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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궁인창의 지식창고 북한 사암 지상순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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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북한 사암 지상순례기
◈ 10. 함북 종성 곡천사를 찾아서
지난번에는 함흥(咸興)의 설봉산(雪峯山)에 있는 귀주사(歸州寺)를 찾아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여러 그의 말사(末寺)를 찾아 보았다. 귀주사(歸州寺)가 고려(高麗) 때의 고찰(古刹)로서 함경남북도(咸鏡南北道)의 대본산(大本山)이니만큼 많은 말사(末寺)를 가지고 있다.
北韓 寺庵 紙上巡禮記
⑩ 咸北 鍾城 谷泉寺를 찾아서
鄭泰爀 (哲博·東國大佛教大教授)
 
 
지난번에는 함흥(咸興)의 설봉산(雪峯山)에 있는 귀주사(歸州寺)를 찾아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여러 그의 말사(末寺)를 찾아 보았다. 귀주사(歸州寺)가 고려(高麗) 때의 고찰(古刹)로서 함경남북도(咸鏡南北道)의 대본산(大本山)이니만큼 많은 말사(末寺)를 가지고 있다.
 
귀주사(歸州寺)에 속해 있는 사암(寺庵)의 수는 함경남북도를 통해서 81 사암(寺庵)이니, 사암(寺庵)을 두루 순례(巡禮)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적(寺跡)이 기록(記錄)에는 남아 있어, 선인(先人)들의 유택(遺澤)을 잊을 수 없는 사암(寺庵)을 찾아 보려고 한다. 오늘은 종성(鍾城)의 곡천사(谷泉寺)로 가기 전에 영흥(永興)의 안불사(安佛寺)를 먼저 찾아야 하겠다. 이 사암(寺庵)은 석왕사(釋王寺)의 말사(末寺)로 되어 있었으나, 전번에 찾지 못하여 자못 섭섭함을 금할 수 없어, 늦으나마 찾아 보고 길주(吉州)로 해서 함북(咸北)의 종성(鍾城)까지 올라 가려고 하는 것이다.
 
안불사(安佛寺)는 영흥군(永興郡) 복흥면(福興面)에 있는 고찰(古刹)이다. 영흥군(永興郡) 성불산(成佛山)에 자리잡고 있다. 사적(事蹟)의 기록에 보면 홍무(洪武) 26년에 유릉묘(楡陵墓)를 점득(占得)하려고 조정(朝庭)으로부터 지관(地官)이 왔는데, 그 때에 철령(鐵嶺) 위에서 부첩(符惵)을 띄워 날렸더니 떨어진 곳이 이곳인데 이것을 안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여기에 작은 암자(庵子)를 지어 절을 이룩하고자 하였음으로, 지관(地官)이 감히 이 자리를 빼앗을 수 없어, 다시 부첩(符惵)을 날리니, 이 암자(庵子)의 동쪽 동구안에 떨어졌는지라 그래서 이 곳에 묘소(墓所)를 정하였다 하니, 그곳이 지금의 유릉(楡陵)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후에 안불사(安佛寺)는 날로 융성하여 승도(僧徒)들의 운집(雲集)이 점성(漸盛)하니 처음 크게 법당(法堂)을 세우고 좌우에 요사(寮舍)를 지으니, 숭정(崇禎), 무자년(戊子年)에는 다시 남루(南樓)를 건립(建立) 하게 되어 드디어 거찰(巨刹)이 이룩되었다.
 
이렇게 하여 여기에 명승(名僧)들이 모여 살게 되었던 것인데, 그 후에 재난(災難)을 만나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법당(法堂)을 중건(重建)하고 또한 동서(東西)에 상실(上室)을 창건하여 옛보다도 더욱 증축하였었다. 그 후에 강희(康熙), 을사년(乙巳年)에 태심(太心), 지훈(智訓) 두 대덕(大德)이 개축(改築)하여 좌우로 두 선방(禪房)을 건조(建造)하니 동우(棟宇)가 매우 웅장하여 신도(信徒)가 운집(雲集)하기 시작하자 이 절 살림이 매우 융성하였는데, 병진년(丙辰年) 봄에 또 화재(火災)를 만나 법당(法堂)이 회신(灰燼)되었으나 좌우의 네 선방(禪房)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불전(佛殿)이 없어짐에 절통(切痛)함을 금치 못한 불신사(佛信士)들이 이의 중창(重創)을 발원(發願)하여 드디어 낙성(落成)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기에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금불상(金佛像)을 뫼시고, 다시 좌우에 두 보처(補處)를 뫼시니 함흥(咸興)의 서(西)쪽 광성령(光城嶺) 동(東)쪽에 금사자(金獅子)의 좌처(座處)가 이룩되었다. 이렇게 되어 이 성불산(成佛山)은 영산(靈山)의 면모를 갖추게 되고 천룡(天龍)이 호위(護衛)하게 되었다.
 
 
▶ 두만강(豆滿江) 상류 전경
 
 
그 후에 남쪽에 있던 대루(大樓)에 큰 범종(梵鍾)을 주성(鑄成)하고 반쟁(盤錚), 운판(雲板)을 주성(鑄成)하여 조석(朝夕)으로 울리는 그 소리는 사바(娑婆)의 고뇌(苦惱)을 씻어 주었었다. 그러하던 이 절이 이제는 주인없는 빈 절이 되었고, 절 앞에 즐비하게 늘어선 부도(浮屠)와 비각(碑閣)만이 옛이야기를 전하고 있을 뿐이다. 위에서 소개한 사적(事蹟)은 능파(陵坡) 무준장로(無準長老)가 기록한 바인데, 그는 다시 여기에 첨가하여 이 영산(靈山)에 불상(佛像)이 끊이지 않고 후생(後生)에 길이 이어져서 천지(天地)와 더불어 오래기를 기원하고 있다.
 
이제부터는 함흥(咸興) 이북의 각 사암(寺庵)을 순례(巡禮)하고자 하니, 함흥군내(咸興郡內)에 있는 각 사암(寺庵)이 생각난다. 북주동면(北州東面)에 있는 극락암(極樂庵), 천서면(川西面)에 있는 광흥사(廣興寺), 하조양면(下朝陽面)에 있는 용흥사(龍興寺), 천서면(川西面)에 있는 은성암(隱聖庵)과 보문암(普門庵)이 주마등같이 머리를 스쳐가는데, 모두가 이제는 적도(赤徒)들의 매서운 눈초리에 때를 기다리는 숨은 은덕(隱德)만이 멀리서 월애광(月愛光)같이 비친다.
 
함흥(咸興)을 지나서 홍원군(洪原郡)으로 길을 잡는다. 보청면(甫青面)에 흥덕암(興德庵), 호현면(好賢面)에 은적사(隱寂寺), 용천면(龍川面)에 향파암(香坡庵)이 있다.
 
홍원읍(洪原邑)으로 들어가서 동방으로 약 5리(里)쯤 가면 송도(松島)라는 섬이 있어 해안에 연(沿)해서 깎아진 절벽 위에 늙은 소나무가 우거져 절경(絶景)을 이루고 있고 다시 홍원(洪原)서 동북쪽으로 10리(里)쯤 가면 사랑산맥(思郎山脈)이 뻗어 해안을 이루는데 옛날에 북청(北靑)에 사는 우아(牛蛾)라는 여인이 일찌기 남편을 여위고 혼자 살고 있었는데 홍원(洪原)의 관노(官奴) 억남(億男)이라는 자(者)가 이를 유인하여 이 해안을 거닐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설화(說話)가 있는 사랑산(思郎山)이 보이고, 이 바위를 절부암(節婦岩)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바위 위에 보이는 해월정(海月亭)을 옛모습 그대로 남아서 옛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다.
 
서쪽으로 약 30리(里)쯤 가면 함관령(咸關嶺)이 있다. 이곳은 준험한 고개로서 고려(高麗) 때에 이성계(李成桂)가 원(元)나라의 장솔(將率)을 파(破)한 옛 전장(戰場)이니, 지금도 비각(碑閣)이 있다.
 
북쪽으로 우뚝 솟은 두무산(豆無山)에 있는 은적사(隱寂寺)를 찾는다. 이 절은 규모로 보아, 많은 승려들이 살던 곳인듯 하나, 지금은 공회당(公會堂)으로 쓰고 있을 뿐, 불상(佛像)도 없고 사암(寺庵)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이 절이 이렇게 된 것을 보니, 용천면(龍川面)에 있는 향파암(香坡庵)도 이 꼴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하니, 향파암(香坡庵)을 찾아 갈 용기가 나지 않는다. 이왕 이곳까지 왔으니 황가라산정(黃加羅山頂)에 있는 봉수대(烽燧臺)나 보고자 동쪽으로 약 30리(里)를 가서 산 위에 있는 옛 봉수대지(烽燧臺趾)를 둘러보고, 다시 내려와 남산(南山)에 오른다. 여기에도 옛날 함흥(咸興)과 황가라산(黄加羅山)을 응대(應對)하던 봉수대(烽燧臺)가 있다.
 
멀리 바라보이는 곳이 동해(東海)이다. 바닷가에 작은 부락이 점점히 놓여 있는데, 그 위에 덮인 연무(烟霧)에 가려서 음산한 기분을 더해 준다. 몸도 지치고 마음도 피곤하여 잠간 쉬고 싶은데 가지고 온 술 한잔으로 객수(客愁)를 잊고 여러 가지 상념(想念)에 잠긴다.
 
이제 노정(路程)을 바꿔서 북청(北靑)쪽으로 가보자. 북청군(北靑郡)에는 작은 사암(寺庵)들이 많이 있다. 일일이 찾지는 못하겠으나 이름이 나마 회상해 보아야겠다. 북청면(北靑面)에 있는 것으로는, 광제사(廣濟寺) · 보현암(普賢庵) · 벽해암(碧海庵) 등이 있고, 양가면(良家面)에는 보덕암(普德庵)이 있으며 , 속후면(俗厚面)에는 수암사(水岩寺)가 있고, 신포면(新浦面)에는 연화암(蓮華庵)이 있고, 보성암(寶聖庵)이 있다. 또한 가회면(佳會面)에는 감로암(甘露庵)이 있으며, 상거서면(上車書面)에는 유선암(留仙庵)과 대인사(大仁寺)가 있고, 니곡면(泥谷面)에는 관음사(觀音寺)가 있고, 덕성면(德城面)에는 학린암(鶴隣庵) · 청련암(靑蓮庵) · 백운암(白雲庵)이 있다.
 
이젠 이원(利原)으로 가자, 이원(利原)에는 제법 이름있는 사암(寺庵)이 있다. 동면(東面)에 있는 복흥사(福興寺)를 먼저 찾는다. 감토봉(甘吐峯) 밑에 있는 이 절은 정통(正統) 원년(元年) 곧 병진년(丙辰年)에 처음 건조(建造)되었는데, 그 때의 이름은 청수암(淸水庵)이었다. 그 후에 다시 정수암(淨水庵)이라고 개명(改名)하고 강희(康熙) 40년, 경진(庚辰) · 신사(辛巳)년간(年間)에 선방(禪房)을 증축(增築)하고, 강희(康熙) 56년 정유년(丁酉年)서부터 건륭(乾隆) 3년 무오(戊午)사이에 신원(信元) · 법혜(法惠) · 정언(淨彥) · 담행(曇行) 등이 법당(法堂)을 조영(造營)하여 소화(塑畵) · 불상(佛像)을 뫼셨으며, 혹은 500근 대종(大鐘)을 주성(鑄成)하고, 낡은 불각(佛閣)을 중수(重修)하여 정수사(淨水寺)라고 개칭하였으며, 성전(聖殿)을 개수(改修)하여 대웅전(大雄殿)이라고 하니, 수도(袖徒)가 운집(雲集)하였던 곳이다. 그러던 이 시절에 건륭(乾隆) 6년 신유(辛酉)와 기유년(己酉年)에 산이 무너져 사우(寺宇)가 대파(大破)하자, 본사(本寺)의 승(僧) 담행(曇行) · 신원(信元) 등이 남으로 6~70리(里) 내려가 감토봉(甘吐峯)의 맥하(脈下)에 새로 절터를 잡아서 건립(建立)한 것 이 건륭(乾隆) 9년 갑자(甲子)의 봄이었다.
 
그 후에 산명(山名)이 만복사(萬福寺)로 바뀌고, 절 이름도 복학사(福學寺)라고 하였다. 건륭(乾隆) 25년 경진(庚辰), 신사(辛巳)년간(年間)에는 구층보탑(九層寶塔)을 뜰 안에 세워 불전(佛前)을 장엄(莊嚴)하니, 이것은 명제대사(明濟大師)의 중흥(中興)의 공(功)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역시 주인을 잃고 적도(赤徒)들의 휴식처(休息處)로 되었으니, 부처님의 밝으신 방편문(方便門)이 언제나 열릴 것인가?
 
다음은 근처에 있는 옥수암(玉水庵)을 찾는다. 향림산(香林山) 밑에 아담하게 꾸며져 있는 작은 사암(寺庵)이다. 산이름이 향림(香林)이니 온 산(山)에서 향기가 풍기는 것 같기도 하다. 향림(香林)이라고 한 것으로 보면 감로천(甘露泉)이 있는 듯하다. 찾아보니 절 옆에 샘물이 있는데 그야말로 감로(甘露) 그대로이다. 왕년(往年)에는 이곳을 찾는 청신(淸信)의 선남선녀(善男善女)들이 부처님을 그리워하면서 복(福)을 비는 이가 끊이지 않았건만, 이제는 남의 눈을 피해 간혹 찾는 아낙네들이 있을 뿐이다.
 
다음은 보성사(寶盛寺)를 찾기로 한다. 이 절은 건륭(乾隆) 3년 신묘년(辛卯年)에 행원(行願), 행찰(行察), 보화(普化) 등이 소금강(小金剛)으로부터 이곳으로 와서 절을 이룩하였다. 당시의 태수(太守) 남공익(南公益)이 이곳에 자리를 잡으니, 풍수설(風水說)에 의해서 점득(占得)한 곳이다. 광무(光武) 기해년(己亥年)에 다시 산신각(山神閣)을 짓고, 신축년(辛丑年)에 육화료(六和寮)를 크게 건조(建造)하고 보광전(普光殿)을 세워서 오늘에 이른 것이다.
 
다음은 서면(西面)에 있는 정광사(定光寺)로 간다. 정광사(定光寺)는 대덕산(大德山) 기슭에 있는 절로서 매우 장엄(莊嚴)하던 옛 모습이 그래도 남겨져 있으니, 불덕(佛德)의 홍대(弘大)하심을 새삼 느끼게 한다. 대덕산(大德山)은 백두산(白頭山) 줄기가 내려뻗힌 산맥(山脈)으로 옆으로 창명(蒼溟)이 끼고 도는 곳이다. 산곡(山谷)이 그윽하여 정토(淨土)를 이룰만한 곳이니 정광여래(定光如來)의 자비보탑(慈悲寶塔)이 정광사(定光寺)를 이룬 것이다. 검푸른 이끼 낀 간판(簡板)에 새겨진 것을 보면 당(唐) · 문종(文宗) 때 개성(開成) 3년에 이곳에 작은 암자(庵子)를 지어 운흥암(雲興庵)이라고 하니, 그 후, 송(宋) · 진종(眞宗) 함평(咸平) 원년(元年)에 운흥사(雲興寺)라고 개칭하고, 숭정(崇禎) · 병자년(丙子年)에 재앙을 만난 후, 성정(性淨)이라는 승(僧)이 정광여래(定光如來)의 사리(舍利) 2매(枚)를 받들고 이곳을 찾았으니, 그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시현자(示現者)였다. 강희(康熙) 6년 임인년(壬寅年)에 다시 보영(普影)이라는 이가 삼원(三願)하여 삼생(三生)의 연(緣)이 있다 하여 삼세여래(三世如來)와 십전명왕(十殿冥王)의 후불영정(後佛影幀)을 뫼시니, 승평인월(昇平姻月)에 법륜(法輪)이 끊이지 않았다.
 
갈길이 바빠 함북(咸北)으로 발을 재촉한다. 함북(咸北) 길주(吉州)에는 보현사(普賢寺), 명천(明川)의 한심사(閑心寺), 쌍계사(雙溪寺), 송덕사(松德寺), 장동사(長同寺) 등이 있고, 성진(城津)에는 운흥(雲興), 경적(慶積)의 두 사암(寺庵)과 은선(隱仙), 오봉(五峰)의 암자(庵子)가 있으며, 부녕(富寧)에는 청계(淸溪), 유계(幽溪)의 두 절, 무산군(茂山郡)에 수월암(水月庵), 백운사(白雲寺)가 있으며, 회녕군(會寧郡)에 극락원암(極樂園庵), 백천사(白泉寺)가 있고, 종성군(鍾城郡)에는 곡천사(谷泉寺)가 있고, 온성군(穩城郡)에는 영월(英月), 개원(開院), 청계(清溪)의 삼사(三寺), 경원군(慶源郡)에 월명사(月明寺), 경흥군(慶興郡)에 보현사(普賢寺) 등이 있다.
 
먼저 길주(吉州)를 거쳐 종성(鍾城)의 곡천사(谷泉寺)를 찾아간다. 길주(吉州)는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옛 땅으로, 오래도록 여진족(女眞族)들이 살던 곳이다. 사기(史記)에 보면 고려(高麗) 예종(睿宗) 2년에 윤관(尹瓘), 오연총(吳延寵)이 군병(軍兵) 17만(萬)을 거느리고 여진족(女眞族)을 몰아낸 곳이다. 그래서 부녕(富寧), 경성(鏡城), 회녕(會寧), 온성(穩城), 경흥(慶興), 경원(慶源) 등지를 6진(鎭)이라고 했는데, 여기에 오니, 옛날에 재가승(在家僧)이 있었던 것이 생각난다. 이제 현금(現今)에 이곳에는 공공연히 종교(宗敎)가 행해지지 못하고 보니, 옛날 있었던 재가승(在家僧)과 같이 불교(佛敎)가 가정으로 들어갔음을 짐작하게 한다. 물론 옛날 있던 재가승(在家僧)과는 다르나, 생활속에 불교가 살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옛날 있던 재가승(在家僧)이란 어떤 것인가. 이제 모두가 잃어버려지고 있는 때이라, 옛 것을 되새겨 보는 것도 뜻있는 일이라고 여겨지니, 앞서 소개한 많은 사암(寺庵)이 이제는 흔적을 찾기 어려운 속에 재가불교(在家佛敎)의 상징이요, 이 지방(地方) 사람들의 정신적인 의지처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왕 여기에 온 이상 6진(鎭) 땅의 옛 재가승(在家僧)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6진(鎭)의 재가승(在家僧)들은 일종의 특수부락을 이루고 있었으니, 물론 처자(妻子)를 거느린 가정생활을 하면서 불당(佛堂)을 집안이 뫼시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원래, 여진족(女眞族)의 귀화(歸化)한 사람들인데, 자기들이 살고 있는 지방에 사찰(寺刹)을 건립(建立)하여 부락 전체가 이 절을 중심으로 살아갔던 것이다. 그러한 유풍(遺風)이 근대에 까지 내려와서 작은 암자(庵子)가 각처에 산재해 있으나 별로 사암(寺庵)의 구실을 하지 못하던 바이니, 적화(赤化)된 이제야 그러함은 당연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경성(鏡城)의 오봉산(五峰山)에 있는 곡천사(谷泉寺)에 왔다. 이 절은 옛 재가승(在家僧)부락의 사찰(寺刹)인 동시에 아직도 재가승(在家僧)의 후손인 듯한 풍모를 한 사람도 보이나, 그저 마음으로만 부처님을 믿고 있는 형편이다. 두만강(豆滿江) 연안에 자리잡은 이 절은 종성면(鍾城面)에 속하고 있는데, 종성읍(鍾城邑) 중앙에 그림같이 우뚝 솟은 삼층누각(三層樓閣)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희안하다. 이 누각(樓閣)은 옛날에 여진족(女眞族)을 항복받은 곳이라 수강루(受降樓)라고 하는 누각(樓閣)이다. 누각(樓閣)에서 이제는 적구(赤狗)들을 항복받아야 하겠으니, 수강루(受降樓)의 그 이름들을 오래도록 지니기 바란다.
 
수강루(受降樓)에 올라 눈을 멀리 간도(間島)의 넓은 벌판으로 보내니, 용용(溶溶)히 흐르는 두만강(豆滿江)의 은파(銀波)와 동쪽 만주(滿洲)땅의 운연(雲烟)이 아른아른한 끝에 아련한 허공만 찬바람을 보내고 있다.
 
남한의 비옥한 벌판과 유난히도 올해는 추위가 없어 훈풍(薰風)만이 훈훈한 삼팔(三八) 이남의 낙토(樂土)에 비하면 너무도 차가운 공기가 나의 마음까지 얼어붙게 한다.
 
 
- 북한 1978년 02월호(통권 제74호)
【문화】 북한 사암 지상순례기
• 11. 경기도 개성 안화사를 찾아서
• 10. 함북 종성 곡천사를 찾아서
• 9. 함남 함흥 귀주사를 찾아서
(2024.06.26. 13:08)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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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