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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궁인창의 지식창고 북한 사암 지상순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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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북한 사암 지상순례기
◈ 5. 금강산 표훈사를 찾아서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창건(創建)하였고, 암중(庵中)에 나옹조사(懶翁祖師)와 청허(淸虛) · 유정(惟政)의 제명승(諸名僧)의 화상(畵像)이 안치(安置)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몇 기(基)의 사리탑(舍利塔)만이 남아있는 백화암적(白華庵跡)을 찾았던 전일(前日)을 회고(回顧)하면서 오늘은 표훈사(表訓寺)로 향한다.
北韓 寺庵 紙上巡禮記
⑤ 金剛山 表訓寺를 찾아서
鄭泰爀 (哲博·東國大佛教大教授)
 
 
1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창건(創建)하였고, 암중(庵中)에 나옹조사(懶翁祖師)와 청허(淸虛) · 유정(惟政)의 제명승(諸名僧)의 화상(畵像)이 안치(安置)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몇 기(基)의 사리탑(舍利塔)만이 남아있는 백화암적(白華庵跡)을 찾았던 전일(前日)을 회고(回顧)하면서 오늘은 표훈사(表訓寺)로 향한다.
 
표훈사(表訓寺)는 백화암(白華庵)으로부터 약 2정(町)쯤 떨어져 있어, 중향성(衆香城)이 그림자를 잠근다는 함영교(涵影橋) 건너는데, 표훈사(表訓寺)의 경내(境內)에 들어가니, 과연 금강산(金剛山) 4대찰(大刹)의 하나로써, 장안사(長安寺) 다음가는 명찰(名刹)의 면모가 그대로 나타난다. 신라승(新羅僧) 표훈조사(表訓祖師)가 문무왕(文武王) 10년에 創建하였다고 하니 약 1,900년의 긴 역사를 가진 고찰(古刹)이다.
 
그 후에 세조(世祖)가 중수(重修)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표훈사(表訓寺)가 들어선 지세(地勢)가 매우 평정(平正)하고, 숲이 자욱하여 자못 야취(野趣)가 넘치는데, 마치 앞가슴같이 퍼진 곳이다. 청학봉(靑鶴峯)을 등에 지고 법기봉(法起峰)을 옆에 끼고 태상동(太上洞) · 만폭동(萬瀑洞)의 모든 승옥(勝沃)를 한 손에 휘어잡은 곳이다.
 
다리를 건너면 능파루(凌波樓)가 있다. 이 누각(樓閣)으로 들어서면 그 뒤에 개풍영빈관(開楓迎賓館)과 본당(本黨)인 반야보전(般若寶殿)이 있는데, 여기에는 법기보살(法起菩薩)을 뫼셨다.
 
장대(丈大)의 상(像)이다. 청학봉(靑鶴峰)을 배경(背景)으로 오보봉(五寶峰) · 칠성봉(七星峰) · 법기봉(法起峰)이 동북(東北)으로 중루(重壘)한 절가(絶佳)한 경계(境界)를 이루어, 고아(古雅)한 건물과 서로 어울려서 더욱 승경(勝景)을 자랑한다.
 
화엄경(華嚴經)에,
 
「동북방(東北方)……해중(海中)에 금강산(金剛山)이라는 곳이 있으니, 옛부터 여러 보살(菩薩)들이 여기에 머물렀고, 현금(現今)에는 법기(法起)라는 이름을 가진 보살(菩薩)이 있어, 그의 권속(眷屬)과 더불어, 여러 보살상(菩薩像) 1,200인(人)과 같이 그 속에 항상 머물러 있으면서 법(法)을 연설(演說)하신다」
 
고 한 것이 있으므로, 불가(佛家)에서는 금강산(金剛山)은 부처님의 금구(金口)로 증언(證言)하신 법기보살(法起菩薩)의 주처(住處)라고 믿어, 법기보살(法起菩薩)의 신앙(信仰)이 대단하였는데, 표훈사(表訓寺)에서 동북으로 가장 우뚝하게 높이 솟겨 보이는 봉우리가 법기봉(法起峰)이다.
 
마치 사람의 형자(形姿)를 하여 법기보살(法起菩薩)의 진신(眞身)이라고 하여 여러 가지 재미있는 설화(說話)가 얽혀 있다.
 
또한 반야전(般若殿) 좌우(左右)에 승찰(僧察)과 같은 당우(堂宇)가 벌려 있는데, 이것은 역대의 조정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으므로, 궁중에서 많은 빈객이 오가게 되어 개풍영빈관(開楓迎賓館)이라는 높은 누대(樓臺)도 있고 당우(堂宇)가 늘어서 있을 뿐 아니라 궁중 유래의 유물이 적지 않았고, 더구나 원(元)의 황실의 비호를 많이 입어 은문동로(銀文銅爐), 향합(香盒) 등이 전래(傳來)하는데, 지금은 어찌 되었는지? 전일(前日)에는 원(元)의 제실(帝室)의 시물(施物)을 받고 생활하던 승려(僧侶)의 사적(事蹟)을 기술한 비석과, 원조인(元朝人) 양재소찬(梁載所撰)인 「상주분량기(常住分粮記)」의 각석(刻石)이 있었는데, 그것도 지금은 어찌 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 금강산 표훈사 전경
 
 
그 뿐만 아니라 고기(古記)에 보이는 몽산화상(蒙山和尙)의 가사(袈裟), 나옹화상(懶翁和尙)의 사리(舍利) 등의 보물이 있었는데, 어찌 된 줄을 모르게 되고, 정란종(鄭蘭宗)의 명기(銘記)가 있는 500근(斤) 대유증(大鍮甑)인 큰 시루가 반야전(般若殿) 안에 놓여 있던 것이 눈에 선하다. 이 큰 시루는 한꺼번에 40말의 밥을 쪄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오래 전래(傳來)하던 오삼불(五三佛)을 새겨 뫼신 철탑(鐵塔)도 있었는데, 이것은 임진란 때에 왜병이 가져갔다고 하니. 모두 아쉬운 것 뿐이다.
 
표훈사(表訓寺)에서 특기(特記)할 것은 신앙적으로는 법기보살(法起菩薩)의 신앙의 본당(本堂)인 것이다.
 
대저 불교(佛敎)가 금강산(金剛山)으로 들어올 때에, 이 곳을 섭화(攝化)한 보살(菩薩)은 법기보살(法起菩薩)이시다.
 
그러므로 금강산(金剛山)의 모든 불교적(佛敎的) 법상(法像)은 여기서부터 나왔다고도 하니, 옛 신도(神道)의 신앙과 화엄경소설(華嚴經所說)의 법기보살(法起菩薩)의 인연설(因緣說)이 결탁하여 이룩된 듯도 하다. 따라서 표훈사(表訓寺)의 북방에 서 있는 법기봉(法起峰)은, 금강산(金剛山)에 있는 여러 신악(神岳) 중에서도 특수한 지위를 가졌었으며, 그래서 대개 제사를 지낼 때에는 이 표훈사(表訓寺)에서 지내는 일이 많았다.
 
불교(佛敎)가 이 땅으로 들어오기 이전에 우리 조상들이 믿고 있던 옛 신도(神道)인 「한밝」의 의문(儀文)은 동방의 태양을 존상하니 그래서 이 표훈사(表訓寺) 동(東)쪽에 신체(神體)를 설상(設像)한 것이 이것이다.
 
 
2
 
표훈사(表訓寺)는 부근에 여러 말사(末寺)를 가졌으니 말사(末寺)를 찾지 않을 수 없다.
 
먼저 경순왕비(敬順王妃)의 개창(開刱)이라는 돈도암(頓道庵)을 찾고, 다시 신라(新羅)의 고탑(古塔)으로 유명한 신림암(神林庵)을 둘러보니 모두 주인없는 옛 모습이 풍운(風雲) 속에 외로히 서있어 시운(時運)을 기다릴 뿐이며, 다시 정양사(正陽寺)로 발길을 돌린다.
 
정양사(正陽寺)는 옛부터 이름있는 곳이라, 특히 헐성루(歇惺樓)가 있어 유명하다. 정양사(正陽寺)로 가려면 표훈사(表訓寺)의 뒷뜰을 나와 양장(羊腸)같이 꼬불꼬불한 험로를 약 5리(里)쯤 올라서 방광대(放光臺)의 산양평지(山陽平地)를 나오면 여기에 정양사(正陽寺)가 있다. 작으나마 아담한 당우(堂宇)들이 소담스럽게 모여 있다. 정양(正楊)은 산의 정맥(正脈)이라고 일컬음이니,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여기에 오셨을 때에 법기보살(法起菩薩)이 개신(改身)하여 돌 위에서 방광(放光)을 하였으므로 여기를 방광대(放光臺)라고 하고, 이로 인하여 태조(太祖)가 요신(僚臣)을 데리고 정례(頂禮)하고 여기에 절을 이룩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뒷산등성이를 방광대(放光臺)라고 하고, 앞 재를 배점(拜岾)이라고 하게 되었다고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적혀있다.
 
사내팔각당(寺內八角堂)에는 장여(丈餘)의 석불약사(石佛藥師)가 안치(安置)되고 뒤에 있는 반야전(般若殿)에는 대반야경(大般若經)을 소장하였고, 앞뜰에는 고석(古石)과 고탑(古塔)이 있으니, 모두 신라시대(新羅時代)의 작품(作品)으로서, 탑의 구조가 정교함은 거탑리(巨塔里)와 신계사(神磎寺)의 고탑(古塔)과 아울러 금강산(金剛山) 3고탑(古塔)의 하나로 유명하다.
 
약사불(藥師佛)을 뫼신 약사전(藥師殿)은 들보를 쓰지 아니한 팔각당(八角堂)임이 또한 정교하고, 벽화(壁畫)가 오도자(吳道子)의 모사(模寫)라고 하여 고래(古來)로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며, 그 안에 석불(石佛)인 약사불(藥師佛)을 봉안하였다.
 
그 앞에는 신라(新羅) 말기(末期)에 속하는 2층의 기탑(基塔), 3층신(層身)의 석탑(石塔), 또한 고박(古樸)한 석등(石燈)이 서 있다.
 
사내(寺內)에 우뚝섰는 고루(高樓)로 올라간다. 이것은 헐성루(歇惺樓)라는 것인데, 여기서 내다보이는 내금강(內金剛)의 제봉(諸峰)은 부공(夫工)의 신교(神巧)를 경탄할 따름이다.
 
헐성루(歇惺樓)는 경내(境內)로 들어서면서 오른편으로 보이는 한 작은 누각(樓閣)이지만, 금강산(金剛山) 제이천봉(第二千峰)을 한꺼번에 구경할 수 있어 이름난 곳이다.
 
정양사(正陽寺)는 해발(海拔)로 따지면 2,700척(尺)밖에 안 되는 곳에 있지만, 내금강(內金剛)에 속하는 모든 봉만(峰蛮)이 모두 제 나름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혹은 전신(全身)이 보이기도 하고, 혹은 반신(半身)만 보이고, 전면만 보이고, 측면만 보이며, 가지각색으로 동서남 3면(面)에 둘러선 것이, 마치 헐성루(歇惺樓)가 점호할 때 빠졌다가는 혼이 날까 봐서 꼼짝 않고 서 있는 것 같다.
 
헐성루(歇惺樓)의 장관을 만들기 위해서 금강산(金剛山)이 생겼나 보다.
 
이 세상에 있는 온갖 산이란 산의 전형(典型) 물색(物色)을 앉은 자리에서 고스란히 볼 수 있는 것이 이 헐성루(歇惺樓)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산다운 산이 금강산(金剛山)을 빼고는 없는데, 금강산(金剛山)에서 이 헐성루(歇惺樓)만한 위치가 또한 다시 없기 때문이다.
 
어느 명화(名畵)가 이에 따르며, 어느 명필(名筆)이 이를 형용(形容)할 것이라.
 
가정(稼亭) 이곡(李穀)이 정양(正陽)에 와서 읊은 시(詩)가(家) 있다.
 
玆山怪怪復奇奇
愁殺詩人與畫師
更欲登臨最高處
臍脚力未衰時
 
라고 하였고, 또한 직제(直齊) 이기홍(李箕洪)은
 
肩興催上正陽樓
萬二千峰眼底浮
盡日憑欄眞面對
吾行到此便宜體
 
라고 하였고, 종산(鍾山) 조존집(趙存集)은,
 
一生即住正陽寺
九死難忘歇惺樓
不用更躋高處望
金剛眞面已全收
不可形容不可思
群巒只足强名之
……
 
이라고 한 것이 있으나 어찌 이를 두고 형용하리요.
 
 
3
 
자! 다시 길을 잡아 만폭동(萬瀑洞)으로 가자. 표훈사(表訓寺)로 돌아와서 그 동문(東門)으로 나가면, 계류(溪流)를 따라서 청학봉(靑鶴峰) 밑에 금강문(金剛門)이라는 석문(石門)이 있다.
 
이 석문(石門)을 나가면 단애(斷崖)가 양측(兩側)에서 핍박(逼迫)하니, 향로봉록(香爐峰麓)에서 흐르는 물과, 또한 내원통암(內圓通庵)으로부터 흐르는 물이 합주(合注)되는 곳이다.
 
만폭동(萬瀑洞)의 승경(勝景)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안에 내금강(內金剛)의 대표적(代表的)인 수승(殊勝)한 누침(累枕)요, 현묘유원(玄妙幽遠)한 팔담(八潭)이 있다.
 
수십척(數十尺)에 걸쳐서 펴져있는 큰 반석(盤石)이 마당같이 깔렸는데, 반석(盤石) 위에 봉래선인(蓬萊仙人) 양사언(楊士彦)이 쓴 글로서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이라는 여덟 자가 천겁(千劫)의 풍우(風雨)에도 쓰러지지 않고 뚜렷이 남아있다. 그 옆에 새겨진 기반(基盤)은 옛 선인(仙人)이 한가히 노닐던 자취라고 한다.
 
양사언(楊士彦)의 글씨는 필세(筆勢)가 하늘을 나르고 꿈틀거림이 가히 만폭(萬瀑)과 더불어 다툴 만하다.
 
이곳을 지나면 좌우에 버티고 서 있는 깎아 세운 단벽(斷壁)은 모두가 철동색(鐵銅色)으로 검푸른 음기(陰氣)가 서린 천지(天地)에 계류(溪流)가 급히 달리니 천인궁학(千仞窮壑)에 쏟겨 내린다. 온 금강산(金剛山) 중에 백천줄기 골짜기 물이 이리로 용솟음치며 만출(灣出)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승경(勝景)은 더욱 수승(殊勝)하니, 송운(松雲) 유정(惟政)도 이곳 만폭동(萬瀑洞)을 읊어 칭찬하되,
 
此是人間白玉京
瑠璃洞府衆香城
飛流萬瀑千峰雪
長肅一聲天地驚
 
이라고 하였다.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한 봉우리가 있으니, 이것이 또한 오인봉(五人峰)이다. 여기에 청학(靑鶴)이 산다고 말한다. 또한 그 밑에 푸른 담(潭)이 있어 이름하기 관음담(觀音潭)이요. 담반석애(潭畔石崖)에는 푸른 이끼가 끼어 오를 수가 없다.
 
곤로봉(昆盧峯)의 남쪽, 내무재령(內霧在嶺)으로부터 출발하는 계류(溪流)가 마하연(摩訶衍) 밑으로 흘러 떨어져서, 법기봉(法起峰)의 암벽(岩壁)에 부딪쳐, 부서져서 비등(飛騰)하는가 하면 거꾸로 떨어지고 용솟음치며 솟아오르는 그 기세(氣勢)는 그야말로 노폭(怒瀑)이 비등(飛騰)하여 작게는 주옥(珠玉)을 이루고 크게는 분설(粉雪)을 이루는 품이 가(可)히 천하(天下)의 절경(絶景)이다.
 
연장(延長) 15정여(町餘)에 울려 진동하는 성향(聲響)이 산곡(山谷)을 뒤흔든다. 이것이 8담(潭)의 진경(珍景)이다.
 
여덟개의 폭포(瀑布)가 모두 이 萬瀑洞에 모여 있으니, 흑룡담(黑龍潭), 비파담(琵琶潭), 벽파담(碧波潭), 분설담(噴雪潭), 진주담(眞珠潭), 구담(龜潭), 선담(船潭), 화룡담(火龍潭) 등 여덟이다.
 
외금강(外金剛) 옥류동(玉流洞)의 8폭(瀑)과 구분하기 위하여 이것을 내금강(內金剛)의 8폭(瀑)이라고 부른다. 만폭동(萬瀑洞)에는 이 밖에도 유명무명(有名無名)의 여러 연폭(淵瀑)이 있어 승경(勝景)은 이를 데 없다.
 
깊어가는 계곡(溪谷)은 한걸음 한걸음마다 새로워지는데, 먼저 부닥치는 큰 홍담(泓潭)이 영화담(暎花潭)이다.
 
무섭게 하얀 돌이 주옥(珠玉)같이 맑은 물을 담아 찾는 이를 반기니, 우선 노독(路毒)을 잊고 정신(井神)이 쇄락(灑落)해진다.
 
이내 와폭(臥瀑) 하나를 지나면 돌 위에 철구확같이 파인 구멍이 있고, 거기에 물이 고였는데, 이것이 옥녀세두분(玉女洗頭盆)이라는 것이다. 석애(石崖)로 올라가면 김매월당(金梅月堂)의 애각(崖刻)이 보인다.
 
「요산요수(樂山樂水)는 인지상정(人之常情)이나 이아칙등산이소(而我則登山而笑)라, 임수이곡(臨水而哭) 운운(云云)」
 
하였다.
 
 
▶ 금강산 비로봉
 
 
그의 애타는 심정을 가히 짐작하게 된다. 이 아름다운 금강산(金剛山)에 와서 눈물을 흘린 것이다.
 
애각(崖刻)의 밑에 청룡담(靑龍潭)이 있다. 근처의 돌은 오히려 약간 붉은 빛을 띠었다. 임을 여읜 김시습(金時習)의 피눈물에 물든 듯 싶어지나 비단(緋緞) 매월당(梅月堂)만이랴.
 
금강산(金剛山)을 찾아드는 사람이 유독 즐거운 마음에만 취할 뿐만 아니라 슬픔에 젖어 여기서 일생을 눈물로 불사른 사람도 많으리라 생각하면서 희비쌍곡(喜悲雙曲)의 느낌을 짐짓 갖추면서 조금 더 올라가면, 떨어지는 물을 받아서 한 소(沼)를 이룬 것이 있으니, 이것이 영아지(影娥池)이다. 사선대(四仙臺)라고 새긴 것이 보인다.
 
 
4
 
언듯 고개를 쳐들면 맞은 편 법기봉(法起峰) 허리에 불면 날아갈 듯한 작은 암자(庵子)가 공중에 강뚱히 매달려 있다. 한편쪽 기둥 받침이 수백척(數百尺) 외기둥으로 받혀 있는데, 이것은 구리기둥이다. 이것이 유명한 보덕굴(普德窟)이다.
 
하늘에서 선인(仙人)이 내려오는 것 같다. 고구려(高句麗) 안원왕(安原王) 때 보덕대사(普德大師)가 여기에서 수도(修道)한 곳이다.
 
보덕굴(普德窟)은 겨우 7, 8간(間) 남짓한 작은 암자(庵子)이지만, 금강산(金剛山) 8만9암자(庵子) 중에서 가장 특이(特異)한 위치(位置)에 있는 것이다. 법기봉(法起峰) 중복(中腹)을 서쪽으로 향하여 나가면 간반(間半)통 삼간(三間) 길이의 한 작은 집이 붙어 있는 것은 변도방(辨道房)이다.
 
뜰에 나서매 대소(大小) 향로봉(香爐峯) 이쪽으로 만폭동(萬瀑洞) 계곡(溪谷)의 모든 비밀을 지켜보게 되는데, 뜰에서 남으로 암벽에 3층걸이로 된 집이 앞에는 구리쇠의 지팡이를 짚고, 뒤에는 쇠사슬에 얽혀 매달린 것이었다.
 
이것이 보덕굴(普德窟)의 관음굴(觀音窟)이니, 약해서 보덕굴(普德窟)이라고 한다. 본래 이 암자(庵子)는 덩그렇게 공중에 매달렸다고 하여 고인(古人)은 석연소(石燕巢)같다고도 하고, 신선(神仙)의 집이라고도 하였다.
 
이 관음굴(觀音窟) 서(西)쪽 구석에 백석상(白石像)이 봉안(奉安)되어 있을 뿐이다. 과거(過去)에는 무수한 축원문(祝願文)이 있었는데, 지금은 어찌 되었는지 찾을 길이 없다.
 
금강산(金剛山) 중(中)에서도 영험(靈驗)하신 이 부처님께 조국의 평화통일을 기원하면서 김일성(金日成) 도당(徒黨)들의 미친 망상(妄想)을 어서 없애 달라고 기원(祈願)하지 않을 수 없다. 남추강(南秋江)의 기(記)에도 『관음전전원상원다(觀音前前願狀願多)」라고 하였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기도를 했는가를 알 수 있다.
 
만폭동(萬瀑洞)을 비롯하여 이 보덕굴(普德窟)에는 아름다운 설화(說話)가 있다. 그것은 옥녀세두분(玉女洗頭盆)에서 비롯하여 이 보덕굴(普德窟)에서 그치는 이야기(惹起)다.
 
흔히들 말하기를 만폭동(萬瀑洞)은 선녀(仙女) 보덕(普德)각시의 택지(宅地)로서 보덕(普德)각시가 사람을 기다려 상사몽(相思夢)에 울적하면, 백옥(白玉)같은 몸을 아낌없이 드러내어 만폭동(萬瀑洞) 상하(上下) 팔담(八潭)의 사이를 오르내리면서,
 
「기다리는 임은 어디 오시나, 청산(靑山)은 만금(萬金)이요, 심수(深水)는 천회(千廻)로다」
 
하면서 노래를 하는데, 오락가락하는 꽃다운 모습이 옥수(玉水)에 비칠 때에는, 나와 같이 이 아릿다운 가인(佳人)을 버려두고 임은 어디로 다니는가 상심(傷心)하느라니, 옥같은 얼굴과 삼단같은 검은 머리를 북북 씻던 곳이 옥녀세두분(玉女洗頭盆)이요, 손수건을 빨던 곳이 수중암(手中岩)이다. 선녀인들 임 그리움이 어찌 없겠는가.
 
천상(天上)에 있으면 이런저런 일도 없으련만 인간 세상에 내려와 이곳 만폭동(萬瀑洞)에 택지(宅地)를 정하니 인간이 그리울 것도 당연하리라.
 
이러한 선인(仙人)의 사정(事情)이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인간(人間)에게 알려졌다. 보덕(普德)각시는 부끄러워서 몸을 숨겼지만 짓궂은 인간(人間)이 그의 자취를 따라서 각시의 집으로 가보니 그것이 바로 관음굴(觀音窟)이었다는 것이다.
 
이 보덕(普德)각시는 바로 관음(觀音)의 화신(化身)이라고 한다.
 
보덕굴(普德窟)에서 만폭동(萬瀑洞)의 계류(溪流)를 내려다 보면 아슬아슬한 것이 잘못 이곳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더구나 보덕(普德)각시가 숨어 사는 이곳에 내가 찾아왔으니, 무슨 죄를 지은 듯하기도 하다.
 
발 아래를 굽어보니, 눈이 아물거리고 찬바람이 얼굴을 씻어가는데, 몸이 둥둥 떠서 구름 위로 날라간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이
 
「陰風生巖玉
溪水深更綠
倚杖望層巓
飛簷駕雲木」
 
이라고 한 것이 실감(實感)으로 느껴진다. 또한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의
 
銅柱琳宮白日邊
亂峯加雲倚長天
眞仙倘佳千尋窟
仍我靑靈駕紫姻
 
이라는 시구(詩句)가 머리를 스쳐가는 바람에 눈을 번쩍 뜨니 한 청학(靑鶴)이 오락가락 하면서 나를 보자 굴(窟)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 북한 1977년 9월호(통권 제69호)
【문화】 북한 사암 지상순례기
• 6. 금강산 마하연사를 찾아서
• 5. 금강산 표훈사를 찾아서
• 4. 금강산 장안사를 찾아서
(2024.06.16. 16:26)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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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