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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북한 사암 지상순례기
◈ 8. 함북 칠보산 개심사를 찾아서
개심사(開心寺)는 함흥(咸興)에서 북(北)쪽으로 약 100리(里)쯤 가서 천불산(千佛山)에 있는 명찰(名刹)이다. 이들 사찰(寺刹)이 있는 산의 이름부터 묘(妙)한 불연(佛緣)이 있으니, 천불(千佛)이라는 것이 이것이다. 천불(千佛)이라는 것은 과거의 장엄겁(莊嚴劫)에 있어서 1, 000의 부처님께 공덕을 쌓았다는 것이요, 또한 미래(未來)의 성숙겁(成熟劫)에도 1, 000의 부처님께 공덕을 쌓는 것이요, 또한 현재의 현겁(賢劫)에서도 1, 000의 부처님께 적덕(積德)하는 인연으로 있게 된 산이라는 것이다.
北韓 寺庵 紙上巡禮記
⑧ 咸北 七寶山 開心寺를 찾아서
鄭泰爀 (哲博·東國大佛教大教授)
 
 
개심사(開心寺)는 함흥(咸興)에서 북(北)쪽으로 약 100리(里)쯤 가서 천불산(千佛山)에 있는 명찰(名刹)이다. 이들 사찰(寺刹)이 있는 산의 이름부터 묘(妙)한 불연(佛緣)이 있으니, 천불(千佛)이라는 것이 이것이다.
 
천불(千佛)이라는 것은 과거의 장엄겁(莊嚴劫)에 있어서 1, 000의 부처님께 공덕을 쌓았다는 것이요, 또한 미래(未來)의 성숙겁(成熟劫)에도 1, 000의 부처님께 공덕을 쌓는 것이요, 또한 현재의 현겁(賢劫)에서도 1, 000의 부처님께 적덕(積德)하는 인연으로 있게 된 산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천불산(千佛山)은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많은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불연(佛緣)이 돈독한 영산(靈山)이다.
 
이러한 영산(靈山)에 또한 개심사(開心寺)라는 명찰(名刹)이 있다. 이름부터가 개심(開心)이다. 마음을 활짝 열어 펼치라는 절이다.
 
부처님이 6년고행(苦行) 끝에 보리수(菩提樹)나무 밑에서 명상(暝想)에 잠기셨을 때, 동쪽 하늘에 명성(明星)이 비치고 있는 것을 보시고 홀연 개심(開心) 하신 그때의 그 마음을 가리킨다.
 
부처님의 그 때의 그 마음은 저 맑게 비친 명월(明月)과 같이 마음에 티끌이 없는 깨끗한 마음이니, 인간의 고뇌(苦惱)를 깨끗이 떠난 마음이다. 그러나 그 마음이 어떻다고 표현할 수 없고 잡을 수 없는 마음이라, 과거심부가득(過去心不可得), 현재심부가득(現在心不可得), 미래심부가득(未來心不可得)이다.
 
9년 면벽(面壁)하는 달마(達磨)앞에선 혜가(慧可)가, 스스로 제자(弟子)가 되겠다고 자기의 팔뚝을 잘라 보인 고사(故事)와 같이, 아무데도 걸리지 않는 마음이기도 하다. 그래서 개심사(開心寺)라고 한 이 절의 이름이, 마음을 홀연히 연다는 것이요, 천강(千江)에 비친 달과도 같은 마음을 가리키고 있다. 그럼으로 이 산에 계시는 십방삼세(十方三世)의 무량겁중(無量劫中)에서 설법(說法)하시는 많은 부처님이 이 절에 머물면서 수도(修道)하는 수도자(修道者)에게 마음을 열어주시는 곳이다. 그래서 여기에 보이는 십방법계(十方法界)의 모든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모두 마음을 열어 성불(成佛)하는 절이다.
 
함경남도(咸鏡南道)에서는 이 천불산(千佛山)의 개심사(開心寺)가 옛부터 명찰(名刹)로 이름난 곳이나, 현금(現今)에는 여기에서 불연(佛緣)을 고마워하는 자(者)가 없게 되었으니 미법시대(未法時代)이 무슨 기연(機緣)을 기다림인가.
 
산(山)마루에 올라가서 개심사(開心寺)를 내려다 보니 사지(寺趾)가 실로 묘(妙)함이 있다. 좌우로 둘려 싸인 뫼뿌리는 뒤에서 보필(輔弼)하고 앞에서 맞으며, 흐르는 물줄기가 산을 휩싸는 것이 모든 형국의 아름다움을 갖추었다. 그야말로 오행(五行)을 갖춘 형국은 태극(太極)이 동(動)해서 일어난 양기(陽氣)가 온 산세(山勢)를 움직이다가 고요히 쉬면서 음(陰)으로 변하여 적정(寂靜)을 극(極)하는 것은 5기(氣)가 움직여서 8괘(卦)를 이루듯이 이 산, 저 산은 소위 오회지지(五會之址)를 이루고 있다. 그럼으로 지공화상(指空和尙)이 말하기를 비록 산수(山水)가 절승(絶勝)하되 형국이 오회(五會)를 얻기가 어렵다고 했는데, 그러나 이 곳은 산수(山水)가 절승(絶勝)할 뿐만 아니라 오회(五會)를 얻은 곳이라, 반드시 장차 크게 형통(亨通)할 곳이다.
 
 
▶ 함북 칠보산의 전경 (출처:월간 산)
 
 
옛날 단군(檀君)께서 백두산(白頭山)으로부터 내려와 10일동안 이 산에 머물러 지제선인(持提仙人)을 만나보고 문답(問答)한 곳이 또한 여기가 아닌가?
 
그래서 그 후에서 이 산을 지제산(持提山)이라고 했으며, 그후에 주무왕(周武王) 때에 기자(箕子)가 백두산(白頭山)을 거쳐서 이 산 가까이 오니 밤낮으로 구름이 짙은 속에서 어디선지 피리소리가 구름 사이에 들리는지라 그 피리소리를 따라서 이 산으로 오니, 그 피리소리는 바로 이 산에서 나는지라, 이 산을 풍류산(風流山)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 후, 한(漢)나라 소제(昭帝), 명제(明帝) 때에 불경(佛經)이 중국(中國)으로 도래(到來)하고, 그 후에 당(唐) 태종(太宗) 22년(年), 신라(新羅)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이 산에 1, 000의 탑을 쌓았음으로 천탑산(千塔山)이라고 하게 되었고, 그 후에 당(唐) 고종(高宗)때, 지공국사(指空國師)가 여기에 절을 지어 개심사(開心寺)라고 하고, 산이름을 천불산(千佛山)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럼으로 이 개심사(開心寺)는 우리나라의 도선국사(道詵國師)와 호승(胡僧) 지공화상(指空和尙)과는 깊은 인연이 있는 사찰(寺刹)로서, 많은 사화(史話)가 얽혀 있다.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여기에 천탑(千塔)을 세우게 된 이야기는 이러하다.
 
도선(道詵)이 이 산(山)으로 와서 축탑(築塔)하려 할 때, 마음에 몇 개의 탑을 쌓을지 알지 못하기에 산세(山勢)를 보고 두루 살피니, 산천(山川)의 악기(惡氣)가 가득한 지라, 마음이 심히 현란(眩亂)하여, 한 번 이 악기(惡氣)를 도력(道力)으로 누르니, 홀연히 한 조각 흰 구름 속에서 1, 000개의 탑을 쌓으라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날라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도선(道詵)은 1, 000개의 탑을 쌓게 되었고, 이에 따라서 천탑산(千塔山)이라고 했다고 한다.
 
또한 지공화상(指空和尙)이 이 산에 절을 지을 때에 이 절터를 답사하니, 터가 묘(妙)하여 반드시 먼저 어떤 절을 세웠을 것이니, 그 터를 찾으려고 할 때 큰 바위가 셋이 있는지라, 그 바위를 옮겨 보려고 하나, 옮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음이 심히 개연(慨然)하여 하는 수 없이 한 노송(老松) 밑에 앉아 밤을 새우게 되는데, 야반(夜半)에 뇌성(雷聲)이 동중(洞中)에서 치면서 무엇을 깨는 소리가 났다. 그래서 아침에 그 소리난 곳으로 가보니, 세 큰 바위가 어디론지 가서 없어지고 그 자리가 매우 묘(妙)하여 절을 세우려는 소원(所願)과 같은지라, 지공(指空)이 감탄하여 말하기를 땅이 열려서 절터가 생겼으니, 하늘이 지공(指空)의 마음을 열었도다 하고, 절을 거기에 짓고, 이름을 개심사(開心寺)라고 하였다.
 
하여튼 천불산(千佛山) 밑에 있는 이 개심사(開心寺)는 한반도(韓半島)의 정기(精氣)가 여기에서 용출(鎔出)한 곳이다. 저 반공(半空)에 치솟은 봉우리는 관음산(觀音山)이라고 하는 것이고, 서쪽으로 바라보아 멀리 광활한 계곡이 보이는 곳은 천불동(千佛洞)이다.
 
일월(日月)을 한 입으로 품었다가 토해 낼듯이 웅대(雄大)하다. 여기에 천불(千佛)이 있다. 사방십리(四方十里)나 되는 동내(洞內)에는, 또한 큰 석굴(石窟)이 있다. 그 안으로 들어가니, 사방(四方) 100보(步)의 넓이나 되는 텅빈 동굴(洞窟)이다. 옛날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축탑(築塔)할 때에 힘이 들어서 피곤하면 여기에서 쉬던 곳이다. 동(洞)안에 네개의 연못이 있는데, 각각 1리(里)쯤 떨어져 서로 상조(相照)하니, 기이(奇異)하다 할 것이다.
 
동국지지(東國地誌)에 보면 「사상지어경도(四象池於鏡道)」라고 한 그 네 연못이 과연 이것이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여기에 큰 연못이 있는 것은 희유(希有)한 일이다.
 
산봉(山峰) 위로 올라가서 천탑(千塔)을 바라보니, 한 눈 앞에 벌어져 보이는 것이, 마치 석병(石甁)을 세워놓은 듯한데, 하나하나의 탑신(塔身)이 서로 상섭(相涉)하니, 텅 빈 큰 방 안에 천등(千燈)을 켜 놓은 것과도 같다.
 
누워서 보아도 나타나고, 서서 보아도 모두 나타나는 것이 마치 가을 맑은 하늘에 한 조각 달이 구름 사이에 나타나는 것 같기도 하다. 저 장공(長空)을 나르는 것은 무엇인가. 고목(古木)이 비천(飛泉)하는 저 곳에는 단학(丹鶴)이 깃들이고 있지 않는가.
 
고려(高麗) 89년에 이 절에 불이 나서 대웅전(大雄殿)이 타고, 니소(泥塑), 목조(木彫), 정화(幀畵), 영상(影像)이 모두 타버렸으나, 오직 여기에 소장(所藏)했던 대장경(大藏經)만은 완연(完然)하였다고 하니, 가히 짐작할만도 하다.
 
그 후에 고려왕사(高麗王師) 나옹선사(懶翁禪師)께서 이 절을 절터의 중앙(中央)지로 옮기고 중건(重建)하였던 것인데, 그 후 여러번 중수(重修)하여 지금 초라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그동안에 많은 사연이 얽혀 있다. 과거, 불운(佛運)이 융창(隆昌)하던 때에는 이 절에 영걸(英傑)이 운집(雲集)하던 곳이니, 선(禪)∙교(敎)를 쌍수(雙修)하는 승려(僧呂)가 많이 모였고, 문장(文章)이 능한 호변준걸(好辨俊傑)도 많이 모였으며, 티끌 세상을 떠나서 마음의 고요함을 즐기던 도승(道僧)들도 많이 모였다.
 
고려(高麗) 299년, 고종(高宗) 때에 다시 이 절에 불이 나서 완전히 타버린 일이 있었는데, 이것은 겁화(刼火)를 입은 것이 아닌지, 말세(末世)가 되면 인심(人心) 또한 흉악(兇惡)하니, 겁화(刼火)인들 없을소냐.
 
이 산은 대덕산(大德山)의 한 지맥(枝脈)으로써, 왼쪽으로 봉황봉(鳳凰峰)이 솟아 있고, 오른쪽에는 오상봉(梧相峰)이 서 있으며, 봉(峰) 밑에는 덕안릉(德安陵)이 있고 봉황봉(鳳凰峰) 밑에 이 절이 있다.
 
태조대왕(太祖大王)이 이 절에 덕안릉(德安陵)을 봉(封)하고, 원당(願堂)으로 이 절을 지정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물론 무학대사(無學大師)가 권한 것이니, 무학(無學)이 이 절의 도형(圖形)을 태조(太祖)께 아뢰었던 것이다. 그 후에 태종대왕(太宗大王)이 또한 이 절을 정화릉(定和陵)이라고 봉(封)하고 제사(祭事)를 봉향(奉香)케 했으며, 이로 인해서 이 절이 매우 소중히 여겨졌던 것이었다. 조선조(朝鮮朝)가 등국(登國)한 후, 함경감영(咸鏡監營)을 영흥(永興)에 초설(初設)하였던 것을 도백여공(道伯呂公)이 함흥(咸興)으로 옮기고 함산지(咸山誌)를 기술한 속에 보면 이 개심사(開心寺)의 경내(境內)에 암자(庵子)가 몇 개 있었다고 기록되었는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암자(庵子)인 금수암(金水庵)이 변을 당하였고, 갑자호란(甲子胡亂) 때에 정수암(淨水庵)이 또한 변을 당하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 대성암(大聖庵)이 변을 당하였는데 옛 금수암(金水庵)이 그 후에 백운산(白雲山)의 성불사(成佛寺)가 되고, 정수암(淨水庵)이 운봉산(雲峰山)의 정수사(淨水寺)가 되었고, 대성암(大聖菴)은 광흥사(廣興寺)가 되었다. 진세(塵世)의 덧없는 변태(變態)는 가히 논할 바 아니로되, 또 다시 적토(赤土)에서 찾는 이 없는 적료함을 면치 못하게 되니, 어찌 개탄(慨嘆)치 않으리요.
 
사내(寺內)를 돌아보니 강희(康熙) 갑진년(甲辰年)에 관찰사(觀察使) 노봉민공(老峯閔公)이 쓴 친필(親筆)로 대웅전액자(大雄殿額字)와, 신해년(辛亥年)에 관찰사(觀察使) 약천(藥川) 남공구만(南公九萬)의 친필(親筆)로 된 양화루(兩花樓), 영송루(迎送樓)의 두 액자(額字)가 있고, 을미년(乙未年)에 관찰사(觀察使) 춘오(春塢) 이공(李公) 당규(堂湀)의 친필(親筆)인 극락전(極樂殿), 약사전(藥師殿), 적조당(寂照堂)이라고 된 네 액자(額字)와, 무자년(戊子年)에 관찰사(觀察使) 우계(愚溪) 홍만조(洪萬朝)가 쓴 명부전(冥府殿), 나한전(羅漢澱)이 옛 사람들의 입김을 느끼게 할 뿐이다.
 
이제 대웅전(大雄殿) 부처님께 고(告)하여도 지금의 심회(心懷)를 풀길 없어, 다시 발길을 돌려 천불산(千佛山) 밖의 몇 개의 말사(末寺)를 찾기로 한다. 말사(末寺)라고는 기린사(麒麟寺)와 관음사(觀音寺)의 둘이 있다. 천불산(千佛山) 안에는 대승암(大乘庵)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는데, 이것은 원효대사(元曉大師)의 창건(刱建)으로 전하며, 또한 불정암(佛頂庵)은 의상대사(義湘大師)의 창건(刱建)이라고 하며, 견불암(見佛庵)은 나옹화상(懶翁和尙)의 병건(瓶建)이라고 하는데, 옛날에 모두 일곱의 암자(庵子)가 있던 것이 지금은 다섯개만 남아 있다.
 
옛 선인(先人)들은 이 곳에서 천불(千佛)을 배견(拜見)했건만 지금에 누가 부처님의 모습인들 배견(拜見)하겠는가. 지공(指空)이 일심(一心)의 홀연활개(忽然豁開)에서 천화상백억계(千花上百億界)에서의 백억(百億)의 부처님을 배견(拜見)하였을 것이요, 도선(道詵)도 여기에서 1, 000의 부처님을 뫼셨건만, 현금(現今)에 과연 누가 부처님의 모습을 뵈올 수 있는지?
 
한 부처님의 모습을 보면 그 속애서 천백억(千百億)의 부처님을 뵈올 수 있고 활짝 열면 이 마음속에서 천백억(千百億)의 부처님을 뵈올 수 있다.
 
그러니 북한(北韓)의 편집광(遍執狂)들도 개심사(開心寺)에 와서 마음을 열면 부처님을 여기서 뵈두면, 바로 여기에서 천불(千佛)이 출현(出現)할 날이 올 것이다. 부처님 앞에 그 날을 기원할 새 발 아래에 청풍(淸風)이 스쳐가니, 면전(面前)에 밝은 달이 또한 진불(眞佛)이 아니냐.
 
어젯밤 꿈에 만뢰(萬籟)가 구적(俱寂)하고 심신(心神)이 청한(淸閑)하더니, 이제 일진청풍(一陣淸風)이 도래(到來)하여 홀연 개심(開心)을 얻는도다.
 
도선(道詵)이 탑을 세우고, 지공(指空)이 절을 지어 이제 나에게 이렇게 보여주니, 그동안 몇 사람이나 제도(濟度)하였느냐. 축탑조사(築塔造寺)한지 천 여년, 몇 사람이나 거쳐 갔나? 세월을 헤아려 보다 깜박 잠이 들어, 또 꿈을 꾸니, 석가(釋迦), 가엽(伽葉), 대덕(大德), 대유(大儒)들이 모두 와서 나를 반긴다.
 
내가 이제 이 십방법계(十方法界)에 머물면서 십방삼세(十方三世)의 모든 부처님과 맞뵈우니, 시공(時空)을 초월한 무애지간(無碍之間)에 마음은 마치 거울과 같고, 이 거울에 비치는 만상(萬象)이 또한 나의 참 모습이 아니냐.
 
때는 이미 저물려하니, 산사(山寺)를 내려와 청풍(淸風)을 베고 쉬고자 할 때, 청풍사문(淸風沙門)과 명월비구(明月比丘)가 모두 놀라 몸을 일으켜 경송(敬送)한다. 아연(俄然)히 꿈을 깬 즉, 과연 내가 청풍(淸風)을 덮고 누워 명월(明月)을 베개로 삼았도다.
 
오호(嗚呼)라, 긴 인생(人生)이 또한 일장춘몽(一場春夢)인대 꿈 속에 삼팔선(三八線)을 넘어서 함흥(咸興)을 지나 천불산(天佛山) 개심사(開心寺)를 찾으니 나의 도력(道力)도 이만하면 장(壯)하도다.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이것 또한 진(眞)에서 멀기 천만리(千萬里)이건만,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무언(無言) 속에 말을 하고 함이 없는 속에서 글로 적으면서, 고성(古聖)의 자취를 더듬고, 불적(佛跡)을 찾는 일이 또한 대견하다 할 것이다
 
인간세상의 500년이 도리천(忉利天)의 일주야(一晝夜)요, 도리천(忉利天)의 500년이 야마천(耶摩天)의 일주야(一晝夜)요, 야마천(夜摩天)의 500년이 도솔천(兜率天)의 일주야(一晝夜) 라고 하니, 이와 같이 올라가서 28천(天)의 최상(最上) 비비상천(非非想天)의 일주야(一晝夜)면 과연 인간(人間)속의 몇 해나 되겠는가. 불가설(不可說), 불사량(不思量)이나, 부처님의 한 세계(世界) 속에서는 한 찰나에 꺼졌다 다시 생하는 물거품과도 같다. 반세기(半世紀)동안 국토(國土)가 양단(兩斷)된 것이 무슨 걸림이 있겠는가? 영겁중(永劫中)의 일찰나(一刹那)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이 땅이 적지(赤地)에 싸여 잡초만 우거져 있기는 하나, 이 땅에도 불연(佛緣)이 다시 오면 천백억불신(千百億佛身)이 일불시현(一佛示現)으로 화현(化現)할 것이며, 무량(無量)한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으로써 교화도생(敎化度生)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기연(機緣)을 기다리는 곳이 바로 여기가 아니고 무엇이랴, 김일성도당(金日成徒黨)들아, 제비나 참새가 어찌 대붕(大鵬)의 뜻을 알까보냐마는 그래도 이 땅에 불연(佛緣)이 오랬으니 그대들도 여기에서 마음만 씻으면 모두 형제의 정(情)이 오갈 것이니 그래서 조국(祖國)이 통일(統一)이 되면 그 때에는 내가 다시 이곳을 찾기로 하겠다마는 이제 슬픈 마음을 금치 못하면서 하산귀경(下山歸京)하겠노라.
 
 
- 북한 1977년 12월호(통권 제72호)
【문화】 북한 사암 지상순례기
• 9. 함남 함흥 귀주사를 찾아서
• 8. 함북 칠보산 개심사를 찾아서
• 7. 함남 안변 석왕사를 찾아서
(2024.06.20. 17:11)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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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