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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궁인창의 지식창고 북한 사암 지상순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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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북한 사암 지상순례기
◈ 12. 경기도 해주 신광사를 찾아서
오늘은 해주(海州)의 북숭산(北嵩山)에 있는 신광사(神光寺)를 찾기로 한다. 이 신광사(神光寺)는 해주군(海州郡) 석동면(席洞面)에 있어, 패엽사(貝葉寺)의 말사(末寺)로 되어 있다. 개성(開城)을 거쳐서 가는 길이니, 개풍군(開豊郡)에 있었던 흥왕사(興王寺) 옛터를 찾아보고 싶어진다.
北韓 寺庵 紙上巡禮記
⑫ 京畿道 海州 神光寺를 찾아서
鄭泰爀 (哲博·東國大佛教大教授)
 
 
오늘은 해주(海州)의 북숭산(北嵩山)에 있는 신광사(神光寺)를 찾기로 한다.
 
이 신광사(神光寺)는 해주군(海州郡) 석동면(席洞面)에 있어, 패엽사(貝葉寺)의 말사(末寺)로 되어 있다.
 
개성(開城)을 거쳐서 가는 길이니, 개풍군(開豊郡)에 있었던 흥왕사(興王寺) 옛터를 찾아보고 싶어진다.
 
서울을 떠나 임진강(臨津江)을 건너서 장단(長湍)으로 들어갔다가 진봉면(進鳳面) 흥왕리(興旺里)로 발걸음을 옮긴다.
 
멀리 대흥산성(大興山城)을 바라보니 박연폭포(朴淵瀑布)가 눈에 보이는 것 같다. 박연폭포(朴淵瀑布)는 성거산(聖居山) · 천마산(天摩山)의 높은 뫼를 사이에 끼고 몇 구비를 구비치면서 우회하는 계수(谿水)가 합쳐서 반석(磐石)으로부터 떨어지는 것인데, 폭포의 길이는 30척(尺)이나 되어 이곳의 승경(勝景) 중에서 으뜸이건만, 여기를 찾아 머리를 씻을 겨를이 없음이 안타깝다.
 
진봉면(進鳳面) 흥왕리(興旺里)는 여기 저기에 채전(採田)과 삼포(蔘葡)가 있는 속에 제멋대로 초석(礎石)이 딩굴고 있다.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어 흥망성쇠의 무상함을 새삼 느끼게 한다.
 
고려조(高麗朝)의 문종(文宗)이 당시의 덕수현(德水縣)인 이 곳에 흥왕사(興王寺)를 짓기 시작하여 12년이 걸려 문종(文宗) 21년 정월(正月)에 원당(願堂)이 낙성되었다고 하니 문종(文宗)의 1대(代)를 걸쳐서 온 정성을 드린 사우(寺宇)였건만 어찌 이다지도 폐허화(廢墟化)될 수 있으랴. 문종세가(文宗世家) 9년 을미(乙未) 병신조(丙申條)에 보면 문종(文宗)이 불교를 숭상하여 불사(佛寺)를 창건하기를 발원(發願)하니, 불교의 법력(法力)으로 국가의 재변(災變)을 막고 서민의 의처(依處)를 만들어 방가(邦家)의 복리(福利)를 꾀하려고 이곳을 택하여 흥왕사(興王寺)를 이룩하게 되었다고 한다.
 
(古先帝王, 尊崇釋敎, 載籍可考, 況聖祖以來, 代創佛寺, 以資福慶, 寡人繼續, 不修德政, 災變屬見, 庶憑法力, 福利邦家, 其令有司, 擇地創寺)
 
이와 같이 불사(佛寺)를 창건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하고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꾀하려는 어지(御旨)에서 애민애국(愛民愛國)하는 성지(聖旨)를 엿볼 수 있다.
 
12년만에 끝난 이 대공사(大工事)는 간수(間數)가 무릇 2,800간이나 되는 것이었다. 이토록 일대일사(一代一事)의 불사(佛事)가 진행됨에, 사방(四方)에서 모여드는 승려들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아 병부상서(兵部尙書) 김양(金陽)과 우가(右街) 승록(僧錄) 도원(道元) 등으로 하여금 계행(戒行)있는 자(者) 1,000명(明)을 뽑아 이곳에 상주케 하였다고 한다. 드디어 사전(寺殿)이 낙성(落成)됨에 이르자, 5일동안 연등대회(燃燈大會)를 베풀고 대궐서부터 이곳까지 연로(輦路) 좌우에 채붕(綵棚)을 즐비하게 연결하여 깔고, 등을 달아 뫼를 이루고, 꽃으로 나무를 만들어 장엄(莊嚴)하니, 밤에도 낮과 같이 휘황찬란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날 왕(王)은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행향납시(行香納施)하여 일찌기 없었던 성대한 행사를 보였다고 한다.
 
그 후 다시 왕(王)은 문종(文宗) 24년에 삼층대전(三層大殿)의 자씨전(慈氏殿)을 창건하였다.
 
이와 같은 큰 불사(佛事)를 뫼심에 있어서 공사가 진행될 때마다 그곳으로 친히 왕이 나가시어 일보는 관리들에게 벼슬을 더 주고, 다시 나라 안의 모든 죄수를 감형 또는 사면하여 이 불사(佛事)의 순조로운 진행을 빌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문종(文宗)이 흥왕사(興王寺)를 창건함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그 뒤에 이 절에 금자화엄경(金字華嚴經)을 써서 모시고, 또 금탑(金塔)을 조성했는데, 그 탑(塔)은 은(銀) 427斤(근), 금(金) 104斤(근)이나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장엄불사(莊嚴佛事)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모두 불보살(佛菩薩)의 법력(法力)으로 나라에 재변(災變)이 일어나지 않고 국민이 안온(安穩)히 잘 살기를 비는 뜻에서가 아니겠는가?
 
 
▶ 이율곡(李栗谷) 선생이 은퇴한 해주(海州) 석담요금정(石潭搖琴亭) 전경
 
 
그러나 이와 같은 흥왕사(興王寺)가 고려문화사상(高麗文化史上)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은 사우(寺宇)의 장엄(莊嚴)보다도 현재 세계 문화사상에 금자탑을 이루고 있는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의 간행이 이곳에서 계획되었고, 여기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대장경(大藏經)의 간행은 일찌기 현종조(顯宗朝)에 시작하여 문종(文宗) 5년에 제1회의 간행이 있었으나 문종(文宗)의 아드님이신 의천(義天)이 일찌기 출가하였다가 선종(宣宗) 2년에는 다시 송(宋)으로 건너가 교전(敎典)과 그의 소(疎) 3,000 여권을 모아 가지고 귀국하였고, 그 후 다시 요동 · 일본 등지에 흩어져 있는 경전(經典) 등을 모아 이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고 간행하였다. 이것이 바로 의천(義天)의 속장경조조사업(續藏經彫造事業)이다. 그러므로 의천(義天)은 흥왕사(興王寺)의 제1대 주지(住持)가 되어 법(法)을 설하게 된 것도 이 절이 의천(義天)의 아버지인 문종(文宗)과의 깊은 인연이 있었던 까닭이라고 할 것이다.
 
흥왕사(興王寺)는 이와 같이 고려조(高麗朝)의 국찰(國刹)이 었는데, 몽고병란(蒙古兵亂)에 회신(灰燼)되고 다시 여러 번 중수(重修)를 거듭하다가 충숙왕(忠肅王) 27년에 정조(晶照) · 달환(達幻) 등 제사(諸師)가 9년 걸쳐서 중수(重修),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러나 다시 퇴폐되고, 이조(李朝) 중엽(中葉)에는 그 모습 조차 감추고 말았다.
 
그러나 고허(古墟)나마 찾고 싶은 심정을 누가 책하랴마는 이곳까지 왔다가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발걸음은 자못 무겁기만하다. 마침 봄바람이 소매깃을 흔들매 내가 여기에 서 있는 것도 기연(奇緣)임을 깨닫게 된다.
 
옛날의 성왕(成往)의 사(寺)에서도 그랬듯이 봄바람이 훌쩍 불어 행인의 옷소매를 흔든다.
 
문득 발을 멈추고 흥왕사(興王寺)의 고허(古墟)에 서니, 사우(寺宇)는 어디가고 궁궐(宮闕)도 어디갔나
 
옛 소식을 말해주는 초석(礎石)들만이 사람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데, 논밭에 무심코 나르는 꿩이 갑자기 깃을 치며 소리칠 때 머리를 들어 먼산을 바라보니 구름이 걸려 있을 뿐이다.
 
 
春風吹動行人裾,行人立馬興王墟.
禪龕宮闕兩消歇,壞垣遺礎令人歔.
田頭野雉忽飛起,山上浮雲時卷舒.
 
 
발길을 재촉하여 해주(海州)로 가야 한다. 우선 개성(開城)으로 들어가서 잠시 쉬었다가 연백평야(延白平野)를 지나가야 해주(海州)로 들어가게 된다.
 
이제 경기도(京畿道) 땅을 작별하려고 하니, 문득 아쉬운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장단군(長端郡)에 있는 화엄사(華嚴寺)이다. 장단군(長端郡)의 진서면(津西面)으로 가야 하겠는데, 그리로 되돌아갈 겨를이 없다. 그러니 잠시 앉아서 화장(華藏)을 그려보는 일이라도 해야겠다.
 
이 절은 본래 계조암(繼組庵)이라고 하였는데, 지공화상(指空和尙)과의 깊은 유서(由緒)로 말미암아 대총림(大叢林)으로서 옛날에는 양주(楊州) 송암사(松岩寺)와 겨눈 큰 절이었다. 이 절에는 서도(西度)로부터 지공화상(指空和尙)이 가지고 온 패엽범경(貝葉梵經)이 있었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어느듯 내 몸은 기차를 타고 연백평야(延白平野)를 지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해주(海州)에 발을 들여놓고 사방을 둘러본다. 남쪽에 남산(南山)이 우뚝 섰다. 고려(高麗) 문종(文宗)이 이에 올라 밤을 새고 주연을 베풀었던 옛 일이 그립다. 북쪽으로는 광석천(廣石川)이 흐르는데 양변(兩邊)에 우거진 숲이 봄소식을 전하려 하는데 냇물 한가운데 방정(方正)한 반석(般石)이 가히 수십명이 앉을 만하다.
 
다시 멀리 북쪽을 보니 우이산(牛耳山)이 보인다. 동편으로는 아득히 보이는 것은 지성산(池城山)이요, 그 뒤에 보일듯 말듯하게 아물거리는 것은 불족산(佛足山)이니, 그 산정(山頂)에 있는 돌에 사람의 발자취가 있어, 사람들이 그것을 불적(佛跡)이라고 하였으므로 불족산(佛足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여기서 더 북쪽으로 가, 30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것이 북숭산(北嵩山)이요, 동쪽으로 약 5리쯤 떨어진 곳에 보이는 것이 수양산(首陽山)이다. 이 수양산(首陽山)에는 산정(山頂)에 누대(樓臺)가 있으련만, 어찌 되었는지 궁금하다.
 
성임(成任)의 시(詩)에,
 
청산첩첩창해변(靑山疊疊滄海邊), 창해묘묘청산전(滄海淼淼靑山前).
 
이라고 했듯이 청산(靑山)이 첩첩히 싸인 그 끝에 푸른 바다가 이어지는 곳이요, 또 푸른 바다가 출렁이는 그 앞에 또 청산(靑山)이 보인다. 이름이 수양(首陽)이니, 기절(奇絶)함이 그럴싸하다. 한가이 이곳에 왔거나, 남북이 통일이 되어 이곳을 찾는다면 저 수양산(首陽山)에 올랐다가 배를 띄워 갈매기와 벗해 보고 싶다. 옛날의 명장(名將)들은 한번 죽어서 후세에 경성(警聲)을 남겼건만, 영풍(英風)이 천년(千年)토록 불건만 늠연(凜然)히 적료함 뿐이다.
 
해주(海州)로부터 서쪽 30리밖에 있는 불숭산(佛嵩山)을 찾아가자. 여기에 신광사(神光寺)가 있다. 이 절은 원순제(元順帝)의 원찰(願刹)로 창건한 대찰(大刹)이다. 처음에 순제(順帝)가 아직 위왕(魏王) 아목가(阿木哥)로 있을 때에, 죄(罪)를 지어 고려(高麗)의 탐라(耽羅)(지금의 제주(濟州))로 귀양을 왔다가 나중에 다시 황해도(黃海道) 대청도(大靑島)로 옮기었는데, 그가 두루 서해(西海) 산천을 구경하고 돌아다니다가, 해주(海州)의 북숭산(北嵩山)에 이른 즉, 문득 풀 속에서 한줄기 빛이 발하는 것이 있어, 이상스럽게 여겨 찾아가 보니, 일위(一位)의 불상(佛像)이 풀 속에 묻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그는 곧 그 앞에 꿇어앉아 사뢰기를
 
『만일 부처님께서 명우(冥佑)를 내리시어, 저로 하여금 귀국해서 등극하게 되면 마땅히 절을 지어 부처님을 잘 뫼시고 조은하겠사오니, 외로히 계시는 부처님이나, 귀양살이하는 저나 마찬가지 신세이오니, 그리 양해하시어 소생을 불쌍히 여겨 도와주십소서』
 
하고 정성껏 빌며 축원을 그렸다. 그랬더나 그 후 2년이 지나자 환궁하여 등극하였는데, 그것이 부처님의 은혜인 줄을 잊고 지내던 중, 하루는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시어,
 
『어찌 나를 잊고 있는가? 』
 
하고 일깨우는지라, 깜짝 놀라 잠이 깨자, 곧 과거의 일을 깨닫고, 큰 절을 짓기로 결심하여, 대감(大監) 송골아(宋骨兒)로하여금 공장(工匠) 37명을 데리고 고려(高麗)땅으로 와서 고려(高麗) 시중(侍中) 김중견(金中堅)과 김석견(金石堅)과 밀직부사(密直副使) 이수산(李壽山) 등과 더불어 법당의 영건(營建)을 감독케 하여, 법당 보광명전(寶光明殿)을 지어 부처님을 뫼시고, 그 앞에 좌우로 장랑(長廊)을 연못에 곁하여 지으니, 높고 낮음이 어울려 정교(精巧)함이 극치(極致)에 이르는 것이었다. 법당의 동쪽에 있던 누대(樓臺)와 제찰(齊察)은 물론, 북쪽에 있는 전각(殿閣), 그 앞이 있는 석탑(石塔), 서쪽에 있던 나한전(羅漢殿) 등은 어느 곳에서 볼 수 없는 굉장(宏壯)한 것이었는데 지금은 아무 것도 남지 않았으니, 이 적토(赤土)에서 외로이 방광(放光)하시나, 그 빛을 보지 못하는 중생(衆生)들의 눈을 언제나 뜨게 하시어, 옛날의 그 자리를 다시 자리잡으시려나.
 
 
▶ 광조사(廣照寺) 진철대사(眞徹大師) 보월승공탑비(寶月乘空塔碑)
 
 
그토록 동국(東國)에 으뜸가던 이 상광사(祥光寺)가 초라하게 서있을 뿐이다. 울적한 기분을 달랠 길이 없어 향적봉(香積峯) 쪽으로 올라가니, 암석 사이에 한 그루 나무가 향나무가 있어 향기(香氣)가 충천한다. 이것이 유명한 나옹선사(懶翁禪師)가 홍건적(紅巾賊)에게 받은 향나무이다.
 
이 나무만은 아직도 향기(香氣)를 뿜고 있다. 공민왕(恭愍王)의 부름을 입어, 내전(內殿)에서 원음(圓音)을 크게 떨치고, 태후(太后)의 청으로 (신광사(神光寺)에 머물고 있던 나옹(懶翁)이, 마침 홍건적(紅巾賊)이 침범하여 서울을 함락시키니, 관민(官民)이 모두 피신하더니, 오직 사(師)만은 승도(僧徒)를 거느리고, 평일과 다름없이 설법(說法)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적기(賊騎) 수십명이 절로 들어오는지라, 사(師)가 선술(禪術)로 그들을 물려가게 하니, 그들은 사(師)에게 향을 바쳤다고 한다.
 
그리하여 사(師)가 그 향을 피우고, 이 바위 위에 앉아 정(定)에 들은즉, 피운 향의 연염(烟焰)에 따라서 적(賊)들이 춤을 추면서 산마루를 넘어서 달아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바위를 나옹암(懶翁岩)이라고 하고, 그때 그 향의 연염(烟焰)이 서린 곳에 솟아난 나무 바로 이 향나무인 것이다.
 
홍건적이 이렇게 신광사(神光寺)에서 나옹선사(懶翁禪師)의 법력(法力)에 굴복하고 그대로 간 후에는, 법중(法衆)들이 크게 놀라서 사(師)를 졸라서 굳이 피신하기를 권하므로 사(師)도 마지못하여 허락(許諾)하자, 그날 밤에 꿈에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더니,
 
『스님, 스님께서 이 곳을 떠나시면 안되옵니다. 적병(賊兵)이 스님이 떠나신 것을 알면 당장에 들어와서 약탈할 것이오니, 스님께서 이 절을 지키고 그대로 계셔야 합니다』
 
하고 간청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이튿날 토신좌(土神座)에 가서 보니, 그 꿈에 나타났던 신인(神人)의 모습과 같은지라, 사(師)는 다시 대중을 타일러, 위난(危難)을 무릅쓰고 그대로 지키고 있더니, 그 뒤에도 적기(賊騎)가 가끔 왔다가면서도 상주하는 인호(人戶)와 전량(錢粮)은 조금도 해치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 나옹암(懶翁岩)에 앉아 향수(香樹)를 어루만지니, 나옹(懶翁)의 신력(神力)이 나에게 옮겨진 듯한 느낌이 든다.
 
비록 이 땅을 더럽히고 있는 것이 저것과 이것의 구별은 있을망정 나의 법력(法力)으로 이 땅을 다시 정화(淨化)할 것 같은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온 몸이 화끈 달아오르더니 불덩이 같은 뜨거운 어떤 힘이 솟아 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옹(懶翁)의 신통력(神通力)이다. 나옹(懶翁)도 그 때에 이 힘을 얻어, 이 바위에 앉아 향을 피우는 동안에 일절중생(一切衆生)의 미계(迷界)를 헤매는 모습을 깨닫고, 그것을 제도(濟道)하는 힘을 얻은 것이 아닌가. 바위에 꽃인 철지(鐵支)는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철지(鐵支)를 잡고 다시 신광사(神光寺)로 내려와 귀로(歸路)에 동쪽으로 약 5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수양산(首陽山)에 오른다.
 
석축(石築)이 둘러 쌓여있던 자취가 완연한데, 옛날에는 이 산을 두른 산성(山城)은 둘레가 2만 846尺이었다고 한다. 높이가 18척(尺)이었으니, 전하는 바에 의하면 안성(安成) · 원로(元老) · 동중(董仲)이라는 세 사람이 이곳에 성(城)을 쌓았다고 한다.
 
해주(海州)로 돌아오니 해는 이미 서산에 기울고 돌아올 길이 멀다. 해주(海州)에는 사암(寺庵)이 꽤 여럿 있는데, 광동면(廣洞面)에 있는 신광사(神光寺)를 비롯하여 북암(北庵) · 운목암(雲木庵) · 안양암(安養庵)과 같은 작은 암자(庵子)는 거의 없어졌고, 해주면(海州面)에 있는 정각사(正覺寺)는 어찌됐는지 궁금하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불족산(佛足山)에 보람사(普覽寺)가 있고, 수양산(首陽山)에 서수사(栖須(?)寺)가 있고, 지성산(池城山)에는 금강사(金剛寺)가 있고, 우이산(牛耳山)에는 명석사(命石寺) · 중대사(中臺寺) · 묘자사(妙慈寺) · 자비사(慈悲寺)가 있고, 북숭산(北嵩山)에는 빈수사(鬢須寺)가 있고, 달마산(達磨山)에는 선정사(禪定寺)가 있었고, 수미산(須彌山)에는 광조사(廣照寺)가 있다고 하니, 이제는 그의 진영(眞影)은 찾지못할 망정, 자취(紫翠)도 찾기 어렵다. 다만 광조사(廣照寺)에 있는 진철대사(眞徹大師) 보월승공탑비(寶月乘空塔碑)라도 배견(拜見)하고 돌아와서 다시 우이산(牛耳山)를 찾아 보고 싶다.
 
이 절은 그 옛날 홍건적(紅巾賊)이 신광사(神光寺)에서 나옹선사(懶翁禪師)의 법력(道力)에 쫓겨서 묘자사(妙慈寺)를 침략하려할 때에 나옹(懶翁)이 법력(法力)을 여기까지 미쳐서 그것을 중지시킨 일이 있었으므로 그것을 전하는 어떤 기록이라도 있을 법하기에 말이다. 그러나 그것도 헛된 망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절이 없어졌는데, 어디에 무엇이 있으랴. 여기까지 왔으니, 우이산(牛耳山)에라도 올라 우이산사(牛耳山祠)에 참례(參禮)하고, 그 옛날은 춘추(春秋)로 제사(祭祀)를 지내던 곳에 나 혼자라도 향축(香祝)하고 싶은 욕망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 산정(山頂)에 올라보니, 그 옛날 있던 산사당(山祠堂)은 없어졌고, 산을 의지해서 있던 사암(寺庵)들도 보이지 않는다.
 
 
- 북한 1978년 04월호(통권 제76호)
【문화】 북한 사암 지상순례기
• 13. 황해도 구월산 패엽사를 찾아서
• 12. 경기도 해주 신광사를 찾아서
• 11. 경기도 개성 안화사를 찾아서
(2024.06.30. 21:39)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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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