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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궁인창의 지식창고 북한 사암 지상순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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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북한 사암 지상순례기
◈ 14. 황해도 재령 묘음사를 찾아서
구월산(九月山)에까지 왔으니, 조금 다시 길을 돌려서 은율군(殷栗郡)으로 갔다가 다시 발을 되돌려서 재령(載寧)으로 향할까 한다. 은율군내(殷栗郡內)로 들어서서 읍내(邑內)로 발을 디디면 먼저 멀리 보이는 석탑이 있다. 두 석탑이 화강암으로 초석(礎石)을 받쳐 6척(尺)이 넘는 방형(方形)을 이루고 있는데, 6층석탑이다. 탑의 높이는 8척(尺)이 넘는 높이다. 여기가 은국사지(殷國寺址)인 것이다.
北韓 寺庵 紙上巡禮記
⑭ 黃海道 載寧 妙音寺를 찾아서
鄭泰爀 (哲博·東國大佛教大教授)
 
 
구월산(九月山)에까지 왔으니, 조금 다시 길을 돌려서 은율군(殷栗郡)으로 갔다가 다시 발을 되돌려서 재령(載寧)으로 향할까 한다.
 
은율군내(殷栗郡內)로 들어서서 읍내(邑內)로 발을 디디면 먼저 멀리 보이는 석탑이 있다. 두 석탑이 화강암으로 초석(礎石)을 받쳐 6척(尺)이 넘는 방형(方形)을 이루고 있는데, 6층석탑이다. 탑의 높이는 8척(尺)이 넘는 높이다. 여기가 은국사지(殷國寺址)인 것이다. 석탑(石塔)의 유래에 대하여는 남은 문헌이 없으므로 자세히는 알 수가 없으나, 현재의 이 읍내에 은국사(殷國寺)라는 절이 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 유지(遺趾)가 여기인 듯하다.
 
반율군내(般栗郡內)에는 북부면(北部面)에 큰 지석(支石)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니 운산리(雲山里)에 있는 지석(支石)을 보러 가지 않으면 안된다. 사암(寺庵) 순례(巡禮)길에 올랐지만 옛 우리 조상들의 손 때가 있으니 고고학적인 가치를 찾기에 앞서, 내 핏속에 따사로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운산리(雲山里)로 들어서서 지석(支石)을 찾는다. 제법 큰 지석(支石)이다. 서부에 있는 지석(支石)으로는 가장 큰 지석(支石)이라고 한다.
 
이제부터 약 300여년 전에 허준(許準)이라는 이가 중국으로 건너가서 일행(一行)이라는 이에게 풍수(風水) 지리학을 공부했는데, 그는 지리학에 능통하여 오히려 스승을 능가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을 안 스승 일행(一行)은 오히려 그를 시기하여 미워하기에 이르렀으니, 어느 날, 그 스승이 허준(許準)의 고향(故鄕)인 우리나라의 산천(山川)을 헤아려 보니 너무도 산세(山勢)가 뛰어나 있어, 그 혈맥이 모두 활기를 띠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이러한 산수의 정기를 타고나는 인물도 또한 뛰어날 것임에 틀림없다고 깨달은 그는 한 흉계를 내었으니, 그 산맥의 활기를 끊어버려야 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어떤 일로 허준(許準)이 죄를 짓게 된 것을 기화로 삼아, 허준(許準)을 중죄로 다스리려고 하였다. 이것을 안 허준(許準)은 스승에게 자기의 죄를 속(贖)해줄 것을 빌게 되자, 이 기회를 타서 그 스승이 허준(許準)에게 말하기를,
 
『그대의 죄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이 나라의 큰 벼슬에 있게 하겠으니, 나의 말을 들으라』
 
고 하고는 허준(許準)에게 당부하기를
 
『그대가 조국으로 돌아가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각산맥(各山脈)에 따라서 요소(要所)에 지석(支石)을 두라』
 
고 하였다.
 
 
▶ 묘음사(妙音寺) 5층석탑 전경 (사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허준(許準)이 스승의 명(命)에 따라서 북쪽에서부터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지석(支石)을 놓기 시작하여 중부로 내려오게 되었는데, 許準은 문득 이 지석(支石)으로 말미암아 산의 혈맥이 끊어지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 한 사람 때문에 조국에 불리한 일이 일어나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고는 공사를 중지하고 몸을 감추어 은신하면서 허준(許準)은 스승의 무모한 흉계에 노하여, 백두산정(白頭山頂)에 풍차를 달아 스승의 간계를 막았다. 이런 사실을 안 스승은 드디어 허준(許準)의 죄를 용서하고 그 풍차를 치우도록 했다고 한다. 이런 전설이 있어서 그런지 부석(敷石)의 밑에 동인(銅人)이 있다고 전하는데, 그것은 어찌 되었는지.
 
여기서 일도면(一道面)쪽으로 발을 돌린다. 우산리(牛山里)로 가면 원정사(圓井寺)가 있다. 멀리 구월산(九月山)의 제2봉(峯)인 주가봉(朱家峰)이 보인다. 이 봉우리는 옛날 주원장(朱元璋)이 이 봉우리 밑에 와서 숨어서 수업(修業)하여 천하의 대세(大勢)를 점치고는 만주(滿洲)땅으로 건너가 명(明)나라를 건설하여 명태조(明太祖)가 되었다는 설(說)이 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산맥(山脈) 하나하나, 봉우리 하나하나가 천하의 생기(生氣)를 모아가지고 있어,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면서, 그 수려함으로 인걸을 속출(續出)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그 옛날 허준(許準)이 이 땅에 지석(支石)을 세웠기 때문에 오늘날 이 땅에 붉은 이리가 들끓고 있을 뿐, 뛰어난 인간이 나기 어렵게 되었는지, 아니면 시운(時運)이 그래서 그런지, 백두산정(白頭山頂)에 풍차(風車)를 달아 놓았다는 허준(許準)의 고사(故事)를 믿는 것은 아니로되, 그것이 사실로 되었던들 6∙25동란(動亂) 때에 중공군이 이 땅에 들어오지 못했을는지 모른다. 어리석은 사람은 잘되면 제 잘나서 그렇다고 하고, 못되면 조상의 탓을 한다고 하니 내 이제 누구를 원망하랴. 시운(時運)도 아니요, 지석(支石)의 탓도 아니리라. 모두 우리의 탓이다. 현명(賢明)하지 못하고 힘이 없는 탓이 아닌가?
 
어느 덧 나는 우산리(牛山里)에 이르렀다. 지금 작으마한 절이 남아 있는데 경내(境內)에 들어서니 옛날에 그 우람하던 가람(伽藍)의 모습을 말해주는 사적비(事蹟碑)가 있다.
 
사적비(事蹟碑)에 새겨진 문면(文面)이 오랜 풍우(風雨)에 마멸(磨滅)되고 이끼가 끼어 글씨를 읽기 어려우나 한번 보고 다시 보며 눈을 닦아가면서 읽어 본다. 기록(記錄)에 의하면 원(元)의 순제(順帝)가 태자로 있을 때에 문책을 당하여 이곳으로 유배되었던 바, 어느날 긴 깃발을 하늘 높이 날려, 그것이 떨어지는 곳에 태(胎)를 묻으려고 하였는데, 마침 이곳에 걸렸으므로, 여기에 태(胎)를 묻고 기도하는 처소(處所)로 삼으려 하여 많은 공장(工匠)을 중국으로부터 불러 들여 원당(願堂)을 세웠다. 그 때에 한 공장(工匠)이 먹고 남긴 참외씨를 묻어 놓았는데 지금도 이곳 어느 구석에 묻혀져 있다고 한다.
 
또한 이 경내(境內) 어딘지는 모르게 되었으나 당시 용정(龍井)이라는 밑없는 한량없이 깊은 우물이 있어 이 절을 세울 때에 신부(神符)를 그 우물 속에 던져 그 속에 있던 용(龍)을 쫓아낸 후에 이 자리에 절을 이룩하였다고 하여 사명(寺名)을 원정사(圓井寺)라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절이 개창(開刱)될 때에 어디서인지 업진강(業津江)에 불상삼체(佛像三體)와 향목(香木)으로 만든 탁자 하나가 용주(龍舟)를 타고 떠내려 오는지라, 정광사(淨光寺)의 중이 이것을 보고 불상(佛像)을 건지려고 하였으나 너무도 무거워서 할 수 없이 되돌아 왔다. 그러나 그 후에 원정사(圓井寺) 중의 꿈에 불상(佛像)이 머리맡에 나타나면서 말하기를
 
『나는 너의 절에 머무르겠노라』
 
고 하는지라 그 중이 깜짝 놀라 깨어 보니 꿈이었다. 그래서 대중을 동원하여 그 불상(佛像)을 맞이하여 뫼시려 하자, 그 무거웠던 불상(佛像)이 힘들지 않게 따라 오는고로, 쉽게 이 절에 안치(安置)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 불상(佛像)을 안치(安置)한 보광명전(普光明殿)을 이룩하고 정중히 모셨다고 하는데, 지금 이 보광명전(普光明殿)을 모신 본존불(本尊佛)과 향목(香木)의 좌양(坐楊)이 그때 꿈속에 나타나신 부처님과 탁자(卓子)인 것이다.
 
숲속으로 찾아가 맑게 흐르는 계류(溪流)에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다시 보광전(普光殿)으로 들어간다.
 
언제 누가 이곳을 찾았는지 향(香)을 피운 자취가 있다. 아마 나이 먹은 아낙네나 늙은 노인들이 남의 눈을 피하여 이곳을 다녀 갔나보다. 서울서 가지고 온 향(香)을 피우고 지심(至心)으로 발원(發願)하기를,
 
『부처님이시여, 이곳은 계실 곳이 못 되오니 부디 이곳을 떠나 다시 남쪽으로 내려 오셔서 한강을 따라 올라오소서』
 
하고 발원(發願)하니, 문득 일진훈풍(一陣薰風)이 몸을 스치며 금음묘성(金音妙聲)이 하늘가에서 울려오지 않는가.
 
이제 해가 정오를 지났다. 오늘 중으로 재령(載寧) 땅의 묘음사(妙音寺)까지 가야겠다. 길을 재촉하나 마음은 초조하지 않다. 재령(載寧)으로 가는 길을 어디로 잡을 것인가. 은율읍(殷栗邑)으로 되돌아가서 송화(松禾)로 해서 신천(信川)으로 빠져가서 재령(載寧)으로 가기로 하자.
 
송화군내(松禾郡內)에는 패엽사(貝葉寺)의 말사(末寺)로 되어 있던 화장사(華藏寺), 수증사(壽增寺)가 있으리라. 송화(松禾)에 들어서니, 동북쪽으로 옛 현지(縣址)가 있던 기지(基址)가 있고 와룡동(臥龍洞)에는 연무정지(燕無亭址)가 있으며 백운동(白雲洞)에는 도동서원(道東書院)이 있다. 도동서원(道東書院)은 숙종조(肅宗朝) 기묘년(己卯年)에 숙종(肅宗)으로 부터 하사(下賜)받은 액각(額閣)이 걸려 있다. 이 서원(書院)은 주자(朱子), 조광조(趙光祖), 이황(李滉), 이이(李珥) 등을 모신 곳이다. 아무도 찾는 이 없고, 오직 옛 유생(儒生)들의 오가던 자취만 남아 있을 뿐이다. 자양리(紫陽里)는 어디인가. 장양면(長陽面) 자양리(紫陽里)라고 하니, 여기까지 왔으니, 이곳을 찾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자양서원(紫陽書院)을 찾으려는 것이다. 나의 본관(本貫)이 연일(延日)이고 포은(圃隱)께서는 방조(傍祖)가 되는 탓도 있겠으나, 그것보다도 이 땅에 어린 한(恨) 많은 옛 조상님들의 외로운 혼을 위로하지 않을 수 없다.
 
이태조(李太祖)가 등극(登極)하자 포은(圃隱)의 일족(一族)은 누(累)를 두려워하여 사방(四方)으로 흩어지니, 종가(宗家)는 경기도(京畿道) 용인군(龍仁郡) 모현리(慕賢里)에 정착하고, 분가(分家)는 유리방방(流離方方)하다가 그 일족(一族)이 해주(海州)로 이거(移居)하고, 다시 북으로 올라가서 200여년 전에 이곳 자양리(紫陽里)에 발을 멈추어 10여대가 지났다. 이곳에 그 후손(後孫)들이 영당(影堂)을 뫼시니 이것이 자양서원(紫陽書院)이다. 예전에는 1년에 두 번씩 제사를 행했는데, 그것도 이제는 쇠(衰)하고 말았다. 이것이 누구의 탓이랴.
 
이제 자양서원(紫陽書院)을 찾아 감회가 자못 깊은 것을 느끼며, 벅찬 가슴을 부둥켜 안고 인근에 살고 있으리라 믿어지는 후손(後孫)의 문을 두드린다. 남한(南韓)에서 같으면 얼마나 다사로운 체감(體感)을 느끼련만, 서먹서먹하기 짝이 없다. 민족의 비운이 여기까지 미쳤으니, 인간성의 상실로 인하여 다가올 세대가 어찌될지 두려울 정도로 걱정스럽다.
 
송화(松禾)에는 서원(書院)이 이것만이 아니다. 도원면(桃源面) 군산리(郡山里)에는 삼봉서원(三峯書院)이 있다. 삼봉(三峯) 문익점(文益渐)를 뫼신 곳이다.
 
하리면(下里面) 화장동(華藏洞)에 있는 화장사(華藏寺)를 찾자. 이 절은 옛날있던 사우(寺宇)가 아니고 그 기지(基趾)에 새로 지은 것인데, 종교(宗敎)를 인정(認定)하지 않는 이 땅에서 폐사(廢寺)되는 운명에 있다. 이 하리면(下里面)에는 청량동(淸涼洞)에 청량사지(淸凉寺址)가 있으리라.
 
고려시대의 거찰(巨刹)이었던 청량사(淸凉寺)의 옛 터를 찾지 않을 수 없다. 이 절에는 본래 홍종(洪鍾)이라고 일컫는 큰 종(鍾)이 있어, 그 종성(鐘聲)이 온 군내(郡內)를 울려 퍼졌다고 하니, 새벽에 울리는 그 종소리는 하서팔승(河西八勝) 중의 하나로서 많은 선남선녀(善男善女)의 마음을 씻어 주고 있었건만, 지금 그것은 어디로 갔는가? 지금 있어 울려 퍼진 들, 들을 사람이 얼마나 될는지!
 
다시 신천읍(信川邑)으로 가자. 신천군(信川郡)에는 구월산(九月山) 패엽사(貝葉寺)가 있는 관계로 많은 사암(寺庵)이 있는데, 그것을 모두 찾을 수 없으므로 달마산(達摩山)의 북록(北麓)에 있었던 운흥사지(雲興寺址)라도 찾은 다음에 자혜사(慈惠寺) 석등(石燈)이라도 배견(拜見)하기로 작정한다. 달마산(達摩山)은 그리 높지 않은 산인데, 여기에 약 800년 전에 운흥사(雲興寺)를 창건(創建)하여 당시에는 100여명의 승려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절이 지금부터 60여년 전에 폐사(廢寺)되고 말았으나, 그 절의 앞에 있던 전나무의 남은 등걸이라도 보고 가고 싶다. 그 전나무는 둘레가 100여척(餘尺)이나 되었음으로 이 절의 자랑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나무가 불에 타 죽은 후, 등걸만 남아있다.
 
자혜사(慈惠寺)는 남부면(南部面)에 있으니, 그리로 가는 도중에 궁흥면(弓興面) 만궁리(彎弓里)에 잠간 들려야겠다.
 
이 만궁리(彎弓里)에는 무슨 글씨인지 모르는 이상한 글자가 새겨져 있는 비석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약 400년쯤 전에, 청나라가 명(明)나라를 멸하고 여력을 가지고 우리 나라를 쳐들어온 일이 있었다. 이 때에 우리의 명장(名將) 임경업(林慶業) 장군(將軍)이 청병(淸兵)을 의주(義州)에서 막았음으로 청장(淸將) 용골대(龍骨大)는 하는 수 없이 군병(軍兵)을 돌려 해로(海路)로 해서 서울을 공략(攻略)하려고 하였다. 이 때에 만궁리(灣弓里)에 살고 있던 황모(黄某)라는 이가 탈기(奪起)하여 나라가 위기에 임하여 있는데 나라의 멸망을 보고 있는 것은 인신(人臣)의 도리(道理)가 아니라고 하고 수백(數百)의 병사(兵士)와 더불어 청군(淸軍)과 탈전(奪戦)하여 전사(戰死)하였다. 이 때에 이 패보(敗報)를 접한 가인(家人)이 죽은 황모(黃某)의 이름을 부르자, 한 마리의 나비가 날라와서 그 모정(慕情)을 전하였으로, 그 부인은 그 나비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 황모(黄某)의 옷과 같이하여 매장(埋葬) 하니, 그 묘(墓)가 지금도 만궁리(灣弓里)의 뒷산에 있다. 이와 같이 나비로 화하여 고향으로 돌아와서 정을 나누던 그 때가 아쉽다. 인정(人情)이 살아있는 세상에는 나비와 인간이 정통(情通)할 수 있는데 지금과 같은 물질문명 시대에는 이런 나비도 날라올 수 없이 되었음이 자못 슬프기만 하다. 나는 믿는다. 임경업(林慶業) 장군(將軍)의 넋이 살아있고, 황모(黃某)의 혼백 지금 이 무덤 속에 있으니, 이 땅은 영구히 안보(安保)되리라.
 
남부면(南部面)은 여기서 멀지 않다. 모혜사(慕惠寺)에는 보물(寶物)로 지정된 5층석탑(層石塔)이 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 2층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석탑이 조성되어 있다. 기단(基壇)의 상하에 새겨져 있는 연판(蓮瓣)은 정치(情緻) 그것이지만, 탑파(塔婆)의 각층이 잘 조화된 권형(權衡)은 비할 데 없이 아름답다. 이 석탑은 고려초기(高麗初期)의 것으로 그 류(類)를 찾기 어렵다.
 
해가 벌써 서쪽으로 기울어졌음인지 논밭두렁에서 우짖는 새소리도 힘이 없어 보인다. 이젠 재령(裁寧)으로 가자. 재령군내(裁寧郡內)에는 옛 사암(寺庵)의 폐사(廢寺)가 많으나, 그것을 찾을 여유가 없어 바로 장수산(長壽山)에 오르기로 한다.
 
장수산(長壽山)은 장수면(長壽面)에 있어 황해금강(黃海金剛)이라고 칭하여 우리 나라의 8경(景) 중의 하나이다. 온 산이 어디를 보나 그야말로 절경이니, 동서남북의 사방이 모두 웅대한 한폭의 그림이다. 이 풍경은 가히 황해금강(黃海金剛)이라고 할 만하다.
 
이 산의 중복에 묘음사(妙音寺)가 있다. 지금부터 600여년전에 개창(開刱)한 대가람(大伽藍)이었는데, 동학난(東學亂)을 만나서 병화(兵火)에 불타, 오유(烏有)로 화했던 것을 다시 중창(重刱)한 것이다. 부근에 대리석으로 된 비석이 외로이 서 있는데 검푸른 이끼가 끼어 있어 비면(碑面)의 글자를 알 수 없으나, 이 절의 유서(由緖)가 씌어져 있으련면 알 도리가 없다. 자그마한 도장(道場), 대웅전(大雄殿) 안에 봉안(奉安)된 불상(佛像)에는 음기(陰氣)마저 서려, 습기(濕氣)가 도는데, 향단(香壇)에 싸인 먼지도 닦는 이가 없어, 간혹 오르내리는 거미만이 쌓인 먼지를 밟고 간 흔적이 있다. 황구(惶懼)하기 그지 없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불신(佛身)을 닦으니 천연히 빛나는 신광(身光)이 십방세계(十方世界)로 방광(放光)하시어 둥근 월애광(月愛光)이 하늘가로 점점 퍼지면서 온 누리가 활연(闊然)히 생기(生氣)를 되찾는다. 무념(無念) 중에 발길을 옮겨 옆에 있는 나무 등걸에 걸터앉아 잠시 소요중(逍遙中), 오고 감이 없는 속에 내가 지금 왔음을 깨닫자, 벌떡 일어나 다시 산성(山城)으로 오른다.
 
장수산성(長壽山城)은 고려시대(高麗時代)에 축성(築城)한 것인데 폐루(廢壘)가 왕년의 사연을 되새기게 한다. 본래는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때에 처음으로 축조(築造)되었다고 하니, 성내(城內)에 일곱개의 샘물이 있다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서는 말하고 있다. 축조(築造) 당시에는 둘레가 8,915척(尺)이요, 높이가 9척(尺), 상석(象石)이 험조(險阻)하고 그 안에 군창(軍倉)이 있어 또한 샘물이 일곱 곳에 있었다고 하는데, 이제 와서 보니 이리저리 뒹굴고 있는 축석(築石)과 폐루(廢壘) 뿐 다람쥐가 오르기에 알맞는 암석(岩石)에 샘물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더구나 군창(軍倉)이 있었다던 옛터는 알 도리가 없다.
 
재령(載寧)에는 사우(祠宇)로서 문묘대성전(文廟大成殿)이 있다. 중종(中宗) 때에 창건(刱建)한 것이니, 300여년 전에 재수(再修)한 건물이다. 또한 금장산하(金藏山下)에는 경현재(景賢齋), 모현재(慕賢齋), 문천사(文泉祠)가 있고, 이 외에 이율곡(李栗谷)이 자주 노닐며 낚시하던 세심정(洗心亭)과 벽송정(碧松亭), 일옹정(逸翁亭) 등의 명소(名所)도 있으나 모두 찾을 겨를이 없어, 보적봉(寶積峯) 중복에 있는 채진암(采眞庵)에 올라, 채진석문(采眞石門)으로 들어가 새가 되어 훨훨 날라나 보고 싶다.
 
 
- 북한 1978년 06월호(통권 제78호)
【문화】 북한 사암 지상순례기
• 15. 황해도 서흥 귀진사를 찾아서
• 14. 황해도 재령 묘음사를 찾아서
• 13. 황해도 구월산 패엽사를 찾아서
(2024.07.03. 13:35)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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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