티나무 숲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수도는 20.0m정도이며 이 숲은 마을 입구의 낮은 곳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숲속에는 300년정도 되는 팽나무가 자라고 있으며 팽나무에서 조금 떨어진 나기복씨(78세)집 옆 아래 밭에는 산뽕나무 한그루가 있는데 이 나무 또한 희귀성이 있는 나무로 12.0m의 높이에 흉고 둘레가 약 2.0m정도가 된다.
방현마을 숲
방현 마을을 진입하면 중간 하천변에 느티나무 3그루와 서어나무 3그루가 마을 숲을 형성하고 있다. 이 숲은 수령이 100년 정도니고 수고는 25m정도로 마을을 보호하는 비보 숲으로 서쪽의 기운과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기에 매우 중요한 숲이라고 홍익표(75세)씨는 전해주고 있다. 마을의 형태로 보아 예전에는 나무가 서있는 중심에서 마을을 감쌀 수 있도록 앞에 숲으로 막혀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흔적이 없다. 50년 전에는 이곳에 마을 할머니들이 정월 초삼일이나 보름날에 음식을 차려놓고 소원을 빌던 일도 있었는데 지금은 행해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윤마을 입구 숲
방현리 이윤마을은 백련산 자락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며, 이곳에 2-3가구가 살고 있는 입구에 숲이 형성되어 있는데 100년 내외의 느티나무가 14주가 있고 참나무류 30여주가 자생되고 있다. 수령은 약100년 내외이고 수고는 20.0m 정도이다. 마을 입구에는 모정이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쉼터 역할을 하고 있다.
수방마을 숲
수방마을 숲은 마을 뒤쪽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이는 북쪽의 바람과 나쁜 기운을 막기 위해 조성된 숲으로 판단된다. 이곳에는 서어나무 8주, 느티나무 1주가 있는데 이는 고사 직전으로 대책이 필요하다. 수령이 약 200년 정도이고 수고는 20.0m 내외이다. 주변에는 돌을 놓아 쉼터를 조성하였고 서향을 막는 비보 숲으로도 말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