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지식놀이터 ::【궁인창의 지식창고 북한 사암 지상순례기
[광고]
[100 세트 한정] 행운의 2달러 스타노트+네잎클로버 컬렉션 35% 19,800원 12,800원
일반 (일자별)
【문화】 북한 사암 지상순례기
◈ 13. 황해도 구월산 패엽사를 찾아서
서울에서 북으로 순례길에 올라, 개성(開城)을 지나 옹진(甕津)쪽으로 노정(路程)을 잡는다. 해안을 멀리 끼고, 서쪽으로 향하는 것이다. 옹진(甕津)땅은 고구려(高句麗) 때에는 옹천(甕遷)이라고 하던 곳인데, 옛날에는 여기에 소강진(所江鎭)이라는 관방(關防)과 관량수(舘梁戍)이라는 관방(關防)이 있었다.
北韓 寺庵 紙上巡禮記
⑬ 黃海道 九月山 貝葉寺를 찾아서
鄭泰爀 (哲博·東國大佛教大教授)
 
 
서울에서 북으로 순례길에 올라, 개성(開城)을 지나 옹진(甕津)쪽으로 노정(路程)을 잡는다. 해안을 멀리 끼고, 서쪽으로 향하는 것이다. 옹진(甕津)땅은 고구려(高句麗) 때에는 옹천(甕遷)이라고 하던 곳인데, 옛날에는 여기에 소강진(所江鎭)이라는 관방(關防)과 관량수(舘梁戍)이라는 관방(關防)이 있었다.
 
멀리 개룡산(開龍山)에 있는 봉수(烽燧)는 동쪽으로 물여산(勿餘山)을 바라보고, 물여산봉수(勿餘山烽燧)는 개룡산(開龍山)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지방(地方)에는 옛부터 그리 큰 절은 없었으나 오직 금봉산(金鳳山)에 연근사(連根寺)가 있었고 보운사(寶雲寺)에 개룡암(開龍庵)이 있었으며, 청암산(靑岩山)에 심침암(深寢庵)과 망해사(望海寺)가 있었으나, 이제는 거의 모두가 폐사(廢寺)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니,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려 장연(長淵)으로 가는 수 밖에 없다.
 
장연(長淵)으로 가려면 다시 기차를 타고 벽성(碧城)으로 나와서 북으로 방향을 바꾸어 올라가야 한다. 이 장연(長淵)에는 옛 고찰로서 학림사(鶴林寺)가 있던 사적(事蹟)을 찾게 된다.
 
오늘날에는 이 절이 없어지고 순택면(蓴澤面)에 쌍계암(雙溪庵)이라는 작은 절만이 있으나, 없어진 절터를 찾는 나에게는, 우람한 사우(寺宇)가 문제가 아니라 불상(佛像)을 찾아 불종(佛種)을 심는 것이 보다 더 큰 임무인지라 장연(長淵)으로 발길을 돌리는 것이다. 취야(翠野)서 장곡(莊谷)을 거쳐 버스를 타고 달리기 몇 시간 만에 장연읍(長淵邑)에 다달았다. 북쪽으로 송월산(松月山)이 보이니, 이 산에 학림사(鶴林寺)의 옛터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면서 발길을 재촉한다. 학림사(鶴林寺)는 신라(新羅)의 눌지왕사(訥祗王師)인 묵호자(墨胡子) 아도화상(阿道和尙)의 창사(創寺)라고 하고, 고려태조(高麗太祖)의 왕사(王師) 월남(月南) 도선대사(道詵大師)가 불탑(佛塔)을 건립(建立)한 바 있으며, 공민왕사(恭愍王師) 강월헌(江月軒) 나옹조사(懶翁祖師)가 중문(重聞)(?)하고, 인도승(印度僧) 지공(指空)이 유적(留跡)하였고, 그후 태조(太祖)의 왕사(王師)였던 무학(無學)이 또한 여기에 유적(留跡)하였다는 명찰(名刹)인 것이다.
 
사기(史記)에 보면, 아도화상(阿道和尙)은 위(魏)나라의 사람 아골마(阿骨摩)가 사신(使臣)으로 고구려(高句麗)에 왔을 때에 그를 뫼시던 사희(使姬)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리하여 아도(阿道)가 7세에 이를 때, 아버지 아골마(阿骨摩)를 따라서 중국으로 건너가, 15세에 현창화상(玄彰和尙)의 문하(門下)로 출가(出家)하여 승(僧)이 되니, 그 때에 법명(法名)을 아도(阿道)라고 하였다. 아도(阿道)가 다시 고국 땅으로 돌아오며 당시의 왕(王)은 고향으로 돌아온 아도(阿道)를 위하여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하여 거기에 있게 하니, 아도(阿道)보다 2년 전에 온 순도(順道)가 있던 성문사(省門寺)와 더불어 이 이불란사(伊弗蘭寺)는 우리 나라의 절로는 최초의 것이 되었다.
 
이와 같이 하여 불교가 이 땅에 유통(流通)하자, 신라(新羅)의 눌지왕(訥祗王) 500의 대가람(大伽藍)을 영건(營建)하니, 그때에 이 학림사(鶴林寺)도 창건(創建)된 것이다. 이 송월산(松月山)은 승가산(僧伽山)이었는데, 아도(阿道)가 이곳에 이르러 천문(天文)을 우러러 보고, 지리를 굽어 살피니, 빼어난 70여(餘)의 산봉우리가 마치 불보살(佛菩薩)에게 법(法)을 청(請)하는 청신사(清信士)와 같은 지라, 이 산 이름을 승가산(僧伽山)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산용(山容)은 마치 선인(仙人)이 옷소매를 날리면서 하늘을 나르는 것과 같기도 하며 높이 솟은 주봉(主峯)은 비로자나법신불(毘盧遮那法身佛)이요, 그 옆에 서 있는 봉우리는 가엽(迦葉)이 계족산(鷄足山)에서 입정(入定)한 모습이고 또 그 옆에 있는 봉우리는 아난(阿難)이 5교(敎)를 유통(流通)하는 기세(氣勢)와 습사하며, 그 다음의 것은 마치 향로(香爐)와 같이 생긴 것이 자색연기(紫色烟氣)를 뿜는 것과 같고, 또 다른 것은 옥경(玉磬)을 엎어놓은 것과 다름이 없다.
 
이와 같이 대국(大局)이 가히 3천불(千佛)의 대도장(大道場)이 될만한지라,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여기에 가람(伽藍)을 세워 학림사(鶴林寺)라고 하였다고 한다.
 
 
▶ 패엽사(貝葉寺) 전경
 
 
이제 이러한 연고(緣故)를 지녔으면서도 사우(寺宇)는 없어지고 초석(礎石)만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다.
 
당시 서 있었으리라고 추측되는 대웅전(大雄殿) 뒤쪽, 높직한 곳으로 올라가 서쪽을 바라보니, 만리창해(萬里滄海)가 구름같이 굽실거린다. 장산반도(長山半島)가 서쪽으로 뻗혀 있고, 해안면(海安面)의 서쪽으로 보일듯이 아득히 아물거리는 곳이 몽금포(夢金浦)가 아닌가. 고운 백사(白沙)가 깔려 있어, 서해안(西海岸) 유일(唯一)의 승지(勝地)인지라, 몸을 날려 저 푸른 물에 풍덩 뛰어들어, 이 답답한 심정을 풀어보고 싶다.
 
북쪽으로 눈을 돌리면 구월산(九月山)이 머리에 아직 흰 눈을 이고 있는 듯이 하늘가에 서있고, 동쪽으로 백운봉(白雲峯)이 따스한 햇살을 머리에 이고 있으며, 남으로는 구만리(九萬里) 남명(南溟)에 대붕(大鵬)이 걸림없이 하늘을 나르는 것이 보인다.
 
좌우협곡(左右峽谷)에서 흐르는 맑은 물이 굽이굽이 감아 돌면서 한 연못을 이루니, 이것이 백로지(白鷺池)이다. 저 옛날에는 저기에 보이는 관음봉(觀音峯)의 오른쪽으로 좀 낮게 보이는 용왕봉(龍王峯)과 그 위에 있는 보현봉(普賢峯) 밑에 보현암(普賢庵)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어찌 되었는가? 동쪽 극락대(極樂臺) 밑에 있던 극락암(極樂庵)은 어떻게 되었고 이 절에 세워졌던 탑은 어디에 있는가.
 
고려(高麗)의 태조(太祖)가 등극(登極)한 후(後)에 도선대사(道詵大師)는 많은 공경(公卿)을 모아 팔관대재(八關大齋)를 베풀 때에 1.100의 사탑(寺塔)을 건립(建立)하라고 분부하시니, 그로 인하여 이 절의 뜰에 27층의 탑을 세우게 되었다. 그 때의 불탑(佛塔) 건립(建立)에 가장 공이 컸던 송악(松岳)의 월남도인(月南道人)의 공훈(功勳)을 잊을 수가 없어. 이 산의 이름을 송월(松月)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도고(道高)한 월남도인(月南道人)의 유품(遺品)은 어디에 가고, 그 전설만 남아 있는가?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이 절을 창건하고 학림(鶴林)이라고 사명(寺名)을 부르게 된 데도 얽히고 얽힌 여러 설화(說話)가 있다. 학림사(鶴林寺)가 세워지고 얼마 안되어, 이곳에 밤이 되기만 하면 서쪽 바다 위로 한 줄기 붉은 도깨비불 같은 것이 뻗히는데, 그것이 몇 해를 두고 그러하더니, 이 절을 등(藤)넝쿨이 휩싸는지라, 이 절의 승려들이 있을 수가 없어서 뭇 승이 한사람 한사람씩 절을 버리고 가버렸다. 그래서 폐경(廢境)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 때에 한 백발노옹(白髮老翁)이 있어, 금계일쌍(金鷄一雙)을 옷소매 속으로부터 꺼내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키워서 1,000수(首)가 되면 이 절이 다시 융성하리라고 하고는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여기에 남아있던 스님이 이 금계(金鷄)를 길러 1,000마리가 되자, 그 닭 떼가 하루는 뒤에 있는 삼장봉(三藏峯)으로 올라가더니, 온종일 어디엔지 있다가 서쪽으로 해가 질 무렵에 돌아오는데, 그 닭들이 모두 주둥이가 붉게 물들어 있어, 마치 주필(朱筆)을 가(加)한 것 같은지라, 모두 놀라, 다음날 스님들이 그 닭을 따라 좇아가 본즉, 그 많은 닭들이 각각 하늘로 날라 올라가면서 검고 큰 몸에 붉은 혀를 내뿜는 어떤 것을 쫍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용(龍)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 물건이 군계(群雞)를 이기지 못하고 드디어는 쓰러지니, 뻘건 피를 토하면서 흰 배를 뒤틀다가는 드디어 죽어 넘어졌다. 이것을 본 뭇 승(僧)들이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그것을 보고는 그것이 오공(蜈蚣)임을 알았다.
 
이러한 괴변(恠變)이 있은 후부터는 두절되던 승도(僧徒)가 날로 성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려조(麗朝)에서는 이 절을 원당(願堂)으로 정하고, 닭을 기르는 전답(田畓)을 하사(下賜)하니, 절의 서쪽 20리(里)쯤 밖에 그것이 있었고 그것을 기념하여 학비정(鶴飛亭)을 세웠다고 한다.
 
이런 기이한 일이 있은 후, 그 군계(群鷄)가 자주 소나무 위에 올라가서 울더니, 그것이 드디어 학(鶴)이 되어 상천(上天)하였다. 그런 연고(緣故)로 학림사(鶴林寺) 옛터의 뒤에 서 있는 삼장봉(三藏峯) 서(西)쪽 언덕 바위에 닭의 발자국이 남아 있고, 그 바위를 백학암(白鶴巖)이라고 한다.
 
또한 이 산의 두 계곡(溪谷)이 백학동(白鶴洞), 청학동(靑鶴洞)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 옛날 금계(金鷄)에게 천년 묵은 오공(蜈蚣)이 죽고 귀찬(鬼燦)이 없어진 지 오래지만, 이제 이 땅에 붉은 독(毒)을 뿜는 인귀(人鬼)가 다시 나타났으니, 이 어찌 된 일인가. 불법이 서지 못하게 되자 인귀(人鬼)가 횡행하는 것이다. 저 푸른 송림(松林) 사이에 그 옛날 나르던 백학(白鶴)은 또한 어디에 숨어 있는가?
 
석존(釋尊)께서 열반(涅槃)에 드실 때, 구시라도(俱尸羅圖) 파라쌍수(婆羅雙樹) 사이에서, 머리를 북으로 두고 누우며, 백학(白鶴)으로 색신(色身)을 나누셨다고 한다. 학림사(鶴林寺)의 사명(寺名)에는 이런 저런 깊은 불록(佛綠)이 있다. 그래서 이 절은 이 지방의 수찰(首刹)이 되었다. 학(鶴)은 뭇 새 중의 으뜸이요, 송(松)은 총림(叢林) 중의 으뜸이며, 월(月)은 뭇 별 중의 王이다.
 
또한 학(鶴)은 송월(松月)의 청수(淸秀)함을 사랑하니 이러한 거룩한 뜻이 모두 여기에 길들여 있다. 불종(佛種)이 이 땅에 심어진지 오래이고, 불법(佛法)이 허무(虛無)하지 않으니, 때가 되면 반드시 여기서 다시 빛이 나타나리라 믿으면서 묵연(默然)히 이 자리를 떠날 줄을 몰랐다. 박택면(薄澤面)의 쌍계암(雙溪庵)을 찾아 보고 싶으나, 마음이 급하여 바로 신천군(信川郡)으로 발길을 돌린다.
 
여기서 구월산(九月山)으로 가려면 송화(松禾)를 거쳐야 한다. 송화(松禾)에는 화장사(華藏寺)와 수증사(壽增寺)가 있지만 마음의 여유가 없어, 그대로 구월산(九月山)의 패엽사(貝葉寺)를 찾기로 한다.
 
구월산(九月山)은 은률군(殷栗郡) · 신천군(信川郡) · 안악군(安岳郡)의 세 군계(郡界)를 이루는 명산(名山)이니, 아사달산(阿斯達山)이라고 하였고, 혹은 궁홀(弓忽)이라고도 하고, 또는 증산(甑山)이라고도 하고, 혹은 삼위(三危)라고도 불려졌다.
 
31대본산(大本山)의 하나인 패엽사(貝葉寺)가 여기에 있다. 단군(檀君)이 처음에 평양(平壤)에다 도읍(都邑)을 정하였다가, 그 후에 백악(白岳)으로 옮겼다고 하는데, 그 백악(白岳)이 바로 이 구월산(九月山)이다.
 
옛부터 구월산(九月山)은 명산(名山)이었음으로 많은 절이 있었고, 지금도 많은 사암(寺庵)을 볼 수 있다. 모두 신천군(信川郡)에 속해 있는데, 문무면(文武面)에 패엽사(貝葉寺)를 비롯하여 묘각사(妙覺寺), 낙산암(洛山庵)이 있고, 남부면(南部面)에는 자혜사(慈惠寺)가 있으며, 용진면(用珍面)에는 도솔암(兜率庵), 월출암(月出庵), 지장암(地藏庵), 월정사(月精寺), 달마암(達摩庵), 봉림암(鳳林庵), 칠성암(七星庵) 등이 있고, 용문면(龍門面)에는 운흥사(雲興寺)가 있다.
 
이들 여러 사암(寺庵)을 찾을 겨를이 없다. 대본산(大本山)인 패엽사(貝葉寺)는 패엽사(貝葉寺), 구엽사(區葉寺) 또는 패엽사(唄葉寺)라고도 하니, 법화경간기(法華經刊記)에서 「가정사삼년(嘉靖四三年) 갑자이월(甲子二月) 일(日) 황소도문화군(黃消道文化郡) 구월산(九月山) 패엽사(唄葉寺) 개판(開板)」이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구월산(九月山) 단군(檀君)께서 평양(平壤)으로부터 이 곳으로 천도(遷都)하여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실행(實行)한 곳임으로, 이 패엽사(貝葉寺)에 단군(檀君)의 유적(遺蹟)이 있으니, 그것이 삼성전(三聖殿)이다.
 
본래 구월산(九月山)에는 삼성사(三聖祠)라는 사당(祠堂)이 있어 춘추(春秋)에 제사(祭祠)를 모셨다. 그 사우(祠宇)는 지금 찾을 길이 없으나, 기록(記錄)에 보면 신인단군(神人檀君)을 모신 사우(祠宇)가 패엽사(貝葉寺) 서쪽에 있는 대증산(大甑山)에 있다고 하였으니, 그 자리가 어디인지. 대증산(大甑山)에 있던 사당(祠堂)을 다시 패엽사(貝葉寺)의 뒤쪽에 있는 작은 봉우리인 소증산(小甑山)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 아무리 찾아도 당(堂)이 없다. 이것은 없어진 지 오래지만 이것을 복원(復元)하는 일에 마음을 쓸 사람이 없다. 우리의 조상(祖上)을 찾는 일이요, 우리의 문화를 찾는 일이건만, 할 일은 하지 않고, 오히려 이런 것을 말살(抹殺)시키는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 이곳의 위정자(爲政者)들이니, 그들의 죄는 누구가 주는 것이 아니고 제 스스로 지어서 받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이제 패엽사(貝葉寺)로 들어가자, 아늑히 둘려싸인 숲속에 자리잡은 이 절은 천년(千年)이 넘은 고찰(古刹)인지라, 낡은 사우(寺宇)의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지난날의 긴 사연을 읽을 수 있다.
 
천 수백년전에 패엽조사(貝葉祖師)가 창건(刱建)하였다고 하니, 패엽대사(貝葉大師)가 당(唐)의 패엽대사(貝葉大師) 그 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단군(檀君)이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상(理想)을 이곳에서 베풀었고, 불법의 지혜자비(智慧慈悲)가 이곳에서 행해졌다고 할 것이니, 우리 문화의 발상지가 바로 여기요, 홍익인간의 민족적(的) 이상이 지혜를 얻어서 자비로써 꽃 피워진 것이였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보면 구월산(九月山)에 사천사(四天寺)를 비롯하여 23개의 사암(寺庵)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단군(檀君)이 구월산(九月山)에서 화신(化神)한 후 이 세상(世上)을 구(救)하기 위하여 불법(佛法)에 귀의(歸依)하여 여러 보살신(菩薩身)으로 권화(權化)하여, 구월산(九月山)의 이곳 저곳에서 설법(說法)하신 것이 아니었던가?
 
동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저 평평한 곳이 어디인가. 지금은 마을이 들어 서 있는 넓은 곳이 보인다. 세상에 전하기는 단군(檀君)이 도읍(都邑)을 정했다는 장장평(莊莊坪)이 아닌가, 저녁 노을이 서쪽 하늘에 물들기 시작하면서 여기 저기에서 까막까치가 지저귈 뿐, 그 옛날 온 산을 울려 퍼지던 범성(梵聲)은 도무지 들리지 않는다.
 
저 장장평(莊莊坪) 옛터로 내려가자. 어느 촌로(村老)라도 만나 쓸쓸한 회포를 풀어보자. 옛날에는 이 산에 범이 많아서 자주 마을로 내려가서 사람을 해치기도 했다고 하니, 이제라도 나타나서 나의 길동무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옛날, 유효금(柳孝金)이라는 사람이 일찌기 구월산(九月山)에 올라가는 도중에 길에서 큰 범을 만났다. 그 범이 입을 벌리고 눈물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닌가. 자세히 보니 그 범의 입에 무엇이 물려져 있는 것이였다. 그것을 본 효금(孝金)은
 
『네가 만일 나를 해치지 않는다면 내가 그것을 뽑아주겠다』
 
고 하니, 범은 그리하겠다고 머리를 조아리는지라, 그가 입에 물린 그것을 뽑아 주었다. 그런데 뽑아들고 보니 그 입에 꽂힌 물건은 은(銀)비녀가 아닌가.
 
그날 밤에 꿈에 그 범이 다시 나타나 공손히 말하기를
 
『나는 산정(山精)이요, 어제 성당리(聖堂里)로 내려가서 한 부녀자(婦女子)를 잡아 먹었는데, 그때에 내 목에 무엇이 걸려서 심히 괴롭더니, 당신이 나를 구해 주었소이다. 당신은 그 공으로 당신의 자손(子孫)이 반드시 크게 벼슬하여 경상(卿相)이 될 것입니다』
 
라는 것이였다. 예전에는 인간(人間)만이 아니라 동물까지도 이런 도력(道力)을 부릴 수 있었으니, 이것은 인간이나 동물이 가장 순수한 본연(本然)의 모습을 지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통력(神通力)은 불가사의한 정신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옛 세상은 그립다.
 
내가 지금 구월산(九月山)을 내려가는 이 길목에는 범은 커녕 다람쥐 새끼 한마리 다니지 않는다.
 
인간이 순수성을 잃고 물욕에 눈이 어둡고 권세에 미쳐 날뛰는 세상에서 동물인들 제 모습을 지닐 수 있으랴, 모두가 미쳐 날뛰는 세상에 산신령(山神靈)이 움직일 수 있으랴. 그러나 신통무한(神通無限)한 불보살(佛菩薩)의 방편력(方便力)은 언제 어떻게 선행방편(善行方便)을 나타낼지 모른다. 이 땅에 불보살(佛菩薩)의 법력(法力)이 기(機)에 응(應)하고 시(時)에 순(順)하여 언젠가는 나타날 것이다. 내가 걸어가는 발자국 마다에 연꽃이 피고, 훈훈히 불어 오는 바람이 향기롭기 그지없다. 그러나 이 꽃, 이 향기를 보지 못하고, 맡지 못하는 중생(衆生)들이 가련하기 그지없다. 서구적(西歐的)인 사유(思惟)속에서, 물질만을 숭상하는 나머지 유물주의(唯物主義)에 빠져서 인간의 영성(靈性)을 모르는, 공산주의자들은 그 옛날에 범이 인간과 이야기한 이 사실을 한낱 우화(寓話)로만 생각하여 넘겨 버리리라. 그러나 이런 사실(事實)은 인간이나 동물의 차원을 넘어선 높은 차원에서 볼 때에는 하나로 통(通)하는 성스럽고 순수한 세계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너와 나의 구별이 없고, 인간과 동물의 구별이 없다. 하물며, 무슨 주의(主義)니 무슨 주의(主義)니 하는 사상적인 갈등도 있을 수 없다.
 
우리 인간이 모두 본연의 순수성으로 돌아가서 범과 이야기하는 세상에 있게 되면 38선(線)이라는 가구(架究)의 선(線)이 어디에 있으며, 마음에 아무런 장벽이 없는데 어찌 조국의 평화적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 북한 1978년 05월호(통권 제77호)
【문화】 북한 사암 지상순례기
• 14. 황해도 재령 묘음사를 찾아서
• 13. 황해도 구월산 패엽사를 찾아서
• 12. 경기도 해주 신광사를 찾아서
(2024.07.02. 11:55)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광고]
제주 클레르 드 륀 펜션 제주시 애월읍, M 010-6693-3704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로그인 후 구독 가능
구독자수 : 0
내서재
추천 : 1
▣ 다큐먼트 작업
지식지도
알림∙의견
모든댓글보기
▣ 참조 지식지도
▣ 다큐먼트
▣ 참조 정보 (쪽별)
◈ 소유
◈ 참조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