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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궁인창의 지식창고 북한 사암 지상순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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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북한 사암 지상순례기
◈ 2. 금강산 신계사를 찾아서
深谷寺에서 다시 乾鳳寺로 돌아오면 이제부터는 金剛山으로 들어갈 문제이다. 여기에서 잠시 건봉사의 옛 史蹟을 살펴보기로 한다。이곳은 高楲部 간성(杆城) 땅, 옛날 신라의 法興王 七년 庚子年에 阿道和尙이 금강산 남쪽에 위치한 이곳에 절을 이룩한 것이 乾鳳寺의 初刱이다。그 당시는 圓覺寺라고 했다고 한다。
北韓 寺庵 紙上巡禮記
② 金剛山 神溪寺를 찾아서
鄭泰爀 (哲博·東國大佛教大教授)
 
 
1
 
심곡사(深谷寺)에서 다시 건봉사(乾鳳寺)로 돌아오면 이제부터는 금강산(金剛山)으로 들어갈 문제이다. 여기에서 잠시 건봉사의 옛 사적(史蹟)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곳은 고성군(高城郡) 간성(杆城) 땅, 옛날 신라의 법흥왕(法興王) 7년 경자년(庚子年)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금강산 남쪽에 위치한 이곳에 절을 이룩한 것이 건봉사(乾鳳寺)의 초창(初刱)이다。그 당시는 원각사(圓覺寺)라고 했다고 한다。이곳엔 법흥왕(法興王) 20년 계축년(癸丑年)에 다시 보림암(普琳庵)과 반야암(般若庵)의 부속 사암(寺庵)이 세워졌다。
 
그 후 신라 景德王 17년(758) 戊戌年에는 發微和尚이 이 圓覺寺를 중건하고 念佛萬日會를 베풀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念佛萬日會의 嚆矢가 된 것이다。萬日이라면 1년 365일로 해서 27년하고도 155일이 남는다。
 
이런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를 당시에 이곳에서 개설하였다는 것은 당시에 불교 신앙이 얼마나 敦篤하였던가를 보여주는 것이다。오늘날에도 간혹 萬日會을 개설하는 일이 있지만, 당시 여기에서 頭陀僧 貞信 · 良順 등 31人과 더불어 염불을 一念勤修하니 香港 1820명이 自願發心、그중 120명은 의복을 내었고 1700명은 음식은 베풀어 주어 염불하는 사람들에게 牛受를 제공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에서 29년을 정업(淨業)을 근수(勤修)한 31명의 정신자(淨信者)들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來迎을 입어 淨土에 往生하였고, 그 香徒들도 모두 그 뒤를 따라 往生하였다고 전한다。기록을 보면 31인이 염불을 닦기 시작한 지 29년이 되자 阿彌陀佛이 두 보살과 더불어 淸淨大衆을 거느리고 龍船을 타고 내려와서 연화대에 내리어 金色 팔을 펼쳐 念佛 大衆을 接引하고 대중이 모두 이를 보고 歡喜跳躍하여 미증유를 얻으니, 부처님은 그 대중들을 거느리고 般若船을 타고 四十八願을 불러 攝受往生케 하여 모두 몸이 空中으로 올라가 白蓮華世界에 往生하였다고 한다。圓覺寺는 이로부터 우리나라의 淨土信仰의 名刹로 이름나게 되었다。
 
그 후 고려 太祖는 道先國師에게 이 절을 重修하게 하니, 太祖 20년 丁酉年에 寺名을 西鳳寺라고 개칭하였다。이것은 西方에 石鳳이 있다는 뜻이다。과연 西쪽을 보면 岩上에 천연석으로 된 石鳳이 있다。鳳이 極樂淨土로 往生한 淸信徒들을 태워 이 땅으로 다시 내려 왔다가 수려한 景觀에 취해 있는 모양 같기도 하고, 또는 念佛을 닦아 西方極樂淨土에 往生한 그분들이 鳳을 타고 다시 이 땅으로 와서 옛 고국이 그리워 아직도 여기에 逍遙하는 듯한 느낌도 든다。
 
이러한 淸淨道場이라、세월이 흘러 다시 鳳巖庵, 青莲庵을 세웠고, 또한 菩提庵, 大聖庵, 寂明庵도 瓶建되니 고려 恭愍王 七년 戊戌年에는 懶翁和尚이 西鳳寺를 다시 重修하고 寺名은 乾風寺라고 개칭하였다。
 
 
▶ 금강산 건봉사 대웅전의 전경 (사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乾鳳寺라고 하는 이름은 어딘가 무게가 있고 철학적인 깊이가 있는 듯하다。乾鳳寺 事蹟及重刱曠總章譜(1884년 도원장(都院長) 보운긍섭(寶雲亘葉))에 보면 「翩下韶韶九成之來儀故以名之」라고 했는데, 그 옛날 여기서 염불을 닦는 이들이 모두 저 돌을 보고 阿彌陀佛이 來迎하실 때 鳳을 보내시는 것으로 여겼는지도 모른다。돌이 여기에서는 鳳으로 化하고, 鳳은 다시 彌陀의 사자도 化하였으니 이제 옛 성역에 홀로 남은 남은 石鳳을 돌로만 본다는 것은 송구스럽게 느껴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토록 불교가 隆盛하던 신라나 고려 때에는 이 강산의 돌 하나 풀 한 포기가 모두 佛陀의 몸이요, 法界가 清净法身 그대로였는데 오늘날엔 돌은 돌로만 보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더욱이 문득 북녘 땅 붉은 무리들이 모든 것을 유물적으로 본다는 생각에 물질 위주로 어진 백성들의 피를 빠는 비린내가 바람을 타고 코앞을 스치는 느낌이 든다。이 성역은 6·25 동란 때문에 灰燼되고. 이제 새로 지은 법당 안에서는 염불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高麗朝가 世緣을 다하게 되자 불교도 世運에 따라서 변모하고 朝鮮朝에 들어와서 世祖는 이 절이 念佛往生하는 佛縁이 깊은 것을 아시고 널리 十方刹을 살펴 옛날 發微祖師가 여기에서 萬日會를 개설한 神靈한 자취를 좇아서 이 절을 방문했다。 그때 왕비와 왕세자가 文武群僚와 함께 5일간 머물렀다。 世祖는 불공을 드리고는 친히 同參文을 하사하시면서 전답도 하사하시고 御室閣을 건립하게 하고 조정의 전당으로 이곳을 정하였는데, 成宗도 그러했다。
 
또 이 절은 일찌기 신라의 자장율사(慈藏律師)가 唐나라에 가서 부처님의 齒牙 17매와 舍利를 奉載하여 통도사(通度寺)와 월정사(月精寺) 등지에 分封했는데, 임진란 당시 通度寺에 침입한 왜병이 부처님의 齒牙와 含利를 훔쳐간 것을 宣祖 38년 乙巳年에 송운대사(松雲大師) 사명당(四溟堂)이 奉還하여 本寺에 소장했다。
 
이와 같은 사적(事蹟)에 대해 「금강산 乾鳳寺釋迦如来靈牙塔奉安碑交」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唐貞觀 12년 戊戌, 신라 僧 慈藏이 入唐하여 清涼川에서 釋迦 頂骨舍利 歯牙袈裟 數珠를 奉載하고 돌아왔다。 그리하여 五臺山, 鷲樓山, 獅子山, ·葛來山 등 네 山에 收藏하였으나 이조 壬反之難에 일본인이 보물을 가지고 가서 其後 甲辰年에 命을 받들고 日本으로 들어가서 그를 두루 찾아 봉환, 나누어서 여러 사찰에 分藏하니 靈牙가 12매라、杆城의 乾鳳寺에 소장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泗溟이 靈牙를 이 乾鳳寺에 안장한 까닭은 이 절이 본래 四溟의 스승인 信獸大師가 卓錫한 곳이요 四溟이 삭발한 곳이며 關東最勝地區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四溟, 惠能 두 고승이 이어서 本寺를 중건하고 信默大師도 靑蓮庵을 중수하였다。
 
그 후 孝宗과 肅宗이 모두 願堂을 정하고, 正宗 24년에는 泗溟酬忠閣과 四溟碑閣 및 御重樓를 刱建하였으며, 또한 純祖 2년 壬戌에는 제2회 萬日會를 개설하고, 哲宗 2년 辛亥에는 제3회 萬日會가 설치되기도 했었다。 그후 高宗 18년 辛巳年에 제4회 念佛萬日會를 개설했으며 大漢光武 10년 丙午에는 釋迦靈牙塔奉安神를 세웠다。
 
제4회 萬日會의 회향은 大韓隆熙 2년 戊申이었고 제5회 萬日會 또한 同年에 개설되었다。 이와 같이 念佛萬日會가 끊이지 않았으나 이제는 그 옛날처럼 念佛勤修의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이 절을 찾은 옛 故人의 詩 가운데 白洲 李明漢이 옳은 한 구절을 회상해본다。
 
 
海雲이 짙은 속에 달이 뜨는데
옛 절 늙은 솔이 길을 덮어 음산하구나
밤들어 늙은 중과 佛前에 고초 앉아
밤새워 염불하니 殘燭도 외롭도다。
 
(東南月出海雲深、古寺杉松夾路陰
吾與老僧同不寢, 佛前殘燭照孤吟)
 
 
文山 李載赦는 또 이렇게 읊었다。
 
 
눈을 들어 乾方을 보니 鳳石이 머물렀고
무지개 다리 건너 禪樓가 우뚝 섰다。
松雲의 크신 자취 이제도 새로우니
흰 비단 袈裟위에 玉帶鉤를 띄었구나。
 
(睠彼乾方鳳石留, 虹橋偃處起禪樓
松雲古蹟多珍玩, 白錦袈裟玉帶鉤)
 
 
2
 
금강산으로 들어가 靈山名刹을 순례로 하면 가기도 전에 가슴이 설레인다。
 
우리나라는 지금 3·8 이북에 金剛의 靈山을 두고 남한에서 설악산을 금강산 대신으로 국립공원으로 개발, 관객이 줄지어 찾아들고 있고 남쪽으로는 지리산과 한려수도가 또한 金剛의 역을 맡고 있다。 그리하여 金剛을 북에 두고 그 聖域을 그리워함에 따라가고픈 우리의 마음은 더욱 안타깝기만 하다。
 
삼천리강산 어느 곳이 아름답지 아니한 곳이 있으랴마는 금수강산이란 글자 그대로 아름답게 수놓아진 이 강산에서 生을 누린 韓民族은 예로부터 靈氣를 한데 모아 문화의 꽃을 피웠고, 이 땅에서 평화스럽게 生을 즐겼다。
 
이러한 이 강산에서 금강산은 우리의 자랑이다。
 
금강산은 지형이나 山勢가 特奇絶妙함이 세계의 으뜸일 뿐만 아니라 金剛을 중심으로 이 민족의 心志 表象이 거룩하게 피어났고, 여기서 우리의 힘과 슬기가 자랐다。
 
금강산은 실로 韓民族의 신앙의 歸依處이다。 그러므로 금강산은 山이로되 山이 아니고 신명스러운 靈地요, 슬기의 원천이며 부처님이나 신령님의 산 모습이기도 하다。
 
따라서 금강산에는 많은 사찰이 있고 산신이 터를 잡았으니 옛부터 산 전체가 觀省參拜할 聖者의 모습 그대로이다。
 
8·15 해방 전에 가보았던 金剛을 이제 紙上으로나마 순례하려는 필자의 심정엔 형언하기 어려운 감회 속에 애석한 정이, 마치 보물상자를 두고 온 것보다 더한 감이 솟구친다。
 
옛부터 외국사람들이 「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이라고 말했듯이 高麗國하면 으레 금강산을 생각하게 되니 唐나라 사람들만이 아니라 실로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동경하는 명승지이다。
 
금강산의 靈境은 주위가 200여 里로 高城, 金化, 淮陽, 通川의 四郡에 걸쳐 있어, 金剛의 連峯을 중심으로 서쪽을 內金江이라 하고, 동해에 잠긴 곳을 海金江이라 한다。
 
내·외금강(內·外金剛)과 해금강(海金剛)의 온 산이 美의 극치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암식이 독특한 光澤을 지녀, 雄大豪壯한 山容은 실로 영묘한 신비경이다。 더구나 여기에 서린 불교의 由緖는 이 山으로 하여금 더욱 靈氣를 더하므로 이곳을 찾는 이로 하여금 世塵에 때묻은 마음을 씻어주고, 煩惱를 끊고 涅槃의 寂靜에 안주케 한다。
 
금강산에는 장안사(長安寺) · 표훈사(表訓寺) · 신계사(神溪寺) · 유점사(楡岾寺) 등 대가람(大伽藍)이 있고 크고 작은 사찰이 무수히 點在하나 먼저 동해로부터 순례길에 올라 그 중 신계사(神溪寺)를 찾기로 한다。
 
 
3
 
동해로부터 金剛을 찾으면 外金剛의 勝地하는 것이 된다。 神溪寺로 가려면 정어리를 많이 잡기로 옛날부터 유명한 長箭으로 상륙한다。
 
長箭은 짙은 초록색 물결이 고요하여 배를 대면 물과 산이 모두 푸르고 맑아, 물이 산이고 산이 물이며 나와 더불어 모두 푸르르다。
 
여기서부터 千佛山 · 文殊峯 · 勢至峯을 우러러보며 그 뒤로 뚷린 길을 따라서 가노라면 萬物相으로 가는 길이 있다。 長箭浦를 떠나 탄탄대로를 따라서 남으로 가면 벌써 우측에 여러 뫼 뿌리들이 奇景을 이루어 눈을 놀라게 한다。
 
여기서 좀 더 나가면 강물을 따라 좁은 길이 개통하고 이 길을 따라서 서쪽으로 돌아 오르면 文筆峯을 왼쪽으로 우러러보고, 오른쪽은 외연히 솟은 水晶峰이 위세를 부리고 있는 溫井里가 나타난다。 여기에 이르면 溫泉場이라 쉬어 가고 싶은 생각이 든다。
 
더구나 쉬엄쉬엄 좌우 景觀에 취해 느릿느릿 거니노라면 溫井里에서 해가 전 때도 있다。 그 때는 落照가 西天에 빗기니, 그 수정같은 맑고 흰 水晶峯에 연한 자색 안개가 덮이고, 寒霞溪일대의 계곡은 엷은 안개에 싸이는 속에 삼라만상이 저무는 暮景은 자신을 잊고 황홀 속에서 자연과 하나가 되어 그저 온천물에 몸을 담고 싶은 마음을 솟구치게 한다。
 
그리하여 하루의 仙遊를 꿈에서나마 다시 재현하고픈 생각에 하루를 묵게 되고 그 이튿날 맑은 마음으로 앞길을 잡게 된다。 머리속에 그리는 金剛巡禮의 정서는 벌써 이 溫井里에서 맛보게 되지만, 이튿날 아침 싸늘한 공기가 피부를 건드리는 바람에 선뜻 자리에서 일어나 길 차비를 하고 밖에 나가 서쪽을 바라보면, 하늘을 꿰뚫듯이 聳立한 觀音峯과 文筆峯의 鞍部인 極樂峴이 보인다。
 
이름이 극락이기에 즐겁게 오르다 보니 길이 가파르고 오르기가 매우 힘들다。 이 등성마루에 올라서면 神溪寺로 가는 송림이 엿보인다。
 
그러나 온정리(溫井里)에서 서쪽으로 보이는 만물상(萬物相) 연맥(連脈)과 관음봉(觀音峯) 연맥(連脈)과의 사이에 펼쳐진 寒霞溪를 먼저 보지 않을 수 없다。 奇峰秀嶺이 좌우에 聳立하여 있는 幽谷의 길이가 20리나 되고, 좌측에 있는 계곡의 물을 건너서 보이는 觀音連峯에는 隱陽石, 觀音瀑布들이 勝景을 선보인다。
 
짙은 雲霞에 걸린 觀音瀑을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다。 그림도、造化도 아닌, 보는 이를 혹하기 위해 幻現한 天山世界가 하늘에 걸린듯 싶을 정도이다。
 
금강산과 아울러 이름 높은 萬物相은 溫井里에서 10리쯤 되는 곳에 있는데 그것은 온 산이 모두 우주 만물의 모형을 그대로 만들어 보인 모습이다。 조물주가 우주를 창조할 때 여기서 시험해본 것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이다。 그리하여 금강산은 須彌山의 중심부로써 천지신명이 경륜하는 곳이 아니겠는가? 萬物相의 신묘함에는 누구나 놀리지 않을 수 없다。
 
이 바위와 언덕에 神明의 입김이 그대로 살아 있는 듯하다。 三仙巖에 올라 峯頭에 서면, 鬼面과 같은 一怪巖이 있는데, 이곳을 찾는 이들은 보통 여기에 자신의 소원을 부탁한다。
 
그리고 新萬物相, 舊萬物相 등에 올라, 天女峯頂에서 금강의 제일 관문이다 보고하는 석문을 들어서면 天仙臺가 있다。 발아래를 굽어보면 누천(屢天)의 丈岩峯이 그 장관을 겨누는 모양이 形言을 떠난다。
 
그 누가 『金剛山은 보고 느끼기는 할망정, 그것을 形言하려고 하지 말라』던 어느 구절이 이해되는 순간인 것이다。 神溪寺로 가는 길을 재촉하면 곧바로 極樂峴으로 오르게 된다。 가파른 길을 힘들여 올라 峴上에 이르면 神溪寺를 빼어나간 울창한 송림이 눈앞에 그려진다。 이 集仙峯의 雄姿에서 우선 쾌재를 연발하고 산마루를 내려가면 이것이 신계사인 것이다。
 
신라 법흥왕 때에 普雲祖師가 창건하여 그 후 여러 번 재난을 입어 쇠퇴한 데다가 근년에 本寺의 자랑인 萬歲橋마저 소실하고, 현재는 般若寶殿, 羅漢殿, 七星閣 등의 殿閣이 있을 뿐이다。 최근에는 승려는 없고 종교 활동이나 신앙의 표현조차 할 수 없기에 찾는 사람도 별로 없는 데다가, 설사 있더라도 휴양차 찾아오는 공산당원들뿐이므로 그들에게 숙소로 제공되는 일이 이곳의 전부인 것이다。
 
절 앞은 묵은 노송이 울창하게 숲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앞에는 彩霞에 둘러싸인 奇峯을 왼쪽은 應岩, 오른쪽은 文筆峯을 바라보며, 다시 觀音峯을 등에 진 품이 자못 지극히 幽寂하다。 천년의 역사는 묵묵히 지켜보며, 홀로 서 있는 般若寶殿 앞에 선 옛 탑은 금강산에서 오래된 古塔 중의 하나이다。
 
 
4
 
神磎寺로부터 송림 사이를 빠져서 普光庵을 찾고 다시 神溪寺 앞 시냇가에 돌아와 앞으로 나가면 급한 고갯길이 나선다。
 
왼쪽에는 계곡물이 玉石위에 굴러 떨어지다가 남쪽으로 굽이쳐서 彩霞峯 밑에 있는 翠松 사이로 사라진다。 언덕을 내려와서 산허리로 五仙岩을 바라보며 약 10町쯤 내려가면 한 가닥의 맑은 물이 왼쪽으로 흘러서 닿는 廳臺라는 곳이 있다。 觀音, 玉女, 世尊의 連峯이 뿔같이 솟아난 암석은 威儀가 준엄하여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머리를 숙이게 한다。
 
峻峯(준봉)의 山麓을 포위한 울창한 숲 사이를 나아가면 仰止臺에서 金昌峯의 수려한 뫼뿌리를 바라보고, 群仙峯의 깊은 협곡을 지나 末機에 금강문에 도달한다。
 
여기 오면 山勢는 병풍처럼 둘러서 더욱 험하고, 천지가 더욱 寂然한 신비경이 전개된다。 좁은 길을 우회하면 쓰러진 나무토막이 큰 소가 누워 있는 듯하다。
 
이것을 밟고 격류를 건너뛰면 흰 玉流가 큰 바위에 용솟음치는 곳, 옥류동(玉流洞)의 奇勝과 마주친다。 옥류동(玉流洞)으로부터 飛流를 왼쪽으로 보며 쇠사슬을 붙잡고 한 걸음 두 걸음 전진하노라면 발아래의 깊은 深堅이 검푸르게 아득히 보인다。 毛骨이 서늘하고, 가슴이 두근대어 웬만큼 심장이 강한 사람도 내려다보지를 못한다。
 
이 深堅의 앞에 있는 옷이 연주담(連珠潭)이고, 그 앞에 있는 것이 진주담(眞珠潭)이다。 이 연못 옆의 작은 길을 지나 깎아진 절벽을 내려가서 溪流를 건너 나무숲을 헤치면서 올라가노라면 창공을 찌를듯한 石峯의 정상으로부터 폭포가 쏟아진다。 비를 짓고 안개를 덮으며, 떨어지는 이 목포가 바로 비봉폭포(飛鳳瀑布)이다。
 
이 폭포는 중간에 한 번 굽이치면서 위와 아래에서 쏟아지는데 여기를 찾는 이들은 머리 위와 아래에서 같은 폭포를 보게 된다。 비봉폭포(飛鳳瀑布)를 지나서 좌측으로 산허리를 몰면 연담교(淵潭橋)라는 다리가 있다。 옛날에는 이 다리가 바위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다시 암각(岩角)을 내려서서 대안(對岸)으로 건너면 동굴 같은 절벽 밑에서 건너편을 우러러보면서 깎아진 절벽에 늘어져 대지를 부실 듯이 쏟아져 내리는 큰 폭포가 있다。
 
마치 하늘이 거꾸로 기울면서 물을 쏟아놓는 듯하다。 이것이 구룡폭포(九龍瀑布)、一名 중향폭포(衆香瀑布)라고도 한다。 높이가 170여 척이므로 산 중에서 제일 큰 폭포이다。 폭포의 위와 아래에는 마당같이 넓은 반석이 있어, 쏟아지는 물 힘으로 패인 연못이 40여 척이나 되는 웅장(雄壯)한 경취(景趣)는 오묘와 신비를 극하였다。
 
어찌 이런 것이 자연으로 이루어졌을까 하는 의아심과 함께 무궁함에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다시 연담교(淵潭橋)까지 돌아와서 구정봉(九井峰) 숲 사이에 뚫린 험로를 오르면 구룡폭포(九龍瀑布) 절벽 위에 오르게 된다。
 
이것이 구룡대(九龍臺)다。
 
여기서 내려다보면 계곡에 파인 여덟 개의 벽담(碧潭)이 연주(連珠)처럼 늘어서 있어 더욱 숭엄(崇嚴)함을 더하는데 상팔담(上八潭)이라고 일컫는다。
 
길은 이미 만상정(萬相亭)으로 가는 길로 뻗어 나간다。 온정리(溫井里)로 돌아가려는 귀로(歸路)인지라, 한하계(寒霞溪) 시냇물에 발을 담그고 신계사(神溪寺) 부처님께 조국의 통일을 기원한다。
 
발아래 묵은 둘이 푸른 이끼를 띠고 길가에 뒹굴고, 맑게 씻은 바위들은 소복한 여인같이 쓸쓸히 나를 배웅하여 돌아오는 이로 하여금 감회를 자못 크게 한다。
 
 
- 북한 1977년 6월호(통권 제66호)
【문화】 북한 사암 지상순례기
• 3. 금강산 유점사를 찾아서
• 2. 금강산 신계사를 찾아서
• 1. 금강산 건봉사·심곡사를 찾아서
(2024.05.28. 10:39)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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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