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에릭 페터슨(Eric Pederson) 해병대 중위-1
미국 해병대 제1사단은 1941년에 창설된 사단으로 본부를 남부 캘리포니아 해안 캠프 펜들턴(Marine Corps Base Camp Pendleton)에 두고 있다. 조셉 헨리 팬들턴(Joseph Henry Pendleton, 1860~1942) 소장은 미 해병대에서 40년 이상 근무하면서 미국 서해안에 해병을 위한 훈련기지가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캠프 설립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해병대 캠프의 이름은 장군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해병대 캠프는 처음 목조 임시 시설로 건설이 시작되어 1942년 9월 25일 완공하고, 미국 제32대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 대통령이 기지를 헌정했다.
▲ 조셉 헨리 팬들턴(1860~1942) 소장 (사진: 미국 해병대 박물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해병대 제1사단은 유엔군의 일원으로 한국에 파병된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할 때 맥아더 장군의 지휘를 받아 한국 해병대와 공동으로 선봉에 서서 작전을 수행하였다. 미국과 한국 양국의 해병대원들은 합동 작전을 펴 9월 18일에 김포비행장을 탈환하고 행주산성과 영등포로 진격했다. 9월 24일 한강을 일제히 넘은 유엔군은 치열한 시가전 끝에 9월 27일 새벽에 중앙청에 국기를 게양했다. 미국 해병 제1사단 5연대 병력이 경계하는 가운데 9월 29일 낮 12시 국회의사당에서 맥아더 장군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서울을 이양하는 환도식을 거행했다.
▲ 인천상륙작전
미 해병 1사단은 서울을 수복하는 작전을 수행한 후, 10군단에 소속되어 강원도를 거쳐 함경도 방향으로 진격했다. 1950년 11월 2일 장진호 부근에서 중국인민지원군 제42야전군과 전투하였다. 11월 7일부터 11월 24일까지는 보급품을 비축할 창고와 비행장을 건설하고 큰 전투는 없었다. 11월 25일에 중공군 13병단 18만 명의 병사가 장진호 주변에 전진 배치되고, 중공군 9병단 12만 명의 병사가 배치하여 유엔군과 한국군 2군단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때 미 제2보병사단의 병력 4,000명이 다치고, 사단 포병 장비도 대부분 약탈당했다.
▲ 미국 해병대 마크(사진: 미국 해병대박물관)
1950년 11월 27일 미 해병 제1사단은 중공군 12개 사단에 포위되어 고립되고 위기에 봉착되었다. 병력 차이가 무려 10배가 넘었다. 해발 1,200~2,000m의 개마고원 산악지역에서 어려운 전투를 하였다. 낮 기온은 영하 20도, 밤 기온은 영하 32~37도로 떨어지는 혹독한 기상 상황에서 군대는 서로 대치했다. 군사 장비들이 강추위에 얼어붙어 제대로 작동이 안 되었다. 중공군은 야간에 기습공격을 가해 왔다.
미 해병 2개 연대는 힘들게 빠져나와 장진호 남쪽 끝에 있는 하갈우리 지역에 위치한 사단사령부로 후퇴했다. 집결된 병력 만여 명과 차량은 황초령를 넘고 고토리, 진흥리를 지나 함흥까지 110km를 행군하여 철수했다. 철수로는 길이 험하고, 좁고, 땅이 얼어버려 차량 운행도 어려웠다. 해병 장병들의 생사가 갈린 가운데 유엔군 지휘부는 우선 부상병 4,500명을 하갈우리 비상활주로를 이용해 항공기로 후송했다. 미 해병 1사단이 장진호 전투를 할 때 국군 수도군단과 3사단은 두만강까지 진출했다가 함흥으로 철군했다. 12월 11일에 미 해병은 함흥에 도착했다. 중공군 9병단은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 25,000명, 부상자 15,000명이 생겨 함흥 일원에서 4개월간 부대정비를 하느라 1951년 1월 4일 중공군 제3차 공세에 참가하지 못했다.
▲ 장진호 전투 (사진:위키백과)
미 해병 1사단은 흥남에서 육로로 철수한 후 서부 전선으로 이동하였다. 미국 해병대 제1사단 5연대 2대대는 개성 동쪽에 있는 고지에 배치되어 고지를 점령했다. 5연대 2대대 무반동 화기 소대장인 에릭 페터슨(Eric Pederson) 중위는 항상 병사들과 함께 움직였다, 2대대 무반동 화기 소대의 대표적인 무기는 75발을 발사하는 대전차포로 탄약도 무겁고 발사체도 무거웠다. 해병대원들은 반동의 수축과 무기의 악명 높은 블로우백에 대한 언급으로 “우리는 무모한 소총병이다.”라고 외쳤다.
에릭 페터슨 중위는 최전방 고지를 지키면서 병사들이 탄약을 운반하면서 힘들어 빨리 지쳐가는 것을 보고는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힘들어하는 부하 병사들을 볼 때마다 해결책을 찾으려고 애썼다. 병사들이 높은 고지에 포탄을 운반하는 일로 힘들어 잦은 부상과 피로감을 호소했다. 한국전쟁은 잠시 소강상태가 이어졌지만. 사격 훈련은 멈출 수가 없어 매일 시행했다. 부대원들은 맨몸으로 진지에 오르는 것도 힘들어했다.
▲ 철책선 고지(사진: 미국 해병대박물관)
부하들에게 필요한 것은 달콤한 초콜릿, 담배, 술이 아니었다. 전투에서 탄약과 군수용품 등을 운반할 노새나 말이 필요했다. 에릭 페터슨 중위는 밤에 자다가 일어나 캘리포니아에 있는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에 아내가 보고 싶다는 그리움의 말과 전투에 도움이 될 말 안장이 필요하니 집에 있는 말 안장을 군사우편으로 급히 보내 달라는 내용이었다. 편지가 미국으로 도착하자. 에릭 페터슨 중위의 아내는 집안 창고에서 쓸 수 있는 튼튼한 말 안장을 골랐다. 아내는 군사우편을 통해 말 안장을 그리운 남편에게 보냈다.
▲ 말 안장(사진:미국 카우보이박물관)
아내에게 편지를 보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지내던 에릭 페터슨 중위는 말 안장이 전선에 도착하자 다시 고민에 푹 빠졌다. 말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해 시간을 내어 파주와 일산 및 주변 농촌 마을로 말을 구하러 다녔다. 그러나 농촌 주민들이 모두 피난을 떠난 마을은 공허했고 포탄을 운반할 적당한 말이 없었다. 전쟁터에서 말이나 노새를 구하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스스로 깜깜한 밤하늘의 은하수에서 별을 하나 똑 따는 일이 더 쉽다고 생각했다. 에릭 페터슨 중위는 군용차를 타고 말을 구하러 서울이나 수원까지 다녀왔다. 하루는 서울역에 도착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말을 구하려고 하는데요. 도움을 줄 수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전쟁통에 무슨 말이 남아 있겠냐고 말하며 웃었다. 지나가던 한 노인이 말을 사려면 동대문 옆 신설동 경마장으로 가라고 알려주었다.(계속)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