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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궁인창의 지식창고 북한 사암 지상순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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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북한 사암 지상순례기
◈ 11. 경기도 개성 안화사를 찾아서
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이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2년, 병진년(丙辰年)에 궁예 휘하의 제장(諸將)의 추대를 받아 왕위(王位)에 올라 국호(國號)를 고려(高麗)라고 하고 도읍(都邑)을 지금의 개성(開城)인 송악산(松嶽山) 남으로 옮기니, 개성(開城)은 고려(高麗) 역대(歷代)의 왕도(王都)로 정해지게 되었다.
北韓 寺庵 紙上巡禮記
⑪ 京畿道 開城 安和寺를 찾아서
鄭泰爀 (哲博·東國大佛教大教授)
 
 
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이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2년, 병진년(丙辰年)에 궁예 휘하의 제장(諸將)의 추대를 받아 왕위(王位)에 올라 국호(國號)를 고려(高麗)라고 하고 도읍(都邑)을 지금의 개성(開城)인 송악산(松嶽山) 남으로 옮기니, 개성(開城)은 고려(高麗) 역대(歷代)의 왕도(王都)로 정해지게 되었다.
 
그 후에 고려개국(高麗開國) 후 315년 되던 해에 몽고의 침략으로 강화(江華)로 천도(遷都)하였고, 다시 충렬왕(忠烈王) 17년 경인년(庚寅年)에 합단병화(哈丹兵禍)를 피하여 강화(江華)로 천도(遷都)한 것을 합쳐서 약 40년간을 제외하고는 개성(開城)이 430년간 계속해서 고려조(高麗朝)의 도읍(都邑)이었고, 그후에 이씨조선(李氏朝鮮) 때에도 태조(太祖) · 정종(定宗) · 태종(太宗)의 3대(代)의 도읍지(都邑地)였다.
 
고려(高麗)는 신라(新羅)의 뒤를 이어 佛敎의 전성시대(全盛時代)를 이루었으니, 송도(松都)는 고려불교(高麗佛敎)의 중심지였다. 그러므로 송도(松都)를 찾는 것은 고려불교(高麗佛敎)의 유적(遺跡)을 더듬어보는 것이 되기도 한다.
 
송도(松都)에 남아 있는 고적(古蹟)은 거의가 불교사원(佛敎寺院)의 유적(遺跡)이지만, 지금에 당시의 사우(寺宇)는 찾을 길이 없고, 오직 고대구초(古臺舊礎) 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한 중에 오직 안화사(安和寺)만은 옛 이름을 그대로 지니고 송악산(松嶽山) 중복(中腹)에 자리잡고 있음으로 이 절을 찾아서 서울을 떠난다.
 
서울을 떠나서 국도(國道)를 따라 북으로 달리면 임진강(臨津江)이 나온다. 여기서 38선(線) 북(北)으로 들어가면 장단군(長湍郡)이 되는데 우선 장단군(長湍郡) 진서면(津西面)에 있는 화장사(華藏寺)를 찾기로 한다.
 
장단군하(長湍郡下)에는 이 절 외에 강상면(江上面)에 심복사(心腹寺)가 있고, 진서면(津西面)에는 성수암(聖壽庵)이 있으나, 화장사(華藏寺)는 예로부터 유서깊은 사적(事蹟)을 가지고 있는 절이다.
 
목은(牧隱) 이공(李公)이 찬(撰)한 비문(碑文)에 의하면, 서국(西國) 곧 인도(印度)의 지공화상(指空和尙)이 중국으로부터 고구려(高句麗)로 건너와, 금강산(金剛山) 법기도장(法起道場) 예배(禮拜)한 후, 다시 연경(燕京)으로 돌아갔는데, 홍무(洪武) 18년 기축년(己丑年)에 려왕(麗王)이 이곳 보봉산(寶鳳山)에 정찰(淨刹)을 창건(刱建)하고, 그 이름을 붙일 때에 지공(指空)이 화장(華藏)이라고 명명(命名)했다고 한다.
 
이것은 당시의 고려(高麗)의 왕(王)이 지공화상(指空和尙)의 풍악(風樂)에 경심갈구(傾心渴求)하여 이를 인견(引見)하고 지공(指空)의 뜻에 따라서 왕(王)이 정찰(淨刹)을 창건(刱建)하고 원당(願堂)으로 삼았으니, 지공(指空)의 뜻에 따르게 된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으로 이 화장사(華藏寺)에는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의 자사상(自寫像)이 있었고 지공(指空)의 소상(塑像)을 뫼셨으니, 이것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공(指空)을 앙모(仰慕)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 개성(開城) 남대문(南大門)
 
 
또한 이 절에는 지공화상(指空和尙)이 인도(印度)로부터 가지고 온 패엽경(貝葉經) 1권(券)과 우두전단향(牛頭旃檀香) 1조(條)가 있었는데, 불행히도 없어졌으니, 오직 사우(寺宇)의 동쪽에 홀로 서 있는 사리탑(舍利塔)이 지공화상(指空和尙)의 정혜(定慧)를 길이 비추면서 영령조조(靈靈照照)하게 불법(佛法)의 거룩함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 절에 옛날에는 또한 백지(白紙)에 금서(金書)한 법화경(法華經)이 있어, 희유(稀有)한 진보(珍寶)로 삼았는데 이것도 이제는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다.
 
이에 대하여 근세(近世)에 조추재(趙秋齋)라는 이가 이 화엄사(華嚴寺)를 심방(尋方)하여 패엽경(貝葉經)을 배견(拜見)하고 읊은 시(詩)가 있다.
 
이 시(詩)로나마 없어진 패엽경(貝葉經)을 상상해 볼 뿐이다.
 
조추재(趙秋齋)라는 이가 패엽경(貝葉經)을 배관(拜觀)하던 모습이 역역히 눈앞에 떠오른다. 시(詩)에 말하기를,
 
 
「장경각(藏經閣)에 올라가니 날씨가 맑게 개어 좋은 날씨이다. 길일(吉日)을 택하여 사승(寺僧)에게 청하여 패엽불보(貝葉佛寶)를 배관(拜觀)하려 하여,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방을 청소하고 아자방(亞字房)에 들어가니, 선반(旋盤)에서 끄내는 붉은 비단주머니가 있어, 그 주머니 속에 8백의 패엽(貝葉)이 5축(軸)으로 나뉘어, 길이가 1척(尺)인데, 흰 실로 엮어 남목(楠木)으로 장식하였다. 조사(祖師)의 수택(手澤)이 섬세히 남아있다.
 
중국의 비단으로 싼 주머니는 부드럽기 비길데 없고, 초엽죽피(蕉葉竹皮)가 모두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 있다.
 
두 머리가 20행(行)인데, 한 행(行)에 7자(字)씩이 씌였으며, 가운데에 3행(行)의 저의(底意) (주서(註書))가 씌여 있다.
 
글자의 모양은 마치 파리대가지와 새발과 같은데, 단엄(端嚴)하게 쓴 품은 범인(凡人)의 글씨가 아니다.
 
눈으로 보고 입을 딱 벌릴 뿐 읽을 수가 없어, 여러 승(僧)들이 당연(瞠然)히 보고만 있을 뿐이라. ……」
 
 
이와 같이 범서(梵書)로 된 패엽경(貝葉經)이니, 소중히 전해져야 할 것이언만, 지금은 어찌 되었는지 천문(賤聞)한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 뿐 아니라, 공민왕(恭愍王)이 손수 그린 자사상(自寫像)은 근년(近年)에 누군지 가져간 후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하니 모두가 애석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여기에서 다시 길을 바꿔서 개풍군(開豊郡) 상도면(上道面)에 있는 연경사(衍慶寺)로 간다.
 
연경사(衍慶寺)는 개풍군(開豊郡)에 있는 부소산(扶蘇山)에 있는 사찰(寺刹)인데 이태조(李太祖)의 신의왕후릉(神懿王后陵)을 수호하기 위하여 창건(刱建)된 사찰(寺刹)니, 태종(太宗) 10년에 준성(竣成)된 것이다. 이 사찰에 원각사탑(圓覺寺塔)과는 높이, 너비, 양식이 거의 같은 탑(塔)이 있었다고 하는데, 기미년(己未年) 전후(前後)에 파괴되었다고 한다.
 
이 절에서는 두부를 만들어서 능침제수(陵寢祭需)로 공진(供進)했다고 하여 조포사(造泡寺)라고 한다.
 
이제 와서 보니 옛 절의 모습은 조금도 찾을 길이 없고, 작은 암자(庵子)로 남아 있을 뿐이다.
 
여기서 다시 진봉면(進鳳面)의 옥천사(玉泉寺)를 찾아 보고 송도(松都)로 들어가려 한다.
 
송도(松都)에는 성곽(城郭)이 셋이 있는데, 그의 가장 오래된 것은 발어참성(勃禦塹城)이요, 다음으로 오래된 것은 외성(外城)인 나성(羅城)이요, 그 다음은 내성(內城)이라는 것이다.
 
멀리 성곽(城郭)을 바라보며 청교면(靑郊面) 북쪽에 있었다고 하는 개국사지(開國寺趾)를 찾아보고 싶다. 여지승람(與地勝覽)에 보면 보정문(保定門) 밖에 있다고 하였으니, 이조(李朝) 때에 사포서(司圃署)가 있던 곳에 그의 고묘(古墓)가 있을 것이지만 지금 그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단지 그 내력과 옛 모습을 상상해 볼 뿐이다. 보정문(保定門)을 바라보며 북쪽으로 눈을 돌려, 개국사(開國寺)를 회상해 본다. 개국사(開國寺)는 려태조(麗太祖)가 창건한 대찰(大刹)로서 정종(定宗)이 원년(元年)에 의장(儀仗)을 갖추어 불사리(佛舍利)를 봉대(奉戴)하고 이 절에 봉안(奉安)하였고, 현종(顯宗) 9년에는 개국사(開國寺)의 탑을 중수(重修)하여 사리(舍利)를 봉납(奉納)하였고, 계단(戒壇)을 창설(創設)하여 3,200명의 승(僧)을 도제(度濟)하였으며, 문종(文宗)은 송판대장경(宋版大藏經)을 태자(太子)로 하여금 이곳에 봉안(奉安)케 하셨다고 한다.
 
성문(城門)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야다리라는 다리가 있는 곁에 묘련사(妙蓮寺)의 옛 절 터가 있으리라.
 
야다리는 의종조(毅宗朝)의 역신(逆臣) 이의민(李義旼)이 돗다리(저교(猪橋))로부터 높은 제방을 쌓고 양안(兩岸)에 버들을 심어 새 길을 내었다는 제방 길의 끝에 있는 다리이다. 이 다리는 낙타교(駱駝橋)(탁타교(槖駝橋))라고도 하니, 속칭 만부교(萬夫橋)라고도 하는데, 속전에 의하면 신인(神人)이 하룻밤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고 해서 야교(夜橋)라고도 한다. 또한 이 다리에는 이런 설화(說話)도 얽혀있다.
 
일찌기 태조(太祖) 25년에 거란(契丹)으로부터 낙타를 선물로 받았는데 그 때에 거란은 고려와의 조약을 배반하고서 발해(渤海)와 통화(通和)하였음으로 태조(太祖)가 그들의 배신(背信)을 노하여 교빙(交聘)을 끊고 그 사자(使者) 30명을 해도(海島)로 보내고, 낙타를 만부교(萬夫橋) 아래에 버려 두어 굶어 죽게 한 일이 있은 후부터 이곳을 탁타교(槖駝橋)라고 일컫게 되었다고도 하니, 일찌기 한석봉(韓石峯)이 쓴 탁타교(槖駝橋)라는 비석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진 지 오래이다.
 
이 야다리를 넘어서 동북쪽으로 내다보면 한 등성이가 보이는데 지금은 그 등성마루에 인가(人家)가 가득(稼得)히 들어서 있거니와 옛날에는 여기에 묘련사(妙蓮寺)가 있었다고 한다. 저 등성마루가 옛날부터 일컬어 오는 쇳재(삼현(三峴))이다.
 
고려시대에는 이 쇳재에 숭화사(崇化寺) · 용화사(龍華寺) · 태종대(太宗臺) · 보선정(步仙亭) · 묘련사(妙蓮寺) 등 많은 고적(古蹟)이 펼쳐져 있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 중에 묘련사(妙蓮寺)는 충렬왕(忠烈王)이 제국공주(齊國公主)와 더불어 원(元)나라의 천자(天子)와 종우(宗祐)를 위하여 지원(至元) 20년에 창사(創寺)하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에 낙성시킨 절이다.
 
그래서 원사(元使)가 오면 반드시 이곳에 와서 행향축원(行香祝願)하였고, 충렬왕(忠烈王), 제국공주(齊國公主), 충선왕(忠宣王) 및 의비(懿妣) 등의 진영(眞影)을 봉안하였었다고 전한다.
 
개성(開城) 시내를 곧장 빠져나가 송악산(松岳山) 바라보면서 걸어가노라면 공민왕(恭愍王)이 서남(西南)쪽 언덕에 올라가 성상도(星象圖)를 보았다고 하는 봉선사(奉先寺) 터가 있고, 이곳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보이는 미륵사(彌勒寺)라는 것이 이 부근에 있었다고 하니, 려조(麗朝)의 유명한 미륵사(彌勒寺)가 이곳이 아니었던가.
 
다시 더 걸어 올라가 개성시청(開城市廳) 앞으로 당도하니 이 부근이 이른바 수창궁(壽昌宮) 터라는 곳이다.
 
이 수창궁(壽昌宮)은 이태조(李太祖)가 등극하고, 이어서 태종(太宗)이 등극(登極)하던 곳이요, 려조(麗朝)의 별궁(別宮)이 있던 곳이다.
 
그 후에 수녕궁(壽寧宮)이 여기에 세워지고, 다시 수녕궁(壽寧宮)은 민천사(旻天寺)로 변하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또 얼마쯤 나오면 남대문(南大門)이 보인다.
 
이 남대문(南大門)은 이태조(李太祖) 2년에 낙성한 내성(內城)의 남문(南門)인즉, 현존(現存)하는 목조건물(木造建物)로서 가장 오래되고 우수한 구도(構圖)를 가진 문화재(文化財)인데, 시가의 오가는 사람들 속에 고독을 씹으면서 역사의 비극을 말해주고 있다. 문루(門樓)에 올라가니, 우리나라 명종(名鐘)의 하나인 연복사종(演福寺鐘)이 있다.
 
멀리 서남쪽으로 보이는 데가 연복사(演福寺)의 옛터인 듯 하다. 옛날에는 연복사(演福寺)에 서있는 오층탑(五層塔)이 이곳에서도 보였다는데, 지금은 공장의 굴뚝이 검은 연기를 토하고 있을 뿐이다.
 
남대문(南大門)을 내려서 북쪽 가도(街道)로 따라서 올라간다.
 
고려 때에는 좌우에 10간(間)마다 대막(帶幕)을 치고 불상(佛像)을 되시고, 백미장(白米醬)의 큰 독과 국잔이 있어,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대로 마시게 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다점(茶店) 하나 없고 이따금 지나가는 군용(軍用)트럭이 내뿜는 연기 냄새 만이 코를 찌를 뿐이다.
 
시가의 간도(間道)를 북(北)으로 빠져나가 흥국사지(興國寺趾)가 있다.
 
『菩薩戒弟子平章事姜邯瓚
奉爲
邦家永泰遐邇常安敬造
此塔 永充
供養
時天禧五年五月日也』
 
라고 한 것이 지금도 그의 석탑기단(石塔基壇)에 남아서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흥국사(興國寺)는 그 창건년대(創建年代)가 삼국유사(三國遺事) 연표(年表)에 태조(太祖) 7년이라고 되어 있다.
 
원래 흥국사(興國寺)는 국가의 공찰(公刹)이라 행번(行番), 연등(燃燈), 기우(祈雨) 등이 이 절에서 행해졌을 뿐만 아니라, 중외(中外)의 조하(朝賀)를 이곳에서 받았다.
 
발길을 돌려서 삼성동(三星洞)쪽으로 가서 네거리를 지나서 다시 북쪽으로 꺾어 가면 여기에 옛날 법왕사(法王寺)터가 있다. 법왕사(法王寺)는 려태조(麗太祖)가 즉위하신 이듬해에 송도(松都)로 정도(定都)하시고 국가(國家)의 진호(鎭護)를 불법(佛法)의 힘에 입고자 도내(都內)에 10대찰(大刹)을 두실 때에 그 으뜸된 가람(伽藍)이 곧 법왕사(法王寺)이다. 그럼으로 고려(高麗) 때의 팔관대회(八關大會)는 국가(國家)의 성문(盛文)이며, 매년(每年) 대내(大內)에서 거행됨이 원칙이나, 이 법왕사(法王寺)에서 거행된 적이 많았고, 또 비록 팔관회(八關會)가 대내(大內)에서 거행될 경우에라도 왕(王)이 먼저 법왕사(法王寺)에 행향(行香)하신 것이 예사였다.
 
조암동(槽岩洞) 계류(溪流)가 맑게 흐르는 이곳 중대(中臺)는 만월동(滿月洞)에서도 높직한 대(臺)를 이루고 있는 곳이니, 여기에 법왕사(法王寺)가 있었다 고 하는 추측도 있을 법하다.
 
여기서 조금 서쪽에 있는 광명동(廣明洞)에는 광명사(廣明寺)가 있었다고 하니, 지금은 초석(礎石)과 승대(僧臺)가 남아 있다.
 
소격전(昭格殿)이라고 하는 복원궁(福源宮) 옛터를 찾는다. 축석(築石)이 아직도 소연(昭然)히 남아 있는데, 여기에서 동으로 한 령(嶺)을 넘으면 광문동(廣文洞)이 된다. 여기는 왕륜사(王輪寺)터가 남아 있는 서쪽 경계에 접해 있고, 구제학지(九霽學址)와 자하동(紫霞洞)으로 들어가는 골이 된다. 구제학당(九霽學堂)은 최충(崔沖)의 학당(學堂)이니, 고려동(高麗洞) 왕륜사지(王輪寺址)의 서쪽으로 잔잔히 흐르는 계류(溪流)를 타고 들어가면 녹음취송(綠陰翠松)이 우거진 유곡(幽谷)에 부산동천(扶山洞天)이라고 바위에 새긴 것이 보인다. 그 바위 앞에 천년(千年)의 묵은 비각(碑閣)이 남아 있으니, 이것이 구재유허비(九齋遺墟碑)이다. 찬비략(撰碑略)에 의하면 문헌공(文憲公) 최충(崔沖)이 이 부산동구(扶山洞口)에 악성(樂聖) · 대중(大中) · 경업(敬業) · 성명(誠明) · 조도(造道) · 솔성(率性) · 진덕(進德) · 대화(大和) · 대빙(待聘)의 구재학(九齋學)을 두고 후학(後學)을 가르친 곳이다. 동구(洞口) 의 왼쪽에는 구산사(龜山寺)가 있었던 옛터가 있다.
 
구산사(龜山寺)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보면 려태조(麗太祖) 기축년(己丑年) 곧 12년에 창건(創建)했다고 하며,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 삼년조(三年條)에서 인도승(印度僧) 마좌라(摩脞羅)가 여기에 적거(適居)하였다고 있는 명찰(名刹)이었다.
 
구산사(龜山寺)의 동쪽 령(嶺)을 넘어서 산길을 올라가니, 밭 가운데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고초(古礎)들은 또한 여기가 선월사지(仙月寺趾)가 아닌가 주의를 끌어준다.
 
다시 이곳서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등산길을 밟으면 얼마 아니하여 밭 가운데 초석(礎石)들이 흩어진 것이 있고, 여기서 좀 더 올라가면 안화사(安和寺)로 가게 된다.
 
안화사(安和寺)는 지금도 송악(松岳)의 중복(中腹)에 자리 잡고 옛 모습을 그리워하는 듯이 사암(寺庵)의 면모(面貌)를 유지하고 있다. 천석(泉石)의 아름다움 속에 지어진 옛 사우(寺宇)의 위용(偉容)은 나타내지 못하나마, 이 절이 본래 려태조(麗太祖) 즉위(即位) 13년에 왕신(王信)의 추복(追福)을 위하여 안화선원(安和禪院)을 창건케 하고 왕신(王信)의 원당(願堂)을 삼게 한 것이 안화사(安和寺)이다.
 
그 후에 16대(代) 예종(睿宗) 때에 이 절이 국가(國家)의 대찰(大刹)로 드러나기 시작하니, 그 당시의 중창(重創)의 성의(盛儀)는 지금 남아 있는 옛 초석(礎石)들로 미루어 알 수있을 뿐. 현금에 있는 건물은 근대(近代)에 개조(改造)된 것이다. 잠시 쉬면서 당시의 사내성관(寺內盛觀)을 추측이라도 하려하니 이인로(李仁老)의 글에 「단청영구지교(丹靑營構之巧), 갑어해동(甲於海東)」이라고 한 말이 생각 난다.
 
문헌(文獻)에 의해 보건대, 안화사문(安和寺門)을 들어서면 먼저 눈에 띄이는 것이 정국(靖國) 안화사(安和寺)라고 쓴 액방(額榜)이 있었고, 서편에 냉천정(冷泉亭), 북편에 자취문(紫翠門) · 신호문(神護門)이 있었다. 중앙에는 무량수전(無量壽殿)이 있는 동쪽에 제석상(帝釋像)이 있었고, 서쪽에는 향적당(香積堂)이 있었으며, 그 뒤로 다시 3문(門)이 있는데, 동문(東門)은 신한문(神翰門)이라고 하여, 그 안에 능인전(能仁殿)이 있는데 문액(門額)과 전액(殿額)은 송조(宋朝)의 휘종(徽宗)의 어필(御筆)이었다.
 
다시 중문(中門)은 선법문(善法門)이라고 하여 그 안에 선법당(善法堂)이 있었으며, 서문(西門)에는 미타전(彌陀殿)이 안에 있었다. 이 당전간(堂殿間)에 두 집이 있어, 한편에는 관음상(觀音像)을 봉안(奉安)하고, 다른 한편에는 약사상(藥師像)을 봉안하였고, 여기에 조사회상(祖師繪像)과 지장회상(地藏繪像), 16나한소상(羅漢塑像)도 되셨으니, 그것은 송제(宋帝)로부터 얻어왔다고 한다.
 
송악산(松岳山)의 중복(中腹)에서 흘러 내려오는 샘물에 목을 추긴다. 맑고 맛이 좋아 그야말로 감로수(甘露水)이다.
 
이 안화사(安和寺)는 려조(麗朝)의 1대(大) 문화보고(文化寶庫)로 유명한 명찰(名刹)임에 비추어 볼 때에 지금의 초라한 모습이 더욱 마음을 슬프게 한다. 옛날의 성황(盛況)을 무를 데 없어 까막까치에게나 묻고자 하나 아무 말이 없이 날라가고,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있는 돌만이 무언(無言)의 길고 긴 말을 전(傳)해준다.
 
 
- 북한 1978년 03월호(통권 제75호)
【문화】 북한 사암 지상순례기
• 12. 경기도 해주 신광사를 찾아서
• 11. 경기도 개성 안화사를 찾아서
• 10. 함북 종성 곡천사를 찾아서
(2024.06.28. 09:26)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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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